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에베소서 3강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말씀/ 에베소서 2:11-3:13
요절/ 에베소서 2: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바울 사도는 오늘 본문을 통해 하나님을 멀리 떠나있던 에베소 성도들이 어떻게 주님과 가까워졌는지 설명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도 혹 하나님을 멀리 떠나 있지 않은지 돌아보고 주님과 다시 가까워지는 은혜의 시간 되기를 기도합니다.
11-12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는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를 받은 무리라 칭하는 자들로부터 할례를 받지 않은 무리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사도 바울은 현재 그의 복음 사역으로 인해 변화된 에베소 성도들을 대상으로 본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에베소 성도들을 생각할 때 그의 마음이 어떠했을까요? 이것을 이해하기 쉽게 비유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사대부 집안에 태어난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아주 어려서부터 삼강오륜을 배우고 인간의 도리와 예절을 배웠습니다. 아주 어려서부터 아버지를 아버님이라 부르며 자신을 소자라고 칭했습니다. 아버님이 방에 들어오시면 바로 일어나 ‘아버님, 어인 일이신지요’하고 오신 연유를 공손히 여쭈었습니다. 저녁이 되면 부모님 방에 가서 평안히 잘 주무시도록 절하며 인사드리고 다시 아침이 되면 밤새 평안히 잘 주무셨는지 안부를 여쭙고 인사드렸습니다. 이런 그가 어느 날 우연히 한 아이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는 아버지에게 고집을 피우고 떼짱을 부렸습니다. 심지어 반말을 하였습니다. 말리는 어머니를 막 때리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습니다. 이를 목격한 소년은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와같이 자기를 낳아준 부모에게 막되먹고 무례한 아이는 필시 인간이 아닌 짐승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을 바라보는 시각이 딱 이와 같았습니다. 자기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돌과 막대기로 만든 우상을 섬기며 짐승처럼 육체의 본성대로 살아가는 이방인들을 보며 유대인들은 그들을 경멸했습니다.
과거 에베소 성도들도 그와 같은 삶을 살았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에 대해서는 전혀 들어본 적도 없고 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영광스러운 약속을 주셨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전혀 들어본 바가 없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산소망도 없고 하나님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이런 그들이 지금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19절을 보면 그들은 이제 더 이상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 되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놀라운 일이 가능하게 되었을까요?
13절을 보십시오.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바울 사도는 그 비밀이 그리스도 예수의 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피는 이방인들이 하나님을 떠나 행하는 그 모든 우상숭배와 음란과 탐욕과 죄악이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죽게 만든 악한 죄임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동시에 그 피는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웅변하고 있습니다. 바울 사도가 이 피의 복음을 에베소 성도들에게 전했을 때 그들이 아데미 우상을 섬기던 우상숭배와 음란의 죄에서 돌이켰습니다. 매일 저녁 술 마시고 퇴폐적인 삶을 살던 데서 돌이켜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기 위해 두란노 서원으로 나왔습니다. 주말이면 원형경기장으로 놀러가던데서 돌이켜 경건하게 주일예배를 드렸습니다.
지금으로부터 135년 전 조선은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습니다. 이런 조선에 그리스도의 피의 복음이 전해져왔습니다. 선교사들은 이 피의 복음을 전하는데 자신들의 꿈과 젊음과 인생을 바쳤습니다. 1866년 제너럴 셔먼호에 승선한 토마스 선교사는 죽음의 순간까지도 조선인들에게 성경책을 나누어 주었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때 12살 먹은 최치량이라는 소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숙부와 함께 토마스 선교사의 순교장면을 지켜보았습니다. 그는 토마스 선교사로부터 3권의 한문성경을 전해받았습니다. 그는 이 한문성경을 박영식이라는 사람에게 주었습니다. 박영식은 이 성경을 찢어 벽지로 사용했습니다. 세월이 흘러 최치량은 사업에 성공하여 한 여관을 사서 운영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여관의 전주인은 박영식이었고 여관의 벽에 최치량이 전해주었던 성경이 붙어있었습니다. 최치량은 벽지에 붙어있는 성경을 읽고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위해 피흘려 죽으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평양에서 최초로 사무엘 마펫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고 평양 장대현 교회를 세우게 되었으며 평양 지역 선교의 초석이 되었습니다.
