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요한복음 제 17 강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말씀 / 요한복음 16:1-33 요절 / 요한복음 16:13,14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
예수님은 지난 14장에서 성령에 대해 약간 가르치셨는데 이제 오늘 본문에서 본격적으로 말씀하십니다. 어떤 사람이 내일이면 세상을 떠난다는 것을 알 때, 그가 전날 밤에 무엇인가를 가르친다는 것을 생각해보십시오. 월드컵 경기 정도의 얘기를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내용을 진지하게 말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전날 밤에 제자들과 다락방에서 함께 만찬을 하시며 유언적인 말씀을 주셨는데, 그것이 13-16장에 기록된 다락방 강화입니다. 그 중에서도 오늘 16장 말씀은 최후의 가르침입니다. 그 최후의 가르침이 바로 성령에 관한 내용입니다. 이는 제자들이 성령에 대해 바른 이해를 하고 꼭 붙들어야 하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성령에 대한 각종 오해가 난무하는 시대입니다. 우리가 오늘 예수님이 가르치시는 성령론을 잘 배워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제자의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실족하지 않게 하려 함이니." 여기서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이란 예수님이 앞의 15:18-27 에서 제자들이 세상에서 박해를 받을 것을 예언하신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미래가 장밋빛처럼 밝고 멋질 것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도리어 박해가 있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를 미리 알려주심으로 나중에 실제로 박해를 받을 때 "아, 주님이 말씀하신대로 정말 박해가 오는구나. 그러면 또한 말씀하신대로 우리를 도울 성령도 오시고, 예수님이 승리하셨던 것처럼 우리도 승리할 수 있겠구나" 라고 여기도록 미리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제자들을 어떻게 박해할 지 다신 한번 알려주십니다. 2절을 보십시오. "사람들이 너희를 출교할 뿐 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 하리라." 때가 되면 사람들은 제자들을 출교합니다. 출교는 유대공동체에서 쫓아내는 것입니다. 당시 출교에는 '네지파', '니두이', '헤렘' 3종류가 있었는데 가장 심한 등급인 ‘헤렘’의 경우 공동체에서 영구히 추방되고 법적인 보호를 받지 못하였습니다. 유대인 사상에 있어서 그런 사람은 영원히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출교는 실로 무서운 형벌이었습니다. 기독교 역사를 볼 때 마르틴 루터가 보름스 제국회의(Diet of Worms)에서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자 파문을 당합니다. 카를5세는 그가 출두하면 죽이지 않겠다는 약속을 지키기는 했지만 그를 파문하여 모든 공민권을 박탈하였습니다. 그가 회의장을 나가는 순간 누가 그를 죽여도 죄가 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프리드리히 선제후를 통해 그가 바르트부르크 성으로 피신하도록 도우셨습니다. 그는 1년간 그 성에 아무도 모르게 은신하여 지내며 독일어 신약성경을 번역하였습니다.
2절을 다시 한 번 보십시오. "사람들이 너희를 출교할 뿐 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 하리라." 사람들은 제자들을 출교할 뿐 아니라 심지어 죽입니다. 죽이되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전혀 없이, 그들을 죽이는 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고 확신하며 행합니다(2b). 그러니 제자들은 얼마나 무자비한 박해를 받게 되는 것입니까!
그런데 그런 악한 일을 하면서도 그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고 여기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3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이런 일을 할 것은 아버지와 나를 알지 못함이라." 한 마디로 영적 무지 때문입니다. "무지는 모든 과오의 원인이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종교적 열심이 있는 것이 다 좋은 것이 아닙니다. 그 열심은 하나님께 대한 올바른 지식에 기초해야 합니다. 올바른 지식으로 잘 준비된 한 명의 목자가 무지한 다수의 사람보다 유력합니다. 우리가 매일, 매주 성경 말씀을 잘 공부함으로 힘써 하나님을 잘 알아가기를 기도합니다.
