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여름 수양회 주제 5 강 완전한 사랑, 온전한 회복 말씀/요한복음 21:1-17 요절/요한복음 21:15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저는 두 명의 형이 있습니다. 큰 형은 맏이답게 헌신적이고, 다정합니다. 그런데 둘째 형은 차갑고 반항적입니다. 10년전 가족과 연락을 끊고 지금까지 보지 못했습니다. 몇 개월
전 아버지가 담낭제거 수술로 입원하였습니다. 저와 큰 형은 병 문안 하였지만, 둘째 형은 안부 전화 조차 없었습니다. 저는 이런 둘째 형을 속으로
인간이 아니다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런데 부모의 마음은 다른 것 같습니다. 특히, 어머니는 둘째 형이 잘 있는지 항상 걱정하십니다. 이런 어머니를 보면서 자식을 향한 부모의 사랑은 한결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본문은 부모 자식간의 사랑보다 더 뜨거운 예수님과 제자들간의 아름다운
‘love story’ 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배반하고 고향 갈릴리로 도망하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들을 찾아오셨습니다. 많은 고기를 잡게 하시고
음식으로 섬겨 주셨습니다. 잃어버렸던 사명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이 시간 예수님의 완전한 사랑이 우리의 마음에 차고 넘치기를
기도합니다. 그 사랑으로 예수님의 양을 먹이는 목자의 사명 회복하기를 기도합니다. 저희 가운데 다시금 캠퍼스 양들을 섬기고자 하는 열정이 뜨겁게 타오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 와서
조반을 먹으라 (1-14) 1절을
보십시오(자매님).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호수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나타내신 일은 이러하니라.” 그 후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두 번째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후입니다. 그런데
장소가 예루살렘이 아닌 디베랴 호수입니다. 디베랴 호수는 과거 어부인 제자들의 삶의 터전이었던 곳입니다. 예수님은 3년전 이곳에서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는 말씀으로 베드로와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에
제자들은 아무 망설임 없이 배와 그물, 가족까지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비록 멸시 받는 어부였지만 누구보다 성공하고 싶은 욕망으로 꿈틀거렸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 안에서 가능성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치심과 병 고침으로 인하여 수많은 인파가 구름 떼처럼
몰려오자, 그들의 꿈은 곧 이루어질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체포되시고, 심문 받으시고, 십자가형으로 돌아가시자
그들의 꿈도 한 순간에 사라졌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직접 두 번이나 그들에게 나타나 믿음을 갖도록
도우셨습니다. 하지만 실패와 절망감에 사로잡힌 제자들은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고, 무엇을 해야 할지 방향을 잡지 못했습니다. 결국 모든 것을 뒤로하고
무작정 고향으로 내려왔습니다 3절을
보십시오(형제님).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니 그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그 날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고향에 돌아와 좋았지만 당장 먹고 살길이 막막했습니다. 결혼하여 부인과
장모님까지 모시고 사는 베드로는 더 심한 압박을 받았습니다. 베드로는 의미심장한 얼굴로 말했습니다. ‘내는 물고기 나 잡으러 갈란다’ 이
말은 예수님과 함께한 3년간의 일은 과거로 묻어두겠다는 것입니다. 이제 후로는 어부의 삶을 살며 생계에 전념하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당시 상황에서 베드로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습니다. 다른
제자들도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함께 가겠다’며 나섰습니다. 그물을 꺼내어 손질하고 배를 정비하며 고기를 잡을 만반의 준비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호수에 배를 띄우고 힘껏 노를 저어 나아갔습니다.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그물 가득
고기를 잡을 생각을 하니 우울했던 마음이 싹 사라졌습니다.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고 힘차게 그물을 던졌습니다. 그런데 왠 일입니까? 기대와 달리 끌어 올린 그물 속에는 피래미
새끼 한 마리 걸리지 않았습니다. ‘그럴리 없어, 다시 해 보자’ 다른 곳으로 노를 저어 간 후 다시 그물을 내렸습니다. 이
번에는 뭔가 묵직한 것이 걸린 듯 했습니다. ‘그럼 그렇지 아직 내 실력은 녹슬지 않았어’ 하며 힘껏 그물을 들어올렸습니다. ‘아니 이게 뭐지’ ‘쓰레기 더미잖아’ 이렇게
밤 새도록 물고기와 사투를 벌였지만 결과는 제자들의 KO 패였습니다.
