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로마서 7강
영의 새로운 것
말씀/ 로마서 7장 요절/ 로마서 7:6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율법 조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 오늘 말씀에서 바울은 주님께서 우리를 율법으로부터 자유하게 하신 목적이 무엇인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동시에 우리 안에 있는 죄의 본질을 마치 외과 의사처럼 예리한 메스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기는 것이 무엇인지 새롭게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죄의 존재와 속성을 잘 알고 날마다 이 죄에게 속지 않는 신자의 새로운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6절에서 바울은 우리가 율법의 매임에서 벗어나게 되었음을 결혼 비유를 통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1-3절을 보십시오. “형제들아 내가 법 아는 자들에게 말하노니 너희는 그 법이 사람이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하는 줄 알지 못하느냐 남편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 바 되나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나느니라 그러므로 만일 그 남편 생전에 다른 남자에게 가면 음녀라 그러나 만일 남편이 죽으면 그 법에서 자유롭게 되나니 다른 남자에게 갈지라도 음녀가 되지 아니하느니라” 법은 사람이 살아있을 동안에만 그를 주관합니다. 아무리 큰 범죄를 저지른 흉악범이라 할지라도 그가 사망하면 자동으로 그 사람에 대한 기소권은 중지되고 그 사람에게 더 이상 법적 책임을 물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지극히 당연한 사실입니다. 바울은 결혼을 예로 들고 있습니다. 결혼한 여인은 남편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법적으로 남편에게 구속됩니다. 그러나 남편이 죽으면 법적으로 남편에게서 벗어나 자유롭게 됩니다. 또한 다른 남자와 재혼하더라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4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라” 성도들은 과거 법적으로 율법에 매여 있었습니다. 이는 마치 율법을 남편으로 모시고 사는 여인과 같은 처지였습니다. 율법씨 남편은 날마다 부인의 잘못을 면도칼처럼 지적하고 드러내었습니다. 사실 율법씨의 말은 하나도 틀린 것이 없었습니다. 율법씨 말을 다 지키면 부인은 신사임당같은 덕스럽고 훌륭한 부인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율법씨의 지적과 책망을 받으면 받을수록 부인은 신사임당처럼 되는 것이 아니라 더 주눅이 들고 더 잘 못했습니다. 접씨를 깨뜨리고 다리미질하다가 비싼 옷을 다 태워먹었습니다. 동시에 마음에 미움과 분노, 반발심이 가득하여졌습니다. 신사임당이 아니라 뺑덕어멈처럼 되었습니다. 그러나 율법씨는 여자가 연약하다고 해서 결코 봐주는 법이 없었습니다. 여자가 아무리 힘들다고 하소연해도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율법의 높은 기준을 지키도록 강하게 푸쉬하였습니다. 여자는 점점 더 상태가 안좋아져 이제는 막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율법씨 남편에게 막 고함을 지르고 삿대질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점잖고 고매한 성품의 율법씨는 너무 큰 충격을 받고 쓰러져 병원에 입원할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강직한 율법씨는 퇴원하자마자 다시 부인의 그러한 행동을 엄히 꾸짖고 이러한 여자가 받을 무서운 심판에 대해 강론했습니다. 여자는 귀를 막고 울부짖기 시작했습니다. 정말 율법씨와 헤어지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장수 집안 출신인 율법씨는 모든 생활에 절제가 있고 건강에 좋은 음식만 먹으므로 장수할 것이 확실했습니다. 그녀가 율법씨의 매임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녀 자신이 죽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때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그녀를 대신하여 죽으셨습니다. 율법의 모든 요구가 그리스도를 통해 100% 충족되었습니다. 이로써 여자는 율법의 매임에서 해방되었습니다. 그러면 율법에서 해방된 여자는 이제 율법을 초월하여 자기 마음대로, 본성대로 살아도 되는 것입니까?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제 여자의 생명은 자기 것이 아니라, 그녀를 위해 대신 죽으신 그리스도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자는 이제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어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삶은 여자에게 참된 행복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이는 그가 그리스도의 풍성한 사랑 안에서 살아가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풍성한 사랑 안에서 여인은 그리스도를 섬기는 삶이 전혀 의무가 아닌 참된 기쁨이 되었습니다.
