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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018년 로마서 제6강 '너희 지체를 하나님께 드리라'(6:1-23)2018-09-11 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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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로마서 6

 

 

너희 지체를 하나님께 드리라  

 

말씀/ 로마서 6:1-23

요절/ 로마서 6:12,13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지지난 강의에서 바울은 우리가 어떻게 구원을 받는 가, 이신칭의의 원리를 다루었습니다. 지난 강의에서는 그렇게 의롭다함을 받은 이의 삶이 어떻게 달라졌는가를 알려주며 그것을 잘 누리도록 권면하였습니다. 오늘 강의는 이신칭의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 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1) 바울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이신칭의의 원리를 말하면서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다는 표현을 썼습니다. (5:20) 그런데 이말에 기초해서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를 짓겠다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었습니다. 또한 이신칭의의 원리가 도덕적 방종을 가져 올까봐 염려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이에 대해서 바울은 그와 같은 것들은 이신칭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이들의 무지의 소치임을 가르쳐 줍니다. 오히려 이신칭의의 구원의 원리가 거룩한 삶을 살게 한다는 것을 증거합니다. 우리가운데 진짜 이신칭의의 은혜를 입은 사람은 거룩한 삶을 삽니다.

 

그러면, 왜 이신칭의를 얻은 사람들은 죄에 거하지 않습니까?

 

첫째로, 죄에 대해서 이미 죽었기 때문입니다.

죽은 자는 반응하지 않습니다. 크리스천들은 죄에 대해서 이미 죽은 이들입니다. 그들은 더 이상 죄에 세계에 살지 않습니다. 죄의 유혹에 조금 시달리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 죄의 세력에서 출애급한 이들입니다. 우리는 죄에 대해서 죽은 사람들입니다. 동의하십니까? 그러면 도대체 언제 죄에 대해서 죽었습니까? 3,4a를 읽겠습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세례받을 때 우리가 죽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세례는 의식적인 물세례가 아니라 성령세례를 말합니다. 성령세례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깊이 영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깊이 영접하므로 예수님이 죽으실 때 내가 죽고, 예수님이 부활하실 때 내가 부활하는 것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쾅쾅쾅!!”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의 손에 부탁하나이다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운명하실 때 나도 함께 죽는 것을 경험하였습니다. 이제 나는 죽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죽음을 깊이 영접하면 내 안에서 죄의 소원도 죽는 것을 체험합니다.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죄의 소원대신에 거룩한 삶을 살고자 하는 소원이 생기는 것을 체험합니다. 바로 이런 사람이 성령세례를 받은 사람입니다. 물세례는 성령세례를 받은 것을 외부에 공포하는 행위입니다. 성령세례 받은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고백 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2:20a) 우리는 대부분 이런 체험을 했습니다. 그러나 아직까지 이런 체험이 없이 죄와의 투쟁만 하려고 하는 분이 있다면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는 체험을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면 죄와의 투쟁이 훨씬 쉽습니다. 죄에 대해 살아있는 사람과 죄에 대해 근본적으로 죽은 사람이 죄와 싸우는 것이 다릅니다. 우리 모두에게 예수님의 십자가를 깊이 체험하여 죄에 대해서 죽는 경험이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새 생명가운데 행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소원을 알기 때문입니다.

4b를 읽겠습니다.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은 예수님을 부활시킨 것처럼 우리가 새 생명 가운데 살기 원하십니다. 새로운 삶을 사는 것, 이것이 하나님이 값비싼 댓가를 치루고 우리를 살리신 목적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새 삶이란 우리에게 구원의 댓가로 요구하신 의무가 아닙니다. 예를 들면 벌레가 나비가 되었는데요, 그 벌레 더러 이제 나비로 살라고 하는 것이 어찌 부담을 지우는 것이라 할까요? 행복한 삶으로의 초대이지요! 자동차만 타고 사는 이에게 이제 비행기를 타고 좀 넓고 멋진 세계를 경험하라고 요구하는 것이 어찌 부담을 주는 것이겠습니까? 하나님은 예수님의 십자가로 죄사함을 받고 그의 부활하심과 함께 부활한 우리가 이제는 과거와는 전혀다른 차원의 새로운 삶을 살기를 간절히 원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죄악된 삶을 청산하고 새 생명가운데 행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이상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죽음과 함께 우리가 죄에 대해 죽었고 이제 새 생명을 소유하게 되었음을 배웠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영적으로 예수님과 함께 죽는 것을 경험하였다고 하나 그것은 영적이고 법적인 것이고, 실제 우리의 육신의 몸은 살아있습니다. 그리고 그 몸은 죄의 소욕을 여전히 가지고 있습니다. 죄의 유혹은 불씨같은 죄의 소욕을 부채질하며 우리를 죄의 길로 매순간 유혹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합니까? 영적인 투쟁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성화에의 투쟁입니다. 성화에의 투쟁은 크게 두 단어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여길지어다드리라입니다.

