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요한복음 14강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말씀 요한복음 13:1-38 요절 요한복음 13: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13-17장은 십자가를 앞두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다락방 강화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유언과도 같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또 오늘 예수님의 제자로 살고자 기도하는 우리에게 주시는 유언적인 말씀을 잘 듣고 순종함으로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때는 유월절 전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번 유월절에 하나님의 어린 양이 되사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갈 것을 아셨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끝까지 사랑하셨다는 것은 ‘에이스 텔로스(to the end)’로 시간적인 의미와 질적인 의미를 동시에 내포하고 있습니다.
현재 예수님은 곧 체포되어 밤새 심문을 받으시고 고통스러운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셔야 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이러한 고난을 받고 죽으실 것과 삼일만에 부활할 것을 이미 제자들에게 여러 번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이 하신 말씀의 진정한 의미를 전혀 받아들이지 못했고 깨닫지도 못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삶의 마지막 순간만큼은 주변 사람들로부터 진심어린 관심과 이해와 공감을 받기 원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전혀 그러한 이해와 공감을 받지 못하셨습니다. 이런 경우 사람은 극심한 외로움과 슬픔, 자기 연민의 감정을 느끼게 됩니다. 또 관심이 온통 자기에게 집중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바로 그러한 순간에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셨습니다. 또한 시간적인 면에서 끝까지 사랑하실 뿐 아니라 질적인 면에서 최고의 사랑을 하셨습니다. 물론 지금까지도 예수님은 자기 사람들을 뜨겁게 사랑하지 않으셨던 때가 단 한 순간도 없습니다. 그러나 삶의 마지막이 다가온 이 순간 예수님의 가슴에는 제자들을 향한 뜨거운 사랑이 마치 화산에서 터져나오기 직전의 용광로와도 같이 뜨겁게 끓어올랐습니다.
2절을 보십시오.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 그런데 이러한 때에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배반하여 돈을 받고 팔려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저자 요한은 이는 마귀가 그의 마음에 이런 생각을 불어넣었기 때문이라고 멘트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가룟 유다는 자신의 기대와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일하시는 예수님에 대해 불만이 가득했습니다. 그는 청년 실업 문제와 노인 복지 문제로 고통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위해 오병이어 기적의 능력을 적극적으로 사용하지 않는 예수님에 대해 많은 불만을 가졌습니다. 한쪽 뺨을 맞으면 다른 뺨을 내밀라는 둥 나약한 말씀만 하시는 예수님에 대해 분노하는 마음을 갖기도 했습니다. 그가 이런 마음을 잠간 가질 수 있습니다. 아마 다른 제자들도 때로 유다와 같은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유다와 다른 제자들의 차이는, 다른 제자들은 그런 생각을 했다가도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아 그렇군요 하고 자기 생각을 내려놓았습니다. 이에 비해 유다는 끝까지 자기 생각을 내려놓지 않았습니다. 그랬을 때 마귀가 그의 마음에 예수님을 팔고자 하는 악한 생각을 불어넣었습니다.
3절을 보십시오. “저녁 먹는 중 예수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과 또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을 아시고” 저녁 식사 도중 예수님은 두 가지 사실을 인식하셨습니다. 먼저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다 예수님의 손에 맡기셨다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님이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가 되신다는 의미입니다. 세상 모든 만민과 천군천사들로부터 존귀와 영광과 경배를 받기에 합당한 분이 되신다는 뜻입니다. 다음으로 예수님이 인식하신 것은 당신께서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가 이제 때가 되어 하나님께로 돌아가신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이 사실을 지금까지 전혀 모르고 계시다가 이제 드디어 깨닫게 되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이는 예수께서 만왕의 왕이 되시고 만주의 주가 되시며, 이제 곧 제자들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야 할 때가 이르렀다는 사실을 인식하신 가운데 자연스럽게 나온 행동이 무엇인가를 설명하기 위함입니다.
4-5절을 보십시오.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이에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닦기를 시작하여” 다시 1절을 보면 예수님의 가슴에는 제자들을 향한 사랑이 용광로와 같이 타오르셨습니다. 한편 마귀는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님을 팔려는 생각을 넣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자신이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가 되심을 인식하셨습니다. 또 곧 제자들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갈 때가 임박한 것을 아셨습니다. 이 모든 것을 인식하신 가운데 예수님은 무엇을 하셨습니까? 예수님은 조용히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셨습니다. 그리고 겉옷을 벗은 후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으셨습니다. 사랑이 가득한 예수님의 손가락이 제자들의 발가락 사이사이에 들어가 그곳에 묻은 더러운 먼지와 냄새나는 오물들을 깨끗이 씻어주었습니다. 다 씻으신 후에 그 두르신 수건으로 정성스럽게 물에 젖은 발을 뽀송뽀송해지기까지 닦아주셨습니다.
