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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017년 누가복음 제 28 강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라' (누가복음 18:1-17)2017-09-11 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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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누가복음 제 28 강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라

 

말씀 / 누가복음 18:1-17

요절 / 누가복음 18:1 “예수께서 그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여” 


 

지난 주 말씀은 종말에 관한 말씀이었습니다. 주님은 형적도 없이 사라질 세상 쾌락, 물건, 집 등이 주는 기쁨에 매이지 않고 인자의 날 하루를 기다리도록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종말의 때에 성도는 무엇에 매이고 무슨 기쁨으로 살아야 합니까? 기도하는 삶에 매이고, 기도하는 기쁨으로 살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님은 우리가 항상 기도하는 삶을 살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이시간 항상 기도하는 비결을 잘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그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여 항상 곧 언제나 기도하는 것이 가능할까요? 24시간 기도하는 것이 가능합니까? 어떤 목자님은 모처럼 자신과 아내, 아들과 며느리, 그리고 대통령과 나라까지 위하여 충분히 기도하고 마음이 뿌듯하였고 한 1시간쯤 기도한 것같이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시간을 봤더니 단 5분 지난 것을 확인하고 실망했습니다. 반면에 전에 어떤 분은 자신이 하루에 7시간 기도했다고 자랑했습니다. 


흔히 기도를 영혼의 호흡이라고 합니다. 호흡은 한순간도 멈추지 않고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호흡은 힘들지 않습니다. 호흡은 자동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혈액순환과 호흡이 육적인 생명을 유지하고 있는 것처럼 기도도 우리의 영적 생명의 기반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끊임없는 교제입니다. 이 하나님과의 교제는 말없이도 가능합니다. 하나님과의 교제는 유지하는 것이 어려운 일이 아니라 이것이 끊어지는 일이 더 어려운 일입니다. 사람이 하루에 호흡을 7시간만 하고 산 것이 얼마나 어렵습니까? 나무에 비유하면 가지가 나무와 연결된 것이 하루에 7시간만 연결되고 살아있는 것이 더 어렵지요? 


그러나 우리의 영혼은 육체와 다르기 때문에 자동적으로 호흡하며 하나님과 교제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기도가 습관화되고 체질화되고 자연스럽게 되기까지 우리의 영혼이 한 눈을 팝니다. 또한 우리의 기도생활을 단절시키고자 하는 세력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기도하라”는 명령의 말씀을 기억하고 의도적으로 순종하며 자신의 영혼을 훈련시켜야 합니다. 저는 지난주 예수님이 번개처럼 임하신다는 말씀에 한 가지를 깊이 깨달았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재림준비도 초단위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사실상 주님과 1초도 끊어짐 없이 교제하여야 합니다. 이렇게 초단위로 주님과 교제한다는 것은 우리의 마음과 영혼의 입술이 늘 주님을 향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기도를 단절하고자 하는 세력을 이기고  영혼을 훈련시켜 항상 기도하는 종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다음으로 주님은 우리가 낙심하지 말고 기도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언제 기도하다가 낙심하게 됩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듣지 않는다고 생각할 때입니다. “낙심하다”는 단어는 원어로 보면 “지치다” “축 늘어지다” “싫증나다” 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기도에 대해서 무의미함을 느끼고 기도의 손이 축 늘어진 것입니다. “기도해도 소용이 없다”는 생각이 들어오면 한 사람의 신앙생활은 축 늘어지게 됩니다. 그 결과 신앙생활이 죽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지경에 이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기도하다가 이렇게 되어선 안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기도는 우리를 살게 하는 영혼의 호흡이며 우리가 시대를 초월하여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우리가 기도를 중단하기를 가장 안타까이 여기십니다. 그래서 말씀하십니다.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라”


예수님은 본문에서 한 비유를 통해 제자들이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않도록 돕고 계십니다. 

