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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017년 여름특강 제 3강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 ' (로마서 8:14-30 )2017-07-16 0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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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여름특강 3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 


말씀/ 로마서 8:14-30 

요절/ 로마서 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오늘 말씀은 고난 가운데 있는 초대교회 성도들을 향해 주시는 하나님의 큰 위로와 격려의 말씀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과 비할 바는 못되지만 오늘날 우리에게도 각자 크고 작은 고난들이 있는 줄로 압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마음에 큰 힘과 위로를 받고 각자 당하는 그 고난들을 이기고 승리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로마서 8장 전반부에서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믿는 성도는 하나님의 영의 인도함을 받게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14절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영의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씀합니다. 


15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하나님의 영의 인도함을 받는 사람, 곧 하나님의 아들이 된 사람은 하나님을 담대하게 “아버지, 아빠”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16-17절을 보십시오.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바울 사도는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공동 상속자가 되었다는 놀라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상속자로서 받게 될 영광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생명을 다하여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여 받든 그 아들을 얼마나 사랑하시겠습니까! 그에게 하나님께서 소유한 모든 좋은 것을 다 주시려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아무 공로도 없는 우리를 그리스도와 공동 상속자로 세우셨습니다. 그리스도에 주시려는 영광을 우리에게도 주시려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볼 때에 우리는 어느 날 갑자기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그리스도를 남편으로 만나게 된 신부와 같습니다. 훌륭한 남편을 만난 것은 참으로 행복한 일입니다. 남편이 대통령이 되면 부인도 함께 영부인이 되는 것처럼 우리도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어 그가 받을 영광에 동참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영부인이 처음부터 영부인이 된 것이 아닙니다. 젊은 시절 남편이 고생할 때에 부인은 그 모든 고생에 함께 동참하였습니다. 이와같이 그리스도의 신부된 성도들도 영광을 받기 이전에 먼저 받아야 할 고난이 있습니다. 그러면 성도가 받아야 할 고난에는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첫째, 죄와 싸우는 고난이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죄를 없이 하시려고 십자가에 달리신 것처럼 그리스도의 신부 된 성도들도 죄와 싸우는 고난이 있습니다. 죄는 죄와 타협하며 사는 자들에게는 자비롭습니다. 져주는 척하면서 적당히 가지고 놉니다. 그러나 정말로 싸울 자세를 보이는 사람에게는 감추어두었던 그 무시무시한 이빨을 드러냅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흘리기까지는 대항하지 아니하고” (히 12:4)라고 하였습니다. 정말 죄와 싸우는 사람은 마치 격투기 선수가 승리를 위해 피흘리며 싸우는 것과 같습니다. 또 밤에 강도가 들어왔을 때 집주인이 자기와 가족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피흘리며 싸우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날 많은 크리스챤들이 이처럼 죄와 피흘리기까지 싸우는 고난이 힘들어 적당히 타협합니다. 세상의 음란문화, 물질주의, 인본주의와 타협하고 자기도 즐깁니다. 그러나 죄와 타협하는 자는 잠시 이 세상에서는 편안하게 살 수 있을지 몰라도 장차 주님께로부터 받을 칭찬은 기대할 수 없습니다. 죄와의 싸움은 내 능력으로는 승리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내 안에 계신 성령님을 의지하고 말씀을 의지할 때 승리할 수 있습니다. 비록 피는 흘릴 수 있지만, 정말 많이 아플 수 있지만 싸울 때 승리할 수 있습니다. 싸우지 않으면 승리는 없습니다. 그러나 싸우면 반드시 승리합니다. 


