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에베소서 5강 하나님을 본받는 자 말씀/ 에베소서 4:17-5:14 요절/ 에베소서 5:1-2 “그러므로 사랑을 받는 자녀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지금까지 바울 사도는 본래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하나님의 약속과 아무 상관없던 이방인들을 그리스도의 피로 가깝게 하시고 그들을 거룩한 성전의 일원으로 삼으신 하나님의 뜻과 사랑에 대해 강론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동기가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놀라운 비전과 소망을 붙들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7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언하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 같이 행하지 말라” “그러므로”는 지금까지 강론한 바울 사도의 모든 내용을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 에베소 성도들을 이방인 가운데서 불러내셨습니다. 본래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하나님의 약속과 아무 상관없던 그들을 그리스도 안에 있게 하시고 신령한 복과 관련된 놀라운 놀라운 약속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바울 사도는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언”한다고 말합니다. KJV 성경을 보면 “This I say therefore, and testify in the Lord”라고 번역되어 원문의 느낌을 잘 살리고 있습니다. 이는 17절부터 24절의 말씀이 단순히 바울의 개인적인 생각이 아닌, 성도들을 향한 하나님의 간절한 소망이요, 뜻임을 바울이 증언한다는 것입니다. 먼저 바울은 하나님은 에베소 성도들이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 같이 행하지 않기를 바란다고 말씀합니다.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이는 하나님없이 살아가는 이들이 그 삶의 동기가 물거품처럼 가볍고 본질적인 의미나 가치가 크게 결여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많은 이들이 “저 사람 정말 잘났다, 똑똑하다” 하는 그 한 마디를 듣기 위해 죽도록 투쟁하며 살아갑니다. “우린 너 없이는 안돼, 너가 꼭 필요해” 동료들로부터 이 한 마디 말을 듣기 위해 죽을 힘을 다해 살아가는 이도 있습니다. 어떤 이는 사람들로부터 받은 상처를 만회하기 위해, 복수해주기 위해, 복수심이 삶의 원동력인 경우도 있습니다. 심리학자들의 말을 들어보면 많은 성인들의 삶의 근원적인 동기가 의외로 어린아이처럼 유치한 경우가 허다하다고 합니다. 사실 사람은 자기를 창조하신 창조주로부터 이러한 인정을 받고자 하는 근원적인 욕구가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떠나 있으므로 이러한 결핍을 사람들의 말을 통해 채우고자 합니다. 바울 사도는 에베소 성도들이 더 이상 이러한 허망한 것들에 의해 좌우되지 말고 참되고 영원한 하나님의 인정과 칭찬을 좇아 살도록 권면합니다. 18-19절을 보십시오. “그들의 총명이 어두워지고 그들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그들의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그들이 감각 없는 자가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하나님으로부터 받아야 할 인정과 칭찬, 참된 만족과 기쁨을 사람이나 물질적인 대상을 통해, 곧 우상을 통해 채우고자 할 때 어떻게 됩니까? 그때 나타나는 현상이 총명이 어두워지는 것입니다. 마음이 무지함으로 가득하게 되어 어리석어지고 시간이 흐를수록 완고해지게 됩니다. 생각이 없고 지각이 없으며 오직 더러운 욕심과 탐욕만 가득한 사람처럼 되어갑니다. 본문의 18-19절에서 사도 바울이 기술한 내용은 사람이 나이가 들어갈 때 생기는 현상을 정확히 묘사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사람이 나이가 들어갈수록 점점 마음이 더 완고해지고 챨스 딕킨스의 소설 크리스마스 캐럴에 나오는 스쿠루지 영감처럼 되어갑니다. 스쿠루지는 하나밖에 없는 조카가 그를 크리스마스날 자기 집에 와서 식사하시라고 초청해도 그것을 시간 낭비요 아무 의미가 없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서기가 크리스마스날 일하지 않고 쉬는데 왜 그날 일당을 주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나이가 아직 어린 이들은 소설을 읽으며 무슨 이런 인간같지 않은 인간이 다 있는가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소설이 1834년 12월 17일 처음 출간된 직후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이래 지금까지 크리스마스가 될 때마다 각종 연극, 음악, 영화 등을 통해 다양한 방식으로 재생산되는 것은 사람은 누구나 정도 차이는 있지만 나이가 들어갈수록 스쿠루지 영감처럼 되어간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을 떠난 인간은 나이가 들수록 점점 더 마음이 굳어지고 완악해지게 됩니다. 