2-5절이 비유 내용입니다. 먼저 2절을 보십시오.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장이 있었습니다. 보통 재판장들은 일반적으로 경천애인, 즉 하늘을 두려워하고 사람을 존중합니다. 그런데 이 재판관은 좀 특이합니다. 그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했습니다. 6절을 보면 이 사람은 ‘불의한 재판장’ 입니다. 보통 재판장은 정의감이 남다르고 정의를 실현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법학공부를 합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처음부터 그랬는지 나중에 변질되었는지 모르겠지만 불의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옳고 그름보다 뇌물을 주거나 승진하는 데 도움을 주는 사람들에게 유리하게 판결했습니다. 예컨대 대기업이나 권력자들에게 유리하게 판결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도시에 어떤 사람이 있었습니까? 3절을 보십시오.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주소서 하되” 한 과부가 있었습니다. 과부는 이스라엘 사회에서는 고아와 함께 약자의 대명사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그녀에게 풀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원한이 있었습니다. 과부의 원수는 대기업의 회장과 그 하수인 김 부장이었습니다. 착하고 성실한 남편에게 모든 죄를 뒤집어씌우고 감옥에 가게 하였으며 출옥한 후에는 사건을 은폐하기 위해 교통사고로 위장하여 남편을 죽였습니다. 힘없는 과부는 대기업 회장과 그 하수인들을 이길 수 없었습니다. 그녀가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재판장의 판결을 통해서였습니다. 하지만 그 재판장은 돈을 좋아하는 불의한 자요 대기업 편에 서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과부는 돈도 빽도 없기에 그 재판장을 찾아가서 간청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 불의한 재판장은 초라한 과부의 행색을 보더니 그녀를 무시하고 상대도 해주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과부는 자주 그 재판장을 찾아가서 자신의 원한을 풀어달라고 간청했습니다.  


과부는 퇴근하는 재판장을 기다리고 있다가 간청했습니다.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주소서” 그러나 비서와 경호원에 의해서 제지당했습니다. 하지만 과부는 낙심하지 않고 매일 하루도 빠짐없이 청사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어느 비오는 날에는 재판장의 새로 산 양복바지를 붙들고 간청하는 바람에 바지가 구겨지고 찢어졌습니다. 간신히 그녀를 피해 자동차에 탔는데, 그녀는 자동차 앞에 드러누워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주소서”라고 외쳤습니다. 그러자 법원에 출입하는 기자들이 기삿감이라며 다 몰려와 플래시를 터트리며 사진을 찍고 신문기사에 올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재판장의 이름이 실검순위에 오르며 재판관은 자신의 평소비리가 알려질까 봐 두려워하기 시작했습니다. 과부의 청원은 강도를 더해 가기 시작했습니다. 밤늦게 재판장의 집에 찾아와 탄원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 12시 이후에 늦게 퇴근하여 집으로 들어가려는 데 하얀 소복 같은 옷을 입은 과부가 충혈된 눈으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주소서” 라는 바람에 식겁했습니다. 깜짝 놀라 집으로 들어가자 창문을 향해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주소서” 이것이 문제가 된 것은 재판장에게 수능이 얼마 안남은 고3 아들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들이 시끄러워 공부가 안되고 힘들다며 투덜대고 공부를 손 놓고 게임만 하였습니다. 1점 차로 명문대 법대에 들어가느냐 못 가느냐가 결정되는데 재판장의 아내는 속이 탔습니다. 보다 못한 재판장의 아내가 말했습니다. “원수에 대한 과부의 원한은 풀어 주소서” 아내가 한 맺힌 과부처럼 청원하기 시작했습니다. 


