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누가복음 제 27 강
인자가 나타나는 날
말씀 / 누가복음 17:20-37 요절 / 누가복음 17:30 “인자가 나타나는 날에도 이러하리라”
오늘 본문은 17장 20절부터 37절입니다. 전체를 한번 보면 20절에서 바리새인들이 질문을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 임하나이까?” 이에 대해서 예수님이 21절에 답변을 하십니다. 22~37절은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그 중에 22~30절은 인자의 날이 어떻게 임할 것인가에 대한 설명이고 31~37절은 인자의 날을 생각하며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하는 내용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날’, ‘인자의 날’, 또는 ‘인자가 나타나는 날’ 이 모두 같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전체 키워드는 ‘인자가 나타나는 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요절은 30절이고 우리에게 주는 실천적인 방향은 32,33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런 구조를 이해하면서 본문의 의미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20절을 보십시오.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바리새인들의 질문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언제 임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왜 이 질문을 할까요? 이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자주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전체에 ‘하나님의 나라’라는 단어가 28번 반복됩니다. 오늘 17장 20절 이전까지 15번 나오고, 예수님이 그중에 친히 말씀하신 것이 12번 기록되어 있습니다. 특히 누가복음 11장 20절을 보면 “그러나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면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에게 이미 임하였느니라”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했다’ ‘has come’ 하셨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이해를 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메시아 곧 그리스도가 오실 때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데, 이 하나님의 나라는 이 땅에 가시적으로 실현되는 나라로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지상 메시아 사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과거 다윗 왕이 이루었던 것 같은 강대하고 부강한 나라가 실현되리라 믿었습니다.
이들이 이런 지상 메시아 왕국 사상을 갖게 된 근거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특히 구약성경에 나타난 약속의 말씀에 기인했습니다. 창세기 49장 10절에 보면‘통치자의 지팡이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민수기 24:17절에 보면‘한 별이 야곱에게서 나오며 한 규가 이스라엘에게서 일어나 모압을 이쪽에서 저쪽까지 쳐서 무찌르고 또 셋의 자식들을 다 멸하리라’하였습니다. 곧 정치적인 메시아를 말한 것입니다. 이사야 11:1절에도 메시아는‘이새의 줄기’곧 다윗의 후손으로 올 것이라고 예언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이 말씀들을 메시아 예언으로 믿었습니다. 메시아는 다윗의 후손 가운데서 나와서 주변의 모든 나라를 정복하고 이스라엘을 위대한 나라로 세울 것으로 믿었습니다. 우리 생각에는 “아니, 이사야서 53장, 고난의 종 예언은 안 읽어 보았나?” 또는 “시편 16편에 나오는 메시아의 부활 예언은 모르나?”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구약 시대 사람들은 이 말씀들을 메시아 예언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지상 메시아 사상에 사로잡혀서 고난의 메시아는 원하지도 않았고 이해할 수도 없었습니다. 이런 예언의 말씀들은 예수님께서 오셔서 가르치고 성취하심으로 비로소 이해가 된 것입니다. 따라서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였다고 하셨는데도 “우리는 로마 제국의 지배 아래에 있고, 경제 성장률은 낮고 청년실업률은 높고, 날로 살기 힘든데 도대체 무슨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졌나요?”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언제 임하나이까 묻고 있습니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20b~21절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때를 묻는 그들에게 때에 대한 대답 대신 20절 하반절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눈에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다, 또 21절에서는 그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너희 가운데 임했다라고 하십니다.
첫째,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어떻게 임합니까? 누가복음 11장에도 보면 한 말 못하게 하는 귀신 들린 자가 있었는데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내시자 그가 말을 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이 일을 행하신 후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다”고 하셨습니다. 또한 오늘 본문 바로 전에 무슨 기록이 있습니까? 나병환자 열 명이 나음을 받습니다. 그중 한 사람은 예수님께 돌아와 감사를 드립니다. 그에게 예수님이 뭐라고 하십니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눅17:19)” 그는 나병에서 나음을 받고 또 예수님을 믿고 영혼의 구원도 받았습니다. 곧 그의 마음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의 내면에 치유와 회복의 역사가 이루어지고, 그 마음에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가 실현되는 보이지 않는 역사입니다. 물론 그 결과는 변화된 삶을 통해 눈에 보입니다. 그러나 그 나라가 임하는 것 자체는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회복의 역사로 나타납니다.