무엇을 보고 무엇을 들어도 감동을 받는 일이 점점 더 줄어들게 됩니다. 눈에서는 더 이상 감동으로 인한 눈물이 흐르지 않고 입가에는 시니컬한 냉소와 비판만이 가득하게 됩니다. 총명이 어두워져 자녀들이나 주변 사람들을 열받게 하고 관계를 파괴시키는 말이나 행동만 골라서 하게 됩니다. 그러면서도 인생을 오래 산 자기가 더 지혜롭다고 생각합니다. 이성과 사고는 점점 더 마비되고 마침내는 욕망과 탐욕만이 남게 됩니다. 어떤 분은 돈이 그렇게 많고 빌딩이 여러 채 있는데 꼭 명절을 피해서 조카들을 만난다고 합니다. 이는 세뱃돈 주는 것이 아까워서라고 합니다.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가 생각할 수 있지만 이것은 하나님의 생명을 떠나 있는 모든 인생들의 자화상입니다.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를 배워 진리 안에 있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에베소 성도들은 그와 같은 삶을 살면 안된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면 그들은 어떤 삶을 살아야 합니까? 22절을 보십시오.“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바울 사도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라고 말씀합니다. 옛 사람이란 과거 아담 안에 있던 사람을 말합니다. 옛 사람의 가장 큰 특징이 무엇입니까? 저 옛날 아담이 사탄의 유혹을 받아 죄를 범한 것처럼, 옛 사람의 가장 큰 특징은 늘 유혹을 받아 죄를 범하려는 성향이 있는 것입니다. 이는 그의 마음 안에 욕망과 탐욕이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유혹의 욕심”이라는 표현은 원문상 “속임수가 있는 욕망(NIV: deceitful desires)”이라는 의미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욕심은 “너가 이 욕구만 채우면 너는 정말 행복할거야”라고 속인다는 의미입니다. 옛 사람은 정말 어리석습니다. 너무도 어리석어서 이 유혹의 욕심에 날마다 속아넘어갑니다. 한 번 속은 후 ‘아 욕구를 채워도 전혀 행복하지 않구나, 행복한 것 같은 느낌은 찰나적인 순간일 뿐 그 후 더 큰 마음의 고통과 관계의 파괴, 삶의 파괴가 따르는구나’ 하는 깨달음을 얻습니다. 그런데 이 옛 사람은 이런 체험을 하고 깨달음을 얻어도 조금도 더 지혜로워지지 못합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다시 유혹의 욕심에 속아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시 반복합니다. 한편 우리말 성경에서는 번역상 “썩어져 가는”이란 표현이 구습을 수식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원문상 이 표현은 옛 사람을 수식하고 있습니다. (NIV: your old self, which is being corrupted) 옛 사람의 특징은 썩어져 간다는 것입니다. 마치 마약환자가 마약을 하면 할수록 피골이 상접해지고 몸과 마음과 영혼이 죽어가는 것처럼, 유혹의 욕심에 넘어지는 생활을 반복하면서 옛 사람은 점점 썩어져 갑니다. 바울 사도는 이와같이 유혹의 욕심에 늘 속아 죄를 짓고, 또 그런 생활을 반복함으로 썩어져가는 이러한 옛 사람을 벗어버리라고 말씀합니다. 한편 바울 사도는 로마서 6:6절에서 다음과 같이 선포하였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또 로마서 6:8절에서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라고 하였습니다. 이와같이 바울 사도는 로마서에서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 위에서 우리의 옛 사람이 죽고 그의 부활과 연합하여 우리가 새 사람으로 다시 태어났다고 선포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미 죽어버린 옛 사람을 왜 벗어버리는 투쟁을 해야 합니까? 이는 우리의 구원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출애굽기를 생각해보면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집트에서 무려 430년간 노예생활을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모세가 10가지 재앙을 행하고 특히 마지막 장자 재앙 이후 마침내 바로의 통치에서 벗어나 해방되었을 때 그들은 노예 백성이 아닌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노예 백성으로서 옛 사람은 죽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새롭게 다시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신약 성경은 유월절 장자 재앙 때 어린 양이 피흘려 죽은 것을 그리스도의 피에 비유하고,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 바다를 건넌 것을 신약 백성이 세례받은 것에 비유합니다. 