1885년 조선에 온 존 헤론 선교사는 신발이 닳기까지 환자를 돌보고 복음을 전했으며 이질 기운으로 몸이 좋지 못한 가운데서 먼 시골로 심방 가 환자를 진료하다가 조선에 온지 5년만인 1890년 34세의 꽃다운 나이에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는 숨을 거두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조선 하인들에게 복음을 전했으며 아내에게도 내 뒤를 이어 계속하여 조선 선교를 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이와같이 선교사들이 자기의 생명을 다 바쳐 전한 그리스도의 피의 복음은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던 조선을 마침내 하나님과 가까이 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작금의 한국 교회 현실은 어떠합니까? 이 시대 청년들은 다시 하나님을 멀리 떠나가고 있습니다. 각 교회마다, 선교단체마다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나가는 것이 심각한 상황이 되었습니다. 2세들은 부모들이 가르쳐준 신앙대로 이 세상을 사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아우성입니다. 하나님없는 삶, 육신의 본성대로 사는 삶, 돈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삶을 살아야 이 세상에 적응할 수 있다고 항변합니다. 캠퍼스에서 불신자 대학생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정말로 어려운 일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이제 한 세대만 지나면 아니 10년만 지나면 대한민국은 완전한 복음의 불모지가 될지도 모릅니다.
이런 청년들을 다시 하나님께 돌아오게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리스도의 피입니다. 그리스도의 피 안에 담긴 그 죄사함의 권세와 능력, 그리스도의 피 안에 담긴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 - 이것만이 멀리 떠나간 청년들을 다시 하나님께 돌아오게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사사기에서 기드온은 135,000명의 적군을 눈앞에 두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기드온에게 단 삼백명의 용사만 있으면 그들과 싸워 능히 이길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시대에도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온 세상이 하나님을 멀리 떠나 있을지라도 그리스도의 피의 복음에 사로잡힌 청년 12명만 있으면 한 캠퍼스가 변화될 수 있고 한 캠퍼스가 변화되면 한 나라가 변화될 수 있고 한 나라가 변화되면 한 시대가 변화될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바로 주님께서 부르시는 그 청년입니다. 옆 사람을 보지 마십시오. 바로 ‘나’입니다. 우리 청년들이 그리스도의 피에 담긴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에 마음이 뜨겁게 감동된 그리스도의 청년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14-15절을 보십시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그리스도는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넘을 수 없는 장벽을 허무셨습니다. 곧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다 그리스도의 피의 복음이 필요함을 나타내셨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의 차별이 사라졌습니다. 유대인 출신이든 이방인 출신이든 모두 그리스도의 피의 복음으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a Christian)입니다.
차별이 있는 곳에는 필연적으로 우월감과 열등감의 감정이 따라옵니다. 똑같은 크기의 원이 2개 있습니다. 그 원만 보면 둘의 크기가 똑같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원중 하나의 주변에 그 원보다 더 큰 원을 여러개 그립니다. 또 다른 원의 주변에는 그 원보다 작은 원을 그립니다. 이렇게 자기보다 크기가 다른 원과 비교해 보면 놀랍게도 처음에 똑같아 보였던 2개의 원이 크기가 완전히 달라보입니다. 주변에 자기보다 작은 원이 있으면 그 원은 커보이고, 주변에 자기보다 큰 원이 있으면 그 원은 매우 작아보입니다. 이와같이 차별이 있는 곳, 비교가 있는 곳에 우월감과 열등감의 감정이 필연적으로 따라오게 되며 99%는 열등감으로 고통하게 됩니다. 소수의 1% 정도만 우월감을 느낄 수 있으나 그들도 역시 언젠가는 더 큰 원을 만나게 되고 그로 인해 열등감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난 사람은 이러한 차별로 인한 열등감의 고통, 교만의 병에서 해방되게 됩니다. 그는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는 그의 생명입니다. 그리스도는 그의 전부입니다. 그리스도가 그의 전부인 그를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의 그 어떤 자보다 존귀하게 여기십니다. 우리 청년들이 “그리스도는 나의 모든 것입니다. 나는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입니다.”라고 담대하고 고백하고 외칠 수 있는 그리스도의 청년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19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이은 참으로 감동적인 사도 바울의 선언입니다. 그들은 이제 더 이상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닙니다. 그들은 거룩한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 곧 하나님이 돌보시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20-22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바울은 건물의 비유를 통해 에베소 성도들을 향한 하나님의 우주적인 플랜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먼저 에베소 성도들은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었습니다. 이는 사도들과 선지자들, 특히 사도들의 가르침(오늘날 신약성경) 위에 그들의 신앙의 기초를 놓았다는 의미입니다. 다음으로 그리스도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습니다. 모퉁잇돌은 기초석을 의미합니다. 오늘날 현대식 건물은 그 짓는 방식이 다르므로 기초석은 그저 상징적인 의미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 당시에 기초석은 건물 전체를 지탱하는 가장 중요한 돌로 건물의 규모에 따라 그 크기가 10미터 이상 되기도 하였고 무게가 100톤 이상이 되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우주적인 성전 건물에 있어서 기초석이 되십니다. 그리고 에베소 성도들을 포함한 모든 성도들은 그 기초석 위에 쌓아져가는 벽돌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기초석으로 하고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을 벽돌로 하는 우주적인 성전이 완성되는 그날 그 성전 안에 영원히 거하십니다.