어느덧 동쪽 하늘이 밝아왔고, 허탈함과 피곤함에 지친 제자들은 배에 털썩 주저 앉았습니다. 그런데 이 때 멀리서 이런 제자들을 바라보고 계신 분이 있었습니다. 그 분은 부활하신 예수님 이셨습니다.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예수님은
바닷가에 서서 제자들을 바라보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애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 제자들은 대답합니다. “없나이다.”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 ‘아니 밤새 호수 이곳 저곳 그물을 안 던져본 곳이 없는데, 다시 오른편에 던지라니’ 제자들은
순종하기 힘들었습니다. 그래도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다시 그물을 던졌습니다. 그 때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예수님의 명령에 밤새 숨어있던 물고기들이
그물로 집합한 것처럼 그물이 물고기가 가득 찼습니다. ‘야! 이
얼마나 기다렸던 물고기인가!’ 제자들의 얼굴엔 미소가 가득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버리고, 사명까지 버린 제자들을 내버려둘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직접 찾아
오시고, 물고기까지 잡도록 도와 주십니다. 뭐가 아쉽다고
이렇게까지 하시는 걸까요? 그것은
제자들의 상한 마음을 회복시키기 위해서입니다. 일반적으로
세상 원칙은 성공한 자에게 상을 주고 실패한 자에게 벌을 줍니다. 베드로와 제자들은 어부로서나 제자로서나
다 실패했습니다. 그러므로 마땅히 벌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실패한 자까지도 벌이 아닌 상을 주십니다. 구체적으로 실제적인 문제를 도와 주시는 상을 주십니다. 물질이 필요한 때 물질을 주시고, 학점이 필요할 때 학점을 주십니다. 그 때 우리는 ‘아! 예수님이 나와 함께하시는구나’
“나 같은 죄인도 사랑하시는 구나’ 하며
그 사랑에 감동하여 멀어졌던 주님과의 관계가 다시 회복됩니다. 우리 중에 제자들처럼 ‘에이 물고기나 잡으러 가야겠다’며 열심히 세상의 바다에서 물고기 잡고 계신 분이 있습니까? 밤
새 그물질 했지만 빈 그물뿐인 내 신세를 한탄하며 주님의 사랑을 의심하고 계신 분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부활하신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예수님은 내가 힘겹게 고기와 사투를 벌이는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도 나를
바라보시고, 나와 함께 하십니다. 그리고 빈 그물 같던 내
삶을 풍성한 물고기로 채워 주십니다. 7절을 보십시오(형제님).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주심이시라
하니 시몬 베드로가 벗고 있다가 주님이라 하는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 내리더라.” 제자들이 파닥거리는 물고기로
신이 나 있을 때, 한 제자가 소리쳤습니다. “주님이시다.” 베드로는 ‘주님’이라는 말을 듣고 겉옷을 입은 뒤 바다 속으로 점프했습니다. 그리고 박태환 선수처럼 예수님을 향해 온 힘으로 파도를 헤치며 나갔습니다. 사랑하는
주님을 만난다는 생각에 100m를 몇 초만에 주파하여, 해변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주님을 보니 다가서기가 왠지 껄끄럽고, 마음이
예전같이 않습니다. 마음 깊은 곳 무엇인가가 베드로와 예수님 사이를 벽처럼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이런 베드로와 달리 예수님의
