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누가복음 제 23 강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면
말씀 / 누가복음 14:7-35 요절 / 누가복음 14:26,27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오늘 제목과 요절 말씀을 보면 예수님의 제자로 살기 위해서는 가장 가까운 혈육인 부모 형제도 미워하고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해야 한다는 매우 부담스러운 말씀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1파트를 중심으로 겸손, 즉 낮은 자리에 처하라는 말씀, 또는 2파트, 천국 잔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라는 말씀을 강조하고, 3파트는 가볍게 넘어가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그러나 전체 본문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길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비껴가지 않고 이 점을 배우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이 부담스러운 명령의 말씀이 아니라 아주 축복된 초청의 말씀인 것을 발견하고 은혜 누리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7절을 보겠습니다. “청함을 받은 사람들이 높은 자리 택함을 보시고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여 이르시되”. 여기서 청함을 받은 사람들은 14장 1절에서 한 바리새인 지도자의 집에 초청받은 사람들을 말합니다. 1-6절에서 예수님은 만찬 시작 전에 한 수종병 든 사람을 고쳐 주셨습니다. 이어서 7절 만찬이 시작되는데 사람들이 저마다 높은 자리에 앉고자 했습니다. 자리싸움을 한 것입니다. “아, 이 사람아, 당신은 아직도 나이가 젊은 주니어 바리새인이면서 여기 앉으려고 해? 저리로 내려가시오.” “아, 여기가 장유유서 따지는 조선 땅도 아닌데 왜 그러세요?”하며 서로 높은 자리에 앉고자 했습니다. 당시 자리는 U자 또는 ㄷ자로 배치가 되어있었는데, 정중앙 가운데가 제일 상석으로 주인이 앉았습니다. 그 다음에 주인의 오른쪽, 왼쪽, 또 그리고 오른쪽, 왼쪽이 상석이었습니다. 주인에게서 멀리 앉을수록 낮은 자리, 곧 말석이었습니다. 제일 낮은 자리는 들어오는 입구 옆에 앉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3장 6절을 보면 바리새인들은 잔치의 윗자리에 앉기를 좋아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높은 자리에 앉은 자신을 보고 “아, 저분은 높으신 분이구나”라는 말 듣기를 좋아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비유인 이유는 그 만찬 자리가 아니라 8절과 같이 혼인 잔치에 초대받을 때를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혼인잔치는 가장 격식을 차리는 공식적인 자리입니다. 어디에 앉는가가 중요한 잔치입니다. 이런 잔치에서 어디에 앉으라고 하십니까? 8-11절을 보십시오. “네가 누구에게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았을 때에 높은 자리에 앉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보다 더 높은 사람이 청함을 받은 경우에 너와 그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이 사람에게 자리를 내주라 하리니 그 때에 네가 부끄러워 끝자리로 가게 되리라 청함을 받았을 때에 차라리 가서 끝자리에 앉으라 그러면 너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벗이여 올라 앉으라 하리니 그 때에야 함께 앉은 모든 사람 앞에서 영광이 있으리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어디에 앉으라고 하십니까? 10절과 같이 끝자리에 앉으라는 것입니다. 끝자리는 들어오는 문 옆의 자리입니다. 음식을 서빙하는 하인들이 들어오고 나갈 때마다 툭툭 치고 가는 그런 자리입니다. 주인과 대화할 기회도 갖지 못하는 멀리 떨어진 자리입니다.
그런데 그런 말석에 앉아 있으면 어떤 일이 생기기도 합니까? 10절 하반절을 보겠습니다. “너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벗이여 올라 앉으라 하리니 그 때에야 함께 앉은 모든 사람 앞에서 영광이 있으리라“. 주인이 올라 앉으라고 합니다. 그러면 ”아, 저 사람 참 겸손하구먼. 훌륭한데“하고 칭찬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예수님의 말씀의 의도는 그런 것을 기대하고 낮은 자리에 잠시 앉아 있으라는 것은 아닙니다. 낮은 데 앉아서 언제 올라 앉으라 할까 기대하며 주인의 얼굴만 쳐다보고 있으라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마음으로서가 아니라, 자신이 이런 귀한 혼인 잔치에 초대받을 자격이 안 되는 부족한 자요 보잘 것 없는 자인데, 이렇게 오게 된 것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문 입구에라도 앉게 된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하는 그런 겸손한 자세를 가지라는 것입니다. 물론 그런 사람을 주인이 올라 앉으라 할 수도 있고 하지 앉을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영광을 받을 수도 있고 안 받을 수도 있습니다.
