2019년 에베소서 2강
선한 일을 위하여
말씀 에베소서 2:1-10 요절 에베소서 2:10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에베소서 2:10 절 말씀은 우리 모임의 창립자인 이 사무엘 선교사님이 가장 은혜 받고 힘을 얻은 말씀입니다. 사무엘 선교사님에게 자신의 삶의 의미와 가치를 일깨워주고 많은 청년들의 목자로 쓰임 받게 한 위대한 말씀입니다. 우리도 본문을 통해서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나를 향한 깊은 사랑과 나를 거듭나게 하신 그 이유를 배우고 주님의 계획에 부응하는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 성도들이 허물과 죄로 죽었었다고 말합니다. 허물과 죄는 원어로 보면 똑같이 ‘일탈과 탈선’을 의미합니다. 그 차이는 고의성 여부라고 어거스틴이 말했습니다. 죄는 쉽게 말하면 기차가 레일을 벗어나고 인공위성이 궤도를 이탈하는 것과 같습니다.
죄는 사람이 사람의 본분에서 이탈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본분이 무엇입니까? 자신의 근원인 창조주를 인정하고 그 분의 말씀에 따라 사는 것입니다. 죄란 반대로 창조주를 부정하고 자신이 신이 되어 자기 맘대로 사는 것입니다. 사람이 그렇게 하나님을 부인하고 자기 맘대로 살면 어떻게 될까요? 하나님은 태초에 사람을 지으시고 선악과나무를 만드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창 2:16,17) 인간이 선악과를 먹는 것은 하나님의 계명의 말씀을 무시하는 것이고 이것은 곧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자신의 존재의 근원을 지워버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어떻게 된다고 하셨지요? “반드시 죽으리라” “You shall surely die”(창 2:17b) 반드시 죽게 됩니다. 여기서 참고로 죽음은 세 종류가 있습니다. 첫째는, 영적 죽음입니다. 사람이 그를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과 분리되는 것입니다. 둘째는 육체적인 죽음입니다. 이것은 육체와 영혼이 분리되는 것입니다. 셋째는, 영원한 죽음입니다. 이것은 사람이 하나님과 영원히 분리되는 것입니다.
에베소 교인들은 하나님을 모르는 부모들 밑에 태어나 수많은 도덕 윤리적인 허물과 죄를 범하며 살아왔습니다. 이런 그들은 육체는 살아있지만 영적으로는 하나님과 단절되어 죽음의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들의 실제적인 삶이 어떠했습니까? 2,3절을 보십시오. 그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첫째, 그들은 허물과 죄가운데서 행하였는 데, 우리가 공기를 호흡하듯이 죄속에 살았음을 의미합니다. 둘째,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습니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으므로 영적으로 죽은 그들은 세상풍조가 흘러가는 데로 살았습니다. 그들은 마치 탁류에 떠내려가는 죽은 물고기처럼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르게 되었습니다. 공중권세 잡은 자라는 것은 마귀를 뜻합니다. 유대인들은 하늘을 세 개로 나누었는 데, 새들이 나르는 하늘, 별들이 있는 하늘, 하나님이 계신 하늘입니다. 마귀는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2번째 하늘에 거하며 하나님을 대적하고 인간이 하나님께 순종하지 못하도록 훼방하는 역할을 합니다. 하나님을 부정하는 인간은 마치 영적인 엔진이 없는 보트와 같습니다. 시류를 따라 사는 데 마귀가 낚아 채서 그의 종으로 삼아버립니다. 그래서 자기 뜻대로 조종하며 자신이 명령하는 대로 살게 합니다. 우리는 종종 인간으로는 행할 수 없는 잔혹한 범죄를 저지른 사람을 봅니다. 그런 사건을 접하고 그런 사람을 볼 때 “나는 악마를 보았다”는 말을 이해하게 됩니다. 사람은 본래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 때 천사처럼 아름답고 감동적인 삶을 삽니다. 마귀는 지금도 우리가 하나님의 뜻과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르지 못하게 하고 있는데 그래서 마귀를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 역사하는 영이라고 합니다.