이런 하나님의 나라는 어느 지역에 국한되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예루살렘이다, 로마다, 종로다, 봉천동이다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심령에 이루어지는 것이고, 그러한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는 공동체 확장의 역사로 나타납니다. 여기서 21절에 ‘너희 안에 있느니라’는 말씀은‘너희 마음에 있느니라’라고 해석도 가능하지만 그보다 문맥에 더 가까운 해석은 너희들 곧 제자들과 무리들을 포함한 여러분들 가운데 이미 임하였다는 뜻입니다. 이런 면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의 오심으로, 정확히 말하면 예수님이 오셔서 메시아 사역을 시작하심으로 이 땅에 이미 시작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already’입니다. 그리고 계속되고 있습니다. 지금도! 그러나 이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성된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재림으로 완성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시작된 ‘already’의 역사지만 완성되지는 않은 ‘yet’의 역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장차 예수님의 재림과 그로 인해 이루어지는 구원의 완성, 곧 새 하늘과 새 땅은 눈에 보이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바로 이것에 대해서 제자들에게 22절부터 말씀하십니다.
22절을 보십시오. “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때가 이르리니 너희가 인자의 날 하루를 보고자 하되 보지 못하리라.” 말씀하시는 대상이 제자들입니다. 20,21절은 대상이 누구였습니까?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눈에 보이게 이 땅에 임하는 지상 메시아 왕국 사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올바른 성격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제 제자들에게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보다 완전한 개념을 설명해 주십니다.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이 오셔서 메시아 사역을 하심으로 이 땅에 임하기 시작했고 예수님의 재림으로 완성되는 나라입니다. 이것이 21절에는 ‘인자의 날’이라고 하고 있고, 30절에는 ‘인자가 나타난 날’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앞으로 복음을 완전히 이해하게 될 것이며,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는 예수님의 재림을 고대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 시대에는 인자의 날을 보게 되지는 못할 것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아! 이 세상은 끝난다, 새 하늘과 새 땅이 임한다”하며 하던 일도 멈추고 하늘만 쳐다보고 있기 쉽습니다. 누군가가 “여기 오신다!” “저기 오신다!”하면 두려움 가운데 놀라서 하던 일도 그만 두고 그때만 기다리게 됩니다. 실제로 과거에 우리나라에 ‘다미선교회’란 곳에서 큰 물의를 일으킨 적이 있었습니다. --> 그림1 '이장림'이라는 교주가 1992년 10월 28일에 예수님이 재림하여 세상에 종말이 온다고 했습니다. 많은 신도들이 직장도 그만두고 학교도 그만두고 그때만 기다렸습니다. 그 오신다는 날 밤에는 모두 흰옷을 입고 모여 밤 12시 시각을 카운트하고 있었습니다. --> 그림2 방송국에서 와서 촬영도 하였습니다. 물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이런 일은 기독교 역사상 수십 번, 수백 번 일어났던 일입니다. ‘여기 오셨다’, ‘저기 오셨다’하며 소동하기 쉽습니다. 이에 대해서 예수님은 뭐라고 하십니까?
23,24절을 보십시오.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저기 있다 보라 여기 있다 하리라 그러나 너희는 가지도 말고 따르지도 말라 번개가 하늘 아래 이쪽에서 번쩍여 저쪽까지 비침같이 인자도 자기 날에 그러하리라.”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는 번개가 번쩍이듯 오십니다. 비오는 날 번개 칠 때 언제 칠지 모릅니다. 한번 치면 온 세상이 다 봅니다. 번개 치는 모습을 보기 위해서 어디로 갈 필요가 없습니다. 물론 예수님이 오실 시대는 분별할 수 있습니다. 시대가 점점 악해지고, 사랑이 식어지고 전쟁과 난리가 많아지면, ‘아, 주님 오실 날이 가까이 왔구나. 하고 우리가 생각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언제다’ ‘어느 시간이다’ 말하는 것은 전부 이단입니다. 예수님은 마가복음 12장 31절에서도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시느니라”하셨습니다.