 

첫째로, 여길지어다.”(11)

10,11절을 읽겠습니다. 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가 살아계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심이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우리의 영혼은 거듭났지만 죄성을 가진 육신은 아직 살아있기에 거듭난 영혼과 육체의 갈등이 있습니다. 때문에 우리의 마음은 죄에 대하여 죽었지만 우리의 육체가 죄에 대해 반응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자신의 전인(全人)에 대해 죄에서 죽었고 하나님에 대하여는 산 자라는 사실을 늘 새롭게 하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이 작업을 사도 바울은 여길지어다한 단어로 표현했습니다. 즉 크리스천은 때마다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하나님께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기는 투쟁을 해야합니다. “나는 죽었다” “나는 죽었어” “죽은 내가 돌아다니면 안되지.. 그러면 나는 좀비지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이런 영적인 투쟁을 했던 분이 바로 성어거스틴입니다. 그는 정욕과 방탕에 깊이 물들었던 사람이었는 데 극적으로 거듭나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안에 정욕과 방탕의 소원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길을 걷다가 자신과 알고 지내던 창녀를 만났습니다. 그녀는 어거스틴에게 어거스틴 오빠, 오빠 반가워요~” 하며 아는 체 했습니다. 만약 어거스틴이 그녀를 아는 체하고 그녀와 대화를 나누었다면 그는 다시 정욕과 방탕에 빠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단호하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당신을 모르오. 나는 어거스틴이 아니요. 당신이 알던 어거스틴은 죽었소그는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하나님께 대하여는 산 자로 여겼습니다. 그럴 때 그는 끈질긴 죄의 유혹을 이기고 새 생명가운데 행하게 되었습니다. 사람마다 끈질기게 괴롭히는 죄가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정욕과 방탕이지만 어떤 사람은 먹는 것과 게으름의 죄가, 다른 사람은 무정, 무자비, 원망과 미움과 분노입니다. 이렇게 우리에게 죄의 유혹이 다가와, 죄의 불씨를 불러일으키고자 할 때 우리는 단호히 우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하나님께 대하여는 산자로 여겨야 하겠습니다.

 

둘째로, 드리라”(13)

죄와의 싸움은 단순히 우리가 죄에 대하여 죽은 자로 여기며, 죄의 소원에 순종하지 않는 것으로 되지 않습니다. 좀 더 적극적인 투쟁이 필요합니다. 12,13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하지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와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몸은 죽을 때까지 죄성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안에 불씨처럼 존재하며 언제든지 확 타올라 자신을 망치고 다른 사람들을 망치는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이런 우리 몸의 문제를 알기에 우리의 몸을 죄에게 드리지 말고, 적극적으로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고 권면합니다. 우리 몸은 이중적입니다. 적극적으로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면 한없이 거룩해지며 많은 의로운 행위들을 하며 하나님과 사람을 기쁘게 하는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반면에 죄에게 내주기 시작하면 정말 사악하고 추악한 범죄의 도구가 되며 비참한 삶을 살 수도 있습니다.

 