이 비유를 통해 예수님이 주시는 결론적인 말씀이 무엇입니까? 11절을 다시 한 번 보십시오.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집니다. 반드시 그렇게 됩니다. 주인은 혹시 잊을지라도 누가 높이고 누가 낮추십니까? 하나님이 그렇게 하십니다. 사무엘상 2:7절은 말합니다.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 여기서 전체 본문 흐름과 연결을 시켜보면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한 첫 번째 자세는 겸손인 것을 배우게 됩니다. 혼인 잔치에 초청받은 것 자체를 큰 영광으로 생각하고 말석에 앉는 것처럼, 예수님의 제자로 부름 받은 것 자체를 큰 영광으로 생각하고 겸손히 주님을 따르는 자세를 갖는 것입니다.
12-14절을 보십시오. “또 자기를 청한 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점심이나 저녁이나 베풀거든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 두렵건대 그 사람들이 너를 도로 청하여 네게 갚음이 될까 하노라 잔치를 베풀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저는 자들과 맹인들을 청하라 그리하면 그들이 갚을 것이 없으므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 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라 하시더라” 제가 예전에 대학에 들어갔을 때 한 선배가 말해 주었습니다. “대학에서는 친구를 잘 사귀는 게 중요해. 아무나 사귀지 말고 나중에 너에게 도움이 될 사람, 똑똑하고 능력 있고, 부모가 재력이 있거나 유명한 사람의 아들들을 사귀어. 우리나라에서 인맥이 얼마나 중요하다고!” 아마 이런 것이 세상 사람들이 친구를 사귀는 원칙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도리어 어떤 사람을 초청하라고 하십니까? 13절을 보면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저는 자들을 초청하라고 하십니다. 이는 그들이 초대 받은 은혜를 갚을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 생각이 듭니까? “나만 손해 아냐?”하는 생각이 듭니다. 초대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가끔 주일에 어느 가정에 초대를 받아갑니다. 컬러풀하고 잘 준비된 음식 서빙을 받습니다. 여기에 들어간 시간과 정성과 기도와 물질은 정말 대단한 것입니다. 사랑의 섬김입니다. “정성과 시간과 돈이 많이 들어가는 초대를 하고서 아무 것도 받는 것이 없어? 그럼 나만 손해잖아?” 그런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14절은 뭐라고 합니까? “그리하면 그들이 갚을 것이 없으므로 네게 복이 되리니”. 네게 복이 있다고 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들이 갚지 못하기 때문에.” 누가 복을 주신다는 겁니까? 하나님이 주신다는 겁니다. 언제? 의인들의 부활 시에. 당장은 손해보고 끝나는 것 같아도 마지막 때 하나님이 다 아시고 하나님이 다 갚아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캠퍼스 복음 역사를 섬길 때, 열매가 보이지 않고, 많은 수고가 헛수고로 느껴질 때, 은혜가 되는 말씀입니다. 봄 학기 양을 얻어 열심히 섬겼는데, 여름 수양회에 가지도 않고 굿바이를 하는 양들이 있었습니다. 또, 간절히 기도하는 가운데 여름수양회에 참석하고 은혜도 많이 받았는데, 역시 굿바이를 하는 양들도 있습니다. 어떤 양들은 대학 4년 내내 섬김과 사랑을 받고, 졸업과 동시에 굿바이를 하기도 합니다. 우리에게 남아서 열매가 되어 주면 얼마나 기쁨이 되고 보람이겠습니까? 우리의 모든 수고에 갚음을 받은 것처럼 보람이 느껴집니다. 하지만 도리어 우리의 곁을 떠나간 양들로 인하여, 그들은 갚지 못하지만, 우리가 장차 진정한 보상을 받게 될지 누가 알겠습니까? 우리는 이 땅에서의 보상을 바라지 말고, 가난한 캠퍼스 영혼들, 병든 영혼들을 주님을 섬기듯이 순수한 마음으로 섬기는 자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15-24절은 큰 잔치의 비유입니다. 15절을 보십시오. “함께 먹는 사람 중의 하나가 이 말을 듣고 이르되 무릇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는 복되도다 하니” 14절에서 예수님은 “의인들의 부활 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다”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시’라는 것입니다. 현재 만찬 중입니다. 한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먹는 것으로 연결되는 상상을 합니다. “무릇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는 복되도다”. 이 말을 하는 사람은 자기는 당연히 그 하늘나라 잔치에 참여할 것으로 믿고 있는 것입니다. “아, 그 잔치는 얼마나 좋을까!”하고 김칫국부터 마시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혈통만으로 모두 구원을 받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구원? 