5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 비유에서 여자는 완벽한 율법씨와 살았지만 오히려 사람이 더 망가졌습니다. 이것은 마치 이런 상황과 유사합니다. 어떤 사람이 훌륭한 인재를 양성할 목적으로 한 학교를 세웠습니다. 그는 오랜 삶의 경륜을 통해 사람이 훌륭한 인재가 되기 위해서는 어려서부터 인성교육을 잘 받아야 하고 특히 자기 부인과 자기 십자가를 통한 절제 훈련을 반드시 받아야 한다는 분명한 교육철학이 있었습니다. 그는 그 학교에 들어온 학생들을 여러가지 다양한 방식으로 절제 훈련을 시켰습니다. 그런데 그중 어떤 학생들이 이러한 학교의 정책이 그들을 고통스럽게 하고 그들의 자율성을 침해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졸업할 때 쯤 그들은 훌륭한 인재가 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반항심과 반발심이 가득한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이들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 학교를 세운 사람의 교육철학과 비전을 이해하려하기보다 그가 만든 여러가지 규율에 마음이 얽매였고 그러한 규율이 그들을 괴롭게 한다고 느꼈으며 결과적으로 그 학교를 세운 이에 대한 반항심과 반발심을 갖게 된 것입니다.
한 가지 예를 더 들어보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군에 입대했습니다. 입대하는 그날 그가 부모님과 작별인사를 마치고 코너를 도는 순간 조교는 그에게 말했습니다. “앞으로 취침, 뒤로 취침, 좌로 굴러, 우로 굴러.” 그는 포병부대에 배치되었습니다. 그가 어리버리할 때마다 그는 선임병들로부터 인격모독에 가까운 대우를 받았습니다. 어려서부터 모범생으로 인정만 받고 자란 그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분노에 사로잡힌 그는 확 사고를 쳐 버릴까 하는 충동에 시달렸습니다. 그런데 만약 이런 그가 실제 전쟁을 한 번 체험해 본다면 그래서 군조직의 특수성과 필요성을 이해할 수 있다면 군생활에 대한 생각과 자세가 달라질 것입니다.
우리가 율법을 주신 이의 참된 사랑과 그 뜻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율법 자체에 얽매이게 되면 반드시 그 율법이 나를 구속하고 모든 자율성과 자발성, 자유를 박탈하고 나를 괴롭히고 고통스럽게 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으로 느껴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율법을 적대시하는 마음이 생겨나게 되고 할 수만 있으면 그 율법을 깨뜨리고자 하는 강한 충동을 느끼게 됩니다. 결과적으로 사망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6절을 보십시오.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율법 조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 그런데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 율법의 모든 요구를 충족하셨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를 율법에서 벗어나게 하셨습니다. 바울은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율법 조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라 선포합니다.
그러면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긴다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긴다는 표현은 영어성경에 serve in the new way of the Spirit (NIV)으로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서 영은 성령을 가리킵니다. 성령은 화석화된 율법조문과 달리 살아계신 인격체입니다. 성령은 진리의 영입니다. 성령은 인간의 고정관념이나 편견에 매이지 않습니다. 또한 오랜 관습에 매이지도 않습니다. 성령은 예수님께서 비유하신대로 이제 막 발효를 시작한 새 포도주와 같이 힘이 있고 역동적입니다. 성령의 새로운 것으로 섬긴다는 것은 이와같이 역동적인 성령님의 다스림과 인도하심을 받아 주의 일을 섬긴다는 의미입니다. 새포도주같은 성령님의 다스림과 인도하심을 받기 위해서는 우리의 내면이 반드시 새 가죽부대가 되어야 합니다. 새 가죽부대는 신축성과 유연성이 뛰어납니다. 새 가죽부대는 포도주가 왕성한 발효를 하여 여러가지 종류의 가스를 발생시키고 부피가 팽창하여도 그것을 잘 견디어 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내면이 어떻게 새 가죽부대가 될 수 있습니까? 새 가죽부대는 이제 막 회개한 심령입니다. 이제 막 회개한 사람의 마음은 죄사함의 은혜와 감격이 넘쳐납니다. 주님의 구속의 사랑에 대한 감격이 뜨겁습니다. 이 주님을 위해서라면 생명까지도 아끼지 않고 내어놓겠다는 결단이 저절로 솟아납니다. 새포도주와 같은 성령님은 바로 이런 사람의 마음 속에서 강력하게 역사하십니다. 그를 통해서 여러가지 편견과 상식을 뛰어넘는 일을 이루십니다. 그 사람을 통해서 주변 사람들에게 아 성령께서 일하시면 이런 일도 일어나는구나 깨닫게 하십니다.