영혼이 죽어서 영적 동력을 상실한 인간들은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대로 삽니다. 노아시대에는 이런 사람들을 한마디로 “육체(고깃덩이)”라는 말로 표현했습니다. 이것은 이방인들에게만 해당된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이 죄를 범했고 영적으로 죽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사도는 이런 인간의 상태와 운명을 한마디로 “본질상 진노의 자녀”라고 표현했습니다. 본질상이란 ‘태생적’이란 뜻입니다. 날 때부터 그렇게 생겨먹어 바꿀 수 없다는 것입니다. ‘태생적 한계’라는 것은 얼마나 우리를 우울하고 슬프게 하는 말입니까? 아무리 노력하고 몸부림쳐도 절대 바뀔 수 없다니요? 사람은 아담의 원죄를 물려받았고 스스로 자범죄를 짓습니다. 우리는 아무리 노력해도 죄인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무엇을 해도 하나님의 진노를 일으키는 존재입니다. 사람은 사람도 끝없이 실망시키고 분노케 합니다. 그래서 사람에게 실망하여 ‘자연인’이 된 사람들도 있습니다. 또 반려견, 애완견들을 키우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는 데 사람에게 실망하여 개를 사랑하기로 결단한 것입니다. 인간 상호간도 서로에 대해 실망하고 분노하는 문제가 큽니다. 하물며 사람의 속마음을 깊은 곳까지 보시는 하나님 편에서 볼 때 인간은 어떤 존재이겠습니까? 끝없이 하나님을 실망시키고 분노하게 하다가 결국 지옥 불에 던져져야 할 존재들입니다.
그런데 이런 우리가 살아났습니다. 우리를 살린 것은 무엇입니까? 4-6절을 보십시오.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하나님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사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늘에 앉히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성도란 어떤 존재인지를 배웁니다.
첫째로 그리스도와 연합한 존재입니다. 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난 존재라고 말했습니다. 성도는 자신이 죽고 부활한 적이 없는데 어찌된 일입니까? 연합의 원리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실 때 내가 죽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살아나실 때 하나님은 그에 연합된 나를 살리셨습니다.
둘째로 다시 살아난 존재입니다. 본문에는 하나님이 성도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다’, ‘일으키셨다’, 이렇게 같은 내용을 두 번, 다른 단어로 표현했습니다. 이는 성도가 죽은 존재에서 살아난 존재, 새 생명 얻은 존재임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이제 성도는 죄와 허물로 죽은 자에서 새 생명을 얻은 자가 되었습니다. 새 생명을 얻었다는 것은 영적 생명이 살아났다는 것입니다. 또한 이제 죄를 이길 힘을 가지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의지를 가지고 세상풍조를 거스릴 수 있는 내적 힘을 소유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셋째로 하늘에 앉아 있는 존재입니다. 성도는 예수님과 함께 하늘에 앉은 존재입니다. 이것은 과거형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미래에 우리가 하늘에 앉을 것을 뜻하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에게 있어서 하늘에 앉으신 것은 승리의 귀환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과 연합한 성도는 승리자의 아이덴터티를 가지게 되었고 영광스럽고 존귀한 위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과거 성도는 꾸물꾸물 땅바닥을 기어 다니는 벌레와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성도는 예수님과 함께 부활하여 하늘에 앉은 존재가 되었습니다. 죄와 심판이 더 이상 성도의 승리자로서 아이덴터티에 손상을 입히지 못합니다. 성도는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승리한 존재로서 죄와 심판의 중력권을 벗어나 우주궤도에 떠 있는 인공위성처럼 하늘에 앉아 있습니다. 또 성도는 세상 일에서 자유로운 존재가 되었음도 뜻합니다. 이미 하늘에 앉은 성도는 시민권이 하늘로 옮겨졌습니다. 때문에 더 이상 세상 일에 놀라지 않습니다. 세상에서 잘되었다고 너무 기뻐하지도 않으며 세상에서 조금 어려움을 겪었다고 해서 지나치게 의기소침하지도 않습니다.
이렇게 벌레 같은 자들이 하늘나라 시민, 하늘의 왕자들이 된 근거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무엇을 잘하였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공로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허락하신 하나님의 풍성한 긍휼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독생자를 주신 하나님의 크신 사랑 때문입니다. 이것을 바울은 ‘은혜’라는 단어로 표현합니다. 은혜란 구원이 우리의 행위의 결과가 아니라 거저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임을 뜻합니다.
