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창세기 6강
홍수 심판과 구원의 방주
말씀/ 창세기 6:1-22 요절/ 창세기 6:13-14
“하나님이 노아에게 이르시되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포악함이 땅에 가득하므로 그 끝 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 너는 고페르 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만들되 그 안에 칸들을 막고 역청을 그 안팎에 칠하라”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홍수 심판과 구원의 방주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해 노아의 신앙의 핵심이 무엇이었는지, 그의 삶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주는지 발견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2절을 보십시오.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
본문에서는 두 가지 질문이 떠오릅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아들들은 구체적으로 누구를 가리키는가, 또 하나는 여자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 마음에 드는 여자와 결혼하는 것이 무엇이 문제인가 하는 질문입니다.
먼저 하나님의 아들들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본문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누구인가에는 몇 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그중 신빙성이 큰 견해들을 살펴보면 먼저는 이들이 하나님의 대리인으로서 당시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끼치던 사회 지도층이라는 견해입니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을 떠난 가인의 후예들과 달리 창세기 4:26절에서 나오는 것처럼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하나님을 섬겼던 셋의 후예들을 가리킨다는 견해입니다.
이 둘을 종합해보면 당시 사회적으로나 영적으로 영향력을 끼치던 사람들, 하나님을 섬기던 사람들이 타락하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타락의 시발점은 그들의 결혼관이었습니다. 먼저 그들은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았습니다. 우리가 길을 가다가 혹은 TV나 영화 등에서 어떤 사람이 매우 아름다운 것을 보고 정말 아름답구나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보았다는 표현은 단지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창세기 3장에서 뱀의 말을 듣고 설득이 된 여자가 선악과 나무를 보았을 때 그것을 먹고 하나님과 같이 되겠다는 탐욕, 곧 억제할 수 없는 강한 욕망에 사로잡혔습니다. 창세기 12:10-20절에서 기근으로 인해 아브람과 아내 사라과 함께 이집트로 내려가게 되었습니다. 그때 아브람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애굽 사람이 그대를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그의 아내라 하여 나는 죽이고 그대는 살리리니 원하건대 그대는 나의 누이라 하라” 아브람은 이집트 사람들이 그의 아내가 아름다운 것을 볼 때 탐욕에 사로잡혀 그를 죽이고 아내를 빼앗을 것을 염려하였습니다. 또 사무엘하 11:2절을 보면 다음과 같은 표현이 나옵니다: “저녁 때에 다윗이 그의 침상에서 일어나 왕궁 옥상에서 거닐다가 그곳에서 보니 한 여인이 목욕을 하는데 심히 아름다워 보이는지라” 여기에서 다윗이 목욕하는 여인을 보았고 그 여인이 심히 아름다워 보였다는 표현은 그녀를 향한 억제할 수 없는 강한 욕망과 탐욕에 사로잡혔다는 의미입니다.
본문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은 사람의 딸들이 신앙이 없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과 결혼하면 신앙생활을 하는데 많은 영향을 받으리라는 것도 부모님의 조언을 통해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딸들이 아름다운 것을 보았을 때 강한 욕망이 그들을 완전히 사로잡고 압도하였습니다.