이와같이 이스라엘 백성은 그들을 비참한 노예의 삶에서 건져내신 하나님의 크신 능력과 권능을 체험하였고 어린 양의 피의 은혜로 믿음으로 홍해바다를 건넌 사건을 통해 완전히 새로운 백성으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여전히 과거 노예로 살던 시절 몸과 마음과 영혼에 배어있던 노예 근성, 노예 정신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들은 노예처럼 자발적으로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고 혼내면 잠시 말을 듣는 것처럼 행동하고, 다시 자율적으로 하도록 하면 본성을 좇아 행했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노예의 본성이 다 빠지고, 자발적인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하나님의 백성다운 모습을 갖추기까지 40년간 광야에서 훈련을 받아야 했습니다. 자, 다시 생각해 봅시다.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너는 순간 노예 백성으로서의 옛 사람은 완전히 죽었습니다. 옛 사람은 사라졌습니다. 그들은 자발적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 일입니까! 옛 사람의 본성은 그들의 마음과 습관에 여전히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러한 옛 사람의 습성을 벗어버리는 투쟁을 해야 했습니다. 이와같이 우리도 우리의 구원이 완성되기 전 옛 사람의 습성을 벗어버리는 영적인 투쟁을 감당해야 합니다. 습관이 가진 무서운 힘에 대해 연구한 이들이 있습니다. 이들의 연구에 의하면 매년 골찌를 맴돌던 어떤 한 미식축구 팀이 있었습니다. 이 팀이 새로운 감독을 만났습니다. 이전 감독들은 볼을 잡으면 생각을 하도록 도왔습니다. 그런데 새 감독은 생각을 하지 말고 미리 연습한대로 습관을 좇아 하도록 훈련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이 방식에 다들 의구심을 품었습니다. 그런데 이 방식대로 하니까 미식 축구 역사상 최고의 성적 상승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감독은 선수들이 실전에서 볼을 받으면 생각을 한다는 구실 하에 실제로는 머뭇머뭇거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의심과 실패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순간적으로 사로잡히고 그 결과 늘 실패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생각하지 말고 평소 팀원끼리 서로 약속된 것을 몸에 습관으로 배이게 한 후 그 습관을 좇아 행하도록 한 것입니다. 이들의 연구에 의하면 처음에는 생각이 사람의 인생이나 조직에 큰 영향을 주지만 점차 실제 한 사람의 인생, 혹은 한 조직을 좌지우지하는 것은 습관이라는 결론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당신의 인생을 바꾸기 원한다면 당신의 습관을 바꾸라는 조언을 하였습니다. 이와같이 우리가 옛 사람의 습성을 벗어버리는 가장 좋은 방법은 좋은 습관을 만드는 것입니다. 갑자기 여유 시간이 생겼을 때 이 시간에 뭐하지 하고 생각하기 시작하면 벌써 진 것입니다. 여유 시간이 생기면 습관을 좇아 하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성경읽기, 기도, 유익이 되는 독서, 어학공부 등 습관을 좇아 하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또 매일 아침 일어났을 때 첫 시간에 뭐하지 하고 생각하기 시작하면 벌써 진 것입니다. 생각하지 말고 첫 시간은 무조건 말씀과 기도 이렇게 습관을 만들어야 합니다. 동시에 나쁜 습관을 바꾸는 것입니다. 많은 이들이 자기도 인식하지 못하는 매우 나쁜 습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렵고 힘든 일을 만나면 자동적으로 원망과 불평의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어떻게 그런 심한 욕설을 할 수 있는가 주변 사람이 물으면 그냥 별 생각없이 했다고 말합니다. 많은 크리스챤들이 눈에 띄는 욕설까지는 아니더라도 거의 욕설에 준하는 원망과 불평, 저주의 생각을 습관적으로 합니다. 그러므로 이런 습관을 바꾸어야 합니다. 어렵고 힘들 때 오히려 뭔가 감사한 것을 찾아서 감사하는 습관을 갖는 것은 매우 좋은 방법입니다. 힘들수록 감사하는 습관을 가진 사람은 그의 삶에 혁명이 일어나게 됩니다. 저도 지난 추수 감사절 때 감사 말씀을 전한 후 메시지에서 설교한 내용을 실천하고자 매일 감사제목을 찾아 감사하고 에버노트에 그 감사제목을 기록하는 일을 시작했습니다. 기도할 때에도 뭔가를 구하기 이전에 반드시 먼저 충분히 감사한 후에 기도하는 습관을 만들었습니다. 그랬을 때 생각이 바뀌고 삶이 바뀌는 작은 혁명을 체험했습니다. 우리도 오늘 말씀을 마음으로 받아 각자 나쁜 습관을 버리고 좋은 습관을 만들 수 있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23-24절을 보십시오.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에베소 성도들은 더 이상 옛 사람 아담 안에 있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 새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먼저 이 새 사람은 하나님을 따라 지어진 존재입니다. “하나님을 따라”라는 표현은 하나님을 꼭 닮은 존재가 되도록 지어졌다는 의미입니다. (NIV: created to be like God) 이것은 놀라운 말씀입니다. 