한 성경학자는 이런 두 가지 가능성을 가진 우리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두 마리의 말이 있습니다. 검은 말과 흰 말입니다. 어떤 말이 이길까요? 내가 먹이를 주는 말이 이깁니다우리가 이신칭의에 대해서 오해할 수 있습니다. 이신칭의는 단번에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단번에 나의 전존재가 거룩하여진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신분만 바뀌었습니다. 또한 우리의 영혼만 거듭났습니다. 우리의 실존은 그대로입니다. 이신칭의는 한 번에 이루어지지만 그 변화된 신분에 걸맞는 사람이 되는 것은 계속하여 진행형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즉 이신칭의는 단번에, 성화는 여러 번에 걸쳐서 이루어집니다. 몸짱이란 말 아시죠? 성화는 쉽게 말하면 우리가 영짱이 되가는 것입니다. 근데, 몸짱이 하루아침에 됩니까? 우리가 휫트니스 센터에 등록 하고 회원이 되면 그 날 몸짱이 됩니까?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그것은 출발에 불과 합니다. 그날부터 여러 가지 운동기구를 가지고 땀이 날 때까지 노력해야 합니다. 그럴 때 배가 나왔던 아줌마도 몸짱이 됩니다. 아줌마인지 처녀인지 모를 정도의 몸이 됩니다. 구원과 성화를 오해하여 이신칭의로 구원받은 후에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투쟁” “씨름이란 단어를 마치 믿음의 세계를 모르는 사람이나 쓰는 말 정도로 폄하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값싼 이신칭의, 값싼 은혜신앙으로 하루하루 죄악된 삶을 합리화하며 결코 변화되지 않는 삶을 지속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또한 그러한 신자들이 불신자들과 사회인들에게 지탄을 받으며 조롱의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스스로도 자조적인 삶을 삽니다.

 

수영을 하면 우리가 믿음을 배웁니다. 믿음으로 물에 자신을 맡깁니다. 그러면 신기하게 몸이 떠오르는 것을 체험합니다. 그 다음에는 손발을 저으며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믿음으로 모든 것을 맡긴다고 하여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그는 가라앉습니다. 믿음으로 자신을 물에 맡기지만 손을 젓고 물장구를 치며 앞으로 나가야 합니다. 성화도 그렇습니다. 성화의 원동력도 믿음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우리에게 영적 투쟁이 있어야 합니다. 죄에 대해서 자신을 죽은 자로 여기는 투쟁, 그리고 자신의 몸을 적극적으로 의의 무기로 드리는 투쟁을 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실력 있는 수영선수처럼 죄로부터 벗어나 즐겁게 하나님의 세계로 나아가며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자유롭게 쓰임 받는 사람이 됩니다.

 

로마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은 것처럼 성화는 결코 단번에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10000번을 하면 달인이 된다는 달인의 법칙이 있습니다. 이처럼 매일, 매순간 우리가 죄대신에 의를 선택하고 죄의 소욕대신에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선택할 때 우리가 영적 달인, 영짱들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매일, 한번 한번 죄의 유혹보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거룩한 성도들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성화에 이르고자 할 때 좌절을 많이 하는 데 과연 성화는 실제 가능할까요?

14절은 말합니다.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 우리가 연약하기에 죄를 안 지을 수 없습니다. 성화의 투쟁가운데 좌절이 있습니다. 이때 우리가 율법아래에 있다면 우리는 정죄감과 좌절로 주저앉고 영적 투쟁을 포기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은혜 아래에 있습니다. 우리가 죄에 져서 절망하지만 우리는 십자가 보혈 앞에 나아가 그 은혜를 덧입습니다. 예수님의 피는 단순히 우리 죄를 용서할 뿐 아니라, 우리에게 죄를 미워하는 마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고자 하는 거룩한 소원을 줍니다. 그 은혜는 우리의 좌절보다 더 큽니다. 그래서 우리를 좌절에서 일으키고 다시 영적 투쟁을 하게 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은혜의 십자가 앞에 나아갈 때 점점 죄의 중력에서 조금씩 벗어나는 것을 체험합니다. 마침내 어느 정도 지나면 죄의 중력권을 벗어나 거룩한 창공으로 멋지게 날고 있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그러니 우리가 죄와 싸우다가 낙심하지 않고 예수님의 은혜를 덧입고 다시 영적 투쟁을 해야 하겠습니다. 조급해 하지 않고 계속하여 성화의 투쟁을 감당하는 우리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15-23 절은 우리가 구체적으로 죄의 종에서 어떻게 의의 종으로 바뀌는 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부분에 이라는 단어가 많이 나옵니다. 종은 원치 않게 자주성을 잃고 끌려다니는 사람을 말합니다. 죄의 종된 사람은 죄를 짓고 싶지 않지만 죄에 붙들려 죄가 이리 가라면 가고 저리 가라면 가며 진정으로 자신이 살고 싶은 삶을 살지 못합니다. 오늘날에는 중독이란 단어를 사용합니다. 알콜 중독이나 마약 중독된 사람들은 술이나 마약이 자신의 삶을 파괴하고 죽음에 이르게 할 것을 압니다. 그러나 그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일생 그것에 매여 삽니다. 마찬가지로 죄에 중독된 사람도 그 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것에 일생 끌려 다니는 삶을 삽니다.

