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요한복음 제 12 강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 말씀 / 요한복음 11:1-44 요절 / 요한복음 11:25,2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제가 요한복음을 아마 10번 이상은 공부한 것 같은데 올해 공부가 특별히 더 감동과 은혜가 됩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분명하게 말씀하시는 바가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그라"(I am He)라는 것입니다. '내가 오리라 약속된 그리스도다'. '내가 이 땅에 성육신하여 온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이 복음서의 기록 목적을 20:31 절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특별히 오늘 말씀은 예수님의 자기 계시의 절정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가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새롭게 만나기를 기도합니다. 그 예수님을 온전히 믿고 부활의 생명이 충만한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어떤 병자가 있으니 이는 마리아와 그 자매 마르다의 마을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라." 예루살렘에서 남동쪽으로 약 3Km 떨어진 곳에 베다니라는 작은 마을이 있었습니다. 그 마을에 세 오누이가 살았는데 그들은 마리아와 마르다, 그리고 나사로였습니다. ‘나사로’는 ‘엘르아살’의 준말인데 '하나님의 도우심'이라는 뜻입니다. 그들은 아마 일찍 부모를 여의고 하나님의 도우심만을 구하며 서로 의지하고 살았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오실 때마다 이 가정에 들러 이들을 섬겨주셨습니다.
그런데 이 가정의 기둥이라 할 수 있는 나사로가 병들었습니다. 나사로는 특별히 예수님이 사랑하시는 사람이었는데 그도 중병이 들 수 있음을 보게 됩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미치는 고난과 시련이 믿는 사람, 예수님이 사랑하시는 사람에게도 동일하게 미칩니다. 그러나 그 고난의 의미와 결과는 다릅니다. 하나님께서 그 자녀들에게 허락하시는 고난은, 고난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로 인해 믿음의 연단을 받게 하시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기회로 삼으십니다.
2절을 보십시오. "이 마리아는 향유를 주께 붓고 머리털로 주의 발을 닦던 자요 병든 나사로는 그의 오라버니더라." 성경에 보면 여인이 예수님께 향유를 부은 사건이 두 번 나오는데 여기에 한번 나오고 누가복음 7장에 한 번 나옵니다. 누가복음 7장에서는 마리아가 아니라 한 죄 많은 여인이 바리새인의 집에서 향유를 붓는 내용입니다. 다른 기사입니다. 본문 2절에서 마리아가 향유를 주께 부은 사건은 다음 장인 요한복음 12장에 나오는데 저자가 성경기록자의 입장에서 여기서 미리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사로가 중병이 들자 그의 누이들은 무엇을 하였습니까?
3절을 보십시오. "이에 그 누이들이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하니." 당시 예수님이 계시던 곳은 요한이 세례를 주던 곳, 곧 요단강 동편의 베다니 근처였습니다(요1:28, 10:40). 예루살렘 근처의 베다니에서 요단강 동편 베다니까지는 약 하루 길이었습니다. 마리아와 마르다는 사람을 예수님께 보내어 긴급한 소식을 전합니다.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실제로 나사로의 병은 심각한 상태였습니다. 나중에 예수님이 베다니에 가셨을 때 나사로가 이미 죽은 지 나흘이 되었는데, 소식을 전하는 사람이 하루 걸려 오고, 예수님이 이틀을 더 유하시고, 하루 걸려 나사로에게 가신 것을 생각해 보면 소식을 전하는 사람이 베다니를 떠나자마자 나사로가 죽은 것으로 추정됩니다. 자매들의 마음은 매우 다급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예수님, 빨리 와 주세요!" 라고 요청하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말만 전하면 예수님이 당장 달려오실 것을 믿었습니다.