바울 사도의 말씀에 의하면 새 사람은 그 마음의 중심에 하나님을 닮은 존재가 되고자 하는 소원이 있다는 것입니다. 새 사람이 성장하고 자랄수록 그에게서 하나님을 닮은 모습이 더욱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헷갈려 하고 절망하는 부분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을 돌아볼 때 그들 안에 하나님을 닮고자 하는 소원보다 죄의 유혹에 쉽게 넘어지는 부분이 훨씬 더 강하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닮고자 하는 소원이 1이라면 세상의 달콤함과 죄의 쾌락을 누리고자 하는 소원은 99인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이는 그가 새 사람이 안 된 것이 아니라 그의 새 사람이 마치 갓난아이와 같이 너무 어리고 연약하기 때문입니다. 이 새 사람이 더 강건해지고 성장하기 위해서는 영적인 젖과 같은 말씀을 때를 따라 공급해 주어야 합니다. 사도 베드로는 이를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설명했습니다: “갓난 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벧전 2:2)” 우리가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고 더 나아가 실제 삶에서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은 우리의 새 사람이 무럭무럭 성장하도록 돕는 자양분이 됩니다. 특히 한 말씀이라도 그 말씀을 실제 삶에서 순종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말씀 묵상과 받은 은혜가 실제적인 순종으로 이어지지 않는 것은 마치 갓난아이가 젖을 바라보기만 하고 실제 먹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혹은 먹긴 먹었는데 소화로 이어지지 못하고 다 토해낸 것과 같습니다. 오늘 말씀도 듣고 은혜받고 끝나면 안됩니다. 받은 말씀에 기초해 실제 나의 습관이 바뀌는 순종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나의 삶에서 한 가지 습관이 바뀌는 순종의 역사, 변화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기도합니다. 25절을 보십시오.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과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라” 거짓은 마귀의 속성입니다. 거짓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자녀인지, 마귀의 자녀인지 헷갈립니다. 형제에게 거짓된 것은 몸된 그리스도를 해치는 것입니다. 26-27절을 보십시오.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않는다는 것은 때론 화가 나지만 이것이 근본적으로 형제에 대한 미움으로 이어지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부모는 자식이 열받게 하면 화가 나지만 근본적으로 자녀에 대한 사랑에서 흔들리지 않습니다. 성도들은 이와같이 형제에 대해 근본 흔들리지 않는 사랑의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아무리 화가 나는 일이 있어도 그날 해가 지기 전까지는 분노의 감정을 다 내려놓고 용서의 마음, 사랑의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이는 습기가 많은 곳에 곰팡이가 피듯 분노의 감정이 오래 남을 때 마귀가 틈타기 때문입니다. 28절을 보십시오. “도둑질하는 자는 다시 도둑질하지 말고 돌이켜 가난한 자에게 구제할 수 있도록 자기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 그리스도인이 성실하게 일하지 않으면 누군가의 것을 도둑질하여 살아가게 됩니다. 새 사람을 입은 그리스도인은 마땅히 성실하게 일하여 자립할 뿐 아니라 남을 구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는 하나님도 성실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29절을 보십시오.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그리스도인은 언어생활에 있어서 특히 덕이 되지 않는 말, 은혜가 되지 않는 말은 입밖에도 내지 말아야 합니다. 그의 모든 말은 은혜가 되고 덕이 되고 선한 말이 되어야 합니다. 남을 은근히 낮추고 자기는 높이는 말, 당사자가 없는 자리에서 남을 깎아내리는 말, 믿음이 연약한 형제를 시험에 빠지게 하는 말, 가십거리를 술안주처럼 즐기는 말 등은 모두 하나님의 자녀로서 합당하지 않은 언어생활입니다. 30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원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우리는 성령 안에서 구원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습니다. 성령께서는 우리가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라고 인정해 주시고 증거를 주셨습니다. 