5,6절을 보십시오. "지금 내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가는데 너희 중에서 나더러 어디로 가는지 묻는 자가 없고 도리어 내가 이 말을 하므로 너희 마음에 근심이 가득하였도다." 예수님은 이제 그를 보내신 아버지께로 돌아가십니다. 이를 예감한 제자들은 마음에 근심이 가득하였습니다. 이런 그들에게 예수님은 무엇이라 하십니까? 7절을 보십시오.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여기서 실상을 말한다는 것은 "I tell you the truth" 로 참된 말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 참된 말이 무엇입니까? 제자들은 예수님이 떠나가시는 것을 근심했지만 이것이 실제로는 그들에게 유익이라는 것입니다. 왜 유익일까요? 예수님은 가셔서 보혜사를 보내주시기 때문입니다. 보혜사(保惠師)에 대해서는 지난 14장에서 배웠습니다. 원어는 "파라클레토스"인데, 옆에서 "상담하다", "돕다", 변호하다", 위로하다" 는 뜻입니다. 그래서 '파라클레토스'라는 단어를 영어성경에 적어도 4가지 이상의 다른 단어로 나타내고 있고, 한글 성경에도 개역이나 개정성경에는 '보혜사' 공동번역은 '협조자' 한글 킹제임스 성경은 '위로자', 현대인의 성경은 '보호자'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령(Holy Spirit)을 ‘거룩한 영’이라고 하여 어떤 힘이나 에너지, 기(spirit)등의 비인격적인 'it'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오래 전에 어느 교회 부흥회에 참여한 적이 있었는데, 설교자가 "성령 받아라"하면서 야구공 던지듯이 던지는 제스처를 한 것을 본 적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받으려고 모션을 취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성령은 그렇게 던지고 받고 하는 물건이 아닙니다. 성령은 거룩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어떤 분은 설교를 하면서 아무 준비도 안하고 원고 없이 한다고 합니다. 성령이 그때 주시는 말씀을 전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성령은 또한 사람이 원하는 때 가져다가 쓸 수 있는 영적인 능력이나 힘이 아닙니다. 우리가 경외해야할 하나님이십니다. 설교자가 간절히 기도하며 겸손히 말씀을 잘 준비하여 전할 때, 그 말씀 가운데 주권적으로, 은혜로 역사하시는 분입니다. '파라클레토스'는 'it' 가 아니라 'He'이십니다. 예수님이 이루신 복음을 온 세상 만민에게 효과적으로 적용하여 모든 믿는 자들이 구원에 이르도록 돕기 위해 오신 삼위 하나님의 한분이십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이 하늘로 가시고 보혜사 성령이 오시는 것이 제자들에게 유익합니까? 이는 성령님은 시간과 장소를 초월하여 제자들과 함께 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성령님이 오심으로 천하 어디서나 주님을 만날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늘로 가시며 제자들을 성령께 맡기는 것입니다. 아침에 보면 엄마들이 어린 아이를 데리고 길에 나가 유아원 버스를 기다립니다. 버스가 오면 아이를 유아원 선생님에게 넘겨줍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성령님께 제자들을 인계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제자들과 친밀하게 늘 함께 계셨지만 성령님은 더욱 친밀하게 가까이 계십니다. 어느 정도 가까이 계시나요? 제자들 각각의 심령, 그 내면에 거하십니다. 1cm도 떨어지지 않고 모든 믿는 자들의 내면에 거하십니다. 요한복음 14:16절을 보면 그 성령님은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하십니다. 여러분은 자신의 내면에 성령님이 계시다, 영원히 존재하신다는 것을 믿으십니까? 그 성령님과 늘 교제하고 대화하십니까? 그 성령님을 근심하지 않도록 죄를 피하는 삶을 사십니까(엡4:30)? 우리가 늘 성령님과 친밀하게 대화하며 교제하는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면 성령님은 구체적으로 왜 오시는 것입니까? 그 분이 오셔서 하시는 일이 무엇입니까? 8절을 보십시오.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이 말씀은 성령의 사명선언문(mission statement)입니다. 성령의 사명은 세상에 오셔서 사람들을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책망'이라고 하니 담임선생님이 잘못을 저지른 학생을 꾸짖거나, 부모님이 말썽꾸러기 아이를 야단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런 점도 있지만 '책망'의 좀 더 정확한 의미는 영어로 convict 인데, 이는 법적 용어로 ‘죄를 폭로하다’, ‘각성시키다’는 의미입니다. '책망하다'는 말을 공동번역은 '바로 잡아주신다', 현대인의 성경은 '깨닫게 해 주신다"로 되어 있는데 결국 이 말은 '잘못을 깨닫게 하여 돌이킨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성령은 무슨 잘못을 깨닫게 하여 돌이키십니까? 성령은 특히 세 가지 면에서 깨닫게 하고 돌이키십니다. 첫째,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 죄(罪)다', 둘째, '예수님이 의(義)다', 셋째, 세상에 심판(審判)이 있다'는 것입니다. 성령은 사람들에게 이러한 것들을 각성하여 깨닫게 하시고 돌이키십니다.