오늘날 관점에서 보면 이것이 무엇이 문제인가 하는 의문이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 눈을 만족시키기 위해, 내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해 결혼하는 것이 결코 작은 문제가 아닙니다. 욕망은 채워지면 더 큰 욕망을 낳습니다. 미식가는 지금까지 맛보지 못한 새로운 맛,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한 차원 높은 맛을 찾아 온 세상을 돌아다닙니다. 내 안의 어떤 욕망을 채우는 것을 추구하는 사람도 결코 만족할 수 없는 끝없는 갈망이 있습니다. 그러나 본래 결혼은 눈을 만족시키고 욕망을 채우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결혼의 목적이 그런 것이라면 언제든지 이혼하고 몇 번이고 재혼하는 것이 허락되어야 합니다. 식당에 가는 주된 목적이 맛에 대한 욕망을 채우는 것이라면 언제든지 다른 식당으로 갈아탈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본래 하나님이 정하신 결혼 제도는 사랑 안에서 하나되는 연합의 비밀을 배우는 것입니다. 또 생명을 잉태하고 낳고 기르는 가운데 책임감을 배우고 희생과 헌신을 배우며 무엇보다 생명의 창조주이신 하나님 아버지를 깊이 체험하고 배우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이 복으로 주신 사명을 서로 도우며 함께 감당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결혼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약속입니다. 서로를 평생 배신하지 않으며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언제나 함께 하며 세상 끝날까지 사랑하겠다는 그 약속이 결혼에서 가장 중요합니다. 저는 결혼식에 참석할 때마다 “신랑과 신부는 기쁠 때나 슬플 때나 목자님이 영적인 투쟁을 잘 할 때나 힘들어서 이불 속에 들어가 뒹굴 때나 젊고 싱싱하여 아름다울 때나 나이가 들어 늙고 아프고 병들어 젊을 때의 아름다움이 다 사라졌을 때나 변함없이 사랑하며 동역하시겠습니까?”라는 질문에 신랑과 신부가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라고 서약하는 순간 무한한 감동을 느낍니다. 그리고 이 가정이 하나님 앞에서 맹세한 이 약속 위에 서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므로 결혼 생활은 사랑에 대한 약속과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헌신하고 희생하는 것을 통해 약속의 하나님, 신실하신 하나님을 배우는 과정입니다. 그러나 노아 시대에는 이러한 결혼관이 완전히 무너졌습니다. 예전에 서구적인 사고를 가진 분과 대화를 한 적이 있는데 그는 이혼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내가 행복하지 않은데 하나님도 내가 행복하기를 원하시는데 왜 행복하지 않은 결혼생활을 지속해야 하는지 물었습니다. 그와 대화하면서 그의 말이 뭔가 좀 이상하긴 하지만 구체적으로 뭐가 잘못된 것인지 정확하게 집어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공부하고 이것이 정확히 노아 시대 사람들의 결혼관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이 시대 사람들은 노아 시대 사람들처럼 내가 행복하기 위해 결혼합니다. 내가 기쁘고 내가 만족하기 위해 결혼합니다. 이 과정에서 서로 많은 상처를 주고 받습니다. 또한 자녀들도 깊은 상처를 받습니다.
3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본문에서 육신은 원문상 ‘바사르’로 고깃덩어리(flesh)를 의미합니다. 그들은 영이신 하나님과 교통하며 살아가는 영적인 존재가 아니라, 본능적이고 육적인 욕망을 채우기 위해 살아가는 고깃덩어리같은 존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들과 함께 하실 수 없으셨고 그들의 날을 120년으로 제한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크게 두 가지로 해석됩니다. 먼저는 지금까지 900년 정도로 길었던 사람의 수명을 120년으로 확 줄였다는 의미로 해석합니다. 연쇄 살인범과 같은 악인들의 수명이 900년이어서 잡히지 않고 살아있다면 세상은 정말 끔찍한 곳이 되었을 것입니다. 또 다른 해석은 120년 후에 홍수심판을 결정하심으로 120년간 회개할 기회를 주셨다는 해석입니다. 두 해석을 종합해보면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어떤 한계를 정해주심으로 그들의 삶이 근본적으로 변화되기를 원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얼마 전 사람은 왜 나이가 들수록 시간의 흐름을 빠르게 느낄까 하는 것에 관한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 글을 쓴 사람의 이론에 의하면 사람은 자기 나이에 비례해서 시간의 흐름을 느낀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태어난 지 하루가 된 아기는 하루가 자기 인생의 전부이기 때문에 하루를 엄청나게 길게 느낀다는 것입니다. 10살 된 아이는 10년이 자기 인생의 전부이기 때문에 10년을 인생을 한 번 사는 것처럼 길게 느낍니다. 30살이 되면 30년은 더 살아야 그런 느낌을 가질 수 있고 50살이 되면 50년은 더 살아야 동일한 느낌을 갖는다는 것입니다. 실제 경험상으로도 어렸을 때에는 주 단위로 살다가(벌써 월요일이네) 나이가 들수록 달 단위로 살고(벌써 4월이네), 더 나이가 들면 계절 단위(벌써 여름이네) 더 나아가 해 단위로 살게 됩니다(벌써 2019년이네). 이처럼 사람의 삶이 생각보다 짧다는 느낌은 인생을 자기 멋대로, 정욕대로 사는 것을 어느정도 제한해 줍니다. 또한 이 삶에 분명히 끝이 있다는 사실은 내 삶이 끝나기 전 무언가 의미와 가치를 남기고 싶다는 소원을 갖게 만듭니다.