에베소서를 연구하는 몇몇 학자들이 에베소서의 주제가 교회론이라고 말하는데, 그 근거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에베소서는 우리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이 우주적인 성전의 완성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될, 반드시 있어야만 하는 하나의 거룩한 벽돌이라고 말씀합니다. 아무리 멋있게 잘 지은 건물이라 할지라도 벽돌 하나가 빠져 있으면 어떻게 됩니까? 마치 이빨 하나가 빠진 사람처럼 보일 것입니다. 하나님이 영원히 거하실 우주적 성전에 나 한 사람이 그와 같이 없어서는 안될 소중한 존재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그 성전을 더욱 아름답게 빛낼 소중한 하나의 벽돌로 다듬어 가고 계십니다. 이것을 생각할 때 나 한 사람쯤이야라고 생각하면 절대 안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우주적 성전을 최고로 아름답게 만들기 위하여 하나님과 함께 또 성령님과 함께 나의 신앙생활을 잘 가꾸어나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에 이러한 우주적인 하나님의 계획에 대한 이해를 주시고 하루 하루 나의 신앙생활을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 가꾸어나갈 수 있는 지혜와 힘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3:1-2절을 보십시오. “이러므로 그리스도 예수의 일로 너희 이방인을 위하여 갇힌 자 된 나 바울이 말하거니와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하나님의 그 은혜의 경륜을 너희가 들었을 터이라” 현재 바울 사도는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감옥에 갇히게 된 것이 너희 이방인을 위해 일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바울 사도가 에베소 성도들의 마음을 무겁게 하거나 죄책감을 심거나 나는 감옥에서 이렇게 고생하고 있는데 너희는 똑바로 잘 해야 하지 않겠느냐 하는 권면의 의미로 말한 것이 아닙니다. 바울이 이렇게 말하는 의도의 핵심은 하나님께서 바울을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 부르시고 그들을 위해 생명을 내어던지는 사역을 감당하게 하실 정도로 이방인들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말하고자 함입니다.
3-6절을 보십시오. “곧 계시로 내게 비밀을 알게 하신 것은 내가 먼저 간단히 기록함과 같으니 그것을 읽으면 내가 그리스도의 비밀을 깨달은 것을 너희가 알 수 있으리라 이제 그의 거룩한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 성령으로 나타내신 것 같이 다른 세대에서는 사람의 아들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상속자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여하는 자가 됨이라” 하나님이 이방인들을 이처럼 사랑하신 것은 지금까지 비밀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이방인들을 하나님의 자녀 삼으시고 그리스도와 함께 상속자가 되게 하시고, 이스라엘에게 주셨던 그 모든 영광스러운 약속과 은혜와 복을 함께 받도록 하신다는 것은 비밀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있었던 이 비밀은 1차적으로는 예수님을 통해 나타났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 예수님은 그 시대 가장 유대인들 중 가장 소외되었으며 큰 죄 가운데 있었던 이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셨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바울 사도를 통해 죄 가운데 있던 이방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을 나타내십니다.