또 성령은 우리의 구원의 완성이 이루어지는 그 날까지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를 도우십니다. 그러므로 이 성령을 근심하게 하는 것은 자신의 영혼에 심각한 해를 가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할 때 성령을 근심하게 합니까? 반복하여 죄를 지을 때, 무엇보다 그 죄에 대해 통회하고 중단하고자 하는 마음이 결여될 때 성령께서 근심합니다. 또 마치 성령께서 계시지 않는 것처럼 성령에 대해 무관심할 때 성령을 근심케 합니다. 우리가 어떤 집에 손님으로 갔는데 마치 내가 없는 것처럼 자기들끼리 떠들고 대화한다면 얼마나 화가 나겠습니까. 이와같이 성령에 대해 무관심한 삶은 성령님을 근심하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마땅히 성령님을 인정하고 존귀히 여기며 늘 성령께서 주시는 세미한 음성을 듣고자 해야 합니다. 31-32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비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그 외에 마귀에게 속한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비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려야 합니다. 대신 서로 친철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용서하되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을 용서하심과 같이 해야 합니다. 5:1-2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사랑을 받는 자녀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라는 표현은 원문상 하나님을 꼭 닮은 자, 하나님을 그대로 흉내내는 자가 되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NASB 성경에서는 이 뉘앙스를 잘 살려 Be imitators of God으로 번역하였습니다. 그런데 서구 문화에서 imitator(모방자)라는 단어는 뉘앙스가 다소 부정적입니다. 사실 우리말에서도 그러합니다. 그래서 본받는 자(Follow God’s example)로 의역하였습니다. 사실 이는 번역상 생기는 문제로 원문의 의미를 충분히 담지 못하고 있습니다. 원문은 모든 면에서 하나님을 최대한 모방하여 내가 있는 자리에서 사람들이 나를 통해 하나님의 향기를 맡도록 하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러면 성도들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될 수 있을까요? 이는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사랑하신 것 같이 그들도 서로 사랑 가운데서 행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어떻게 사랑하셨습니까? 그리스도께서는 본래 죄인이었던 그들을 사랑하사 그들을 위해 자기를 버리셨습니다. 자기를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습니다. 한 사람을 사랑하여 그를 위해 자기를 버리는 사랑은 최고의 사랑입니다. 자기애를 뛰어넘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러한 사랑을 하셨습니다. 성도들도 이 하나님을 본받아 자기를 뛰어넘는 사랑을 할 때 사람들이 그를 통해 향기로운 냄새를 맡게 됩니다. 하나님이 정말로 살아계시다는 것을 그를 통해 느끼게 됩니다. 요즘 우리 모임 가운데 다른 센터라 할지라도 사랑하고 뜨겁게 위해서 중보기도하는 분위기가 있습니다.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이지만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마치 내 일처럼 여기고 기도해주고 있습니다. 또 작고 연약한 센터를 여러모로 돕는 분위기가 있습니다. 어떤 이는 본인도 힘들고 어려움 가운데 있지만 더 큰 어려움 가운데 있는 지체를 돌아보고 사랑을 실천합니다. 이러한 모습을 보면서 참으로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계신 것을 느끼게 됩니다. 우리가 각자 먹고 살기 힘들고 취업하기 힘들고 결혼하기 힘든 가운데 있을지라도 나보다 더 어려움 가운데 있는 지체를 위해 시간을 내서 중보기도해주고 관심을 가지고 격려의 말을 해 준다면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임을 믿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무슨 순교자가 되는 큰 일을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삶의 작은 부분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삶의 지극히 작은 부분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함으로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3-4절을 보십시오.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조차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에게 마땅한 바니라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오히려 감사하는 말을 하라” 본문에서 특히 희롱의 말은 성적인 농담을 가리킵니다. 