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요한복음 11강
선한 목자
말씀 / 요한복음 10:1-42 요절 / 요한복음 10:11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오늘 본문은 9장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9장에서 예수님은 태어날 때부터 맹인이었던 사람의 눈을 열어주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그 사건을 보고도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자는 누구든지 출교시키겠다고 결의하였습니다. 맹인이었던 사람은 출교당할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하게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였습니다.
10장에서 예수님은 동일한 사건을 체험하고도 왜 어떤 이들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고백하는데 비해 어떤 이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고 따르지 않는지 그 이유를 비유를 통해 말씀해 주십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이 우리 인생들에게 어떤 분이 되시는지 말씀해주십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 인생의 선한 목자되신 예수님을 새롭게 만나는 귀한 은혜의 시간 되기를 기도합니다.
먼저 1-5절은 양과 목자의 비유입니다. 1-2절을 보십시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문을 통하여 양의 우리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의 목자라” 당시 팔레스타인에서는 낮에는 각 가정에서 양을 돌보다가 밤이 되면 마을에서 공동으로 운영하는 양의 우리에 자기 양들을 맡겨두었습니다. 양의 우리는 도둑이나 늑대의 공격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높은 돌담으로 되어 있었고 마을 청년 중 사람을 고용하여 밤새 우리를 지키는 문지기로 세웠습니다. 아침이 되면 목자가 문앞으로 왔습니다. 목자의 얼굴을 익히 알고 있는 문지기는 문을 열어주었습니다. 목자는 우리 안으로 들어가서 자기 양의 이름을 하나씩 인격적으로 불렀습니다. 그러면 양들은 그 음성을 알아듣고 밖으로 나왔습니다. 양이 전부 다 나왔는지 확인한 후 목자는 양들 앞에 서서 그날 가기로 계획된 푸른 초장으로 양들을 인도했습니다. 양들은 목자의 음성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목자의 뒤를 졸졸 따라갔습니다.
이상에서 합법적인 목자는 반드시 문을 통해 양의 우리에 들어갑니다. 만약 양의 우리에 문을 통해 들어가지 않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가 있다면, 예를 들어 담을 타고 올라가 지붕을 뜯어내고 들어가거나 담 밑으로 땅굴을 파서 기어들어가는 이가 있다면 그는 틀림없이 절도이거나 강도입니다. 절도는 남의 것을 몰래 훔치는 자이고 강도는 남의 재산을 강탈해 가는 자입니다. 강도는 놀란 양이 비명을 지를 것을 예상하고 입을 틀어막거나 아니면 한 대 때려 기절시킨 후 양을 밖으로 빼냅니다.
6절을 보면 사람들은 예수님의 비유가 무슨 뜻인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7-18절에서 예수님은 다시 비유의 의미를 상세하게 풀어 설명해 주십니다.
7-8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먼저 예수님은 자신이 양의 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문은 어떤 장소에 들어가는 합법적인 경로입니다. 또한 문은 안식과 안정과 생명의 상징입니다. 문이 있다는 것은 그 안에 무언가 소중한 것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안에 별 뭐가 없으면 문도 허름하고 자물쇠도 없습니다. 반면 문이 견고하고 아무나 함부로 들어갈 수 없다면 그 안에 뭔가 소중한 것이 있음을 의미합니다. 문되신 예수님 안에는 죄가 없습니다. 죄가 없으므로 죽음도 없습니다. 그곳은 독사가 어린양과 뛰놀고 사자와 어린 양이 함께 뒹구는 기쁨의 나라, 평화의 나라입니다. 그곳에는 핵을 들고 위협하는 김정은도 없습니다. 몰래 썩은 물을 하수로 배출하는 악덕 기업인도 없습니다. 사람들은 그런 나라가 있다는 것을 몰라서 그렇지 있는 것을 안다면 누구나 그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생애 최대의 소망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나라로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문이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 자기의 죄를 고백하고 죄사함받아 깨끗하게 거룩하게 된 영혼들만이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9-10절을 보십시오.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문되신 예수님을 통해 그 나라에 들어간 자는 구원을 받습니다. 또한 들어가며 나오며 생명의 꼴을 얻습니다. 들어가며 나오며 생명의 꼴을 얻는다는 것은 세상의 여러 어려움 가운데 주님이 주시는 생명의 말씀으로 힘을 얻고 믿음이 더욱 성장하며 주님을 더 깊이 알아간다는 의미입니다. 이 주님이 오신 목적은 양들이 생명을 얻고 더 풍성히 얻는 것입니다. 이에 비해 도둑이나 강도는 그 목적이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것입니다.