4,5절을 보십시오. “그가 얼마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나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재판장은 자신이 하나님도 안무서워하고 사람은 말할 것도 없는 데 과부에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며 과부의 원한을 풀어주겠다고 말했습니다. 과부에 대한 재판장의 확신은 그 과부는 절대로 청원을 포기할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만약 자신이 원한을 풀어주지 않으면 늘 와서 자신을 괴롭게 할 것이 분명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여기서 “괴롭게 하다”의 뜻은 “눈 아래를 치다, 눈을 멍들게 하다” 라는 뜻입니다. 권투할 때 눈을 계속 맞으면 눈이 찢어지고 앞을 보지 못해 싸울 수가 없고 기권의 뜻으로 수건을 던집니다. 재판장은 과부가 찾아올 때마다 괴로움으로 미칠 지경이 되었습니다. 탈진하여 신경쇠약에 걸릴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과부가 하나도 안 예쁘고 정의감이 회복된 것도 아니지만 자기가 살고, 자기 아들이 살리기 위해 과부의 청원을 들어주기로 결단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 불의한 재판장이 했던 말을 들으라고 하셨습니다. 7절을 읽겠습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주시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예수님은 제자들과 과부, 그리고 하나님과 불의한 재판장을 비교하시면서 비유의 결론을 내리십니다. 불의한 재판장은 자신과 하나도 관련 없는 과부의 청원을 들어주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하나님이 택하신 사람들입니다. 과부의 청원을 들어주었던 재판장은 불의한 재판장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십니다. 그러니 제자들이 포기치 않고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왜 안 들어 주시겠느냐는 반문입니다.

      

8절을 보십시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하나님은 끈질기게 기도하는 사람의 기도를 반드시 들어주십니다. 최대한 빨리 들어주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이 다시 오실 때 즉 종말의 때에 이렇게 과부와 같이 원한 맺히게 끝까지 기도하는 사람들이 거의 없을 것이라고 안타까이 말씀하셨습니다. 대부분이 기도에 대한 믿음을 잃고 영적으로 축 늘어져 산다는 것입니다.


이상에서 우리가 기도에 대해서 무엇을 배웁니까?

첫째로 하나님은 즉각 기도에 응답하시지는 않으십니다. 본문을 보면 기도할 때 낙심하지 말라고 권유하고 있는데 그것은 기도응답이 즉각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음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만약 기도응답이 즉각적으로 이루어지면 기도하다가 낙심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몇몇 기도는 즉각적으로 응답하십니다. 예를 들면 물에 빠져서 살려달라고 기도했다고 하면 즉각 몇 초안에 기도응답이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 우리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은 시간을 요합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은 이렇게 기도응답을 천천히 하시는 것입니까? 이는 그를 통해서 이루시고자 하시는 또 다른 선한 일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우리가 인내를 배우며 정금 같은 믿음을 열매 맺는 것입니다. 사랑과 온유와 겸손의 내면성을 기르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도응답과 함께 덤으로 많은 선물을 주시고자 하시기에 최소한 꼭 필요한 만큼의 시간을 지체하십니다. 압력을 적게 견디면 흑연이고 오래 견디면 다이아몬드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도응답이 지연될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덤으로 선물을 많이 주시려는 구나 라고 생각하고 감사하며 인내하며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둘째로 기도응답에 대한 절대적인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기도를 낙심하지 않고 할 수 있는 비결은 하나님은 선하시며 반드시 내 기도에 응답하신다는 믿음을 잃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응답이 이루어지지 않고 지체될 때 동굴에 들어가는 사람의 심정이 듭니다. 동굴에 들어가는 사람은 들어갈수록 더욱 어두워지는 것을 체험합니다. 사탄은 우리가 기도할 때 동굴에 들어온 것 같은 낙심과 절망을 심습니다. 그러나 기도할 때는 동굴이 아니라 터널에 들어온 것을 믿어야 합니다. 터널과 동굴은 비슷하지만 다릅니다. 터널에 들어가는 자는 끝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절대로 절망하거나 잠간 어둠속에 있는 것을 답답해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는 선하신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고 선한 기도제목은 반드시 들어주실 것을 굳게 믿으며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셋째로 원한을 소유한 사람이 끈질기게 기도할 수 있습니다. 과부가 끈질기게 재판장을 찾아간 이유가 무엇입니까? 남편을 죽이고 집안을 망하게 한 김 부장에 대한 원한 때문이었습니다. 원한이란 무엇입니까? 나나 사랑하는 사람에게 부당하게 큰 피해를 입힌 자에 대해 절대로 지워지지 않는 억울함과 복수심입니다. 즉 억울함을 풀고 정의를 세우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원한이 맺히게 되면 다른 일을 하지 못합니다. 원한을 갚을 때만 정상적인 삶을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과부가 끈질겼다기 보다는 원한이 과부를 끈질기게 만들었습니다. 아무리 행상을 하고 돌아와 피곤하더라도 원한이 그녀로 하여금 일어나 새벽같이 출근하는 재판장을 만나러 가게 했습니다. 우리가 기도생활을 잘 하려면 이처럼 원한이 있어야 합니다. 원한이 없는 성도는 안일하게 드러누워 인생을 엔조이하며 향락적으로 삽니다. 그러나 원한을 가진 성도는 그럴 수 없습니다. 끊임없이 하나님을 찾습니다. 새벽에도 밤에도 하나님을 찾습니다. 시간이 날 때마다 하나님을 찾아가 하소연합니다.  