4-5절을 보십시오. “당시에 땅에는 네피림이 있었고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에게로 들어와 자식을 낳았으니 그들은 용사라 고대에 명성이 있는 사람들이었더라”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 사이에 자식이 생겼는데 그들 중 용사들이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용사란 전쟁 용사를 의미합니다. 그들은 키가 크고 근육질의 몸매를 가졌습니다. 그들은 전쟁터에 나가 사람을 많이 죽였습니다. 본문에서 명성이 있었다는 것은 그들의 이름이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졌다는 의미입니다. 창세기에서 ‘이름’은 매우 중요한 주제입니다. 창세기 11장을 보면 사람들이 탑을 쌓아 자기들의 이름을 내고자 하였습니다. 12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름없이 살던 아브람을 부르셔서 그의 이름을 크고 위대한 이름으로 만들어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사람에게는 자기 이름을 알리고자 하는 강한 소원이 있습니다. 이름을 알리는 것은 그만큼 내가 존재하는 이유가 있고 가치가 있다는 의미가 되기 때문입니다. 본문이 기록된 당시에는 이름을 알릴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 전쟁 용사가 되는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였는가가 명성의 크기를 좌우했습니다. 오늘날은 워렌 버핏처럼 돈을 많이 버는 사람이 세계적인 명성을 얻습니다. 얼마 전 아프리카 대륙 최고의 한 부자가 나이지리아 출신 사업가인데 자기가 얼마나 돈이 많은가를 피부로 체험하기 위해 현금 1천만달러(114억)을 인출하여 자기 집에 쌓아두고 하루종일 감상하였다고 합니다. 돈을 정당한 방법으로 버는 것에 대해서는 성경도 반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가 사는 나이지리아와 아프리카에는 기근으로 죽어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도 세이브 더 칠드런에 약간의 기금을 내고 있는데 단돈 3천원이면 한 아이를 죽음에서 구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가 방에 쌓아둔 돈을 감상하고 있는 바로 그 시간 나이지리아와 여러 아프리카 나라들 가운데 우유 한 병 살 돈이 없어 굶어죽는 아이들이 수없이 있었을 것입니다. 노아 시대 용사들의 명성이 수많은 사람의 피와 희생 위에 쌓아진 것처럼 이 시대 부자들의 명성 또한 수많은 이들의 아픔과 희생과 눈물 위에 쌓여져 있습니다.
5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하나님은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한 것을 보셨습니다. 또 그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셨습니다. 이 말씀만 보면 구체적으로 어떤 죄악이 가득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11절과 13절을 보십시오. 이 말씀을 보면 그 죄악은 구체적으로 포악함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포악함은 원문상 ‘하마스’로 곧 폭력(violence)을 가리킵니다. 당시 온 세상에 폭력이 가득했습니다. 네피림을 비롯한 전쟁 용사들은 이전보다 더 유명해지기 위해 전쟁을 일으키고 사람들을 죽였습니다. 남자들은 여자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 만족을 얻기 위해 결혼했다가 욕망이 충족되지 않았을 때 여자를 버리거나 바람을 피우는 방식으로 여자들의 마음에 깊은 상처를 주는 정서적 폭력을 행사했습니다. 아이들은 힘없고 연약해 보이는 아이를 집단으로 괴롭히거나 학대함으로 폭력을 행사했습니다. 학대당한 아이가 심지어 죽어도 처벌을 피할 궁리만 할 뿐 뉘우치거나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돈있고 힘있는 자들은 돈없고 힘없는 자들을 괴롭힘으로 폭력을 행사했습니다. 정치 권력을 가졌거나 돈을 가진 자들은 어떤 나쁜 짓을 해도 그들을 수사해야 할 이들이 봐주고 덮어주고 감싸 안아 줌으로 처벌을 받지 않았습니다. 이에 비해 힘없고 돈없는 이들은 억울한 피해를 당해도 독성 제품을 판매한 악덕 기업으로 인해 자녀가 죽고 가정이 파괴되어도 아무런 도움을 받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폭력이 온 세상을 덮었습니다.
