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제 18강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말씀 요한복음 17:1-26 요절 요한복음 17:17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요한복음에는 다른 복음서에서는 기록된 겟세마네 기도와 주기도문이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대신에 다락방에서 드리신 이 긴 기도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기도는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이기에 예수님의 간절한 바램이 무엇인가가 잘 나타나 있습니다. 본문통해 예수님은 제자들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기를 원하시는 지? 그렇게 살 수 있는 비결은 무엇인지 잘 배우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13-16장에 이르는 긴 말씀을 제자들에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말씀하십니다(1a). 시편에 보면 시편기자가 “여호와여 나의 영혼이 주를 우러러 보나이다” 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미가 선지자는 “ 오직 나는 여호와를 우러러 보며 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나니 나의 하나님이 나에게 귀를 기울이시리로다” 라고 기도했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교만하다가 폐위당했는데 겸손히 하늘을 우러러 보았을 때 그의 총명이 돌아오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미로의 탈출이라는 영상물을 보면 한 청년이 미로를 헤멥니다. 어디에도 길이 없고 깊은 절망에 빠집니다. 그런데 이 청년이 어떻게 그곳을 빠져나오냐면 그가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았을 때입니다. 사실 사방이 막혀있었지만 하늘은 어디나 열려있었습니다. 쳥년은 능력있고 친절한 그분의 팔을 붙잡고 미로를 탈출합니다. 저도 힘들 때면 시편 121편 1,2절을 생각합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여기서 산은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시온산 입니다. 즉 시인이 힘들 때 눈을 들어 하나님을 찾았고 자신을 환난에서 건지시는 하나님을 체험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4장을 말씀하셨지만 하나님께 1장의 기도로 드림으로 다락방성경공부를 완성하셨습니다. 우리도 가르침을 가르침으로만 끝내지 않고 기도함으로 무릎으로 승부하는 성경선생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무엇을 위해서 기도하셨습니까?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1b)” 예수님은 첫 번째로 자신을 위해서 기도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은 기도는 자신을 위해서 하면 안된다고 말합니다. 자신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너무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이고 스케일이 작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먼저 자신을 위해서 기도하셨습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삶의 중심은 나입니다. 내가 없으면 이 우주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을 위해서 먼저 기도하는 것을 꼭 비판할 필요는 없습니다. 자신을 위한 기도는 그만큼 절실하고 피부에 와닿아 우리의 기도가 허공에 뜨지 않게 해줍니다. 자신을 위해서 기도하는 가 그렇지 않는 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무엇을 위해서 기도하는 가가 중요합니다. 먼저, 예수님은 자신이 영화롭게 되기를 원하였고 그 영화롭게 됨을 통해서 아버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를 기도하셨습니다. 자신을 영화롭게 되도록 기도하는 것은 나쁜 기도제목이 아닙니다. 영화롭게 되는 것의 반대는 수치스럽고 불명예스럽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한번 밖에 없는 나의 인생이 진정 영화롭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께 있어서 진정으로 영화롭게 되는 것은 십자가를 지고 죽으시는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영화롭게 되는 것은 부활하고 승천하시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냐 반문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영화는 십자가를 지고 죽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살리고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가 되게 하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을 존경하고 찬양하는 이유는 예수님이 부활하사 하나님 보좌에 앉아계시기때문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지위와 타이틀 때문에 예수님을 존경하고 찬양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을 존경하고 사모하고 찬양합니다. 