고린도 후서 11:2절에서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향해 바울 사도는 다음과 같이 고백하였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을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 바울 사도는 하나님이 이방인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그 뜨거운 사랑을 온 몸으로 느꼈습니다. 바울을 비롯한 유대인들이 보기에 더러운 죄 가운데 있던 이방인들, 온갖 부정한 음식을 먹으며 윤리적으로 방종한 삶을 살던 그들을 하나님은 마치 고결한 출신의 한 남자가 불가촉 천민 출신의 여인과 사랑에 빠져 결혼까지 하려는 것처럼 그와같이 이방인들을 사랑하시고 그리스도의 신부삼고자 하는 그 뜨거운 사랑을 느꼈습니다. 바울 사도는 이 하나님의 마음을 기록한 편지를 받고 그 편지를 이방인들에게 전하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7-9절을 보십시오. “이 복음을 위하여 그의 능력이 역사하시는 대로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따라 내가 일꾼이 되었노라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함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추어졌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함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 측량할 수 없는 놀라운 일들, 곧 죄인들이 죄사함받고 구원받는 일들이 일어난다는 의미입니다. 또한 복음을 통해 성도들이 측량할 수 없는 놀라운 영적인 복을 누리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감추어졌던 비밀의 경륜(경영, 계획)이란 장차 임할 하나님 나라의 주인공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자기가 죄인인 것을 깨닫고 죄를 고백하고 죄사함받은 사람들, 그 죄사함과 구원의 은혜에 감격하여 변화된 새 삶을 살게 된 사람들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사람들을 세상의 중심으로 세우시고, 통치자요 지도자요 목자로 세우시고 온 세상을 다스리도록 하실 것입니다. 이를 통해 창세기에서 아담과 하와를 세우시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다스리도록 하신 하나님의 뜻이 새 아담 곧 그리스도인들을 통해 온전히 성취되는 것이 하나님의 비밀의 경륜입니다.
조선 시대에는 과거에 급제해야 한 고을을 다스리는 사또가 되고 나라를 다스리는 관리가 될 수 있었습니다. 이 시대에는 고시에 합격하거나 돈을 많이 벌어 재벌이 되거나 명문대를 나오고 유학을 가서 박사학위를 받아야 무언가 이 시대의 지도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죄사함의 은혜와 감격이 뜨거운 사람, 죄사함의 은혜로 삶이 변화된 사람이 가장 존귀한 자요, 지도자입니다. 우리 청년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0-12절을 보십시오. “이는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 있는 통치자들과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니 곧 영원부터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하신 뜻대로 하신 것이라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감을 얻느니라” 하나님은 교회를 통해 온 세상으로 하여금 이 하나님의 계획을 알게 하십니다. 이 시대가 아무리 하나님을 대적하고 복음을 대적한다 할지라도 단 한 사람이라도 여름수양회를 통해 십자가 복음을 영접하고 자기의 죄를 자복하고 회개하는 일이 일어난다면 하나님이 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고 계신다는 증거가 됩니다. 외대 가운데 성대 가운데 한성대 가운데 국민대 가운데 상명대 가운데 단 한 사람이라도 복음을 통해, 또 우리 모임의 1대1 성경공부와 여름수양회를 통해 자기가 죄인인 것을 깨닫고 회개하는 일이 일어난다면 하나님은 우리 모임을 귀하게 쓰고 계시며 우리 모임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세상을 알리고 계신다는 증거가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도 살아계시고 일하시는 그리스도를 믿고 담대함과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13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를 위한 나의 여러 환난에 대하여 낙심하지 말라 이는 너희의 영광이니라” 결론적으로 바울은 그가 감옥에서 당하는 환난으로 인해 너무 근심하거나 낙심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바울 사도가 당하는 고난은 하나님이 그들을 이처럼 사랑하신다는 증거입니다. 우리 목자님이 나 때문에 염려하고 근심하시다가 입술이 트고 몸져 누우셨다면 그것은 영광입니다. 하나님이 그 목자님을 통해 나를 향한 사랑을 보여주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목자가 당하는 모든 고난과 아픔과 눈물은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향한 뜨거운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하시는 귀한 도구입니다.
결론입니다. 하나님을 멀리 떠난 이 시대 청년들이 다시 주님께 돌아오도록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그리스도의 피의 복음뿐입니다. 올 한 해 이 피의 복음을 통해 많은 청년들이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올 수 있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죄인들을 위해 십자가에 피흘려 죽으신 예수님, 양들을 위해 감옥에 갇힌 고난을 기쁨으로 감당한 사도 바울을 배워 세상에서 방황하는 영혼들을 위해 작은 한 가지 희생을 실천하는 한 해가 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