이러한 노아 시대를 보면 어떻게 오늘날 이 시대와 그렇게 똑같은지 놀라게 됩니다. 그러나 놀라는 우리도 사실은 알게 모르게 많은 폭력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가정에서 자기 자존심을 내세우기 위해 가족들에게 언어 폭력을 행사합니다. 직장에서 상사는 자기가 일을 편하게 하기 위해 부하 직원에게 언어 폭력을 행사합니다. 본문에서 포악함이 가득한 세상 사람은 다른 누군가가 아닌 바로 내 자신입니다.
6-7절을 보십시오.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이르시되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폭력이 난무한 세상을 보신 하나님은 땅 위에 사람을 지으셨음을 한탄하셨습니다. 이는 원문상 후회하셨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하신 일을 결코 후회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성경 저자가 이런 표현을 사용한 것은 사람들이 자행하는 폭력이 그와같이 하나님의 마음에 깊은 슬픔과 근심, 아픔을 가져다 주었음을 의미합니다. 깊은 슬픔과 근심, 아픔 가운데 고통하시던 하나님은 마침내 자신이 창조한 사람과 더불어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전부 쓸어버리기로 결심하셨습니다.
8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8절의 ‘그러나’는 깊은 어둠 가운데 한 줄기 빛과 같은 ‘그러나’입니다. 본문은 이런 시대 가운데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다는 표현은 원문상 “노아는 하나님의 눈에 은혜를 발견하였다(Noah found favor in the eyes of the LORD.)”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는 노아를 보시는 하나님의 눈에 은혜가 가득했다는 의미입니다. 이는 노아를 보시는 하나님의 눈이 마치 너무도 사랑스러운 자녀를 보는 부모의 눈과 같았다는 의미입니다.
9절을 보십시오. “이것이 노아의 족보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9절은 노아가 하나님의 마음에 기쁨을 가져다 준 이유가 무엇인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먼저 노아는 의인이었습니다. 의인이란 하나님과 바른 관계성을 가진 사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성은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성은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나의 삶을 지켜보고 계신다는 것을 인정하는데서부터 시작합니다. 당시 사람들이 그와같이 포악하게 된 것은 그들의 삶 가운데 살아계신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았기 대문입니다. 그러나 노아는 범사에 하나님이 살아계시며 자기를 보고 계신다는 사실을 인정했습니다.
다음으로 노아는 당대에 완전한 자였습니다. 이는 그가 완벽했다는 뜻이 아니라, 그 시대에 하나님과 바른 관계성 가운데 살아가는 유일한 사람이었다는 뜻입니다. 또한 그는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것은 하나님과 삶을 함께 살았다는 의미입니다. 그는 삶의 모든 일 가운데 항상 기도를 통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찾았고 그 뜻을 순종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13-14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노아에게 이르시되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포악함이 땅에 가득하므로 그 끝 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 너는 고페르 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만들되 그 안에 칸들을 막고 역청을 그 안팎에 칠하라” 하나님은 노아에게 이 세상에 심판이 정해졌음을 알려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심판 가운데 구원을 얻을 길을 알려주셨습니다. 그것은 고페르 나무로 노아를 위해 방주를 만드는 것입니다. 그 방주 안에는 칸들을 막고 역청을 그 안팎에 칠해야 합니다.