우리 사회에서 오랜 기간 직장 등에서 상사나 동료의 성적인 농담, 이른바 성추행으로 고통을 받은 이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심지어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도 이런 이들이 있었습니다. 성적인 농담을 하는 것은 참으로 하나님의 자녀답지 못한 모습입니다. 5절을 보십시오. “너희도 정녕 이것을 알거니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 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 그리스도인이라 하면서 직장과 사회에서 은밀한 가운데 음행의 죄에 빠져 있는 이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자들에게 여러 싸인을 통해 경고의 메시지를 주십니다. 그러한 경고를 받고도 계속하여 음행의 죄에 빠진 자들은 결과적으로 자신이 우상 숭배자임을 스스로 증명하고 있습니다. 곧 하나님보다 성적인 쾌락을 더 사랑한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받을 기업이 없습니다. 6-7절을 보십시오. “누구든지 헛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임하나니 그러므로 그들과 함께 하는 자가 되지 말라” 당시 에베소 교회 가운데 오늘날 구원파처럼 한 번 구원받았으면 그 이후 어떤 삶을 살아도 구원과는 관계가 없다는 주장을 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바울 사도는 이런 이들의 헛된 말에 속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이들에게 속는 자는 장차 그들이 받을 진노의 심판을 함께 받게 됩니다. 8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과거 그들은 총명을 잃고 무지 가운데 있었습니다. 또 아무도 그들을 보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은밀한 가운데 죄를 범했습니다. 그러므로 어둠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 되었습니다. 그들의 삶은 의와 진리로 가득하여 아무 부끄러울 것이 없습니다. 또한 사람들의 무지와 죄를 드러내는 역할을 합니다. 그들로 하여금 회개에 이르도록 돕습니다. 그러므로 빛입니다. 또한 빛되신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러므로 마땅히 빛의 자녀들처럼 행해야 합니다. 10절을 보십시오. “주를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 본문에서 시험해 보라는 것이 분별력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빛의 자녀의 가장 큰 관심을 어떻게 하면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가 입니다.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그의 가장 큰 기쁨입니다. 빛의 자녀의 삶은 어둠 가운데 있는 이들을 책망하여 그들도 마침내 회개에 이르도록 돕습니다. 14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너에게 비추이시리라 하셨느니라” 이 말씀은 본래 어둠 있는 자들, 영적으로 죽은 자들에게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서 잠자고 있는 이들에게도 해당됩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가 큰 위기에 빠져 있습니다. 교회마다 젊은이들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저출산과 맞물려 사라져가는 젊은이들은 한국 교회도 머지 않아 저 유럽 교회처럼 큰 교회가 바자회 장소로 이용되거나 기타 상업적 용도로 사용될 수 있는 위험성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된 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으나 잠자고 있는 이들이 너무 많아졌기 때문입니다. 이런 그들에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너에게 비추이시리라” 이 말씀을 듣고 우리 젊은이들이 잠자는 자들 가운데 깨어서 일어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리스도의 빛을 받아 죄로 어두운 이 세상을 밝히 비추는 빛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결론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단지 우리가 심판을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값없이 은혜로 주신 구원의 더 큰 목적은 우리가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어둠 가운데 빛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의 파도로 캄캄한 이 세상 가운데 어둠을 밝히는 빛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