당연하지! 천국 잔치? 당연히 참석하지!”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을 경계하기 위해서 비유를 주십니다. 16-20절입니다.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베풀고 많은 사람을 청하였더니 잔치할 시각에 그 청하였던 자들에게 종을 보내어 이르되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 하매 다 일치하게 사양하여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밭을 샀으매 아무래도 나가 보아야 하겠으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 하고 또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 시험하러 가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 하고 또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장가들었으니 그러므로 가지 못하겠노라 하는지라“ 같은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마태복음은 이 잔치를 왕이 그 아들의 혼인을 위해 베푸는 황태자의 혼인잔치라고 합니다. 이런 잔치는 보통 1년 전에 손님을 초청합니다. 공식 초청장에 ‘RSVP’라고 씁니다. 지금도 동일합니다. 불어로 ‘RSVP’인데, ‘Repondez s’il Vour Plait’ 영어로는 ‘Reply Please’ 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잔치에 오겠다고 답한 사람들로 명단을 정하고 잔치를 준비합니다. 그리고 잔치가 다 준비되면 이제 오시라고 두 번째 초청을 하는 것입니다.
16절 끝에 “사람들을 청하였더니”, 이것이 첫째 초청이고, 17절에 “종을 보내서 오소서” 하는 것이 두 번째 초청입니다. 이제 두 번째 초청에 다 응하여 와야 합니다. 정말 불가피한 사정, 예를 들면 교통사고가 났다든지 부모님이 돌아가셨든지, 그런 것 아니면 와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이것은 주인에 대한 모독이요, 왕이나 귀족 사이에서는 전쟁도 날 수 있는 문제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했습니까? 18절을 보니 다 일치하여 사양했습니다. 첫째 사람은 밭을 샀는데 그 밭이 무슨 문제가 없는지, 계약서대로 크기가 맞는지 가서 봐야겠다고 합니다. 둘째 사람은 소 다섯 겨리 - 겨리는 멍에로 묶은 한 쌍을 말합니다 - 그러므로 열 마리입니다. 이 소들이 병들지 않고 건강한지, 멍에들은 잘 메어졌는지 시험하러 가야 된다고 합니다. 셋째 사람은 장가들었는데 아내와 함께 시간을 보내야 하기 때문에 못 가겠다고 합니다. 그들의 말은 다 핑계에 불과합니다. 또 급하게 당장 하지 않아도 되는 일입니다. 또한 밭을 살 때 당연히 그 땅을 미리 잘 살펴보지 않았겠습니까? 소 열 마리 값은 아주 큰돈입니다. 이 소들을 미리 잘 체크하지 않았겠습니까? 장가들면 율법에 의해서(신명기 24장 5절) 일 년 동안 아내를 즐겁게 해주도록 되어 있는데, 잔칫집에 같이 오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들은 모두 잔치에 못 오겠다고 거절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는 그들이 황태자의 혼인잔치에 초청받은 것이 얼마나 큰 은혜와 특권인지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 귀한 초청을 멸시하고 그저 세상의 사고팔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일에만 더 관심을 두고 우선순위를 두었습니다. 그래서 일생일대의 기회를 발로 차버린 것입니다.
다 하나같이 오기를 싫어하자 어떤 일이 생겼습니까? 21절을 보십시오. “종이 돌아와 주인에게 그대로 고하니 이에 집 주인이 노하여 그 종에게 이르되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맹인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 하니라” 주인이 노했습니다. 인격모독을 당한 주인은 그대로 있지 않았습니다. 손님이 없다고 잔치를 취소하지도 않았습니다. 21절 하반절을 보면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맹인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 하였습니다. 종이 순종하여 사람들을 데려왔지만 그래도 자리가 비자 주인은 뭐라고 합니까? 23-24절을 보십시오. “주인이 종에게 이르되 길과 산울타리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전에 청하였던 그 사람들은 하나도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21절에 나오는 ‘거리와 골목’은 시내에 있는 것입니다. 23절에 나오는 ‘길과 산울타리 가’는 시외에 있는 것입니다. 산과 들로 멀리 나가서 사람들을 데려오라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볼 때 ‘거리와 골목’에 있는 사람들은 유대인들을 말하고 ‘길과 산울타리 가’에 있는 사람들은 우리와 같은 이방인들을 말합니다.