첫째,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 죄다. 9절을 보십시오.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성령은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 죄임을 깨닫게 하십니다. 물론 세상에 다른 죄들도 많이 있지만, 예수님을 믿지 않음이 정말로 용서 받을 수 없는 가장 큰 죄임을 깨닫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자, 여러분이 길거리에 나아가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당신이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은 죄입니다." 그러면 어떤 반응을 할까요? "이 사람이 미쳤나? 아니, 종교에 자유가 있지 않나? 무슨 그런 독선적인 말을 하는가?" 할 것입니다. 최근에 한 육군 장성이 하급 여군을 성추행했다고 직위해제가 되었고 기소를 당했습니다. 사람들은 죄라고 하면 그런 성추행이나 도둑질이나 강도, 살인 등을 생각합니다. 갑질을 하거나 교통법규 어기는 것들을 생각합니다. 예수 믿지 않는 것을 죄라고 여기지 않습니다. 물론 앞에 열거한 것들도 죄입니다. 그것들뿐만 아니라 성경은 죄의 범위를 아주 폭넓게 말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로마서 1:29-31 에서 우리는 성경에서 말하는 죄의 목록을 볼 수 있습니다.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마태복음 5:22절에 보면 예수님은 형제에 대해 분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미련한 자라고 하는 자마다 지옥 불에 들어갈 것이라고 하십니다. 성경은 심지어 우리가 무슨 일을 할 때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는 것은 다 죄"라고 말합니다(롬14:23). 그래서 실상 해 아래 사는 자 중에 의인은 하나도 없습니다(롬3:10).
그러면 왜 예수님은 9절에서 특히 그를 믿지 않는 것을 죄라고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이는 다른 죄는 다 용서 받을 수 있는 죄이지만 예수님을 믿지 않는 죄는 더 이상 용서받을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내면이 근본적으로 타락하여 죄를 범할 수밖에 없음을 잘 아셨습니다. 행위에 따라 심판하시면 아무도 예외가 없음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그 행위를 따르지 않고 은혜로 구원하고자 하셨습니다. 곧 하나님은 당신의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 주사 인간의 죄 값을 대신 치르는 제물로 삼으시고 그를 믿는 모든 자를 죄 없다고 정하기로 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의 대속의 피를 믿을 때 주홍같이 붉은 죄가 양털같이 희어지게 하셨습니다. 어떤 흉악한 죄인이라고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그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 구원하여 주신다는 것이 복음입니다. 이러한 사죄의 은혜가 누구에게나 주어졌습니다. 그를 믿기만 하면 됩니다. 이는 마치 사형수들에게 주어진 특별사면과 같습니다. 그런데 이를 거절하고 그를 믿지 않으면 이것이야 말로 하나님의 은혜를 거절하는 죄 중의 죄요, 다시는 구원의 길이 없는 죄입니다. 복음이 주어지고 성령이 역사하시면 이 사실을 깨닫습니다. 예수님을 거절하는 것, 그를 믿지 않는 것이 얼마나 끔찍한 죄인지 깨닫게 됩니다.
둘째, 예수님이 의다. 10절을 보십시오.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성령님은 무엇이 ‘의’(righteousness)인지 알려주십니다. 무엇이 의입니까? 예수님이 아버지께로 가신다는 사실이 의에 대해 무엇을 말해줍니까? 이는 예수님이 바로 '의'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예수님의 승천은 그의 십자가에 죽으심과 부활의 결말입니다. 그가 부활하셨다는 것은 그가 죄가 없으셨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그가 승천하여 거룩하신 하나님께로 가신다는 것 자체가 예수님이 의로운 분이시라는 것을 증명합니다. 완전한 '의'가 없이는 결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절대적으로 거룩하시고 의로우신 아버지 하나님의 우편으로 승천하신 예수님은 완전한 의(Perfect Righteousness)가 되셔서 그를 믿는 모든 자에게 그의 의를 나누어주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사람들은 나름대로 의를 쌓고자 애를 씁니다. 실상 기독교를 제외한 세상의 모든 종교는 자기 의를 쌓아서 구원의 가능성을 높여보려는 시도를 하는 것입니다. 참선을 하고, 도를 닦고, 경전을 읽고 지키고, 도덕과 선행을 하고, 구원의 다섯 기둥을 수행함으로 자기 의를 쌓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의를 쌓아도 하나님이 보시기에 인간의 의는 더러운 옷과 같습니다(사64:6). 더럽고 낡고 냄새나는 넝마와 같습니다. 성령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그 어떠한 의로도 하나님께 갈 수 없고 오직 완전한 의가 되신 예수님을 덧입어야 갈 수 있음을 가르쳐 주십니다. 스가랴 3장에 보면 대제사장 여호수아가 하나님 앞에 선 장면이 나옵니다. 그는 대제사장으로 율법을 지키며 종교적으로 거룩한 삶을 살았습니다. 도덕적으로 선행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보시기에 그는 더러운 옷을 입은 자요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자였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더러운 옷을 벗기도록 하고 그에게 아름다운 옷을 입게 하십니다(슥3:3,4). 이 아름다운 옷을 입는 것이 바로 우리가 예수님으로부터 의를 받는 것입니다. 이 의는 율법 외에 다른 의입니다(롬3:21).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우리는 예수님과 연합하게 되고 그 안에 거하게 됩니다. 그때 우리에게 그의 의가 주어집니다(고후5:21, 롬3:22). 성령은 사람이 하나님께로 가는 길은 오직 예수님을 믿고 그의 의를 덧입는 길 밖에는 없다는 것을 깨우쳐 주십니다.