마음은 달랐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위해 무엇을 하고 계셨습니까? 9절을 보면, 육지에 숯불이 펴져 있었고 그 위에 생선과 떡이 있었습니다. 빨갛게 달아오른 숯불 위에 지글지글 익어가는 생선과 빵 냄새가 허기진 제자들의 코 끝을 자극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위해 아침식사를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얼차려를
받아도 시원찮은 상황에 식사까지 섬겨주시는 예수님을 보자 베드로는 할말을 잃었습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지금 잡은 생선을
좀 가져오라’ 베드로는 한 걸음에 달려가 그물을 육지에
끌어 올려 가장 싱싱한 놈을 골라 예수님께 드렸습니다. 예수님은 능숙한 손놀림으로 물고기를 해체하여 꼬치에 넣고 숯불 위에 다시 올려 놓으셨습니다. 어느덧 빵과 고기가 먹음직하게 익자 예수님께 말씀하십니다. 12절을 보십시오(다함께). “예수께서 이르시되 와서 조반을 먹으라 하시니 제자들이 주님이신 줄 아는 고로 당신이 누구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와서 조반을 먹으라’ ‘어서 와서 식사들 해! 많이 배고프지.’ 평소 같으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서로 달려와 뼈도 안
남기고 먹었을 텐데. 지금은 서로 눈치 보며 음식에 손을 대지 않습니다. 왜그럴까요? 그 이유는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쳤다는 죄책감 때문입니다. ‘차라리 속 시원하게 책망이라도 했으면 마음이 더 편할텐데.’ 아무
말 없이 음식으로 섬겨주시는 예수님을 보니, 마음이 더 불편합니다. 예수님도
이런 제자들을 마음을 아십니다. 그래서 먼저 다가가 섬겨 주십니다. 생선에
가시를 발라 제자들의 입에 넣어 주십니다. 야고보 아~ 요한 아 ~ 도마 너는 특별히
도미로 아~ 유월절 만찬자리에서 떡을 떼어 주신 것처럼 한 사람씩 고기와 빵을 먹여 주십니다. 드디어 베드로 차례가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도저히 입을 벌릴 수
없습니다. 그래도 예수님이 주시는 데 차마 거절 할 수 없어, 조그맣게
입을 열어 먹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숯불 같은 사랑에 냉랭한 제자들의 마음이 조금씩 녹아 내리며 그들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어 났습니다. 그러면 ‘와서 조반을 먹으라’하신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우리의 모습과는 상관없이 한결 같은 마음으로 변함 없이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인간의 사랑은 조건적입니다. 내가 받은 만큼 주는 give and take 식 사랑입니다. 또한 자기 중심적입니다. 내 성향과 스타일에 맞으면 좋아하고, 내 기분과 감정에 따라 up and down을 반복합니다. 직장은 더 냉정합니다. 평소에 잘 해주던 상사도 성과를 내지 못하면
가차없이 팽 당합니다. 이렇게 인간의 사랑은 조건적이고 자기 중심적이며 이해관계적입니다. 그러나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은 무조건적이고 변함 없습니다. 잘못했다고
책망하고 열매가 없다고 자르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오히려 사랑으로 인내하시고 다시 열매를 맺도록 도와주십니다. 전반전에 골을 못 넣어도 다시 후반전에 넣을 수 있도록, 아니 넣을
때까지 격려하시고 힘을 주십니다. 이렇게 형편없는 자신을 변함없이 믿어주고, 힘을 주시고, 섬겨 주시는 주님의 사랑을 깨달을 때 마음이 녹아
내리고, 주님과의 관계가 회복됩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잊고, 세상을 더 사랑했던 나, 계획대로 되지 않고, 사는 게 힘들다고 불평했던 나를 주님은 한결 같은 사랑으로 섬겨주십니다. 이사야서 49:15절은 말씀하십니다.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나의 모습과 상관없이 언제나 함께 하시는 주님의 변함 없는 사랑을 찬송합니다.