둘째, 복음의 원수세력과 영적 싸움을 싸우는 고난이 있습니다. 초대 교회 때에도 복음을 대적하는 원수세력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유대인들과 각 지방의 우상숭배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의 배후에는 원수 사탄이 있었습니다. 사탄은 유대인들을 충동질하여 성도들의 전 재산을 몰수하거나 감옥에 처 넣거나 심지어 죽이기도 하였습니다. 오늘날 사탄은 전략을 바꾸어 무자비한 박해 대신 세상의 인본주의, 향락주의, 육신주의로 복음 전파자들을 박해하고 있습니다. 소득이 올라갈수록 복음의 수용성이 현저히 떨어진다는 한 기독교 학자의 통계조사처럼, 또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보다 어렵다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오늘날 우리 사회가 과거에 비해 잘 살게 되면서 특히 젊은이들의 복음의 수용성이 현저히 떨어졌습니다. 많은 사역자들이 캠퍼스에서 대학생 한 사람을 예수님의 제자로 세우는 것이 마치 날아가는 새를 맨손으로 잡는 것처럼 어렵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합니다. 이런 시대에 목자로 산다는 것은 참 고난스럽습니다. 우리 사모님들은 비싼 비용을 들여 아이를 베이비시터에게 맡겨놓고 캠퍼스에 나오지만 눈에 보이는 열매가 잘 없습니다. 우리 목자님들도 물질로 헌신하고 또 주말을 반납하며 복음역사를 섬기지만 요회에 계승자가 잘 서지 않아 나이가 40, 50이 되어도 예전같으면 학생목자, 또 젊은 목자들이 해야 할 일을 지금도 하고 있어서 고난스럽습니다. 그러나 복음역사가 어렵다고, 고난스럽다고 이것을 포기하면 어떻게 됩니까? 우리 주님의 칭찬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복음역사가 어려워도 포기하지 않고 감당하면 하나님의 때에 그리스도의 계절이 반드시 옵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는 부흥이라는 책에서 교회사를 연구해 볼 때 하나님은 일정한 주기로 교회가 영적 기근으로 죽어가게 되면 부흥이라는 단비로 교회를 다시 살려놓으신다고 하였습니다. 또 요한 계시록을 보면 예수님의 재림 직전에 큰 부흥의 역사가 있을 것이라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그 때에 포기치 않고 복음역사를 충성스럽게 섬기던 종들, 고난의 때에 말씀과 기도로 연단된 종들, 준비된 종들을 크게 쓰실 것입니다. 


셋째, 죄와 사탄의 통치가 남아있는 이 세상에 사는 것 자체가 고난입니다. 이 세상은 어떻게 보면 하나님이 통치하시고 다스리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또 어떻게 보면 여전히 죄와 사탄이 지배하는 것 같습니다. 한쪽은 사탄이, 한쪽은 하나님이 다스리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니면 낮에는 하나님이, 밤에는 사탄이 다스리는 것 같기도 합니다. 이는 D day와 V Day의 개념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2차 대전 때 연합군이 노르망디 상륙에 성공함으로(D day: 1944년 6월 6일) 연합군의 승리가 거의 결정적으로 확정되었으나 실제 전쟁이 완전히 종료(V day: 1945년 8월 15일 혹은 9월 2일)되기까지는 국지적인 전투가 계속해서 있었습니다. 그 기간에는 여전히 적군의 총구에서 총알이 뿜어져 나왔고 그 총탄에 맞는 이들은 사망하였습니다. 이와같이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의 복음으로 죄와 사망의 패망은 확정되었고 그 결정적인 세력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재림하시기 전까지 패망이 확정된 죄와 사탄의 국지적인 공격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영적 전쟁을 하면서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천국 후방에서 전투기를 보내주기도 하시고 미사일을 쏘아주기도 하십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사자가 생겨납니다. 때로는 양들이 폭탄을 맞고 전사하기도 하고 목자도 전사합니다. 심지어 선교사도 전사합니다. 