당시 팔레스타인에서 목자의 인도함을 받지 않고 들에서 방황하는 이런 양들을 전문적으로 노리는 절도와 강도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들은 순식간에 양의 입을 틀어막고 준비한 자루에 양을 집어넣은 후 입구를 단단히 묶고 유유히 사라집니다. 그들이 이렇게 하는 목적은 분명합니다. 그들은 윤빛이 나는 양의 털을 깎아서 시장에 내다 팝니다. 양의 젖을 짜서 치즈를 만들고 마침내 더 이상 쓸모가 없다고 판단되면 죽인 후 그 고기를 내다 팝니다.
오늘날 자기가 구원의 문인척 하면서 양들을 유인하여 죽이는 대표적인 절도요 강도는 신천지입니다. 통계에 의하면 현재 매달 2,000명의 영혼들이 신천지에 미혹되고 있다고 합니다. 그들은 외롭고 친구가 필요한 이들에게는 친구로 접근하여 같이 놀러다니고, 취업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힌 이에게는 관심분야의 전문인을 소개시켜 주어 도움을 주고, 교회에 실망한 이들에게는 기존 교회와 차원이 다른 탁월한 비유해석이 담긴 성경공부를 시켜주겠다고 유혹합니다. 그리고는 마침내 교주 이만희를 주요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영접하도록 하여 그 영혼을 죽음과 멸망으로 몰아갑니다. 이러한 신천지의 배후에는 신천지의 교세를 이용해 여러가지 이익을 얻고자 하는 이들도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대적자인 사탄이 있습니다. 그 결정적인 증거는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신 것을 거부하고 이만희가 그리스도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이만희의 문으로 들어가는 자들은 일정 기간 영혼의 만족을 얻고 꼴을 얻을 수 있을지 몰라도 가장 통통하게 살쪘을 때 도살장으로 끌려가게 됩니다.
11-13절을 보십시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물어 가고 또 헤치느니라 달아나는 것은 그가 삯꾼인 까닭에 양을 돌보지 아니함이나”
자신이 구원의 문임을 선포하신 예수님은 이제 “나는 선한 목자”라고 선포하십니다. 먼저 예수님이 목자가 되신다는 것은 우리 인생이 양과 같이 돌봐주는 목자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떠난 인생들을 양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53:6절은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성경이 하나님을 떠난 인생들을 양에 비유하고 있는 것은 참으로 적절합니다. “양과 목자”라는 책의 저자로 유명한 필립 켈러는 동아프리카에서 태어나 8년간 목자 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경험에 기초하여 어떤 점에서 우리 인생들이 양과 유사한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에 의하면 양은 일반적으로 생후 100일 이내에 몸무게가 45킬로그램이 되기까지 자란다고 합니다. 양이 이렇게 잘 자라기 위해서는 푸르고 기름진 꼴을 충분히 잘 먹어주어야 합니다. 하지만 먹는다고 해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먹은 꼴을 다시 되새김질해주어야 합니다. 양이 꼴을 잘 먹지 못하거나 꼴을 먹었지만 그것은 충분한 시간적 여유를 가지고 되새김질할만한 조용하고 평화롭고 편안한 장소를 찾지 못하면 양은 금세 쇠약해지고 여러가지 질병에 걸리게 됩니다. 일반적으로 대부분의 동물들은 자기에게 필요한 음식을 스스로 알아서 찾아먹습니다. 그런데 양에게는 그런 능력이 없습니다. 양은 아무리 그곳에 꼴이 없어도 습관적으로 가던 곳을 늘 갑니다. 목자가 양을 돌보지 않으면 양떼들이 늘 갔던 초장을 반복하여 감으로 그 길이 움푹 패이고 또 초장의 뿌리까지 다 드러나 상하게 되어 그 초장은 얼마 후 황무지로 변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목자는 가을과 겨울철에는 추운 겨울에도 풀이 있는 저지대 초장으로, 봄 여름이 되면 점차 높은 곳에 풀이 있으므로 고지대 초장으로 양을 인도합니다. 그런데 그 고지대로 올라가는 과정이 매우 험난한다고 합니다. 시편 23편을 보면 다윗이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이라고 하였는데 고지대로 올라가는 과정이 자칫 발을 잘못 디디면 천길 낭떠러지로 떨어지고 갑작스럽게 비나 눈보라가 몰아닥치면 양이 폐렴 등에 걸려 죽을 수도 있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와 같습니다.