이렇게 한이 맺혀서 하나님을 찾았던 한 여인이 있습니다. 한나입니다. 한나는 좋은 남편을 만나서 남편의 사랑을 많이 받았습니다. 하지만 아이를 갖지를 못했습니다. 그런데 세컨드로 들어온 브닌나는 아이들을 쑥쑥 낳았습니다. 그녀는 배부른 배를 내밀고 다니면서 한나의 가슴에 불을 질렀습니다. 브닌나가 했던 말 중에서 한나를 가장 격분하게 한 것은 “남편의 사랑을 받으면 뭐해, 하나님께 사랑을 받지 못하는 데.. 겉은 경건해 보이는 데 뭔가 뒤로 호박씨를 까나봐” 하는 말이었습니다. 그 말을 들은 한나는 아무리 남편의 사랑을 받아도 행복이 없었습니다. 남편이 맛있는 것을 브닌나보다 두 배는 더 갖다 주어도 기쁘지 않았습니다. 이때 한나는 어떻게 하였습니까? 하나님의 성전을 찾아서 괴로움을 토로하며 기도했습니다. 그녀는 원통함과 격분함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술 취한 여자처럼 자신의 심정을 다 쏟아내었습니다. 한나의 원통함은 한나가 하나님의 성전을 찾게 했습니다. 그녀가 남편의 사랑에 안주하는 소시민이 아니라 기도의 종이 되게 했습니다. 그리고 위대한 지도자 사무엘의 어머니가 되게 하였습니다. 이상에서 우리는 가슴에 한이 맺혀 있을 때 하나님을 간절히 찾고, 끈질기게 기도할 수 있음을 배웁니다. 


여러분의 기도생활은 어떻습니까? 원한 맺힌 과부처럼 기도합니까? 원한 맺힌 사람은 눈빛이 다릅니다. 지금 우리시대는 원한이 없는 것 같습니다. 오늘날 성도들의 모습이 어떤 지요? 원한 맺힌 과부 같습니까? 즐기는 삶을 사느라 눈들이 풀려있고 삶의 맥아리들이 없진 않습니까? 우리의 원한 맺힌 기도제목은 구체적으로 말하면 성서한국과 세계선교입니다. 통일 제사장 나라입니다. 캠퍼스 한 영혼을 구원하여 제자로 세우는 것입니다. 캠퍼스개척, 제자양성입니다. 2041년까지 10만 명의 선교사를 파송하는 일입니다. 가족을 구원하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로 기도하되 원한 맺힌 기도를 하도록 도와주시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은 원한 맺힌 기도를 반드시 응답하십니다.


1983년에 쏘련 미사일이 대한민국 민간여객기를 격추하여 270여명이 태평양에 수장되었습니다. 그때 한국 사람들의 마음에 쏘련에 대한 원한이 맺혔습니다. 그래서 총을 들고 북진하여 쏘련 까지 가자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UBF 설립자이신 이 사무엘 선교사님은 복음으로 원수를 갚자고 하시면서 USSR 선교를 위해서 한 맺히게 기도하자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때부터 10년 안에 USSR의 문이 열리도록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만날 때마다 둘씩 기도하고 행사 때마다 러시안 댄싱을 추면서 온 몸으로 기도했습니다. 저도 모스크바, 러시아 요회 목자를 하였습니다. 그때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당시로는 10년이 아니라 100년이 지나도 결코 열릴 것 같지 않았던 철의 장막 USSR이 5년 만에 열렸습니다. 그것은 마치 홍해가 갈라지는 것 같은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UBF 멤버들의 한 맺힌 기도를 받으시고 속히 기도를 응답하셨습니다. 저희는 이를 통해서 한 맺힌 기도를 받으시는 하나님을 체험하였습니다. 