얼마 전 북한의 김정은은 20대 약관의 나이에 북한의 최고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그가 젊은 날 최고 지도자가 된 것을 인식하고 가장 먼저 한 일은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으로 보이는 고모부를 잔인하게 처형한 것이었습니다. 이를 통해 그는 최고 지도자인 자기가 말하면 모든 사람들이 부들부들 떨며 즉각 복종할 것을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최고 지도부가 모인 자리에서 자기가 연설하고 있는데 어떤 사람이 꾸벅꾸벅 졸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분노한 그는 그를 비행기를 격추시키는데 사용하는 고사포로 처형해 버렸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단지 한 나라의 최고 지도자가 아니라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가 되심을 인식하셨습니다. 영원한 하나님의 영광으로 돌아갈 것을 아셨습니다. 그것을 인식하신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가룟 유다를 본보기로 처단하셨습니까? 제자들이 예수님이 입만 벙끗하셔도 부들부들 떨며 즉각 복종하도록 권위를 나타내셨습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 순간 종의 모습으로 낮아지셔서 제자들의 냄새나는 발을 씻어주셨습니다. 당시 남의 발을 닦아주는 것은 너무 천한 일이기 때문에 하인 중에서도 유대인 하인에게는 절대 시키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러한 일은 오직 이방인 출신 노예에만 시켰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인이 하는 일 중에서도 가장 비천한 일을 몸소 행하셨습니다.
오늘날 많은 모임이나 단체의 지도자들은 자기가 리더라는 것을 인식한 후, 그것을 사람들의 뇌리에 깊이 인식시키기 위해 여러가지 권위를 세우는 행동을 합니다. 자신에게 반기를 들거나 고분고분한 태도를 보이지 않는 사람에게 여러가지 불이익을 주거나 왕따를 시킴으로 다른 사람들이 리더인 자기를 함부로 대하지 못하게 합니다. 자기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지만 사람들 안에 악한 본성이 있기 때문에 너무 부드럽게 대하면 물로 보고 수염을 잡아 뽑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 세상의 방식입니다. 우리의 모범이 되시는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최고 지도자이시지만, 가장 낮은 자가 되셔서 사람들을 겸손과 사랑으로 섬기셨습니다. 예수님이 발을 씻어주신 이들 중에는 예수님을 배반하기로 결심한 가룟 유다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사실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럼에도 그의 발을 사랑으로 씻어주셨습니다. 자기를 대적하는 자들까지도 끝까지 사랑으로 품으셨습니다.
6-8절을 보십시오. 제자들의 발을 한 사람, 한 사람씩 씻어주던 예수님의 손길이 수제자인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렀습니다. 베드로는 너무 황송하여 말하였습니다: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으시나이까?” 예수님은 이런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하는 것을 네가 지금은 알지 못하나 이 후에는 알리라.” 베드로가 다시 말했습니다: “내 발을 절대로 씻지 못하시리이다.” 예수님은 이런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를 씻어주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것은 제자들이 지금은 깨닫지 못하는 깊은 영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죄인들이 구주이신 예수님과 관계성을 맺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구주로부터 죄사함을 받아 죄와 허물로부터 깨끗해지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이 발을 씻어주셨다고 해서 더러운 죄와 허물이 씻겨나가고 깨끗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으로부터 발씻김을 받았지만 죄로부터 깨끗해지지 못했습니다. 우리를 더러운 죄로부터 깨끗하게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주님의 입에서 나온 약속의 말씀, 생명의 말씀과 또 십자가에서 내 죄를 위해 흘려주신 붉은 보혈의 피 뿐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이 사건을 통해 예수님은 최고의 사랑의 표현이 그들을 죄로부터 깨끗하게 하여 주시는 것임을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제자들이 이것을 지금은 알지 못하지만 나중에는 알게 될 것입니다.