25절을 보면 예수님은 재림하시기 전에 먼저 인류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 고난을 받아야 함을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인자의 날’ 곧 예수님의 재림의 때는 무엇과 같은 것입니까? 26~29절을 보십시오.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더니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망시켰으며 또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에 하늘로부터 불과 유황이 비 오듯 하여 그들을 멸망시켰느니라”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하는 그 인자의 날은 택하신 자들에게는 구원의 날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무서운 심판의 날입니다. 하나님은 자비로우셔서 그 인자의 날이 어떻게 임할 것인가 역사상 두 번의 사건을 통해서 미리 보여 주셨습니다. 그것은 노아의 홍수와 소돔, 고모라의 심판 사건입니다. 베드로후서 2:5-6에도 이 점을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옛 세상을 용서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의를 전파하는 노아와 그 일곱 식구를 보존하시고 경건하지 아니한 자들의 세상에 홍수를 내리셨으며 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망하기로 정하여 재가 되게 하사 후세에 경건하지 아니할 자들에게 본을 삼으셨으며.” 노아시대에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시고 또 타락한 소돔과 고모라를 불로 멸망시키신 것은 그 심판 자체도 의미가 있지만, 그것으로 후세에 경건하지 아니할 자들에게 본을 삼으신 것입니다. 본을 삼으셨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example’, ‘샘플’로 삼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대적하고 타락하면 이렇게 된다는 것을 구체적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예수님도 반복하여 우리에게 경고하십니다. 26절을 보십시오.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 노아의 때가 어떠했나요? 27절입니다.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더니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망시켰으며.” 노아 시대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신 사건은 창세기 6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죄악이 가득한 세상을 물로 심판하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래서 노아에게 방주를 짓도록 명하십니다. 노아는 말씀에 순종하여서 수십 년에 걸쳐 거대한 방주를 짓습니다. 베드로후서 2:5에 의하면 노아가 “의를 전파”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의를 전파했다는 것은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 죄에 대한 심판이 있다는 것을 증거한 것입니다. 그는 방주를 지으면서 이제 곧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이 있을 것을 말했습니다. 회개하고 구원의 방주에 들어오도록 초청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무엇을 했습니까? 노아를 조롱했습니다. “햇볕은 쨍쨍 모래알은 반짝인데 무슨 홍수야? 구름 한 점 없는데 저 영감 미쳤구나”했습니다. --> 그림3 그 당시 아주 어리석은 일을 하는 사람을 보면 “저 사람 노아 같구먼~”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사람들은 무슨 일을 했습니까?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갔습니다. 그들이 특별히 끔찍한 악행을 저지른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경고를 무시하고 그저 일상생활에 바쁘게 산 것입니다. 먹고 살기 위해서 열심히 일하고, 청년 실업 시대에 열심히 공부하여 job을 얻고, 장가가고 시집을 갔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계신지 안 계신지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는 말을 우습게 여기고 현실에 충실하게 살아갔습니다. 그러다가 노아는 방주에 들어갔고, 하나님은 방주의 문을 닫으셨습니다. 하늘에서 폭우가 쏟아지고 땅에서는 물이 터져 올라와 온 세상을 물로 덮었습니다. --> 그림4 그때 살아남은 사람이 몇 명이었습니까? 여덟 명이었습니다. 노아와 그의 아내와 세 아들과 세 며느리, 곧 여덟 명만 구원을 받았습니다. 적어도 수천, 수만 명이 노아가 방주를 짓는다는 사실과 그가 전한 심판의 메시지를 들었을 텐데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았습니다.
두 번째 예가 28,29절입니다. “또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에 하늘로부터 불과 유황이 비 오듯 하여 그들을 멸망시켰느니라.” 롯은 아브라함 시대, 곧 BC 2,000년 경 소돔에 살았습니다. 소돔 사람은 매우 타락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이들을 불로 심판하고자 작정하셨습니다. 불 심판 전에 하나님은 롯에게 말씀 하셨습니다. 창세기 19:12절 “그 사람들이 롯에게 이르되 네게 속한 자가 또 있느냐 네 사위나 자녀나 성 중에 네게 속한 자들을 다 성 밖으로 끌어내라.”너의 친척들, 더 나아가서 너의 친구들, 너의 말을 믿는 모든 사람들을 밖으로 끌어내라, 그들을 구원하라고 하셨습니다. 롯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심판 계획을 다 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도 듣지 않았습니다. 믿지 않았습니다. 그의 사위들은 롯의 말을 농담으로 여겼습니다. “장인어른, 참 유머가 많으시네요”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여전히 무슨 일을 했습니까?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지었습니다. 하나님 없이, 하나님과 상관없는 삶을 열심히 살았습니다. 롯은 천사의 손에 이끌려 두 딸과 아내를 데리고 소돔을 나갔습니다. 그가 나가자마자 하늘로부터 불과 유황이 비 오듯 내려서 다 멸망시켰습니다 --> 그림5.