15-16절을 보십시오. “네가 만들 방주는 이러하니 그 길이는 삼백 규빗, 너비는 오십 규빗, 높이는 삼십 규빗이라 거기에 창을 내되 위에서부터 한 규빗에 내고 그 문은 옆으로 내고 상 중 하 삼 층으로 할지니라” 방주의 길이는 137미터, 너비 22.8미터, 높이 13.7미터이고 3층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17-19절을 보십시오. “내가 홍수를 땅에 일으켜 무릇 생명의 기운이 있는 모든 육체를 천하에서 멸절하리니 땅에 있는 것들이 다 죽으리라 그러나 너와는 내가 내 언약을 세우리니 너는 네 아들들과 네 아내와 네 며느리들과 함께 그 방주로 들어가고 혈육 있는 모든 생물을 너는 각기 암수 한 쌍씩 방주로 이끌어들여 너와 함께 생명을 보존하게 하되” 하나님은 홍수 심판을 통해 세상에 가득한 죄를 물로 쓸어버릴 계획을 세우셨습니다. 그러나 노아와는 언약을 세우셨습니다. 그 언약은 하나님이 지정하신 방식대로 방주를 만들고 그 방주 안에 들어갈 때 장차 임할 홍수 심판으로부터 생명을 보존할 수 있다는 약속의 말씀이었습니다.
22절을 보십시오. “노아가 그와 같이 하여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노아는 하나님이 주신 언약의 말씀, 약속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 증거로 하나님이 명하신 방식 그대로 방주를 지었습니다.
노아가 방주를 짓는 것은 결코 만만한 일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한 번도 온 세상을 휩쓰는 홍수를 본 적이 없었습니다. 창조를 믿는 과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홍수 심판 이전에는 기후가 달라 오늘날처럼 장대비가 오거나 장마가 지는 일이 없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아무리 폭력을 저지르고 악행을 저질러도 수사관들을 돈으로 매수하면 큰 탈 없이 넘어갔습니다. 하나님의 심판같은 것은 없다고 느꼈습니다. 저렇게 돈과 권력의 힘을 믿고 아무 문제 없이 악행을 저지르며 잘 사는 것 같은 사람을 볼 때 하나님도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온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의 심판 같은 것은 없다, 하나님도 없다 이렇게 생각하는 가운데 혼자서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을 믿고 방주를 짓다는 것이 얼마나 쉽지 않은 일이었을까요. 방주를 만들기는커녕 다들 유흥지로 놀러가는 주일에 혼자 예배드리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입니다. 노아는 가족들을 중심으로 예배를 드렸는데 주일 메시지 제목은 “장차 임할 하나님의 심판” “구원의 방주”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 “이 시대를 본받지 말라” “믿음으로 결혼해야 하는 이유” “신앙적 자녀교육” 등이었습니다. 노아는 이러한 제목을 말씀을 힘있게 선포하고 맛있게 점심식사를 한 후 오후에는 모든 가족들이 깊이있는 소감을 쓰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발표하는 가운데 서로 배우고 힘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이 되면 힘차게 방주를 지었습니다. 본문에 기록되어 있지 않아서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아마도 방주를 짓는 것 자체보다 방주 짓는 것을 비웃고 조롱하고 방해하는 이들로 인해 더 큰 어려움이 있었을 것입니다. 아침이 되면 방주에 사람들이 스프레이로 조롱의 글을 써 놓고 애써 구해놓은 역청에 오물을 뿌려놓기도 하였습니다. 방주 건설 현장을 지나갈 때마다 사람들은 미친 영감, 미친 가족이라며 조롱의 말을 하였습니다.
한 해 한 해 세월이 흐르면서 방주는 점차 그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방주 높이 13미터는 고층 빌딩 건물처럼 높았고 무엇보다 방주 길이 137미터는 대형 고층 빌딩이 여러 개 다닥다닥 붙어있는 것같은 웅장한 모습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방주를 보면서 이것은 진짜로 미친 짓이든지, 아니면 정말 저 영감이 하나님으로부터 뭔가 듣기는 들었는 모양이다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은밀한 가운데 노아에게 다가와 장차 임할 심판과 구원에 대해 좀 더 자세히 듣고 싶다는 말을 하였습니다. 노아는 이런 그들을 1대1 성경공부에 초청했습니다. 그리고 주일예배에도 와보도록 하였습니다. 노아는 드디어 양을 얻었다며 행복해 했습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이들과 연락이 끊겼습니다. 나중에 알고보니 친구들의 압력(peer pressure)으로 인해 1대1 성경공부를 그만 둔 것이었습니다. 노아는 크게 아쉬워했습니다. 그러나 그 영혼을 하나님께 의탁하고 다시 힘차게 망치질을 시작했습니다.