이러한 양의 속성을 보면 우리 인생들과 정말 유사합니다. 우리 인생들도 양처럼 꼴이 필요합니다. 사람은 뭔가 정신적으로, 또 영적으로 만족이 되고 채워져야 살아갈 수 있습니다. 양이 꼴을 되새김질하는 것처럼 사람은 때마다 내 삶에 의미가 있다고 느껴지고 뭔가 영적으로 만족이 되어야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한 번 만족을 경험한 대상에 대한 이상한 고집과 집착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스마트폰을 통해 뭔가 정신적인 만족을 한 번 경험하면 앉으나 서나, 하루종일 스마트폰만 쳐다보다가 침대에 누워 잠들기 직전까지 스마트폰을 봅니다. 아침이 되면 스마트폰에서 울리는 알람을 듣고 스마트폰을 켜면서 하루를 시작합니다. “스마트폰은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스마트폰이 나를 푸른 풀밭으로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스마트 폰이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최신 정보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외로운 골짜기를 홀로 다닐지라도 전혀 심심하지 않을 것은 최신 스마트폰이 늘 나와 함께 있음이라”라고 흥얼거립니다.
또한 우리 인생은 천길 만길 낭떠러지 길을 기어 올라가는 여정과도 같습니다. 또 그런 위험과 어려움 가운데 얼마나 자기 스스로를 지킬 힘과 능력이 없는지 처절하게 깨닫게 됩니다. 어떤 이는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는 큰 어려움이 없이 자랐습니다. 그러나 재수 삼수를 하면서 삶이 결코 만만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어떤 청년은 어떻게 대학은 갔으나 취업하는 과정에서 삶이 만만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어떤 이는 자녀 문제로, 어떤 이는 갑작스런 중한 질병이나 큰 사고로 인해 인생의 벼랑 끝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양이 결코 스스로 힘으로 자기 자신을 구원할 수 없는 것처럼 양과 같은 우리 인생들도 죄문제, 인생의 고난과 역경의 문제 앞에서 자기 스스로를 구원할 힘이 없습니다. 양들이 시력이 좋지 못해 앞을 잘 분간하지 못하는 것처럼 우리 인생들도 한치 앞을 알지 못합니다. 당장 내일 일을 알지 못합니다. 양이 한 번 뒤집어 지면 스스로 힘으로 못일어나는 것처럼 우리 인생들도 한 번 넘어지면, 미투 운동으로 넘어지면, 죄 문제가 온 천하에 드러나면 다시 일어나지 못합니다.