예수님이 자기 정욕과 만족을 위해서 살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뜻과 우리를 위해서 사신 삶의 완성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때문에 십자가는 예수님의 영화요, 예수님이 가장 찬양받으셔야 할 이유입니다. 우리도 어떻게 사는 것이 영화롭게 사는 것일까요? 우리가 자기 정욕과 만족만을 위해 살면서 존경과 칭찬과 영광을 받으려고 한다면 그것은 욕심입니다. 또 우리가 다른 사람이 나를 존경하지 않고 대접하지 않는다고 화를 내면 그것은 수치입니다. 사람의 영화는 타이틀, 자리, 나이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자리가 높아도 속으로 무시하고 수치스럽게 여길 수 있습니다. 반면에 비록 타이틀은 없어도 사람들이 존경하고 사모하며 자랑이요 자부심으로 여길 수도 있습니다. 그 차이는 그 사람이 예수님처럼 정말 말없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사는 가, 그렇지 않는 가로 결정됩니다. 그러니 우리도 예수님처럼 십자가를 짐으로 나의 삶이 진정 영화로워질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왜 예수님은 십자가를 위해서 기도하셨습니까? 자기 힘으로는 도저히 질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을 놓고 하지는 않습니다. 힘들고 어렵고 불가능해 보이는 것이 대상입니다. 십자가는 연약한 인성을 가지신 예수님도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야 질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도 연약한 인간의 몸으로 십자가를 지셨으므로 우리도 아무리 부족해도 기도하면 십자가를 지고 그 길을 걸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궁극적인 기도제목은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인생목적이자 우리들의 인생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무에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만물이 그에게서 말미암고 그에게로 돌아가는(롬11:36) 창조주 하나님만이 절대적이고 영원하고 불멸의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입니다. 이 하나님에 비하면 그 어떤 위대한 인간과 그 어떤 주의 종도 자신의 영광을 일말이라도 내세울 수 없습니다. 저는 종종 주일예배 때 사회자가 기도하는 내용을 통해서 도전을 받고 정신이 확 들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이 예배를 통해서 오직 하나님만 영광을 받으시기를 원한다는 내용입니다. 어떤 교회에서는 예배시간에 하나님보다 목사님이 드러나기도 합니다. 혹은 하나님과 주님의 종의 영광이 거의 동등되게 나타납니다. 혹은 하나님의 영광이 조금 더 드러나기는 하지만 주의 종도 언제나 영광을 챙기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실상 하나님의 영광에 비하면 우리 인간의 영광은 반딧불만도 못합니다. 태양앞에서 우리가 반딧불을 켜고 밝기를 자랑하고 돌아다닌다면 얼마나 무의미하고 우스운 일인가요? 일제 강점기에 황해도 제령에 정찬유 장로는 31살에 장로가 되었고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약 3만평의 대지 위에 성전을 건축했는데 당시 돈으로 3만환 오늘날로 하면 약 20억원을 내었습니다. 당시 이 정도 예배당을 지었으니 얼마나 영향력있는 분이었습니까? 제직회에서는 예배당을 지은 후 머릿돌에 화강암으로 ‘정찬유 장로 기념 예배당’이라고 조각하여 아름다운 표석을 붙였습니다. 그러자 그 장로님은 그 다음부터 교회에 나오지 않으셨습니다. 제직들이 무엇이 서운해서인가 하여 심방을 갔더니 그분은 그 머릿돌에 조각된 표석때문이라고 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돈 몇 푼 헌금했다고 정찬유 장로 기념 예배당이 될 수가 없습니다. 예배당은 주님의 예배당입니다. 영광 받으실 이는 내가 아니라 오직 주님뿐입니다. 나는 주님께서 주인 노릇 하는 교회에 다닐 뿐이지 인간 정찬유가 주인 노릇하는 교회에 다니지 않겠습니다.” 이에 목사님과 제직들이 눈물을 흘리며 그 화강암 조각을 다 깨뜨려 버리자 그 장로님은 다시 그 교회에 나오셨습니다. 교회나 일반사회에서나 왜 많은 문제가 생깁니까?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아닌 반딧불보다 못한 자기영광을 구하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조금이라도 노력한 만큼 인정을 받지 못하면 너무나 힘들어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자기죽음을 통해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신 예수님을 배우고 정찬유 장로님처럼 하나님의 영광만 구한다면 우리는 어떤 공동체에서도 자유함을 가지고 섬길 수 있습니다. 