우리가 이 사랑을 날마다 가슴으로 느끼며 그 사랑으로 충만한 삶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2. 내
양을 먹이라 (15~17) 부활하신 예수님과의 소박하지만 맛있는 아침 식사도 끝이 났습니다. 예수님의
파도와 같은 사랑이 지치고 상한 제자들의 몸과 영혼을 가득 채웠습니다. 그런데 단 한 사람, 베드로만이 여전히 어두운 얼굴을 하며 예수님의 눈길을 피했습니다. 그에게는
딱 한가지 해결해야 하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다는 자책감의 상처였습니다. 이런 마음으로 제자 공동체를 이끌고, 어린 양을 먹이는 사명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상처를 치유하고 다시 수제자로 회복되기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말씀하십니다. 15절을
보십시오(다함께).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식사 후 예수님은 베드로를 조용히 부르셨습니다.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베드로의 가슴은 덜컹 내려 않았습니다. ‘베드로
너 그럴 수 있어?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너는 그러면 안되지’ 곧
불벼락이 떨어 질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잔잔한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갑작스런 질문에 베드로는 순간 당황했습니다. 몇 주 전만 해도 ‘물론이죠 제가 예수님을 가장 사랑합니다. 당연한걸 물으세요’ 거침없이 대답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었습니다. 무슨 말을 하더라도 예수님께는 변명과 거짓으로 들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말합니다.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주님이 아신다’ 이 말은 예수님을 정말 사랑하지 않고는 감히 할 수 없는 말입니다. 베드로는
겸손하지만 분명하게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였습니다. 그런데 끝난 줄 알았던 예수님의 질문은 계속 되었습니다. 16절을
보십시오(강영국) “ 또 두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양을 치라 하시고.” 예수님은 두 번째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질문하십니다. 왜 자꾸 똑 같은 질문을 하시지? 베드로도 같은 대답을 반복 했습니다..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제 더 이상 묻지 않기를 바랬습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귀에 다시 예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17절을
보십시오(김바울_근심하듯).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질문에
베드로는 더 이상 견딜 수 없었습니다. 눈물이 주르륵 흘러 내리며, 주님
앞에 무릎을 꿇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주님 모든 것을 아시지 않습니까?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십니다.” 이렇게 말하는 그의 마음은 세 번 부인했던 그 날 밤의
기억과 아픔으로 더욱 고통스러웠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왜 세 번이나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반복해서 질문하셨을까요? 첫째, 베드로의 상처를 회복시키기 위해서입니다. ‘한 번 실수는 병가의상사’라는 말이 있지만, 자존심이
강한 베드로에게 세 번 부인한 사건은 실수가 아니라 더 이상 제자로 살 수 없는 완전한 실패였습니다. 이런
실패로 인한 절망, 자책감 때문에 다른 사람의 얼굴을 똑 바로 볼 수 없었습니다. 심지어 새벽에 꼬끼오~하고 닭이 울기만 해도 자다가 벌떡 일어나 한 숨을 내 쉬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베드로의 상처를 누구보다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사랑합니다 공개적으로 고백하도록 도우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사랑고백을 받아주셨습니다. 이를 통해 그와 깨진 관계성을
회복시키셨습니다. 그의 상처를 치유하여 주셨습니다. 둘째,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 그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고 물으실 때 ‘사랑’은 ‘아가페’의 사랑입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대답한 ‘사랑’은 ‘필레오’ 즉 ‘친구간의 우정’을
의미합니다. 베드로의 사랑은 우정에서 비롯된 인간적 사랑이었습니다. 한마디로
‘의~리’에 기초한 사랑으로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일은 의리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몇 번 하다 지치고, 상처도 쉽게 받을 뿐 아니라 남에게도 상처를 주게 됩니다. 무엇보다
결정적인 순간에 예수님을 부인하고 배반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순수하게 사랑하셨습니다. 하나 밖에 없는 목숨을 십자가에서 내어 주셨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사랑을 알고, 그러한 사랑으로 예수님을 사랑하길 원하십니다. 혹시
목자님의 섬김이 좋아서, 사람들의 인정과 칭찬 듣고 싶어, 내
꿈과 계획 때문에 이 곳에 있는 분이 계십니까?