그러나 양은 다른 것은 다 부족하지만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는 것에는 천재적인 재능이 있습니다. 양은 목자의 음성을 단 한 마디만 들어도 아 이 분이 내 목자님이시구나. 이 분이 정말 나를 사랑하시는 분이구나 느낍니다.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됩니다. 본능적으로 느낍니다. 양은 한 번 그가 목자인 것을 느끼면 자신의 모든 것을 그에게 맡깁니다. 이와같이 우리 인생들도 연약하지만 목자님의 음성을 알아보는 데에는 천부적인 재능이 있습니다. 우리 인생들은 정말 나를 사랑하시는 목자님을 찾아 광야 길을 유리 방황하는 양의 여정과도 같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우리에게 내가 양의 목자라고 하십니다. 양들의 이름을 알고 그들의 이름을 불러주시며 그들의 앞에 서서 그들을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시는 목자라고 하십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목자들 중에서도 ‘그 선한 목자’이십니다. (원문상 정관사가 있음) 이는 예수님이 유일하고 참된 목자, 그 선한 목자라는 의미입니다. 선하다는 것은 ‘good’으로서 먼저 이는 목자로서 자세가 아주 훌륭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필립 켈러의 책을 보면 그의 이웃 목장의 관리인은 월급을 받고 일하는 목자로서 양들의 상태에 무관심하였습니다. 불쌍한 양들은 황폐한 들과 메마른 초장에서 꼴을 찾아야 했습니다. 특히 겨울이 되면 새기를 밴 암양들에게 필요한 건초와 곡식이 부족하였습니다. 그 양들이 마실 물은 여러 해충과 세균이 가득한 더러운 흙탕물이었습니다. 그 흙탕물을 마시고 양들은 배탈이 나거나 콜레라에 걸려 죽어갔습니다. 이에 비해 저자는 훌륭한 자세를 가진 목자였습니다. 그는 겨울이 되면 차가운 바람이 들어오지 않도록 우리를 아늑하게 만들었습니다. 여름철이 되어 코파리가 양의 코의 점막에 알을 낳지 못하도록, 그 파리의 유충이 양의 머리 속에서 악성 염증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한 마리도 빠뜨리지 않고 기름을 발라 주었습니다. 양은 한 번 뒤집어지면 절대로 스스로 일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양이 혹시 뒤집어지지 않았는지 항상 살폈습니다. 한 번은 일이 있어 목장을 비우게 되었는데 자녀에게 용돈을 주면서 뒤집힌 양이 없는지 살펴보도록 하였습니다. 또 그는 이른 봄, 햇볕에 눈이 다 녹기도 전에 양떼보다 앞서 거칠고 험산 산지로 예비 답사를 떠났습니다. 특히 양들에게 치명적인 독성을 가진 풀들 예를 들어 백합 잎사귀처럼 생긴 캐머스라는 풀이 있는데, 사랑스러운 양들이 그 풀을 먹고 죽어갈 것을 생각하며, 그 풀을 하나도 남김없이 뽑는 지루하고 힘든 일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요한복음 말씀을 공부했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말씀을 보면 예수님이 정말 선한 목자이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3장을 보면 예수님은 인간적인 의지와 성실과 능력을 의지하여 많은 노력을 했지만 하나님 나라를 보지 못한 지성인 니고데모를 대화하며 도우셨습니다. 그가 자기 지식과 이성, 편견의 한계에 갇혀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할 때 때로는 책망하기도 하시면서 그와 함께 밤 늦게까지 지성과 영혼의 대화를 나누셨습니다. 4장을 보면 몹시 덥고 목마르고 피곤한 가운데서도 영혼이 목마른 사마리아 여자에게 영생의 샘물에 대해 알려주셨습니다. 5장을 보면 자리에 누워 원망과 불평만을 일삼던 38년 된 병자에게 예수님을 의지하여 스스로 일어나 자리를 들고 걸어가도록 도와주셨습니다. 8장에서 간음의 죄를 짓고 죽음의 문턱에 이른 여인을 바리새인들과 무리들로부터 구원하여 주시고 새 삶의 기회를 주셨습니다. 9장에서는 태어날 때부터 소경으로 태어난 이에게 그의 삶이 누구의 죄 때문이 아니라 그의 삶을 통해 하나님이 나타내기 원하시는 선한 뜻이 있다고 말씀하여 주심으로 운명적인 그의 삶에 밝은 소망의 빛을 비추어 주셨습니다.