우리가 뜨거운 성령의 다스리심과 인도하심을 잘 체험하지 못하는 이유는 뜨거운 회개가 없기 때문입니다. 회개한지 너무 오래 되었기 때문입니다. 많은 이들이 죄악된 삶을 살다가 처음 예수님을 만났을 때 뜨겁게 회개하고 그 다음에는 특별한 죄가 없는 한 그렇게까지 뜨겁게 회개할 일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신앙의 연륜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죄인 중의 괴수인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우리가 인생의 연륜과 신앙의 연륜이 깊어질수록 자기 안의 죄가 얼마나 큰지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뜨거운 회개는 일생동안 가능합니다. 우리가 항상 회개하기에 힘씀으로 늘 새 가죽부대와 같은 내면을 유지하기를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역동적으로 일하시는 성령님의 다스리심과 인도하심을 충만히 받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저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고 풍성한 생명의 열매 맺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더 말씀을 깊이 연구하고 더 이 시대를 연구하여 이 시대 젊은이들에게 맞는 말씀을 준비하여 전하는 투쟁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본문 말씀을 통해 나의 죄를 애통히 회개하는 것이 새 가죽부대가 되는 비결이요 성령의 충만한 인도하심과 다스리심을 받는 비결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를 통해 매주 소감을 통해 진실하게 나의 숨은 죄를 회개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제가 말씀연구도 중요하지만 다른 무엇보다 숨은 죄를 깨닫고 회개하는 것을 가장 힘쓰는 종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성령의 인도하심과 다스리심에 대해 바울 사도는 8장 전반부에서 더욱 풍성하게 풀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전에 먼저 바울은 7-25절에서 율법과 죄의 관계에 대해 더 자세히 풀어 설명할 필요성을 느낍니다.
7절을 보십시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지금까지 바울은 율법의 주관과 다스림을 받는 것이 결국 죄를 짓고 사망에 이르는 결과를 낳는다고 강론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질문이 생깁니다. 그렇다면 율법이 죄입니까? 율법이 사람으로 하여금 죄를 짓게 만드는 것입니까? 바울은 이에 대해 그럴 수 없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율법이 사람에게 어떤 것이 죄인지 가르쳐주는 역할을 한다고 말씀합니다. 예를 들어 율법이 탐내지 말라는 말씀을 하지 않았더라면 사람이 탐심이 죄라는 것을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8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온갖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율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라”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은 첫 사람 아담에게 선악을 아는 지식은 오직 하나님께만 속한 것임을 계명을 통해 알려주셨습니다. 그런데 뱀이 기회를 타서 그 계명을 이용하여 첫 사람 아담의 마음 안에 자기도 하나님처럼 되려는 탐심을 불어넣었습니다. 선악과 계명이 없었더라면 뱀은 첫 사람을 유혹할 미끼가 없었을 것입니다. 본래 사람에게 참된 자유와 행복을 주기 위해 주어졌던 계명이 뱀에게 이용당하여 탐심의 죄를 불러일으켰습니다.
11절을 보십시오.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 바울은 죄가 기회를 엿보고 있다가 계명을 이용하여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다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마치 죄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최종목표를 세우고 그것을 실천하기 위해 세부계획과 작전을 세우는 인격적인 존재인 것처럼 묘사하고 있습니다.