이 큰 잔치 비유가 우리에게 말씀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우리는 본래 시내에서 살 자격도 없어 야산이나 들이나 산울타리 가에서 지내던 이방인이었습니다. 구약 시대 선지자들의 초청을 받았던 자들은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리스도가 오셔서 본격적으로 초청하였는데 이를 거절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천국의 초청장이 우리에게까지 넘어온 것입니다. 복음이 우리 이방인들에까지 넘어오게 된 것입니다. 이 얼마나 큰 은혜를 받은 것입니까? 우리에게도 밭에 나가봐야 되는 일이 있습니다. 소를 시험해봐야 되는 일이 있습니다. 장가들고 시집가는 일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천국 잔치 초청이 얼마나 귀한 특권인지 우리가 알아야 되겠습니다. 세상 일에 매여 만왕의 왕 하나님의 천국 잔치 초대를 거절하는 무지한 자가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길 본론을 보겠습니다. 25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이 바리새인의 집에서 말씀을 마치고 나오실 때 수많은 무리가 주님을 따랐습니다. 예수님이 이들에게 말씀하십니다. 26-27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이 말씀은 마치 예수님이 우리에게 부모처자 형제자매를 미워하라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한 번도 예수님의 육신의 부모나 형제자매를 미워하신 적도 없고 제자들에게 미워하라고 하신 적도 없습니다. 도리어 누가복음 2장 51절을 보면 예수님은 어릴 때 부모인 요셉과 마리아를 순종하며 섬기셨습니다.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까지도 사랑하는 제자 요한에게 그 모친을 끝까지 돌봐주도록 부탁하셨습니다. 또한 마가복음 7장 8-13절을 보면 바리새인들이 자기들의 고르반 전통으로 부모를 섬기지 않는 것을 책망하셨습니다. 부모를 잘 공경하도록 명하셨습니다.
원수도 사랑하라고 하신 예수님께서 피를 나눈 가족을 미워하라고 하실 리가 만무합니다. 그러면 26-27절은 무슨 뜻일까요? 이것은 우리가 가족을 사랑하지만 예수님보다는 덜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족을 덜 사랑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마땅히 사랑해야 할 가족을 덜 사랑한다는 것은 마음에 모진 결심을 해야 가능합니다. 이는 마치 미워하는 마음을 먹는 것과 같습니다. 실제로 미워하기까지 하고자 하는 결심을 해야 가족에 대한 정을 억제할 수 있습니다. 자녀를 위해서 목숨 바쳐 희생하신 부모님들, 특히 한국의 어머니들을 생각할 때 우리가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 누가 그 어머니를 사랑하고 보답하고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런 정을 억제하고, 심지어 자기 목숨보다 더 예수님을 귀하게 여기고 사랑하는 자세를 가져야만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을 최우선 순위에 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의 가족보다, 심지어 나의 목숨보다 더 예수님을 우선순위에 두고 사랑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게까지 해야 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는 첫째로, 예수님은 만유의 창조주시요 나의 생명의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골로새서 1:16절은 말씀합니다.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만물이 예수님에게서, 그로 말미암아,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습니다. 우리 자신도 예수님에 의해서, 예수님을 위해서 창조되었습니다. 나의 인생목적은 예수님을 위한 것입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나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사 나의 영원한 구주가 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나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먼저 나를 죽도록 사랑하사 자기 생명을 주셨습니다. 셋째로, 예수님 안에 영생이 있고 그 분 안에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따를 때 우리는 예수님을 얻습니다. 내가 예수님과 같은 사람이 되고, 예수님이 내 안에, 내가 예수님 안에 거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온전히 소유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습니다.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는 것과 같습니다. 사도 바울에게는 세상에서 자랑할 것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이 참 보화되심을 발견하였을 때, 가장 고상하신 예수님에 비하면 세상의 것들은 배설물 정도밖에 안 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는 자기의 모슨 소유를 버리고 오직 참 보화되신 예수님을 얻기 위해서 전력 질주하였습니다.