 

우리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죄의 종, 의의 종이 됩니까? 16절을 보십시오. 너희 자신을 종으로 내주어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내가 누구에게 자신을 내어주느냐에 따라서 죄의 종이 될 수도 있고 의의 종이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죄의 종이 되지 않을 비결이 무엇입니까? 당장의 유혹과 끌림보다 그 결과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죄의 종이 되면 그 결국은 부끄러움과 사망입니다. 의에 순종하면 의에 이르고 그 결국은 거룩함과 영생입니다. 요새 경부선을 타려면 서울역으로, 호남선을 타려면 용산역으로 갑니다. 편의상 서울 역을 순종의 역, 용산 역을 죄의 역이라고 해 봅시다. 용산 역을 선택한 사람은 대전 까지는 경부선하고 같이 갑니다. 그러나 그후 익산, 정읍 역을 거쳐서 목포로 갑니다. 용산 역을 선택한 사람은 반드시 이런 코스로 갑니다. 이처럼 죄의 역을 선택하면 부끄러움, 영적 사망, 영원한 사망의 역에 반드시 도달합니다. 옛날에 비둘기 호라는 완행열차가 있었습니다. 8-9 시간 달려야 종점에 이르렀습니다. 요새 KTX는 아주 빠르게 달립니다. 2-3시간 만에 종점에 도착할 수도 있습니다. 죄의 열차는 완행일수도 있지만 급행일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나의 선택의 결과가 무엇이라는 것을 분명히 안다면 함부로 죄를 선택하지 않을 것입니다.

 

독이 조금 든 포도주를 조금씩 마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점점 독이 쌓여 치사량에 이릅니다. 이처럼 조금 혹은 한 번의 죄에 대한 순종을 가볍게 여길 것이 아닙니다. 죄의 삯, 그 결과는 사망입니다. 사망이란 세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영적 사망은 하나님과 분리입니다. 육적 사망은 몸과 영혼이 분리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영원한 사망은 영원히 하나님과 분리되는 것입니다. 죄를 지을 때 우리는 하나님에게서 멀어집니다. 그리고 허무와 무의미와 죄책감과 불안과 염려가운데 살게 됩니다. 죄의 삯은 사망으로, 죄는 우리 영혼의 치사량을 점점 높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 때 죄짓기를 매우 조심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의에 대해 순종하면 거룩함에 이르고 그 마지막은 영생입니다. 거룩함을 아주 재미없는 삶의 대명사로 오해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거룩함은 참으로 소중하고 즐거운 것입니다. 사람은 거룩할 때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교제는 세상에서 가장 큰 즐거움과 생명력과 풍성함을 줍니다.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얼마나 기뻤던지 365년을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기쁨을 모르는 사람은 365일 동행하는 것도 힘듭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기쁨, 이것을 사도바울은 영생이란 단어로 표현했습니다. 영생은 사람이 하나님과 친밀하게 지내며 하나님과 풍성한 교제를 누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이 땅에서 충분히 누리다가 주님의 재림시에 완전히 누릴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새 생명가운데 거하도록 하기위해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이 삶은 정말로 자유롭고 차원 높고 행복한 삶입니다. 진정한 삶의 보람과 의미가 있습니다. 이런 삶을 살라고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죄가운데 거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신칭의를 오해하여 죄의 수렁에 매여 여전히 죄의 종으로 살고 있다면 이것은 우리를 값비싼 보혈로 구원해 내신 하나님의 기대와 소망을 저버리는 것입니다.

지난 주 홍요셉 목자님이 믿음의 가정을 이루었습니다. 9.3일에 결혼식을 하였고 이제 허니문도 다녀왔습니다. 그런데 홍요셉 목자님이 금주부터 다시 총각의 삶을 살겠다고 하면 결혼식은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우리가 이신칭의의 구원에만 머물고 다시 죄가운데 되돌아간다면 그것은 결혼식만 하고 총각으로 돌아가는 것과 같이 어리석습니다. 구원받은 우리는 이제 한 차원 높은 삶으로 비상해야 합니다. 정말 행복이 넘치는 주님과의 교제와 성화의 삶을 힘써 누려야 하겠습니다.

 

어떤 면에서 거듭남은 선물 포장지와 같습니다. 우리가 포장지만 풀었다 쌌다 하지 않고 진짜 선물인 성화의 축복을 마음 껏 누리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하지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12,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