이상에서 방주를 완성한 노아의 신앙의 핵심은 장차 임할 하나님의 심판의 경고와 그 가운데 구원의 길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과 언약을 세우고 그 언약을 통해 주신 약속의 말씀을 믿고 그 믿음에 기초해서 사는 것은 창세기 전체, 아니 성경 전체의 핵심적인 내용입니다. 우리가 세상 가운데서도 무언가를 믿고 그 믿음을 기초로 사는 부분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돈은 엄밀히 따지면 종이 조각에 불과하지만, 또 요즘 경우에는 내 통장 잔고에 찍힌 숫자에 불과하지만 한 달 간 열심히 일한 대가로 돈을 받습니다. 이는 돈을 발행한 정부를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러한 신뢰는 언제든지 돈의 가치를 구매를 통해 직접 확인할 수 있으므로 그렇게 어려운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어떤 이들은 정부를 믿지 못하기 때문에 자기가 가진 돈이 상당량을 금으로 바꾸기도 합니다. 하지만 금에 과연 절대적인 가치가 있는가, 그 가치를 신뢰하고 믿을 수 있는가 생각해보면 어려운 문제입니다. 또 사람들은 오늘이 존재했던 것처럼 내일도 여전히 존재할 것이라고 가정하고 혹은 믿고 살아갑니다. 거의 조금도 의심이 없습니다. 그러나 내일 아니 5분 후에 내가 살아서 숨쉬고 있을 것이라는 것을 절대적으로 보장해주는 것은 사실 없습니다. 하지만 살아있을 것이라고 믿고 살아갑니다. 이는 지금까지 수십년간 큰 문제 없이 숨쉬고 살았다는 경험이 뒷받침해주기 때문에 그러한 믿음을 가지는 것은 크게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온 세상에 대한 홍수 심판에 대한 경고의 말씀을 믿고 그 믿음에 기초해서 한 평생을 방주 짓는 일에 헌신한다는 것은 큰 믿음이 필요합니다. 노아가 그와 같이 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평소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노아는 지극히 작고 사소한 문제들을 놓고 하나님께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을 구했습니다. 그때마다 신기하게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인도해 주셨습니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 노아는 홍수 심판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도 믿을 수 있었습니다. 방주를 짓는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의 조롱과 비웃음 반대와 방해가 있었지만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음으로 그 모든 어려움을 다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배우는 노아의 신앙의 핵심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시대 또한 노아 시대처럼 폭력이 가득한 것을 보십니다. 아동학대, SNS 폭력, 힘과 권력을 가진 자들이 행하는 폭력, 일상에서 자기 편의를 위해 자행되는 폭력을 보십니다. 이러한 폭력이 어느 수위를 넘어서는 순간 하나님은 온 세상을 심판하십니다. 베드로 후서 3:6-7절은 다음과 같은 준엄한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그 때에 세상은 물이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보호하신 바 되어 경건하지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 그러나 사랑의 하나님은 그러한 가운데 구원의 길을 예비하여 주셨습니다. 요한복음 3:16-17절에서 하나님은 다음과 같이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이 약속이 말씀은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영접하는 모든 이에게 해당되는 하나님이 주신 약속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하신 약속을 반드시 지키십니다.
오늘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믿고 따르는 것은 노아 시대 방주를 짓는 것처럼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닙니다. 수많은 조롱과 멸시, 비난과 방해가 따릅니다. 오늘날 영국에서는 기독교인이라고 공개적으로 선언하면 수많은 실제적인 손해를 본다고 합니다. 거의 사회 생활에서 매장되는 분위기라고 합니다. 우리나라도 점차 그런 방향으로 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어려움과 조롱과 반대와 실제적인 손해를 이겨낼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이 주신 경고의 말씀과 구원의 약속의 말씀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참으로 믿는 것입니다. 노아와 그의 삶은 말세지말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참으로 귀한 본이 됩니다. 우리가 노아처럼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믿고 따르는 삶을 끝까지 삶으로 하나님의 심판 가운데 생명을 보존하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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