그런데 이 소식을 들으신 예수님의 반응이 어떠합니까? 4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 예수님은 이 병이 죽을 병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실제로 예수님이 이 소식을 들었을 때 나사로는 이미 죽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이는 나사로가 그 병으로 인해 죽게 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영어로 보면 "This sickness will not end in death"로 되어 있는데, 나사로가 비록 죽더라도 그것이 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뒤에 이루어질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일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리시는 일입니다. 이 일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며 또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하시는 예수님께는 절망이 없습니다. 우리에게 아무리 심각한 문제가 있더라도 절망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우리에게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우리는 언제나 밝고, 긍정적이며 감사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죽은 자도 살리시는 전능하신 예수님께 우리의 모든 문제를 들고 나가기를 기도합니다. 그가 친히 해결해주시고 가장 선한 길로 인도해주실 것을 믿습니다. 5,6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 예수님이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5절을 보면 예수님이 세 오누이를 사랑하셨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사랑하셨다면 빨리 달려가셔야 할 것 같은데 예수님은 일부러 이틀을 더 지체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누구를 사랑한다면 그에게 가장 좋은 것을 줍니다. 어떤 광고를 보니까 한 엄마가 어린 아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고 매몰차게 거절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아이는 막 울면서 무엇을 사 달라고 하는데 그것이 뭔가 보니 햄버거 같은 인스턴트 음식이었습니다. 그 엄마가 하는 말 "나는 엄마다!" '너에게 나쁜 것을 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나는 엄마다.” 아이를 사랑하는 엄마는 가장 좋은 것을 줍니다. 예수님도 그들을 사랑하사 가장 좋은 것을 주고자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바로 달려가 나사로를 살리셨다면 그들이 잠시의 위로는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사로는 어차피 다시 죽습니다. 그 누이들도 죽습니다. 이런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부활에 대한 믿음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부활을 믿고 영생을 소유한 자들이 되기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바쁜 일도 없으신데 그 계신 곳에서 이틀 더 머무셨습니다. 나사로가 아주 확실하게 죽어서 그 몸에서 냄새가 날 정도가 되도록 방치하신 것입니다. 이런 그를 부활시키심으로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부활신앙을 선물로 주고자 하신 것입니다. 물론 이 최고의 선물을 받기 위해 마리아와 마르다는 오라비 나사로가 죽는 것을 지켜 보아야했습니다. 그를 무덤에 넣고 며칠간 애곡하는 슬픔을 겪어야했습니다. 예수님도 그것을 잘 아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잠시의 인간적인 아픔을 부인하셨습니다. 자매들의 원망과 오해를 감당하셨습니다.
이를 볼 때 우리도 사람을 돕는 지혜를 배웁니다. 그것은 단순히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 대한 믿음을 갖도록 돕는 것입니다. 특히 예수님을 믿고 부활의 생명을 얻도록 돕는 것이 가장 잘 돕는 것입니다. 우리가 먼저 부활의 생명을 얻고 우리가 돕는 사람들이 부활의 생명을 얻도록 돕기를 기도합니다.
7절을 보십시오. "그 후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유대로 다시 가자 하시니." 이틀이 지난 후, 예수님은 유대로 다시 가자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은 유대로 가면 짱돌이 날아오는 공포에 시달렸지만 예수님은 세상의 빛을 보는 자, 곧 사명을 가진 자가 낮 시간에는, 곧 하나님의 정하신 때가 되기까지는 결코 죽는 일이 없다고 말씀하십니다(9).
11절을 보십시오.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또 이르시되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예수님은 나사로가 잠들었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에게는 죽음이 없습니다. 잠시 자는 것일 뿐입니다. 이제 예수님은 나사로를 깨우러 가십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곳까지 하루 길인데 나사로가 잠들었으면 그 가는 동안 스스로 깨어나지 않겠는가? 안면이 명약(Good sleep is the best medicine) 이라고 푹 자고 나면 병이 낫지 않겠는가? 생각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나사로가 죽었다고 밝히 말씀하십니다(14). 이런 충격적인 말씀을 하신 후 무엇이라 하십니까? 15절을 보십시오.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그에게로 가자 하시니." 와! 나사로가 죽었는데 예수님은 기뻐하십니다. 왜 기뻐하시나요? "너희를 위하여." 즉, 제자들이 부활의 믿음을 갖게 될 좋은 기회가 생겼으므로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우리가 무슨 일을 당하든지 믿음을 배우면 유익하게 여기신다는 사상을 배웁니다. 믿음을 배우는 것이 가장 귀하다는 것입니다. 왜 믿음이 그토록 중요합니까?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히11:6). 믿음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유일한 통로입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은 잠시요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세상은 영원합니다. 믿음이 있을 때 이 영적인 세계를 봅니다.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세상에 속지 않고 보이지 않는 영원한 것을 보면서 살아갑니다. 그래서 진리의 길을 가며 헛되지 않은 인생, 영원한 상급을 얻는 인생을 살게 됩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귀합니다. 참다운 믿음은 고난과 역경을 통해 빚어집니다. 고난의 때는 믿어야 할 때요 믿음을 강하게 연단 받을 기회입니다. 고난과 역경은 믿음의 양성소입니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죽음을 통해 제자들이 강한 믿음의 소유자가 되기를 간절히 원하셨습니다. 그렇게 될 것을 믿고 기뻐하셨습니다.
16절을 보십시오. "디두모라고도 하는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말하되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하니라." 디두모는 헬라어, 도마는 히브리어인데 ‘쌍둥이’라는 뜻입니다. 그는 유대로 가자는 예수님의 방향에 순종하기로 결단하였습니다. 그는 아마 머리에 붉은 끈을 두르고 외쳤을 것입니다.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가자, 가자!" 그의 말은 영웅적으로 들립니다. 그러나 그의 내면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가득 찼습니다.