우리는 내가 믿음으로 사는데, 하나님께서 나를 지켜주시는데 나에게 왜 이런 고난이 있는가 스스로에게 질문하며 혼돈스러워하고 힘들어 합니다. 그러나 알아야 할 것은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는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을 살면서 여러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을 당할 수 있습니다. 중한 질병에 걸릴 수 있습니다. 큰 사고를 만나 죽음에 이를 수도 있습니다. 이런 일들은 할 수만 있으면 피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크든 작든 그러한 고난을 거쳐가는 것은 모든 그리스도의 공동 상속자들이 피할 수 없는 과정입니다. 


18절을 보십시오.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지금부터 사도 바울은 성도가 이 세상을 살면서 당하는 고난을 어떻게 이기고 승리할 수 있는지 말씀하고 있습니다. 가장 먼저는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이는 원문상 ‘로기조마이’인데 ‘계산해보다(calculate), 깊이 고려해보다(consider)’ 하는 뜻입니다. 무엇을 생각해보는 것입니까? 현재 내가 당하는 고난과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을 비교해 보는 것입니다. 먼저 현재 내가 당하는 고난의 크기와 장차 나타날 영광의 ‘크기’를 비교해 봅시다. 사도 바울은 ‘비교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비교할 가치가 없다, 비교한다는 것이 애초부터 말도 안된다(NIV: not worth comparing)는 것입니다. 우리는 태양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태양은 지구의 130만배 크기이니까 정말 크죠. 그러나 우주에는 태양과 비교할 수 없이 큰 별이 무수히 많으며 현재까지 발견된 가장 큰 별은 지구에서 5천 광년 떨어진 곳에 위치한 VY 행성이라는 붉은 극대거성입니다. 이 별의 직경은 무려 28억 km(지구는 1만 2756 km, 태양은 139만 km)이며 이 별을 시속 900 km 의 비행물체로 이동할 때 한 바퀴 도는데 무려 1,100년이 걸린다고 합니다. 현재 내가 받고 있는 고난만 바라보면 태양처럼 커 보입니다. 내가 당하는 고난이 우주에서 제일 큰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은 붉은 극대거성보다 더 큰 것입니다. 제 페이스북 동영상을 보면 처음 태양을 볼 때 엄청나게 크다고 생각되는데 맨 나중에 보면 태양은 점처럼 작다고 느껴지게 됩니다. 이와같이 내가 현재 당하는 이 고난의 과정을 잘 인내하고 승리하면 그와 비교할 수 없는 큰 영광으로 변화되어 나타난다는 것을 생각할 때 마음에 큰 위로를 받고 고난을 이겨낼 힘을 얻게 됩니다. 


다음으로 시간적인 기준으로 비교해 볼 수 있습니다. 고난 중에 있는 사람은 그 고난의 시간이 견딜 수 없이 길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고난의 시간이 아무리 길다 하더라도 장차 나타날 영광의 시간과 비교해 볼 때 그 고난은 찰나의 순간과 같습니다. 찰나는 75분의 1초(약 0.103초)입니다. 우리의 인생이 만약 한 찰나라면 1000년, 만년은 도대체 얼마나 긴 시간일까요?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의 시간은 그와같이 긴 시간입니다. 우리가 어떤 학위를 받을 때 그 학위를 받기 위해 5년 7년 공부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너무 길고 지겹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그 학위를 받은 이후 30년 40년의 삶이 달라진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바뀌고 공부를 감당할 용기를 낼 수 있게 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아무리 길게 고난을 받는다 하더라도 50년 이내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이후 받을 영광은 무한의 무한입니다. 그 무한의 시간과 비교해 볼 때 50년은 비교할 가치조차 없습니다. 또 현실적으로 고난 속에서도 자면서 쉬는 시간도 있고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의 순간도 있으므로 순수하게 고난의 시간만 합한다면 5년 길어야 10년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무리 고난이 긴 시간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감당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19-22절에서 바울은 모든 피조물이 장차 성도들에게 나타날 영광을 간절히 고대하며 기다리고 있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이 영원할 것으로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실상 이 세상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영광을 받을 그 날만을 학수고대하고 있습니다. 폭우가 쏟아져 계곡이 물에 잠기고 나무가 쓸려갈 때 계곡은 탄식하며 하나님의 아들들이 영광을 받아 이런 폭우가 이제는 그만 쏟아지기를 고대합니다. 폭염으로 나무가 말라갈 때 산은 탄식하며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 자식같은 나무들이 더 이상 말라죽지 않을 그 날이 오기만을 마치 산모가 산통가운데 아이 낳을 날을 탄식하며 기다리는 것처럼 대망하고 있습니다. (NIV: 22 We know that the whole creation has been groaning as in the pains of childbirth right up to the present time.)