셋째, 세상에 심판이 있다. 11절을 보십시오.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라." 성령께서는 이 세상 임금이 이미 심판을 받았다는 것을 깨우쳐 주십니다. (NAS; has been judged). 또한 유일한 의가 되신 예수님을 믿지 않고 이 세상 임금인 사탄을 좇아가는 자들도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을 깨닫게 해 줍니다. 천로역정에 나오는 기독자는 한 책을 읽다가 울며 떨며 근심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자기가 장차 멸망할 세상에 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성령께서는 이 세상이 망할 세상이요 내가 이대로 살다가는 멸망하고 하나님의 심판에 처해진다는 것을 깨닫게 하십니다. 사도행전 2장을 보면 베드로가 백성들에게 오순절 설교를 합니다. 이를 들은 백성들의 마음이 성령의 역사로 찔림을 받아 말합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죄, 의, 심판에 대해 깨닫고 “아, 내가 죄인이구나, 내가 의가 없구나, 내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망하게 되었구나!” 하고 깨닫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각성을 갖고 예수님께 나아오는 것- 이것이 신앙의 첫 걸음이요 크리스천이 되는 첫 단계입니다.
이상을 볼 때, 성령님은 무슨 일을 하러 오신 분임을 알 수 있습니까? 세상으로 하여금 죄, 의, 심판에 대해 바로 깨닫게 하며 유일한 구원의 주 예수님께 나아와 그를 믿도록 하는 분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성령님의 역사는 우리 가운데 항상 있는 실제적인 역사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성령의 역사를 병고치고 방언하고, 사람의 마음을 흥분시키는 것으로 오해합니다. 이는 성령의 역사의 극히 일부분이요, 또 특별한 경우에 나타나는 것에 불과합니다.
12,13절을 보십시오.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리라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제자들은 아직 믿음이 연약했습니다. 또한 아직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으심과, 부활, 승천하심이 일어나지 않았기에 이러한 일들을 깨닫기 어려웠습니다. 보혜사는 진리의 성령이십니다. 여기서 진리는 예수님을 말합니다. 또 성경 전체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기독교사상 전체를 의미한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 전체나, 기독교사상 전체도 결국 예수님을 말하는 것입니다. 다른 종교들은 교훈을 말하지만 기독교신앙은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을 말합니다. 진리의 성령께서는 우리 신자들을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십니다.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과 그의 말씀을 더욱 깊이 깨닫도록 인도하십니다. 또한 성령님은 오직 들은 것을 말하십니다.(개역한글: 듣는 것, what he hears) 성령님은 삼위 하나님의 한분으로 성자이신 예수님과 성부이신 아버지가 하시는 말씀 안에서 말씀하십니다. 성령은 장래 일을 알리십니다. 장래 일'이란 무슨 직통계시같은 독창적인 예언의 말씀이 아니라, 전체 구속 역사 중 예수님이 성취하지 않으신 남은 일에 관한 것이요 앞으로 성취될 일입니다. 성령의 이러한 사역 역시 예수님의 말씀과 별개가 아니라 철저히 그의 말씀과 결부되어 주어지는 것입니다. '
14,15절을 보십시오.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 무릇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하였노라." 성령은 겸손한 영이십니다. 자기를 드러내지 않고 예수님의 영광을 나타내십니다. 성령의 강력한 역사가 있는 곳에 예수님이 유일한 진리요 길이요, 우리의 의가 되심이 드러납니다. 예수님이 아름답고 존귀하고 참되시고 영광스런 구주이심이 드러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의 영광을 보고 예수님께 나아옵니다.