오히려 헛된 자기영광을 구하지 않게 된 것에 대해서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영광만을 구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미움과 분노와 억울함과 손해의식이 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만을 구하는 것은 말같이 쉽지 않고 죄악된 인간으로서 이를 수 없는 경지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도 정찬유 장로님에 주셨던 그 자유와 겸손을 주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여 자기를 낮추고 자기를 죽이셨습니다. 이럴 때 예수님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은 예수님에게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즉 만왕의 왕, 만주의 주가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얻은 권세를 자신에게 주신 모든 사람들에게 영생을 주시는 데 사용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목적으로 예수님께 권세를 주셨고 예수님도 그런 목적으로 권세를 사용하셨습니다. 권세를 가지고 갑질하는 사람들 때문에 사람들이 상처를 받고 고통을 당하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요새는 을질이라는 것도 있습니다. 을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오히려 그 위치를 역이용하여 갑들에게 횡포를 부리며 괴롭히는 것입니다. 하여간 사람들은 조그만 권세라도 있으면 자신을 드러내고 결과적으로 다른 사람을 괴롭히는 데 씁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에게 주어진 만민의 왕으로서의 권세를 오직 사람들을 살리는 데 사용하셨습니다. 특히 영생을 주시는 데 사용하셨습니다. 여기서, 잠깐 우리가 영생이란 무엇인가 생각해 봅니다. 영생이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영생이란 단순히 삶의 길이가 아니라 삶의 질입니다. 삶의 길이가 영생이라면 지옥도 영생일 것입니다. 영생이란, 순간을 살아도 영원함을 느끼며, 최고의 생명력 곧 행복과 만족과 기쁨을 누리며 사는 것입니다. 이런 영생은 어떻게 얻습니까? 첫째로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 존재의 기원을 알지 못하고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지를 모른다면 어떻게 최고의 생명력을 느끼며 살 수 있겠습니까? 허무와 무의미가운데 방황할 것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이 보내신 그리스도 예수님을 알아야 영생을 얻습니다. 유대인들은 오직 하나님만 알고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이런 그들에게 왜 영생이 없습니까? 그것은 자신들이 죄인임을 알지 못하고 자기 의를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의를 추구하는 인간은 불의감과 위선으로 결코 행복할 수 없습니다. 때문에 우리가 창조주 하나님과 함께 반드시 구주 예수님을 알아야 영생을 얻습니다. 이런 면에서 유대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영생이 없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모른다고 하는 것은 결국 사실 그분을 보내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어리석은 부자처럼 많은 부를, 어떤 사람은 니고데모처럼 권력과 명예를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사람들의 환호와 갈채를 받는 삶을 삽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우리 존재에 영생을 주지 못합니다. 우리는 부자도 아니고 대통령도 아니고 인기스타도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알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보내셔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 예수님도 알게 하셨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성공적인 인생을 산 사람은 영생을 얻은 사람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영생을 누리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예수님은 이제 십자가를 지고 승리의 귀환을 앞두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인생 리포트를 하나님께 아뢰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이 세상에서 아버지께서 하라고 하신 일을 이루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 것을 보고 하십니다(4). 우리도 인생을 회고하면서 하나님앞에서 삶을 정리하며 보고할 날이 가까이 오고 있습니다. 수양회 때 이병두 목자님은 아주 인상깊은 광고를 하셨는데 학생들은 50년이 남았는데 자신은 이제 아버지께 돌아갈 때가 되었는데 별로 드릴 것이 없음을 깨닫고 안타깝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나이드신 분이 먼저 꼭 인생결산을 한다는 보장도 없습니다. 