9-10절을 보십시오. 주님과 상관이 없는 사람이 된다는 말에 깜짝 놀란 베드로는 발뿐 아니라 확실하게 손과 머리도 씻어 주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사랑하였고 예수님과 깊은 생명의 관계성을 맺기 원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에게 이미 목욕한 자는 발만 씻으면 된다고 하셨습니다. 이미 온 몸이 깨끗하기 때문입니다. 다만 가룟 유다는 온 몸이 깨끗하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15:3-4절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졌으니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일러주신 말씀으로 이미 깨끗하여졌습니다. 그들은 장차 예수께서 그들을 위해 십자가에 피흘려 죽으심으로 그들의 구세주요 메시야가 되신다는 약속의 말씀을 믿고 영접함으로 온 몸이 깨끗하여졌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더 이상 죄를 회개할 필요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비록 온 몸이 깨끗할지라도 밖에 나갔다 오면 반드시 발을 씻어야 하는 것처럼 제자들도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영접함으로 깨끗하여졌지만 매일의 삶 가운데 짓게 되는 죄를 주님께 들고 나아가 고백함으로 죄사함을 받아야 합니다.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 1:8-9절에서 한 번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으면 그 다음부터는 죄로부터 완전히 자유해져 회개할 필요가 없다는 오늘날 구원파와 같은 주장을 하던 당시 영지주의자들을 향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였습니다: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제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복음을 영접한 후 그 다음부터는 회개하는 생활을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하면 주님과의 관계성이 멀어지게 되고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식게 됩니다. 위선적인 바리새인과 같이 되어 타락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오히려 죄사함을 받기 이전보다 더욱 죄에 민감해져 작은 죄일지라도 크게 생각하고 주님 앞에 진실하게 고백하고 회개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이를 통해 구주 예수님을 이전보다 더욱 사랑하게 되고 세월이 흐를수록 관계성이 더 깊어지게 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오래 하면 할수록 사람들의 눈치를 살피며 체면 때문에 냄새나는 발을 주님께 들고 나오지 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때 발에 무좀이 생기게 됩니다. 더 심각한 것은 주님과 멀어진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신앙생활을 오래 하면 할수록 더욱 냄새나는 발을 주님께 들고 나옴으로 주님을 이전보다 더 사랑하고, 오늘 주님을 향한 사랑이 어제보다 더 뜨겁게 타오를 수 있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제자들의 발을 다 씻으신 예수님은 옷을 입으신 후 다시 앉아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13-15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두 번째 중요한 의미는 이와같이 제자들도 서로 발을 씻어주라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예수님께서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주님이 되시고 선생이 되시는 예수께서 그들의 발을 씻어주셨으니 그들도 서로 발을 씻어주는 것이 마땅하지 않는가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제자들이 서로 발을 씻어주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을 의미합니까? 각자의 냄새나는 발은 각자의 부족한 부분, 결점과 약점, 허물, 죄문제 등을 의미합니다. 이것을 서로 씻어준다는 것은 이것을 참고 감당해주며 더 나아가 위해서 기도해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세상에 완벽한 제자 공동체는 없습니다. 누구에게나 위대한 장점이 있으면 곧 위대한 단점이 있습니다. Leader와 Follower의 경우 리더가 일처리나 사람을 대하는 것이 꼼꼼하고 섬세한 경우, 자칫 마음이 좁아 그가 마음을 많이 쓰고 수고한 일에 대해 어떤 평가나 비판을 받을 때 과도하게 신경질적으로 반응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반면 스케일이 크고 마음이 태평양처럼 넓은 리더의 경우, 일처리나 사람을 대하는 면에서 섬세하지 못해 팔로워들에게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뜨거운 열정을 가진 리더는, 결정적인 순간을 버럭버럭 화를 냄으로 팔로워들에게 불안감을 조성하기도 합니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한결같은 믿음, 태산같은 믿음을 가진 리더는 때로 팔로워들의 아픔이나 고통에 정서적으로 잘 공감해주지 못해 서운함을 유발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스케일이 크면서도 일처리나 사람을 대하는 일에서는 매우 섬세한 리더, 뜨거운 열정을 가졌으면서도 태산과 같은 안정감을 가진 리더, 큰 믿음을 가졌으면서도 사람들의 아픔과 상처에 잘 공감해주는 리더를 원합니다. 하지만 세상에 처음부터 그런 완벽한 리더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훌륭한 리더는 본인도 투쟁해야 하지만 팔로워들도 함께 만들어나가야 합니다. 그의 단점을 부각시키고 비판하기보다 장점을 귀하게 여기고 부족한 부분을 잘 동역해 줄 때 리더들도 세월이 흐르는 가운데 배우고 성장하여 부족한 부분이 보완되어 더 훌륭한 리더가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목자와 양과의 관계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양들도 말씀을 같이 공부하기 때문에 자기는 못해도 목자는 이렇게 이렇게 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양들의 목자에 대한 요구수준은 매우 높습니다. 심지어 어떤 양은 목자가 완벽할 것을 기대합니다. 그러나 세상에 완벽한 목자는 선한 목자 예수님 한 분뿐입니다. 인간 목자들은 다 선한 목자 예수님을 배워가는 과정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목자들도 부족한 부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양들도 이것을 알고 때로는 목자님을 잘 감당해 주어야 합니다. 물론 그 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 목자는 양들이 말 그대로 양이기 때문에 때로는 조금 반항하더라도 결국은 목자의 인도함을 잘 따라올 것으로 기대합니다. 그리고 어쨌든 양이니까 몹시 귀엽고 사랑스러운 면이 있을 것으로 기대합니다. 그런데 때로는 양이 매우 반항적이고 목자를 괴롭힘으로 별로 양같이 느껴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때 목자는 양의 약점과 허물을 발을 씻어주는 사랑으로 감당해 주어야 합니다.