우리는 노아의 홍수 심판이나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에 대해서 들으면 어떤 생각을 합니까? 두 가지를 생각합니다. 첫째는 “참 바보 같은 사람들이구나, 엄청난 심판이 다가오는데 대비를 했어야지!” 둘째는 “나 같으면 절대로 그런 하나님의 심판받는 대상이 되지 않을 거야.” 그런데 다시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과연 그런 상황에서 구원을 잘 받을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30절을 보십시오. “인자가 나타나는 날에도 이러하리라.” NIV에는 “It will be just like this on the day the Son of Man is revealed”라고 되어 있습니다. “just like this”, 똑 같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No! 나는 안 그래. 우리는 그 멸망당하는 바보들과 달라!”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예수님은 “It will be just like this”라고 하십니다. 곧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에도 사람들은 옛날과 똑같이 자기 일에만 바쁘게 지내다가 다 멸망당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30절의 예수님의 경고의 말씀을 마음깊이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나는 아니다, 나같이 성실하고 열심히 사는 자가 어디 있어?” 이렇게 말하지만, 바로 그것이 문제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고 성실하고 열심히 사는 것, 그것이 문제입니다. “정신없이 살다가 방주에 못 들어가는 자가 내가 될 수 있다, 아니 그럴 가능성이 많다, 현실에 매여 바쁘게 살다가 소돔에서 못 빠져나가 불과 유황에 타죽을 수 있다. 내가 그럴 수 있다, 내게 그럴 가능성이 많다”라고 생각을 해야 됩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준엄한 경고를 받은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본문은 두 가지 방향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롯의 처를 생각하라”-32절입니다. 둘째는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살리리라” -33절입니다. 먼저 31,32절을 보겠습니다. “그 날에 만일 사람이 지붕 위에 있고 그의 세간이 그 집 안에 있으면 그것을 가지러 내려가지 말 것이요 밭에 있는 자도 그와 같이 뒤로 돌이키지 말 것이니라 롯의 처를 기억하라” 창세기 19장을 보면 천사가 롯에게 방향을 줍니다. 소돔성을 나가서 산으로 도망가라고 합니다. 뒤를 돌아보지 말고 달려가라고 합니다. 그런데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봅니다. 소금기둥이 되어 버립니다. --> 그림6 그녀가 왜 돌아봤을까요? 호기심 때문에? 큰 소리가 나서 놀라서? 31절을 보면‘세간’때문에 돌아본 것입니다. 그녀는 자기의 최고급 가구와 농과 소파와, 그녀의 밍크코트와 크리스천 디올 명품 가방이 불타버리는 것을 생각하니 너무나 아까웠습니다. 애착을 가졌습니다. “안 돼!”하며 뒤를 돌아보는 순간 소금 기둥으로 변했습니다. 이는 그녀의 평상시의 물질에 대한 자세가 어떠한가를 보여준 것입니다.