23절을 보십시오.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이것은 비단 성도들을 제외한 피조물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인 예수님을 구원의 확실한 보증으로 받은 우리까지도 산모처럼 속으로 탄식하며 기다리고 있습니다. 모든 성도들이 대망하며 기다리는 성령의 최종적인 열매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몸의 속량입니다. 죄와 죽음의 지배아래 있는 이 육체의 몸을 벗어버리고 다시는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는 신령한 새 몸을 받는 것입니다. 


24-25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다는 것은 우리의 구원의 완성이 반드시 기다림과 소망이라는 과정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산모가 아무리 마음이 급해도 결혼과 동시에 아이를 낳을 수는 없습니다. 산모는 반드시 약 40주간의 기다림의 과정을 거쳐야 옥동자, 옥동녀를 분만할 수 있습니다. 이 기다림의 시간은 산모에게 있어서 꽤 긴 시간이고 항상 깨어서 긴장가운데 배 속의 아이를 보호해야 하며 입덧이나 산통 등 여러 힘든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산모가 이 기다림의 시간을 가장 잘 견디며 보낼 수 있는 비결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예쁜 아이, 나를 닮은 아이, 귀엽고 사랑스러운 내 아이를 낳을 수 있다는 소망일 것입니다. 이와같이 복음을 영접함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성도는 구원의 완성, 곧 몸의 구원을 얻기까지 산모와 같이 탄식하며 기다림의 시간을 보내야 합니다. 그 기다림의 시간동안 다른 무엇보다 내가 얻은 이 구원을 잃지 않도록, 믿음을 잃어 유산하지 않도록 조심 또 조심해야 합니다. 또 여러 힘든 과정을 참고 인내해야 합니다. 이 기간을 가장 잘 보낼 수 있는 비결은 장차 얻게 될 몸의 구원을 기대하고 소망하는 것입니다. 소망은 인내의 어머니입니다. 소망할 때 끝까지 참을 수 있습니다. 소망은 어떤 큰 고통과 아픔이라도 끝까지 참을 수 있도록 돕는 힘의 원동력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으나 어떤 의미에서는 또한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다고 말씀합니다. 그만큼 신앙생활에서 소망이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에게 어떤 소망이 있습니까? 세상의 헛된 소망을 붙들 때 신앙의 경주를 끝까지 감당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구원의 완성,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을 몸을 덧입게 될 이 몸의 구속의 소망을 굳게 붙들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26절을 보십시오. “이와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다음으로 바울 사도는 고난 중에 있는 성도들을 성령께서 도우신다고 말씀합니다. 곧 고난 가운데 우리가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친히 간구하신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고난 가운데 있을 때 힘든 것은 고난 자체가 힘든 것도 있지만 나에게 왜 이런 고난이 왔는지 그 원인과 그 의미를 알 수 없을 때 정말 힘들고 괴롭습니다. 그 의미를 알 수 없으니까 당연히 무엇을 위해 기도해야 하는지 기도제목도 알 수 없습니다. 다음으로 고난 가운데 힘든 것은 이런 고난 가운데 있는 나를 하나님께서 도와주지 않으신다는 느낌을 받는 것입니다. 예전에 별 고난이 없을 때에는 그렇게 기도응답도 빨리 빨리 잘 해주시고 나를 섬세하게 도와주시던 하나님이 이상하게 이 큰 고난 가운데서는 나를 내버려두시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 것입니다. 그때 버림받은 고아처럼 슬프고 외롭고 하루하루가 고통스럽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이 큰 고난 가운데 있는 우리를 성령께서 도우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제 막 태어난 아이는 어머니가 절대적으로 섬겨줍니다. 울면 우유를 입에 넣어주고 소변과 대변을 보면 기저귀를 갈아줍니다. 그런데 아이가 어느 순간 혼자 힘으로 일어나 걸으려고 시도합니다. 그 모습을 본 어머니는 속으로 너무 기뻐하면서 “조금만 힘내, 조금만. 그렇지, 그렇지” 하면서 아이를 응원해 줍니다. 이때 어머니가 아이를 도와주지 않는 것이 도와주는 것입니다. 성령께서도 우리가 막 태어난 아이와 같을 때에는 우유를 먹여주고 기저귀를 갈아줍니다. 그러나 걸음마를 배우는 단계가 되면 우리의 영적 성장을 위해 때로는 우리를 광야같은 외로움과 슬픔 가운데 홀로 내버려 두십니다. 동시에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하나님께 친히 기도해 주십니다. 성령의 도우심과 말할 수 없는 탄식의 기도! 이것이 얼마나 고난 가운데 큰 위로입니까! 얼마나 큰 격려입니까! 