7절을 보십시오. 이는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하심이라. 바울은 우리가 본질상 진노의 자녀에서 하나님나라 시민이 된 것이 오직 지극히 크신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 때문임을 증거합니다. 바울은 그것을 깊이 체험하고 증거한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바울은 본래 복음을 믿을 생각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는 복음의 대적자였고 핍박자였고 포행자였고 살인자였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스테반 집사를 돌로 쳐 죽이는 데 앞장섰습니다. 그는 무지한 열심으로 미친 개처럼 날뛰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런 그를 끝까지 참으시고 용서하시고 구원해 주시고 최고의 사도로 세우셨습니다. 이는 그를 통해 하나님의 구원이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에 있음을 모든 이에게 알리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왜 사람을 은혜로 구원하기를 기뻐하시나요? 8,9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구원은 하나님이 준비하신 큰 선물인 예수 그리스도를 그저 받기만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받아들이는 것을 ‘믿는다’고 하는 데 이 믿는 것은 사람의 의나 자랑거리가 될 수 없습니다. 어떤 분이 지난 주에 제게 문자를 보내서, 자신이 물질을 잘못된 곳에 투자했는데 물질을 회수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쓰겠다고 기도했는데 물질을 회수하게 되었고 주일예배를 드릴 때 하나님이 그 돈을 제게 주었으면 좋겠다는 감동을 주셨다고 하면서 제게 저의 계좌번호를 알려달라고 했습니다. 얼굴도 모르는 다른 센터사모님입니다. 저는 받을까 말까 고민하다가 하나님이 감동을 주셨다고 해서 하나님의 뜻으로 알고 제 계좌번호를 보내드렸습니다. 대학로의 어떤 안과에 가서 치료후에 계산할 때 간호사님이 저보고 목사님이냐 물었습니다. 그래서 “네”라고 했더니 원장님과 상의하고 오더니 치료비를 안 내도 된다고 하였습니다. 제가 계좌번호를 보낸 것과 안과에서 “네”라고 한 것이 1%라도 저의 의가 될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100% 그 사모님과 간호사님의 은혜이지요. 구원의 은혜도 이와같습니다. 은혜를 수용하는 우리의 믿음은 결코 의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구원역사를 100% 은혜로 이루기를 원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구원역사를 통해 인간이 자기를 자랑하지 않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의와 하나님의 영광만을 드러내기를 원하십습니다. 사람들은 자기 자랑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대놓고 자랑하기, 은근히 자랑하기, 돌려서 자랑하기 등 자기 자랑하는 맛으로 삽니다. 자기 경력, 학벌, 미모를 자랑하고 자기 지식이나 자식이나 타는 차나 먹은 것을 자랑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 자랑하는 사람을 싫어하십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자기자랑은 진실이 아니며 거짓이고 착각이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공로를 자랑하는 사람은 영적으로 미숙한 사람이며 기본이 안 되어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자랑하기 원하십니다. 우리가 “은혜로 구원받았습니다.” “오직 은혜로 삽니다” 이렇게 말하기를 기뻐하십니다. 바울은 “그러나 내가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b)고 증거함으로 구원뿐 아니라 심지어 사역도 다 은혜임을 고백했습니다. 바울처럼 모든 것이 은혜임을 알 때 우리가 교만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판단하지 않고 겸손히 동역하며 섬길 수 있습니다. 우리가 구원과 사역에 있어서 오직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겸손의 사람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다같이 요절 말씀 10절을 읽겠습니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라. 여기서 만드셨다는 것은 성도가 예수님 안에서 다시 태어난 것을 뜻합니다. 우리가 다시 태어났다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첫째로 내가 하나님 편에서 다른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전에 하나님이 보실 때 진노의 자녀들이었습니다. 하는 일마다, 생각하는 것마다 꼴 보기 싫은 극혐이서 즉시 지옥에 던져 넣고 싶은 존재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의 피를 덧입은 우리는 하나님의 눈에 참으로 귀하고 사랑스러운 자녀로 변화되었습니다. 둘째로 우리 안에 깨끗한 마음이 창조된 것을 말합니다. 우리 안에 죄를 멀리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고자하는 의지와 힘이 생겼습니다. 예수님의 피로 우리의 마음이 새로워졌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선한 일을 위해 거듭났다고 했는 데 선한 일이 무엇입니까? 선은 십계명에 기초해 볼 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선한 일을 다음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미가 6:7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아니냐”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가장 선한 일입니다. 둘째는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복음은 세상에서 가장 기쁜 소식이며 한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입니다. 그러기에 복음을 전하는 일이 세상에서 가장 선한 일입니다. 마지막으로 구제하는 것입니다. 육신적인 면, 물질적인 면에서 자기 희생을 감수하며 다른 사람을 도와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선한 일을 하는 존재로 재창조된 것은 갑자기 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신 일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구원에는 하나님의 깊은 사랑과 예정과 섭리가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이 일이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계획된 일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자신을 어떤 존재로 생각하는 가가 삶을 사는데 중요합니다. 바울은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라고 했는데 영어로는 “We are his workmanship”입니다. 우리는 그의 솜씨, 작품이란 뜻입니다. 우리는 과거 허물과 죄로 폐기처분될 불량품같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고린도후서 5:17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이 말씀 그대로입니다. 고려청자, 구찌, 롤렉스, 샤넬, 까르띠에, 루이비통.. 무슨 이름들입니까? 세계적인 명품들이죠. 그러나 진정한 명품중의 명품은 하나님께서 영광스럽게 재창조한 그리스도인들, 우리들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아이덴터티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고려청자입니다. 우리를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재창조하셔서 명품들이 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드립니다.