또한 이는 같은 동역자 상호간에도 적용됩니다. 우리가 보통 양들의 허물과 단점은 기본적으로 보듬어주고 감당해 주려는 자세가 있습니다. 그러나 같은 동역자의 경우 참기 힘든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양에게는 불면 날아갈까 잘못 만지면 터질까 조심조심 대하는데 동역자에게는 감정적으로 말을 확 해 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동역자도 과거 누군가의 귀한 양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이 보혈의 피로 사신 귀한 양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허물을 감당해 주는 것이 마땅합니다.
계속해서 예수님은 종인 주인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함을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신 목적은 주인이신 주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셨으니 그들도 서로 발을 씻어주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한편 예수님은 그들 가운데 참된 주님의 제자가 아닌 자가 있음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 하신 성경 말씀처럼 예수님의 사랑을 받았지만 예수님을 배반하는 자가 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미리 그에 대해 언급하시는 것은 예수님은 그의 배반을 모르셨기 때문에 십자가에 죽으시는 것이 아님을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는 것은 인류의 죄를 대속하여 그들을 죄로부터 구원하기 위함이시지 결코 누군가의 배반 때문이 아닙니다.
21-30절에서 예수님은 가룟 유다의 배반에 대해 말씀하시고 그가 회개하도록 도우십니다.
21절을 보십시오. 말씀을 마치신 예수님은 괴로운 마음 가운데 토로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제자들은 이 말씀이 누구에 대해 하신 말씀인지 의아해 하였습니다. 시몬 베드로는 눈짓으로 예수님의 품에 누워있던 저자 요한에게 그가 누구인지 여쭤보도록 말하였습니다. 요한이 묻자 예수님은 “내가 떡 한 조각을 적셔다 주는 자가 그니라” 말씀하시고 떡 한 조각을 적셔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에게 주셨습니다. 그가 조각을 받을 때 곧 사탄이 그 속에 들어갔습니다. 예수님은 “네가 하는 일을 속히 하라”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가 하려는 일을 드러내셨고 마지막 순간까지 회개하도록 도전하셨습니다. 한편 제자들은 무슨 뜻으로 이 말씀을 하시는지 이해하지 못하였고 어떤 이들은 유다가 돈궤를 맡은 재정부장이므로 명절에 우리가 쓸 물건을 사라는 의미이거나 혹은 가난한 자들에게 무엇을 주라는 의미인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제자들은 바로 옆에 있는 동역자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영적으로 어떤 상태에 있는지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그만큼 동역자 상호간의 관심과 사랑이 부족하였습니다.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나가니 곧 밤이었습니다. 유다는 예수님이 주신 마지막 기회를 버리고 예수님을 배반하려는 생각을 실천에 옮기기 위해 밖으로 나갔습니다. 빛이 없는 어두운 밤, 캄캄한 밤은 악한 사탄의 지배를 받고 있던 그의 마음과 같았습니다.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하여 팔기 위해 밖으로 나가자 예수님은 지금 인자가 영광을 받았고 하나님도 인자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도다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에서 인자가 받을 영광은 십자가에 죽는 것입니다. 유다가 밖으로 나감으로 예수님이 곧 체포되시고 밤새 심문받으시고 채찍질 당하시고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시는 이 엄청난 사건들의 시작이 초읽기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긴박한 순간에 요한복음 13장부터 17장에 이르기까지 주옥과 같은 다락방 강화의 말씀을 주십니다.