17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와서 보시니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 지 이미 나흘이라." 유대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당일에 장례를 치렀습니다. 나사로의 시신은 수의에 싸여 굴로 된 무덤 안에 안치되었고 무덤 입구는 돌로 막았습니다. 그렇게 한지 나흘이 되었습니다. 모든 것이 끝났습니다.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한 오 리쯤 되어 가까웠기 때문에 오라비를 잃은 두 자매를 불쌍히 여겨 많은 유대인들이 조문을 왔습니다. 예수님이 베다니에 도착하신다는 소식을 들은 마르다는 마을 입구까지 나와서 영접합니다. 그녀가 예수님을 보고 하는 말이 무엇입니까? 21절을 보십시오.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약간의 원망이 섞인 말입니다. 왜 이제 오셨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좀 미안하였는지 덧붙여 말합니다.
22절입니다.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22)." 예수님이 나사로가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하시자 형식적인 위로의 말로 알고 그녀는 말합니다.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24b) 이것이 유대인들의 부활관이었습니다(단12:2). 그들의 부활관은 막연한 미래에 대한 희망 사항이었습니다. 관념적이었습니다. 이런 마르다에게 예수님은 놀라운 말씀을 하십니다. 25,26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예수님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로 하십니다. "I am the resurrection and the life." 우리는 예수님과 부활의 생명을 분리하여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과 별도로, 예수님을 떠나서 부활 생명을 얻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예수님 자체가 부활이요 생명이십니다.
그러면 우리가 부활의 생명을 어떻게 얻을 수 있을까요? 25b절을 다신 한번 보십시오.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그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삽니다. 그를 믿는 것이 부활의 생명을 얻는 길입니다. 그를 믿으면 비록 육신은 죽을지라도 그것은 잠 자는 것에 불과하고 다시 깨어나 영생한다는 것입니다.
26절에도 이 점이 반복되어 나타납니다.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여기서 '살아서'라는 말은 ‘영적으로 거듭나서’, ‘영적으로 살아나서’ 라는 의미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산다'는 말은 그 영혼이 죽음에서 살아나는 것을 의미합니다(요5:25). 곧 26절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게 되는 과정을 조금 더 자세하게 설명하며, 25절의 내용을 다시 한 번 반복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25b,26) ‘믿는 자’라는 말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영생은 얻는 길은 오직 하나입니다.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그가 하신 ‘말씀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선언하시고 그를 믿는 자는 영원히 산다는 그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 말씀을 참이라고 믿고 거기에 나의 인생을 거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믿음이란 계약에 참여하는 법적행위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부활의 생명을 주신다는 것은 주님의 일방적인 은혜의 약속입니다. 언약, 계약입니다. 원래 계약이란 쌍방이 조건을 내 걸고 서로 무엇인가를 주겠다고 약속을 하는 것입니다. 계약이 성립하려면 한 쪽에서 청약을 하고 다른 쪽에서 승낙을 하면 됩니다. 우리나라 민법에도 계약을 성립시키는 합의는 청약과 승낙에 의하여 행하여진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민법 527조에 의하면 일단 청약을 하면 상대방이 승낙여부를 표시할 때까지 청약을 철회하지 못합니다.
세상의 모든 계약은 쌍방계약, 쌍무계약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우리의 계약에서는 우리가 하나님께 드릴 것이 없습니다. 드릴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주시기만 하고 우리는 받기만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사람간의 언약은 언제나 일방언약, 편무언약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드릴 것은 없을지라도 그 언약에 참여해야 주님이 주고자 하시는 것을 받습니다. 그 참여하는 행위가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계약 당사자가 서로 믿는 것으로 계약에 참여하는 것과 같이 우리는 부활생명을 주신다는 주님의 은혜의 청약을 믿어드림으로 승낙하여 그 약속하신 것을 받는 것입니다.
의로우신 하나님, 신실하신 하나님은 그 하신 말씀을 거역하실 수 없습니다. 민수기 23:19은 말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하지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하지 않으시랴." 하나님은 자기의 하신 말씀을 절대 부인하지 않으십니다. 그 분의 속성상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어 드릴 때 우리는 하나님과의 법적 언약을 맺는 것이요 우리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부활의 생명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믿음으로 이러한 법적 계약행위에 참여하는 자들을 그대로 두지 않으십니다. 그들의 믿음을 통로로 성령님을 통해 역사하십니다. 그들로 하여금 실제로 살아있는 믿음을 갖게 하시고 부활의 생명에 대한 확신을 주십니다. 그 생명이 real 한 것으로 만들어 주십니다. 사람들은 세상에서 여러 모양의 성공을 위해 오늘도 땀을 흘립니다. 안정된 직장, 이상적인 배우자, 좋은 집과 차 등 소시민적인 꿈을 꿉니다. 그러나 결국 그 모든 것은 바람과 함께 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살같이 빠른 세월이 지나 세상의 모든 것을 놓고 가야할 때가 옵니다. 세계를 정복한 알렉산더 대왕은 33세에 죽으면서 자기의 두 손을 관밖에 내 놓으라고 유언하였습니다. 저 세상에 아무 것도 갖고 가지 못한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러한 세상, 곧 아무 것도 가지고 갈 수 없는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이 무엇입니까? 부활의 생명입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히 누리는 생명입니다. 이는 이론이 아닙니다. 마지막 날에 다시 산다는 유대인들의 관념적인 교리가 아닙니다. 실제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실제적인 선물입니다.