저는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영접하기 전 성경을 공부하면서 귀신들린 한 청년을 살리기 위해 2,000 마리의 돼지떼를 희생하신 예수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어렸을 적 섬마을에 있으면서 동네마다 귀신 들린 청년이 있는 것을 보았고 그런 청년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힘을 가지고 있는지, 또 괴성을 지르며 벗은 몸으로 마을 처녀들 사이를 지나다니는지 보았기 때문에 그 말씀이 매우 실감이 났습니다. 당시 동네 사람들은 그런 귀신들린 청년을 위해 굿을 해주기도 하고 이렇게 저렇게 해 보았지만 문제가 잘 해결되지 않아 매우 골치아파하고 그 청년이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사고 등으로 없어지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바로 그런 청년을 위해 2,000 마리의 돼지떼를 희생하셨습니다. 이 예수님은 저의 마음에 깊은 감동을 주었고 비록 아직은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믿는 단계에는 이르지 못했지만 이 예수님이 한 영혼을 온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시는 선한 목자이신 것을 조금은 느낄 수 있었습니다.
다음으로 선한 목자라는 것은 그 동기가 양을 향한 사랑임을 의미합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선한 목자와 삯꾼 목자를 대비하여 선한 목자가 어떤 목자인가를 말씀하십니다. 삯꾼 목자의 궁극적인 동기는 돈을 벌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만약 이리가 와서 양들을 헤칠 때 자기 목숨이 위험하다 싶으면 양들을 버리고 도망갑니다. 이에 비해 선한 목자는 목자생활하는 동기가 양들을 향한 순수하고도 절대적인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이리가 왔을 때 양들을 보호하고 살리기 위해 자기 목숨을 걸고 싸웁니다.
예수님은 우리 인생들이 양처럼 어디로 가야 꼴을 얻을 수 있을지 알지 못해 방황하는 것을 보셨습니다. 무엇보다 죄의 늑대와 사탄의 이리가 양들의 목을 날카로운 이빨로 물고 영원한 죽음과 멸망의 어두운 곳으로 끌고 가는 것을 보셨습니다. 끌려가는 양들의 눈에서 두려움과 절망에 가득한 눈물을 보셨습니다. “제발 누가 나를 건져주세요, 제발 누가 나를 살려주세요” 하는 절박한 음성을 들으셨습니다. 죄의 늑대와 사탄의 이리는 양을 놓아달라는 목자의 요청에 이 양은 죄를 지었기 때문에 내가 끌고 갈 합법적인 권한이 있다고 말하였습니다. 목자가 그 양을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목자가 양이 받아야 할 죄의 형벌을 대신 받는 것 뿐이었습니다. 선한 목자 예수님은 양들을 자기 생명보다 더 사랑하셨기 때문에 죽음의 길로 끌려가는 양을 살리기 위해 자기 목숨을 십자가에 내어줌으로 양이 받아야 할 죄의 형벌을 대신 받기로 결단하셨습니다. 로마서 5:8절은 이 선한 목자 예수님의 사랑을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14-15절을 보십시오.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십자가에 손과 못에 굵은 대못이 박혀 피 흘리는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고통으로 온 몸이 뒤틀린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이 예수님은 내가 받아야 할 죄의 형벌을 대신 받으셨습니다. 이 예수님에게서 나를 향한 사랑이 느껴지십니까? 나를 도대체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감당할 수 없는 그 사랑이 느껴지십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양인 것이 분명합니다. 양은 목자를 알아봅니다. 아까도 말씀드린 것처럼 양은 시력도 나쁘고 별다른 재주나 능력이 없지만 자기 목자를 알아보는 것에는 천재적인 능력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양은 자기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이 예수님이 진짜 자기 목자요, 선한 목자인 것을 알아보고 자기 인생과 자기 생명을 예수님께 맡겨드립니다. 그 분이 이리 가자 하면 이리 가고 저리 가자 하면 저리 갑니다. 때로는 예수님이 인도하시는 그 길이 거칠고 험해 보여도 무서운 암벽과 낭떠러지를 사이에 둔 좁은 길이어도, 그래서 처음에는 부들부들 떨며 못간다고 뗑깡을 놓다가도 부드러운 음성으로 머리를 만지며 설득하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고집을 내려놓고 발걸음을 그쪽으로 향합니다. 이 예수님이 나를 자기 생명보다 더 사랑하시는 선한 목자이신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양들이 다른 것은 몰라도 예수님의 사랑에 대해 잘 아는 것은 마치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아시고 예수님이 하나님을 잘 아시는 것과 같습니다.