사무엘 선교사님은 생후 8개월에 어머니를 여의셨습니다. 계모는 친자와 그를 차별했습니다. 고기반찬을 친자에게만 주었고 그에게는 주지 않았고 그가 영어공부하려는 것을 보고 “네 까짓 것이 공부해서 뭐해” 하며 호롱불을 발로 차서 그것이 눈에 맞아 한쪽 눈이 시력을 잃을 정도가 되셨습니다. 그는 어머니 없이 자란 슬픔과 설움과 운명주의가 컸습니다. 자신의 의미와 가치를 찾기 힘들었습니다. 그러던 중에도 삶의 의지를 갖고 영어공부를 하고 학교대신 인쇄소에 다니며 열심히 책을 읽었습니다. 그러다가 엡 2:10 말씀을 깊이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는 이 말씀을 통해 자신이 하나님의 깊은 사랑과 섭리가운데 예수님의 보혈안에서 새롭게 창조된 귀한 존재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사랑속에서 자신의 삶의 가치가 보였습니다. 그때부터 그는 인생을 보는 눈이 달라졌습니다. 자신의 아픔을 자신처럼 슬픔많은 대학생들을 이해하고 섬기는 선한 일을 위한 섭리로 영접하셨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아픔과 슬픔있는 대학생들을 깊은 공감과 사랑으로 섬겼습니다. 그랬을 때 그의 사랑과 섬김으로 수많은 슬픔의 사람들이 기쁨의 사람들이 되었고 강건한 내면을 가지고 한국캠퍼스뿐 아니라 세계캠퍼스에 나아가 승리하는 목자요 선교사들이 되었습니다. 또한 열심히 공부한 영어도 주님의 세계선교역사에 귀하게 쓰임받게 되었습니다. 내가 ‘나를 어떻게 보느냐’가 매우 중요하며 나의 삶을 결정합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의 솜씨요 작품이요 명품이라고 생각할 때 모든 운명과 슬픔의 문제가 사라집니다. 나의 소중함을 알 때 함부로 살지 않게 됩니다. 고려청자나 루이비통 가방에 쓰레기를 담아 다닐 수는 없쟎습니까? 그리고 시간을 아껴가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선한 일을 하고자 합니다.
어떤 분은 과거 허물과 죄속에서 살았습니다. 자신도 자신에게 소망을 둘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이제 예수님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아직 자존감이 낮습니다. 그래서 아무렇게나 살아도 된다는 생각이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자신이 쓰레기장에 서 회수되어 겨우 작동만 되도록 고친 시계정도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분들은 그리스도안에서 새롭게 된 자신의 정확한 아이덴티티를 아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피로 완전히 새로워졌습니다. 롤렉스 시계보다 더 고귀한 명품으로 거듭났습니다. 나의 삶은 무한한 가능성이 있고 나는 얼마든지 명품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새로운 피조물이 된 내가 참으로 아름답고 감동적이며 멋진 인생을 살길 원하십니다. 예수님의 핏값으로 명품이 되게 하시지 않았습니까? 우리가 대충 적당히 살고자 하는 마음을 회개하고 명품인생, 작품인생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결론입니다. 우리는 과거 허물과 죄로 불량품같은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선한 일을 위하여 살도록 우리를 그리스도안에서 재창조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안에서 하나님이 새롭게 창조하신 최고의 작품, 명품입니다. 그러니 이제 우리가 함부로 살지 않고 선한 일을 위하여 하루하루 작품인생, 명품인생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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