예수님은 이제 잠시 제자들과 함께 있은 후 그들이 결코 따라 올 수 없는 곳으로 갈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난 후 무슨 말씀을 주십니까? 34-35절을 보십시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구약에 기록된 옛 계명의 말씀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곧 신명기 6장에 기록된 쉐마의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또한 레위기 19:18절에 기록된 바와 같이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은 이미 구약 시대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어졌던 계명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을 새 계명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어떤 점에서 새 계명이 됩니까? 이는 사랑의 기준이 예수님께서 그들을 사랑하신 것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구약 시대에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은 기준이 자기 자신이었습니다. 자기가 자기를 사랑하는 것처럼 남도 사랑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곧 자기가 배가 고프면 남도 배가 고프다는 것을 알고, 자기가 어떤 경우 서운하면 남도 똑같은 마음이라는 것을 알고 배려하고 사랑으로 대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새 계명은 그 기준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사랑입니다. 주님께서 나의 죄와 허물과 연약함을 참아주시고 용서하시고, 또 용서하실 수 있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내 죄의 형벌을 대신 받으신 사랑을 나타내주신 것처럼 우리도 형제의 죄와 허물을 용서하고 감당해주고 사랑으로 품고 기도해주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각자 맡은 직분을 열심히 하고 최우선적으로 양들을 돕는 생활을 열심히 하는 것은 좋습니다. 그런데 너무 자기 맡은 일과 양치는 일에 몰두하다가 바로 옆에 있는 동역자를 사랑하는 일에 소홀히 할 수 있습니다. 가룟 유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영적으로 어떤 상태에 있는지 전혀 알지 못했던 제자들처럼 바로 옆의 동역자가 어떤 상황 가운데 있는지 어떤 어려움과 아픔이 있는지 어떤 기도제목이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누군가가 사랑의 반대는 미움이 아니라 무관심이라고 하였습니다. 미움보다 더 무서운 것이 철저한 무관심입니다. 그러한 무관심의 뿌리에는 내 일만 잘되면 된다는 이기주의가 깔려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교회는 몸된 그리스도에게 연결된 자체입니다. 한 군데가 아프면 온 몸이 아픕니다. 내가 손으로서 아무리 열심히 일을 하고 싶어도 발이 아프면 꼼짝도 못하고 누워있어야 합니다. 내가 발이어서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일하고 싶어도 잇몸에 염증이 생기면 너무 아프고 몸에 열이 나고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서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먼저 그곳부터 치료를 받아야 합니다. 이와같이 우리가 각자 주님께서 맡겨주신 고유한 사명을 열심히 하는 것은 맞지만 다른 지체가 아프면 그를 사랑으로 돌보는 것이 순서상 먼저입니다. 입이 열심히 일해서 몸에 좋은 음식을 찾아 몸에 넣어준다 할지라도 위장이 아프면 전혀 그 음식을 소화할 수 없고 아무런 유익이 되지 못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주의 일을 열심히 해도 서로 사랑하지 않으면 그 일이 몸된 주님의 교회에 별다른 유익이 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각자 맡은 직분에 충성하지만 그러한 가운데 바로 옆에 있는 동역자들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다른 무엇보다도 동역자들의 실제적인 기도제목을 알고 기도해줌으로 뜨거운 형제 사랑을 실천하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어디로 가시는지 묻는 베드로에게 지금은 따라 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 오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왜 지금은 따라갈 수 없는지, 내가 주를 위해 목숨을 버리겠다고 말하는 베드로에게 주님은 그가 닭 울기 전에 세 번 주님을 부인할 것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를 통해 그가 자신의 연약함을 발견하고 주님을 의지하여 돌아올 수 있도록 마음 준비를 시켜주셨습니다.
결론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신 예수님은 제자들을 최고로 사랑하셨습니다. 그들의 발을 씻어주시고 제자들도 서로 이와같은 사랑으로 사랑하도록 새 계명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각자 맡은 사명에 충성하는 가운데서도 주님이 주신 새 계명의 말씀을 늘 기억하는 가운데 형제 사랑, 동역자 사랑을 실천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다른 무엇보다 동역자들의 기도제목을 알고 기도해주는 사랑을 실천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