16절을 보십시오.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그들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예수님은 안식일에 의료행위를 했다고 맹렬한 비난을 받고 이로 인해 종교 재판에 회부되어 자칫 사형판결을 받을 것을 아시고도 한 맹인거지를 안식일에 눈을 뜨게 하셨습니다. 이 예수님의 한 영혼을 향한 사랑을 보고도 그가 선한 목자이신 것을 알아보지 못하는 이들, 더 나아가 양들을 위해 십자가에서 자기 생명을 내어주시는 것을 보고도 이 분이 선한 목자이신 것을 끝까지 알아보지 못한 이들은 그것은 그들이 예수님의 양이 아니라는 증거입니다. 그러나 그 사랑을 보고 느끼고 체험하여 예수님을 따를 양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예수님의 양들이 있을 것을 아셨습니다. 그리고 그들도 한 목자 되신 예수님을 따르게 될 것을 내다보셨습니다.
17-18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는 것은 종교 지도자들의 시기나 분노 때문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는 것은 양들을 죄와 죽음의 형벌로부터 구원하기 위해 예수님께서 자발적으로 자기 생명을 버리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유대인들 가운데 큰 분쟁이 일어났습니다. 어떤 이들은 그가 귀신들려 미쳤다고 말하고 어떤 이들은 귀신이 맹인의 눈을 뜨게 할 수 있느냐 하였습니다.
22-39절은 수전절 때 성전에서 말씀하신 예수님에 대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성전에 오시기 전 과거 알렉산더가 죽은 후 알렉산더 휘하의 장군들이 제국을 4등분하여 통치하던 때 그 중 수리아의 통치자인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가 유대인의 신앙과 정신을 말살할 목적으로 예루살렘 성전에 제우스 신상을 세우고 돼지피로 제사를 드림으로 성전을 크게 더럽힌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에 분노한 유대인들이 유대 마카비를 지도자로 하여 수리아 세력을 몰아내고 BC 164년 다시 성전을 정화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날을 기념하여 하누카라고도 불리는 수전절 절기로 삼았습니다. 그러므로 수전절은 성전을 다시 새롭게 한 것을 기념한 절기입니다.
이 수전절 때에 예수님은 성전으로 오셨습니다. 유대인들은 만약 당신이 그리스도시라면 더 이상 우리를 헷갈리게 하지 말고 명확하게 말씀해 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내가 이미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한 일들이 내가 그리스도인 것을 증거하고 있는데 너희가 믿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믿지 않는 이유는 너희가 내 양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내 양은 내가 행한 일들을 보고 또 내가 말한 음성을 듣고 내가 목자인 것을 알고 나를 따른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양들에게 영생을 주심으로 영원히 멸망하지 않을 것으며 아무도 그들을 예수님 손에서 빼앗지 못하리라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양들을 예수님께 인도하신 하나님 아버지는 만물보다 크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목자님이신 예수님도 아버지 하나님과 하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말을 들은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신성모독을 했다고 생각하고 돌로 치려 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시편 82:6절 말씀을 인용하시며 성경에 하나님의 말씀을 받음으로 성령충만해진 사람들을 신이라 하였는데 하물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셔서 세상에 보내신 분을 하나님의 아들이라 함으로 신성모독이라 할 수 없음을 변증하셨습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을 믿지 않더라도 예수님이 행하신 일을 믿으라 하십니다. 그러면 아버지께서 예수님 안에 계시고 예수님이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후 예수님은 그를 믿지 않는 이들을 떠나 요단 강 저편 요한이 처음 세례 베풀던 곳으로 가셨습니다. 그곳에서 많은 이들이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결론입니다. 예수님은 선한 목자이십니다. 그의 음성을 듣는 자, 그가 나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것을 보는 자는 그 분이 나의 진정한 목자이신 것을 알게 됩니다. 이는 그가 예수님의 양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자 이 자리에 모여 앉아있는 것 자체가 우리가 예수님의 양이라는 증거입니다. 그러나 이왕이면 주님의 말씀을 더 잘 순종하고 따르는 예수님의 사랑스러운 양들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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