먼저 죄의 궁극적인 최종목표는 사람을 영원한 파멸에 이르게 만드는 것입니다. 죄는 결코 장난을 치지 않습니다. 얼마 전 한 강도가 은행에 나타났는데 실수로 총을 떨어뜨렸습니다. 그는 당황하여 달아났습니다. 그 총을 조사해보니 장난감 총이었습니다. 이는 그가 돈을 훔치려는 악한 의도를 가졌지만 최소한 사람을 죽일 생각은 없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죄는 이러한 은행강도와 같지 않습니다. 죄는 기회를 엿보고 있다가 적절한 기회가 오면 정말로 총을 쏩니다. 전혀 그럴 의도가 없는 것처럼 접근했다가 정말로 절벽 밑으로 사람을 밀어버립니다. 죄는 단 1%의 자비도 없이, 일말의 양심의 가책도 없이 사람을 영원한 파멸의 벼랑 아래로 밀어버리는 담대함과 완전한 사악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음으로 죄는 이러한 최종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세부전략과 계획을 세웁니다. 죄가 사용하는 방식은 계명을 이용한 설득입니다. 우리는 죄가 무슨 초능력을 가진 존재인 것처럼 생각합니다. 죄가 사람을 좀비로 만들어서 그의 의사나 의지와 관계없이 죄를 짓도록 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렇게 보이는 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실상 죄는 무슨 초능력이나 신비한 힘으로 우리를 좀비처럼 만드는 것이 아니라 계명을 이용하여 우리를 설득합니다.
아까도 말씀드린 것처럼 죄는 첫 사람 아담에게 계명을 이용하여 선악과를 먹으면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고 설득하였습니다. 역사 이래로 죄는 계명이 나의 자유를 속박하고 나를 불행하게 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설득하여 나를 속입니다. 또 그 계명을 깨뜨릴 때 참된 자유와 기쁨과 행복을 누릴 수 있다고 설득하여 속입니다. 죄의 설득을 객관적으로 한 발 떨어져서 들어보면 정말 말도 안되는 사기입니다. 그러나 어떤 특정한 상황 속에서 죄가 말하는 어떤 특정한 논리를 들으면 신기하게 사람들이 속습니다. 이런 점에서 죄는 보이스 피싱과 같습니다. 보이스 피싱을 당한 사람은 마치 영혼이 팔린 사람처럼 넋이 나간 모습으로 휴대폰을 귀에 박은 채 은행을 향해 달려갑니다. 그리고 전 재산을 헌납합니다. 우리는 그가 미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는 그가 그 순간 그 목소리를 듣고 완전히 설득당한 것입니다.
이처럼 죄는 우리 내면 깊은 곳에서 전화를 걸어 우리를 속이는 보이스 피싱과 같습니다. 이 죄는 다윗이 우리야의 아내가 목욕하는 것을 우연히 엿보게 된 순간 그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을 어겨도 좋을 이유를 말해주며 그를 설득했습니다. 왕에게 주어진 면책 특권을 언급했거나 포악한 다른 나라 왕들과 비교해 이 정도는 괜찮아, 혹은 지금까지 고생을 많이 했으니 이 정도 탈선은 하나님이 용서해주실거야 등의 말로 그를 설득했을 것입니다. 평상시 다윗 같았으면 이런 보이스 피싱 전화는 당장 끊어버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낮잠을 늘어지게 잔 후 저물어가는 석양의 햇빛 아래 목욕하는 여인의 모습을 우연히 지켜보게 된 바로 그 순간 그 때 걸려온 전화에 다윗은 그만 완전히 설득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파멸의 길로 한 발을 내딛게 되었습니다.
이 죄는 오늘 이 시간에도 우리 속에 숨어 있다가 결정적인 순간 전화를 걸어옵니다. 보이스 피싱 조직처럼 평소 우리에 대한 정보를 꿰고 있다가, 우리의 기질과 성향을 완전히 파악하여 분석하여 두었다가 그것을 120% 이용하여 계명을 어기고 죄를 짓도록 설득합니다.