27절을 보십시오.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또한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정확하게 알아 그 하나님의 뜻에 맞게 기도해주십니다. 보통 고난 가운데 우리는 너무 힘들어 다음과 같이 기도합니다: “주여 이 고난이 빨리 지나가게 하여 주옵소서.” 그 때 성령께서 우리의 기도제목을 바꿔 주십니다: “주님. 이 종이 이 고난을 통해 배울 것을 배우고 깨달을 것을 깨달아 성장하게 하여 주옵소서.” 또 우리는 기도합니다: “주여 나를 고난스럽게 만드는 저 분이 사라지게 하여 주옵소서.” 그 때 성령께서 다시 기도제목을 바꾸어 주십니다: “주님 이 종을 고난스럽게 만드는 저 사람을 통해 이 종이 변화되어 주께서 크게 쓰실만한 위대한 하나님의 종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고난 중에 기도응답이 거꾸로 되는 것 같이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반발심이 들어 기도를 중단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나의 기도를 성령께서 하나님의 뜻에 맞게 바꾸어 주신 것이고 그 바뀐 기도제목을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신 것입니다. 


28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이 말씀은 고난 중에 있는 자들에게 최고의 위로요 격려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십니다. 선(NIV: the good)이란 무엇을 의미합니까? 본문에서 선이란 하나님이 보시기에 가장 아름답고 좋은 것입니다. 하나님께 기쁨이 되고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동시에 우리 편에서도 최종적으로 볼 때에 가장 좋고 유익하고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도의 삶에 일어나는 모든 것들을 다 합력하여 이와같이 최종적인 선을 이루십니다. 그러면 이 말씀이 고난 중에 있는 성도들에게 의미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첫째, 하나님은 고난을 축복으로, 악을 선으로 바꿀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역경과 고난 그 자체는 결코 축복이라 할 수 없습니다. 그 역경과 고난 안에 사람들의 더러운 죄와 허물이 얽혀 있습니다. 졸면서 고속도로를 달리는 버스 운전사로 인한 사고, 이기적이고 심한 욕설로 부하직원을 괴롭히는 직장상사로 인한 마음 고생, 이로 인해 생겨난 신경성 위염과 만성 편두통, 나의 부족함과 연약함으로 인해 맡은 일에서 크게 실패한 것 등은 그 자체만 보면 결코 선하거나 아름답지 않으며 우리의 삶을 망가뜨리는 흉측한 괴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을 사용하여서 가장 아름다운 선으로 바꾸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사탄은 역경과 고난을 이용하여 성도로 하여금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신하게 만들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러한 역경과 고난을 선으로 바꾸십니다. 그러한 역경과 고난을 통해 자신의 부족한 점, 죄인된 자아를 깊이 발견하게 하십니다. 학생이 시험을 치면 자신의 실력을 정확하게 알게 되듯 성도가 고난을 받게 될 때 자신의 실존을 정확하게 깨닫게 됩니다. 고난받을 때 내 속에 이렇게 원망, 불평, 불신의 죄가 깊고 크구나 하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고난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자부했는데 그 사랑이 너무도 피상적이고 얄팍한 것이었구나,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했지만 사실은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을 더 사랑했구나 깨닫게 됩니다. 