이 부활 생명을 얻을 때 우리의 삶은 완전히 달라집니다. 어떠한 일 앞에도 두려움이나 절망이 없습니다. 어둠이 없습니다. 샘솟는 힘이 넘칩니다. 사람들의 인정과 칭찬에 매이지 않습니다. 세상의 그림자와 같은 것들을 좆지 않습니다. 속지 않습니다. 부활 생명의 기쁨으로 죽음의 위협도 두려워하지 않고 주님을 섬기게 됩니다.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부활의 생명을 얻고 누리게 하시는 주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우리가 더욱 주님을 분명하게, 강력하게 믿어드림으로 부활의 생명을 충만히 누리기를 기도합니다.
27절을 보십시오. "이르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마르다는 말씀을 듣고 예수님이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믿는다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러나 조금 후에 보면 그녀는 돌을 옮겨 놓으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아무 소용이 없다는 불신의 말을 합니다. 마르다는 소원이 많아서 뭐든지 고백은 잘 하지만 믿음에 안정감이 없습니다. 한 마디도 그녀는 소원은 있었지만 그 소원이 믿음의 실력과 일치하지 않았습니다. 신자들이 믿음이 얕고 늘 변동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첫째는 체계적으로 말씀을 배우지 않기 때문입니다. 깨닫고자 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체계적으로 잘 배우면 믿음이 생깁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옵니다(롬10:17). 성령님께서는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믿음을 선물로 주십니다(엡2:8).
둘째는 신앙연단을 받지 않기 때문입니다. 벨기에의 안트워프라는 도시에 가면 다이아몬드 거리가 있습니다. 주로 유대인들이 운영하는데 그 거리 전체가 다이아몬드를 만들어 파는 곳입니다. 그 곳에 가면 상점 안에 큰 기계들이 많이 있는데 원석을 사서 수십 번의 공정으로 거쳐 깎고 다듬어서 아름다운 다이아몬드를 만들어냅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체계적으로 정미하게 말씀을 공부하고 실제 생활에서 연단을 받을 때 정금과 같이 순수한 믿음, 안정감이 있는 믿음, 믿음의 실력이 있는 사람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28-32절은 마리아가 예수님을 만나 슬퍼하는 내용입니다. 33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그가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 예수님은 마리아와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비통히 여기셨습니다. 여기서 비통히 여기셨다는 것은 영적으로 분노하신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인간을 종 삼고 있는 죽음의 세력, 사탄 마귀의 세력에 분노하셨습니다. 그 세력에 잡혀 비참하게 살고 있는 인생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눈물을 흘리셨습니다(35).
예수님은 무덤으로 가셨습니다. 39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이르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마르다는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이나 되었으니 아무 소용이 없다는 말을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마르다에게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십니다. 사람들이 무덤의 돌을 옮기자 예수님은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리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43절을 보십시오.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예수님은 죽은 자를 산 자같이 큰 소리로 부르셨습니다. "나사로야 나오라!"
44절을 보십시오.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죽은 자가 수의에 쌓인 채 걸어 나왔습니다. 아마 다리도 묶여 있었으면 총총 점프하면서 나왔는지 또는 굴러 나왔을 수도 있습니다. 여하튼 그가 무덤에서 나왔습니다. 역사상 소위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난 일이 여러 번 보고가 되었습니다. 어떤 경우는 관속에서 뚜껑을 두드리는 소리가 나서 열어보니 살아 있었다고도 합니다. 그러나 그런 경우는 모두 가사 상태에 있었던 것입니다. 죽어서 나흘이나 되어 그 몸에서 냄새가 나는 자가 살아난 일은 여기 외에는 전혀 없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로를 풀어놓아 다니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죽은 나사로를 살리심으로 자신이 이 땅에 오신 부활이요 생명이심을 드러내셨습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은 부활이요 생명이십니다. 그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습니다. 이는 절대로 취소할 수 없는 전능하신 창조주 예수님의 약속입니다. 우리는 부활의 주님을 믿어 드림으로 그 언약에 참여하고 부활 생명을 얻게 됩니다. 영생은 모든 것의 모든 것입니다. 예수님을 더욱 깊이, 굳게 믿음으로 이 영생의 복을 지금부터도 풍성히 누리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