26-27절을 다시 한 번 보겠습니다.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이 말씀은 결코 부담스러운 명령의 말씀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얼마나 귀한 분인지 알라는 것입니다. 내 모든 소유를 버리고, 심지어 이 세상에서 내 목숨을 버리고도 얻을 가치가 있는 분임을 알라는 것입니다. 가장 귀한 지혜와 지식과 영생되신 예수님을 소유하라는 축복된 초청의 말씀입니다. 수많은 사람들 중에 산울타리 가에 있던 자격 없는 저희에게 예수님의 제자로 살도록 초청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우리로 하여금 왕의 영광을 보게 하시고, 예수님의 아름다움과 보화됨을 보게 하시고, 이 초청에 응하여 힘써 제자의 길을 가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이 우리를 제자로 부르신 것은 큰 은혜요 축복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저 낭만적인 생각, 영적 허영심으로 예수님을 끝까지 따를 수는 없습니다. 분명한 마음의 준비와 결심, 결단이 있어야 됩니다. 그래서 28-32절 말씀을 주십니다. “너희 중의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진대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에 족할는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계산하지 아니하겠느냐 그렇게 아니하여 그 기초만 쌓고 능히 이루지 못하면 보는 자가 다 비웃어 이르되 이 사람이 공사를 시작하고 능히 이루지 못하였다 하리라 또 어떤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갈 때에 먼저 앉아 일만 명으로써 저 이만 명을 거느리고 오는 자를 대적할 수 있을까 헤아리지 아니하겠느냐 만일 못할 터이면 그가 아직 멀리 있을 때에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할지니라” 망대를 세울 때 높이 세워야 합니다. 높아야만 의미가 있습니다. 높아야만 적군을 발견하고, 과수원에서 도둑을 발견하고, 소방서에서 불을 일찍 발견합니다. 망대를 짓다가 중간에 공사를 멈추면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전쟁을 할 때, 특히 수적 열세가 있을 때, 일만이 이만을 대적해야 할 때 전략을 잘 짜야 됩니다. 고대 전쟁은 아주 잔인했습니다. 지면 죽임을 당하는 것이고 가족들은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그 치를 대가를 생각하고 진지하게 생각하고 결심을 잘 하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제자의 길은 가장 영광스럽고 고귀하고 보람된 길이지만 결심과 각오를 분명히 하고 시작해야 끝까지 갈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신 의도는 어려운 점이 있으니 제자의 길을 시작하지도 말라는 것이 아니라, 어려운 점이 좀 있으니 마음을 단단히 먹어서, 중간에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이기고 잘 따라오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 결심을 하고 따라갈 때 예수님이 또 친히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33절을 보십시오. “이와 같이 너희 중의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모든 것을 버린다는 것은 그 무엇도 예수님보다 덜 사랑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는 분이십니다. 얼마나 사랑하십니까? 자기 목숨을 주시기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이런 주님이 자신을 따르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리라 하실 때는 무슨 뜻이 있는 것입니까? 모든 것을 다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버리는 모든 것을 백배로 다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위해서는 버리는 것이 얻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가복음 10장 29-30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주님의 택함을 받은 우리 제자들은 아무것도 잃지 않습니다. 아무것도 잃을 수 없습니다. 주를 위해 포기할 때 이 땅에서 백배를 받습니다. 내세에 반드시 영생을 얻습니다.
소금은 자기를 온전히 버릴 때, 즉 완전히 녹을 때 식품의 부패를 방지하고 맛을 냅니다. 소금이 녹지 않으면, 즉 자기를 잃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온전히 녹아지고 없어질 때 그 존재 목적이 달성됩니다. 이와 같이 제자의 삶도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 낮아지고, 버리고, 희생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런 자들에게 예수님은 자신을 주십니다. 그럴 때 우리는 세상의, 이 우주의 모든 것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은 자격 없는 우리를 영광스러운 제자의 삶으로 초청하십니다. 제자는 첫째,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삶을 사는 자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상급을 바라고 섬기는 자입니다. 셋째, 예수님을 인생의 최우선순위로 두고 따르는 자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제자들의 주님이 되시며 그들에게 자신을 주십니다. 우리가 이런 축복된 제자의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 부르심의 영광을 볼 수 있도록 우리의 영적 눈을 열어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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