이번 해병대 헬기 사고에서 이모세 형제님의 친구와 진형목자님의 동기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긴장된 실존입니다. 우리가 완벽한 삶을 살순 없지만 최선을 다해 산다면 떳떳할 것입니다. 지미 카터가 대통령이 되고 노벨평화상을 받은 사람이 되었는 데 그것은 사관학교 상담시에 “귀관은 최선을 다했는 가?”라는 상관의 질문을 받은 것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언제 주님께 돌아가든지 사도바울처럼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나의 믿음을 지켰습니다.(딤후 4:7)” 또 예수님처럼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하신 일을 다 이루어 아버지를 이 땅에서 영화롭게 하였습니다(4).” 라고 고백할 수 있는 우리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이제 창세전의 영화를 회복하십니다. 그 영화는 창세 전보다 더욱 빛날 것인데 그 이유는 창세전의 영화는 존재론적 영화였다고 하면 이제 창세후의 영광은 십자가를 감당하신 영화로서, 그 삶과 인격이 더해진 더욱 빛나는 영화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예수님의 기도제목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제자들을 위한 기도, 그리고 제자들의 제자들을 위한 기도입니다. 특별히 제자들을 위해서 기도하십니다. 예수님의 사랑과 관심은 제자들에게 있었는데 먼저 제자의 정의를 살펴 보겠습니다. 제자는 예수님이 아버지의 이름을 주어서 아버지를 인격적으로 알고 아버지께서 그리스도를 보내신 것을 믿고 아버지의 말씀대로 살려고 하는 이들입니다(6-9). 예수님은 수많은 무리와 세상을 위해서 기도하지 않으십니다. 제자들을 위해서 기도하십니다. 예수님은 왜 제자들을 귀하게 여기십니까?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며 아버지께서 친히 주셨기 때문입니다(9b,10a). 또 겸손히 말씀을 받고 믿고 순종하는 이들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제자들을 통해서 영광을 받으셨습니다(10b).이런 소수의 제자들이 세상의 미래입니다. 11절을 보십시오.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그들은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은 거룩하신 아버지께서 제자들을 세상에서 보전해 주시도록 기도했습니다. 보전(保全)이란 보존(保存)과 다르게 퀄리티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지 않으시고 세상에 살면서 보전되기를 원하십니다. 17절을 보면 ‘보전’이란 단어가 ‘거룩’이란 단어로 대체되었습니다. 거룩이란 구별됨이란 뜻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모두 그들의 거룩함을 보전 하기원하십니다. 왜 세상에서 제자들이 보전되기 어렵습니까? 악의 유혹이 있기 때문입니다. 악에 빠지지 않게 기도하신 것을 보면 악은 제자들을 유혹하여 그길로 들어서게 하는 함정이나 수렁같은 존재임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거룩하게 사는 것이 힘든 것은 세상이 거룩한 삶을 사는 제자들을 그냥 내버려 두지 않고 미워하고 박해 하기때문입니다. 제자들을 거룩하게 살지 못하게 하는 두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유혹이고 하나는 박해입니다. 이렇게 유혹과 박해를 이기면서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거룩함과 함께 어려운 것이 제자들이 하나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제자들의 제자들을 위해서 공통적으로 기도한 것은 ‘하나됨’이었습니다. 하나됨은 제자의 퀄리티를 보전하면서도 제자들이 나뉘어지지 않고 사랑의 연합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단지 물리적으로 나뉘어지지 않는 것이 아니라 성부성자성령의 하나됨처럼 퀄리티있게 하나되어야 합니다. 하나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둘이 하나됨을 유지하기도 힘듭니다. 하나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죽도록 사랑한다는 사람들이 원수가 되어 헤어집니다.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것이 하나되는 것이고 특히 예수님의 제자들이 하나되는 것도 만만치 않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어려운 하나됨을 잘 이루면 불신자들이 감동을 받고 제자공동체에 들어오게 됩니다. 하나되는 것은 해도 되고 안되면 안된다고 생각하고 끝낼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주신 가장 중요한 첫 계명이기 때문입니다. 자, 여러분 거룩함과 하나됨 이것이 가능한 것입니까? 어렵지만 가능합니다. 만약 가능하지 않는 것을 우리에게 명령으로 주고 가셨다면 이것은 예수님이 우리를 희망고문하시는 것이요 속이시는 것이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가능할까요? 첫째로 기도로 가능하며 둘째로 말씀으로 가능합니다. 첫째로 기도로 가능합니다. 