고난받을 때에 내가 믿음의 사람인 줄 알았는데 사실은 인간적인 사람이었구나 깨닫게 됩니다. 이 깨달음이 하나님 보실 때에는 참으로 아름다운 선입니다. 또한 고난을 통해 겸손히 하나님을 의지하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사람이 고난받기 전에는 말로는 하나님을 의지한다고 하고 또 스스로도 하나님을 의지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자기 능력을 의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러한 사람이 고난을 받을 때 자기 능력으로 할 수 있는 것이 큰 한계가 있고 정말 중요한 것은 자기 힘으로 할 수 없다는 것을 깊이 깨닫게 됩니다. 고난을 통해 그는 겸손히 자기를 내려놓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 편에서 볼 때 참으로 아름다운 선입니다. 또 고난을 통해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받을만한 그릇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사람의 내면이 간사하여 간장 종지와 같습니다. 조금만 성공하면 마음이 높아져 사람과 모임을 무시하고 말을 함부로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 사람의 마음을 먼저 겸손하게 하신 후 그에게 큰 은혜를 주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보실 때 아름답고 선합니다. 


둘째, 이 모든 일에 결코 실수나 실패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은 모든 사건의 배후에 하나님의 계획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재난이나 고난이 사람의 실수나 허물, 죄로 인해 일어난 일이라고 생각하면 고통스럽습니다. 또 그냥 우연히 일어난 일이라고 생각하면 세상 사는 것이 언제 죽을지 모르는 위험한 정글 속에서 사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이 모든 사건의 배후에는 하나님의 계획이 있으며 그러므로 결코 실수나 실패가 있을 수 없습니다. 성도의 삶에 오발탄같은 인생은 결코 있을 수 없습니다. 성도의 인생에 오발탄같은 사건도 있을 수 없습니다. ‘그 때 그 일만큼은 정말 오발탄같은 일이었어. 그것만은 지워버리고 싶어.’ 이런 것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것까지도 다 사용하셔서 내 삶에 선을 이루십니다. 그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믿음이 없는 불신자라면 이 말씀은 해당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만약 그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그의 죄로 인해 십자가에 대신 죽으신 구주라는 믿음이 있다면 이 말씀은 문자 그대로 진리입니다. 그의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이 다 합력하여 선을 이룹니다. 


29-30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하나님은 성도들을 부르시고, 동시에 부르신 그들을 의롭다 하십니다. 또한 의롭다 하신 이들을 영화롭게 하십니다. 구원의 최종적인 목적은 성도들이 예수님의 형상을 닮은 자들이 되는 것입니다. 또 예수님께서 받으실 그 영광에 성도들도 참여하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영화롭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최종적인 선입니다. 


결론입니다. 고난은 성도가 예수님의 형상을 닮고, 예수님의 영광에 참여하는 과정에 있어서 반드시 필요한 과정입니다. 주님께서는 고난받는 성도를 결코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탄식하는 기도로 응원해 주십니다. 우리 안에 선을 이루어주십니다. 이 하나님을 끝까지 믿고 의지하는 가운데 모든 고난을 이기고 승리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