부활하신 예수님은 이 시간 우리에게도 질문하십니다. ‘다윗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우리가 세상 그 누구보다, 세상 그 무엇보다, 심지어 나 자신보다 예수님 한 분만을 뜨겁게 사랑하는 자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과의 관계가 온전히 회복되고, 그 사랑을 힘 입어 가까이
있는 동역자들과 캠퍼스 영혼들을 사랑하기를 기도합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세 번의 사랑 고백을 받으셨습니다. 이를
통해 베드로 마음 속에 세 번 부인했다는 죄책감을 온전히 없애 주셨고, 수제자로써 그의 지위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베드로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인생의 방향을 보여 주십니다. 그것은 양을 먹이는 목자의 사명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사랑 고백 받으실 때마다 동일한 말씀을 반복하셨습니다. ‘내 어린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 이제
예수님은 더 이상 이 땅에 머물 수 없고 하나님 나라로 가셔야 합니다. 이제 베드로가 예수님의 뒤를
이어 예수님의 양 무리를 돌보는 목자가 되어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양을 먹이는 이유가 예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양을 먹이는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또한 양은 내 양이 아닌 예수님의 양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 산 소중한 영혼입니다. 이는 보내 주신 한 영혼에 대한 책임감을 뜻합니다. 그의 구원과 성장을 위해 심정을 다해 섬겨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심정을 다해 먹여야 할 양은 누구입니까? 기본적으로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다 예수님의 양입니다. 특별히 하나님은
우리에게 캠퍼스 젊은 영혼을 먹이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이 시대 캠퍼스 영혼들은 어떻습니까? 얼마 전 대구에서 한 대학생이 편의점에 들어가 강도짓을 하다가 붙잡혔습니다.
그는 경찰조사에서 “등록금은커녕 월세와 생활비도 마련하기 어려워 범행을 저질렀다”고 자백했습니다. 이처럼 겉으로 보이는 것과 달리 이 시대 대학생으로
살아가는 것은 힘겹습니다. 취업을 위해 ‘스펙’을 마련하느라 정신 없이 뛰어다니고, 방학이 되면 저임금 노동자가
되어 아르바이트를 전전합니다. 인생에 대한 고민과 미래에 대한 불안함을 안고 1평 남짓 고시촌에서 밤을 지새고, 편의점에서 도시락으로 끼니를 때웁니다. 이들을 볼 때 안쓰럽고 세상을 잘 못 만났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들이 정말 불쌍한 것은 인생의 참된 의미와 목적도 모른채 현실문제에만 갇혀서 살다가 결국에는 하나님의 심판대 아래 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들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현실 문제를 해결해주는 거이 아니라 예수님을 알려 주는 것입니다. 이들이 예수님을 만나고 믿음으로 살 때 이들이 현실의 어려움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인생이 참 행복해지고 만족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죄 사함 받고 구원을
얻게 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어린양을 먹이는 것은 이 세상 어떤 일보다 가장 고귀하고 아름다운 사명입니다. 하나님의 일방적은혜이며 축복이고 특권입니다. 이 시간 예수님은 우리에게도
말씀하십니다. ‘내 어린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 우리가
목자 없는 양처럼 방황하며 고통하는 캠퍼스 영혼에 대한 상한 목자의 심정을 덧 입고 그들을 말씀으로 먹이는 목자의 사명을 충성되게 감당키를 기도합니다. 20년전 가난한 가정에 대한 운명주의와 수능 실패로 인한 패배주의로 기쁨과 소망 없이 살아가던 죄인을 하나님은
말씀 공부로 인도하셨습니다. 말씀을 통해 어둡던 마음이 밝아졌고, 냉소적이고
살기 어린 눈빛이 따뜻하고 부드럽게 변했습니다. 차갑고 이기적이며 부담스러운 죄인을 목자님들은 감당해
주시고, 기도해 주시며 말씀으로 섬겨주셨습니다. 무엇보다 97년 여름 수양회 때 삭개오를 찾아오신 예수님 말씀 통해 인격적인 거듭남과 구원의 은혜 주셨습니다. 소망 없던 죄인을 구원하신 그 사랑에 감동되어 선교사로 살겠다고 결단했습니다.
그리고 대학생 시절 국민대 캠퍼스 목자의 사명을 감사하며 내가 만난 예수님을 후배들에게 전했습니다.