사람의 힘으로 불가능하기에 예수님은 제자들을 위해서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본문에서 한번 기도한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체험하신 분(히 4;15)으로 우리를 위해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서 간구하고 계십니다(롬 8:34). 그 기도의 힘으로 우리는 유혹과 핍박을 이길 수 있습니다. “누군가 너를 위해 기도하네~”라는 찬송이 있습니다. 워룸(War room) 영화를 보면 남편이 범죄를 하려고 하는데 아내가 기도의 전쟁을 치루고 있기 때문에 결정적인 순간에 남편이 구토를 느끼면서 죄의 마수에서 건짐을 받게 됩니다. 보통 기도하는 어머니를 둔 자녀들은 연약함을 이기고 승리합니다. 저도 어머니를 잃으니 어려운 일이 많아졌습니다. 어떤 목자님도 그런 비슷한 고백을 하면서 이제 자신이 기도해야 하겠다고 말씀하였습니다. 우리는 누군가의 중보기도로 거룩한 삶을 살 수 있고 서로사랑하고 하나될 수 있습니다. 특히 대제사장 예수님의 기도 때문에 가능합니다. 예수님의 기도 때문에 연약한 사도들이 세상을 이기고 세상을 정복하는 선교사들이요 대사도들이 되었습니다. 또 예수님은 도저히 하나될 수 없는 이들을 위해서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못 박는 군병들을 위해서 기도하셨습니다. 그랬을 때 그들의 수괴인 백부장이 변화되어 예수님과 하나 되었습니다. 하나됨은 사람의 힘으로 불가능합니다. 섣불리 하나 되려고 하다가는 역효과가 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처럼 많은 기도를 할 때 성령이 역사하여 도저히 하나될 수 없는 사람과도 하나되게 하실 것을 믿습니다.
제자들이 거룩하게 살고 하나될 수 있는 두 번째 비결이 무엇입니까? 다같이 17절을 읽겠습니다.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그 비결은 바로 진리를 붙드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진리는 ‘알렉세이아’ 불변하고 신실한 그 어떤 것을 말합니다. 곧 하나님의 말씀을 뜻합니다. 우리가 말씀을 붙들 때 말씀에 담긴 깊은 진리를 깨닫게 됩니다. 그 진리는 우리를 사로잡습니다. “본질이 이긴다”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는데, 결국 진리가 이깁니다. 진리가 가장 파워풀하고 진리가 가장 매력적입니다. 그래서 진리에 심취한 사람은 모든 거짓과 속임수, 유혹을 이길 수 있습니다. 가장 좋은 것에 붙잡힌 사람은 덜 좋은 것곽 악의 속임수를 과감하게 떨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진리로 거룩해지도록 기도하셨습니다. 왜 예수님은 진리의 말씀을 주신 것으로 끝내지 않고 기도하셨을 까요? 그것은 말씀을 형식적으로 붙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형식적으로 붙들고 있으면 말씀이 짐이 되고 부담이 될 뿐입니다. 형식적인 말씀은 무거운 비행기동체와 같습니다. 그러나 기도지원을 받아서 말씀이 깊이 역사하면 어떻게 됩니까? 말씀은 거룩하게 사는 데 비행기의 엔진처럼 큰 힘이 됩니다. 네이버 UBF 공식까페에 보닌 이런 글이 있었습니다. “파고 파고 또 파라, 모든 뿌리는 깊은 곳에 있다. 섣부르게 파면 의심만 남는다” 이 말은 우리가 말씀을 깊이 받아야 함을 가르쳐줍니다. 말씀이 우리를 사로잡으면 우리는 기쁨으로 거룩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사상가, 사상범들의 특징은 무엇을 해도 힘들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신이 깨달은 사상으로 마음의 깊은 곳이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거룩해지고 하나되려고만 하지 않고 말씀을 통해서 진리를 깊이 깨닫고 진리에 사로잡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성경공부자체를 위해서 기도해주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을 공부하고 양식을 먹고, 소감을 쓰는 시간들이 가장 행복하고 가장 파워풀한 시간이 되고 우리의 사상의 뿌리가 바뀔 때 우리는 힘들지 않게, 즐겁게 거룩한 제자의 삶, 하나되는 관계를 만들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생각해 볼 점은 주님이 왜 우리가 세상에서 살면서 세상과 다르게 살아야 하는 고통, 하나되기 힘든 사람과 하나되는 십자가를 지우셨는 가입니다. 차라리 데려가 버리시거나 아니면 그런 관계를 만들지 말지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이유가 고통이 아니라 기쁨을 충만히 누리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말씀 하셨습니다(13). 세상에서 세상방식으로 살지 않고 주님의 뜻을 선택함으로 주님의 사랑이 임하는 기쁨을 누립니다. 한계를 극복하면서 믿음을 배우고 기도를 배웁니다. 무엇보다 천박하게 살지 않고 거룩하게 사는 기쁨을 누립니다. 이것은 뒷끝 작렬하는 죄의 기쁨과는 비교할 수 없는 진정한 기쁨이요 건강한 기쁨, 최고의 기쁨입니다. 결론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사랑하셨고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그들이 거룩한 삶을 사는 기쁨을 누리기를 원하셨습니다. 이를 위해서 기도해주셨고 말씀을 깊이 붙들도록 방향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깊이 묵상하는 가운데 마음이 변하여 주님이 간절히 원하시는 거룩한 삶을 즐겁게 살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