제가 2008년 퍼듀수양회에 ‘들소리신문사’ 조회장님을 모시고 간 적이 있습니다. ‘들소리신문’은 그 이름과 같이 세례요한처럼 시대의 죄 문제를 지적하여 외치는 기독교신문입니다. 수양회 기간 중에 어느 날 대강당에 같이 앉았는데 이 분이 제게 말하였습니다. "UBF는 성령의 역사가 참 많군요." 저는 "아니, 우리 모임이 은사주의 모임 같이 방언하거나 치유 사역하는 것도 아닌데 무슨 성령의 역사가 많다고 하시는 것입니까?" 그분은 "복음을 듣고 불신자가 예수님을 믿는 자가 되고, 예수님을 위해 사는 목자가 되고, 선교사가 되어 이방인들에게 예수님을 전하고 그들이 또한 신자요 목자가 되는 인생 소감을 들으니 이것이야 말로 성령의 역사가 아니고 무엇이냐“하였습니다. 이 분이 거의 모든 선교단체나 교회에 대해 늘 비판적인 분이신데 우리 모임에 대해 그와 같이 말하는 것을 듣고 제가 놀랐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성령의 역사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말씀을 통해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 깨닫게 되고 예수님만이 유일한 구주가 되심을 믿게 되는 것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그 주님의 구원의 은혜를 감사하고 일생을 주님을 위해 헌신하기로 결단하는 것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이 세상에 대한 복음 역사의 주체는 성령이십니다. 말씀이 들어가고 기도가 쌓이는 곳에 역사하사 죄인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는 역사를 이루십니다. 복음역사는 신학 교리나, 이론이나, 좋은 교육으로 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가 전제된 성령의 책망하시는 역사로만 됩니다. 우리가 이를 확신하고 더욱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구원과 헌신의 역사를 섬기기를 기도합니다. 성령께서 우리 모임 가운데 충만히 역사하여 주시길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성령의 역사에 대해 가르치신 후 자신의 떠나실 것을 구체적으로 말씀하십니다. 16절을 보십시오.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시니." 이 말씀은 예수님이 조금 있으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것과 또 조금 있으면 부활하실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또한 십자가의 고통은 잠깐이요 부활의 영광은 영원함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이렇게 하심으로 그들이 부활의 영광을 바라보고 임박한 고난을 극복하도록 도우셨습니다.
20-22절을 보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때 세상은 승리의 개가를 부르며 기뻐하지만 제자들은 곡하고 애통하게 됩니다. 그러나 잠시 후 예수님이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시고 성령이 오심으로 제자들의 근심은 도리어 기쁨으로 변하게 됩니다. 이는 마치 여인의 해산과도 같습니다. 여인이 해산하게 되면 산통으로 인하여 근심하지만 아이를 낳으면 새 생명을 탄생한 기쁨으로 그 동안의 고통을 기억하지 않습니다. 23,24절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이 누릴 수 있는 또 다른 기쁨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제자들은 역경 가운데서도 무엇이든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연약한 제자들에게 주신 은혜로운 약속이요 큰 특권입니다.
28절을 보십시오. "내가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왔고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노라 하시니." 이 말씀은 예수님의 전 생애를 한마디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자 제자들의 영적인 눈이 뜨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들은 비로소 예수님의 말씀을 영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마침내 입을 열어 신앙고백을 하였습니다(30). 예수님은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평안을 주시며 격려하십니다. 33절을 보십시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이 얼마나 우리에게 힘과 위로와 격려가 되는 말씀입니까! 세상을 패배한 사람이 우리에게 담대하라고 백번을 외쳐도 그것은 공허한 외침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죄와 죽음까지도 정복하신 우리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기에 우리가 믿을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사도행전 2장을 보면 오순절에 성령이 오십니다. 성령이 강림하신 그 사건은 예수님이 마구간에 탄생하신 것만큼 기쁘고 위대한 사건입니다. 세상에 오신 성령님은 신자들을 결코 떠나지 않고 영원토록 함께 하십니다. 신자들이 전하는 복음을 통해 세상 사람들을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하여 책망하십니다. 우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며 장래 일을 알게 하십니다. 우리가 성령을 의지하는 가운데 양들 가운데 회심의 역사를 섬기며 또한 우리 자신도 날마다 진리 가운데 성장하기를 기도합니다. 성령이 주시는 평안을 누리며 고난이 많은 세상에서 담대한 증인의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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