누가복음은 물질 문제에 대한 교훈이 많은데 여기도 나옵니다. 세상의 물질에 집착할 때 롯의 처와 같이 됩니다. 고린도전서 7:30b,31절은 말씀합니다.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하라 이 세상의 외형은 지나감이니라” 현대인의 성경은 이 앞부분을 이렇게 번역합니다. “무엇을 사는 사람은 그것을 소유하지 않은 것처럼 하고, 세상 물건을 쓰는 사람은 그것을 다 쓰지 못하는 사람처럼 하십시오.” 신자는 세상 물질에 매이지 말아야 합니다. 먹고 살 것이 있고 잠잘 곳이 있고 자식을 교육시킬 수 있으면 남는 것은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힘써 사용해야 됩니다. 이를 통해 물질의 지배를 받지 않고 물질을 다스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어떤 분을 보니까, 특별한 소득이 생기면 즉시 반으로 나눠서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주는 것을 보았습니다. 물질 신은 그때, “아니 나를 이렇게 소홀히 여기다니? 자존심이 상하는데!” 이렇게 느낄 것입니다. 이렇게 물질 신이 모멸감을 느끼도록 해야 됩니다. 인자의 날을 대비하는 첫째 자세는 롯의 처를 기억하고 물질에 매이지 않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둘째는 무엇입니까? 33절을 보십시오. “무릇 자기 목숨을 보전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살리리라” 여기서 자기 ‘목숨’은 헬라어로 영원한 생명을 말하는 ‘조에’가 아니라 ‘프쉬케’로 우리의 세상에서의 목숨, 곧 욕심과 죄가 있는 현재의 목숨을 의미합니다. ‘이 세상에서의 나의 목숨을 보전하고자 애쓰면’ 잃게 됩니다. 세상에서 사는 모든 사람은 누구나 육체의 생명을 잃게 되기 때문에 여기서 잃는 것은 영원한 생명을 의미합니다. 반대로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살리리라’ 곧 자기의 영원한 생명을 살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잃는 것은, 그냥 잃는 것이 아니라 주와 복음을 위해서 자기 목숨을 드리는 삶을 사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이 잃는 것입니다. 우리는 명품 가구와 좋은 집과 좋은 차를 붙들고 살다 영원한 생명을 잃을 수가 있습니다. 반면에 하나님과 복음 역사를 위해서 나의 목숨을 적극적으로 드리는 삶, 곧 잃는 삶을 살므로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주와 복음을 위해 잃고자 하면 잃지도 않습니다. 도리어 하나님이 풍성하게 채워 주심을 경험합니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를 경험합니다. 무엇을 하든 형통한 삶을 경험합니다. 세상의 그 무엇에도 매이지 않고 참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돈은 돌고 도는 것입니다. 인생을 살고 나면 남는 것은 돈이 아닙니다. ‘내가 세상에서 어떻게 나의 목숨, 곧 나의 시간과 에너지를 어떻게 사용했는가’ 그것만 남습니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우리의 결산 내용이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가 이를 알고 적극적으로 주와 복음을 위해 우리의 목숨을 드리는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이를 통해 참으로 우리의 영원한 목숨을 살리는 지혜로운 사람들이 다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34,35절은 ‘구원의 개별성’에 대한 말씀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밤에 둘이 한 자리에 누워 있으면 하나는 데려감을 얻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두 여자가 함께 맷돌을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얻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한 자리에서 잠을 자는 두 사람은 부부이거나 형제자매같이 가까운 사람일 것입니다. 맷돌을 갈아 보셨습니까? --> 그림7,8 두 사람의 호흡이 잘 맞아야 맷돌을 갈 수 있습니다. 환상적인 동역이 되는 친구 사이입니다. 그러나 인자의 날에는 예수님을 믿고 준비가 된 사람은 데려감을 얻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버려둠을 당합니다. 심판에 이릅니다. 구원을 얻는 것은 각자의 개별적인 믿음에 달려 있습니다. 또한 37절과 같이 하나님의 심판은 어느 특정한 장소가 아니라 죄로 부패된 세상 어디에나 동시에 임하게 됩니다.
결론적으로, 성경의 모든 약속이 이미 다 이루어졌고 한 가지만 남아 있습니다. 그것은 인자가 다시 오신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재림이 너무나 엄청난 사건이요, 초현실적인 사건이라고 하여 ‘설마’합니다. 그러나 노아 시대 홍수심판과 소돔과 고모라에 내린 불 심판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도 다 ‘설마’하다가 멸망당했습니다. 인자가 오시는 날 ‘설마’했던 사람들의 운명은 자명합니다. 우리가 “인자가 나타나는 날에도 이러하리라- Just like this”하신 예수님의 경고의 말씀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기를 기도합니다. 세상의 재물을 추구하지 않고 오직 주와 복음을 위해서 나의 목숨을 드리는 가장 지혜로운 삶을 살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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