여기에서 어떤 이는 그러면 내가 지은 죄에 대한 책임은 궁극적으로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죄에게 있는 것 아니냐고 질문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비록 첫 사람 아담과 하와는 뱀의 설득에 속았으나,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계명을 어긴 책임은 그들 자신에게 있습니다. 죄가 아무리 속을 수밖에 없도록 기가 막힌 방식으로 나를 속여도, 속은 것에 대한 법적인 최종 책임은 바로 나에게 있습니다.
13절을 보십시오. “그런즉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 만들었으니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 되게 하려 함이라” 이상에서 바울은 계명 자체가 악한 것이 아니라 사람 안에 있는 죄가 악한 것임이 계명을 통해 드러나게 된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15-17절을 보십시오.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행하면 내가 이로써 율법이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이제는 그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바울은 인간에 대한 깊은 통찰을 통해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내’가 있을지라도 그 선을 행하지 못하도록 막는 죄가 동시에 사람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 죄는 너무도 간교하여 거룩한 하나님의 계명까지도 이용하여 사람을 속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잘나고 똑똑한 척 해도 다 헛똑똑이입니다. 결정적인 순간 죄에게 속아 자기를 파멸에 몰아넣는 바보같은 짓을 합니다.
24-25절을 보십시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바울은 자기의 힘과 지혜와 능력으로는 결코 이 죄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 순간 그에게서 절규가 터져나왔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동시에 그는 깨달았습니다.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만이 이 사망의 몸에서 그를 건져낼 수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심령에는 감사가 충만하여졌습니다.
율법은 거룩하고 의롭습니다. 율법은 그 율법을 잘 지킬 때 우리의 삶을 아름답고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 안에 죄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죄는 거룩한 율법을 이용하여 우리로 하여금 그 율법을 어겨도 좋을 이유, 심지어 율법을 반드시 어겨야 할 필요성과 당위성을 끊임없이 말하며 설득합니다. 어떤 사람의 경우는 실제적으로 그 율법의 근본정신을 어기고 있는데 잘 지키고 있다고 착각하도록 속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자기 힘과 능력만을 가지고 율법을 지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사람이 자기 힘과 능력으로 선한 인생을 살아보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그렇게 할 수 없도록 설득하여 막는 죄가 자기 안에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뿐입니다.
그렇다면 이 절망적인 문제에 대한 소망은 없는 것입니까? 있습니다. 그 소망은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율법의 모든 요구를 충족하심으로 우리를 율법에서 자유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성령의 인도하심과 다스림을 받는 새로운 방식으로 주를 섬기도록 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기 이전에는 자기가 자기 삶을 주관하고 다스리다가 예수님을 믿고 난 이후에는 성령께서 내 삶을 주관하고 다스려주시는 것으로 변화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이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기 이전에는 죄가 우리 삶을 주관하고 다스렸습니다. 사람들은 내 속에서 올라오는 죄악된 욕망이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내 속에서 올라오는 죄악된 욕망은 죄가 나를 속임으로 생겨난 착각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창조된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아름답고 열매맺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 때 주셨던 그 아름다운 영광을 회복하는 것이요, 하나님과의 그 친밀한 교제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내가 죄에 대해 완전히 죽고 의에 대해 살아나는 부활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또한 성령의 다스리심과 인도하심을 받는 삶을 통해 가능합니다.
결론입니다. 우리는 법적으로 죄에 대해 완전히 죽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 아직 죄의 성향은 남아있습니다. 우리가 만약 성령의 충만한 다스리심과 인도하심을 받지 못하고, 다시 무언가 내가 주체가 되어 나의 삶을 이끌어나가려 할 때에 우리는 과거처럼 죄에 속아 죄의 다스림을 받는 것처럼 보이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법적으로는 죄에 대해 죽었고 우리의 신분은 완전히 바뀌었으나 마치 그렇지 않은 것처럼 살아갈 수 있습니다. 노예의 신분에서 완전히 해방되었으나 여전히 노예인 것처럼 살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참으로 우리답게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성령의 충만한 다스리심과 인도하심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할 때 하나님 앞에서 풍성한 생명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가을학기 이전보다 더욱 회개하는 생활에 힘씀으로 새 가죽부대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새 포도주와 같은 성령의 충만한 인도하심과 다스림받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