그런데 당연히 합격할 줄 알았던 공군학사장교 시험에서 떨어지자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고, 원망하며
군대로 도망치다시피 떠났습니다. 그 곳에서 나이 어린 고참 밑에서 인내와 겸손 훈련을 받고 제대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무것도 없는 빈 그물 뿐인 삶을 생각할 때 손해의식이 밀려왔고, 미래에
대한 두려움으로 모임을 떠나 세상으로 돌아가려 했습니다. 이 때 예수님은 십자가 사랑으로 찾아오셨습니다. 나는 너를 위해 목숨을 버렸는데 너는 계획대로 인생이 안 풀렸다고 떠나려 하니’라는 주님의 음성 앞에 눈물을 흘리며 회개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주님
한 분만을 사랑하고 섬기겠다며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죄인을 국민대, 보건대, 상명대 역사를 풀타임으로 동역하는 은혜를 주셨습니다. 이 후 2005년 어려운 취업 문턱을 운전면허증 하나로 넘게 하시고, 평신도 목자로 역사를 섬기도록 하셨습니다. 동시에 철 같은 믿음의
소유자 수예 목자와 믿음의 결혼도 할 수 있도록 하셨고, 2남 1녀의
자녀도 열매로 허락하셨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 은혜를 잘 감당치 못했습니다. 영화에서만 보던 강남의 유흥업소를 경험하며 정욕과 술 취함에 몸과 영혼을 더럽혔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죄인을 심판하며 목자에서 파면 시킬 수 있었지만 인내로 감당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직을 하게 하심으로 더 이상 그런 유혹을 받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
이직한 직장에 선교사 출신의 믿음과 마케팅 역량이 뛰어난 멘토를 예비하셨습니다. 그 분의 도움으로 부족하지만
마케팅 업무를 배우며 안정적인 직장생활 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3년전
현재 매일유업으로 다시 옮길 수 있는 계기도 되었습니다. 지금은 그 분을 팀장으로 모시고 있습니다. 팀장은 제가 매일유업에서도 잘 적응하고 성과 낼 수 있도록 세심한 배려를 해 주었습니다. 인사고과도 잘 주고 뿐 아니라 이렇게 수양회 참석한다면 기꺼이 휴가를 허락해 주었습니다. 이처럼 최고의 상사를 보내 주셨음에도 저는 불평과 불만을 토로했습니다. 이것이
팀장 귀에 들어갔고 저에 대한 실망과 배신감으로 팀장은 고통했습니다. 다행히 서로 간에 오해를 풀었지만
여전히 앙금이 있는 상태입니다. 모임 내에서도 비젼 연구회 멤버로 활동하며 모임의 변화와 성장을 추구했지만, 또 한편으로 영적 어린 아이때 저를 섬기고 기도해 주셨던 목자님들을 판단하고 정죄했습니다. 이처럼 죄인은 하나님의 은혜 뿐 아니라 사람의 은혜까지도 잊고 주님과 사람들에게 배신과 상처를 주었습니다. 본문 말씀을 섬기며 베드로의
모습이 저의 모습임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얼마나 배은망덕한 교만한 자인가를 깊이 깨닫습니다. 주님의 변함없는 사랑과 은혜가 아니면 한 순간도 살 수 없는 자입니다. 죄인이
이 주님의 크신 사랑을 항상 감사하며 주님 한 분만을 깊이 사랑하겠습니다. 이 사랑으로 맡기신 예수님의
양을 심정을 다해 섬기겠습니다. 뿐만 아니라 저로 인해 상처 받은 팀장을 존경하고 겸손히 동역하겠습니다. 그리고 연약한 저를 감당해 주시고 기도해 주신 선배 목자님들과 후배 목자님들께 이 시간을 빌어 깊이 감사 드립니다. 결론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부인하고 사명까지 버린 제자들을 변함
없는 사랑으로 온전히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양을 먹이고 치는 목자로 다시 세워 주셨습니다. 우리가 이번 수양회 통해 받은 예수님의 완전한 사랑으로 온전히 회복되어 사랑의 공동체가 되고, 이 시대 죽어가는 청년을 말씀으로 먹이고 제자로 세우는 역사를 뜨겁게 감당하기를 기도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