이상은 우리 선배들의 기도의 삶이요 열매입니다. 우리는 이런 선배들의 기도전통을 이어받아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선진국 형으로 바뀐 캠퍼스에서 영혼을 구원하고 제자 양성하는 기도제목이 있습니다. 평화롭게 통일제사장나라를 이루어 세계를 섬길 기도제목이 있습니다. 그 외도 개인적으로 한 맺힌 기도제목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즐길 것이 많아진 시대에 마음속에서 한이 다 녹아버리고 밋밋하고 무기력하게 기도하고 있진 않습니까? 


제가 본문을 통해서 한 맺히게 기도하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하고 회개하게 되었습니다. 성대캠퍼스의 경우, 더욱 학교수준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엄청난 수준의 학생들이 캠퍼스에 들어오고 있습니다. 교만하고 자기생각이 강한 학생들이 들어온다는 의미입니다. 캠퍼스 제자양성역사가 중단될 위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으로 캠퍼스주위, 우리 목자님 집주위에 기숙사들을 속속 세워지고 있지만 우리는 바라 보기만 할 처지에 있습니다. 또한 개인적으로 자녀문제로 인해서 어찌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할 형편에 있고, 마음에 한이 있습니다. 제가 본문 말씀을 통해서 새롭게 한 맺힌 기도를 하고자 결단합니다. 


우리가 제자양성하고 캠퍼스를 섬길 방법은 하나,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역사하시면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모든 것이 열립니다. 철의 장막도 열립니다. 아무리 어려운 것도 우리에게 어려운 것이지 하나님께는 어려운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제게 다시 한 번 간절한 마음을 허락하여 주시고 간절히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손길을 보기를 기도합니다.   


9-14절은 하나님께서 겸손한 기도를 받으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바리새인은 자기 의에 기초해서 높은 마음으로 기도했습니다. 기도는 자신의 무력함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행위입니다. 그런데 높은 마음으로 기도하는 사람은 사실상 주님이 별로 필요 없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간절한 기도제목도 없고 기도응답도 필요 없습니다. 자기 힘으로 잘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세리는 고개도 들지 못하면서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하고 가슴을 치며 기도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부패함과 무력함을 철저히 고백합니다. 그는 자기 의로 하나님 앞에 결코 설 수 없다는 인식이 있었습니다. 그는 존재자체로 하나님의 도우심과 은혜를 간절히 구하고 있습니다. 이런 세리의 마음으로 기도할 때 하나님께 귀히 여기시고 기도 응답해 주십니다.  


그러면 우리가 죄인된 심정, 낮은 마음을 가지기위해서 일부러 죄를 지어야 할까요?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절망할 정도의 죄가 충분히 있습니다. 찬찬히 자신의 죄악된 면, 부패한 면, 무력한 면을 생각하면서 그런 점을 하나님 앞에서 하나씩 열거하면서 기도하면 됩니다. 다른 사람들과의 비교에서 상대적인 의를 찾아 열거하는 것이 아니라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자신의 허물과 죄와 타락한 내면을 고백할 때 한없이 부족하고 초라한 자로서 하나님 앞에 서게 됩니다. 이럴 때 겸손한 마음으로 기도할 수 있고 하나님께서 그런 우리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15-17절 말씀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어린아이 같은 자세를 가져야 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어린아이의 마음은 유치한 마음이 아니라 단순한 마음으로 신뢰하는 것, 곧이곧대로 믿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마음으로 하나님 나라를 받들 때 그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며 그런 마음으로 기도할 때 확실히 응답을 받습니다. 



결론입니다. 종말의 시대에 우리가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원한을 가지고 한 맺히게 기도하며, 기도응답을 확신하고 기도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