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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017년 누가복음 제 31 강 '모퉁이의 머릿돌' (누가복음 20:1-18)2017-09-23 2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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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누가복음 제 31 강


모퉁이의 머릿돌


말씀 / 누가복음 20:1-18

요절 / 누가복음 20:17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그러면 기록된 바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함이 어찜이냐”


오늘 말씀은 20장 1절부터 18절인데 두 부분으로 되어 있습니다. 1절부터 8절은 예수님의 권위에 대한 질문이고, 9-18절은 포도원 농부의 비유입니다. 두 부분이 독립된 내용이 아니라 서로 관련된 내용입니다. 그 포인트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의 권위를 가지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지극하신 사랑을 배우며, 모퉁이의 머리돌되신 예수님을 우리 인생의 방향이요 목적으로 삼기를 기도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하루는 예수께서 성전에서 백성을 가르치시며 복음을 전하실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장로들과 함께 가까이 와서.’ ‘하루는’이라는 말로 시작됩니다. 신약성경에 4복음서가 있습니다. 복음서는 예수님의 생애를 기록한 책입니다. 그러나 일반적인 전기와는 다릅니다. 복음서는 예수님의 공생애 3년 반을 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예수님의 생애 마지막 일주일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기 일주일 전에 일어난 사건인데, 마태복음 21장, 막 11장, 눅19장, 요12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곧 복음서 기자들은 예수님의 최후 일주일간의 삶, 그의 죽으심과 부활의 사건을 거의 40% 가까이 할애하며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1절의 ‘하루’는, 주일에 예루살렘 입성하시고, 월요일에 성전을 정화하신 그 다음날, 곧 화요일을 의미합니다. 이제 수요일에는 베다니에서 향유 부음을 받으시고, 목요일에는 최후의 만찬을 하시고, 금요일에 체포되어 처형을 당하십니다. 그러므로 화요일 이 날은 대중에게 마지막으로 가르치신 날입니다. 


1절을 다시 한번 보십시오. ‘하루는 예수께서 성전에서 백성을 가르치시며 복음을 전하실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장로들과 함께 가까이 와서’ 예수님께서 가르치실 때 대제사장들, 서기관들, 장로들이 예수님께 왔습니다. 그들은 산헤드린 곧 유대공회 회원들을 말합니다. 산헤드린은 대제사장을 포함해서 71명의 종신회원으로 구성되었는데, 이는 유대 최고 재판소로 행정과 입법 기능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을 관리하는 권한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들이 예수님께 다가왔는데, 1절 끝부분을 보면 ‘가까이 와서’라고 되어 있습니다. NIV에는 ‘came up to him’이라고 되어 있는데 예수님께 따지고자 하는 자세로 바짝 다가선 것입니다. 


그들이 하는 말이 무엇입니까. 2절을 보십시오. ‘말하여 이르되 당신이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 권위를 준 이가 누구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당신이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가? 여기서 ’이런 일’은 19:45-48에 나오는 성전을 정화하시고 백성들을 가르치신 것을 의미합니다. 특히 그들은 성전 정화에 대해서 분노하였습니다. 


당시 성전의 상황을 보면,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오면 바로 있는 큰 광장이 있는데 그것이 ‘이방인의 뜰’입니다. 

이 이방인의 뜰에서 짐승을 파는 자, 각종 장사하는 자, 돈 바꾸는 환전상들이 있었습니다. 그 규모가 아주 컸습니다. 수백 개의 가판이 벌어져 있었고, 수천 명이 그 일에 종사했습니다. 요세푸스에 의하면 유월절 기간에 모이는 순례객이 300만 명 이상 되었고, 도살된 짐승이 256,500 마리였다고 합니다. 이 많은 순례객들을 상대하는 비즈니스는 엄청난 이익을 창출했습니다. 장사하고 환전하는 자들에게 면허를 주는 것은 공회에 큰 돈을 가져다주었습니다. 면허세, 권리금, 부당 이익들은 결국 다 가난한 순례객들의 주머니를 턴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성전을 ‘강도의 소굴이 되었다’고 책망하셨습니다. 이는 유대 교권주의자들에 대한 도전이었습니다. 


그래서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께 질문합니다. 2절을 다시 한번 보십시오. ‘말하여 이르되 당신이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 권위를 준 이가 누구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우리가 산헤드린의 대표이고, 성전을 관리하는 권한이 우리에게 있는데, 네가 누구냐? “Who are you?”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권한을 대행하는 대제사장과 산헤드린의 권위에 도전하는 너는 누구냐! 하며 신성모독죄로 잡고자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3,4절을 보십시오. ‘대답하여 이르시되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내게 말하라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냐 사람으로부터냐’ 예수님은 요한의 세례에 대해서 물으십니다. 요한의 세례가 무엇입니까? 요한의 사역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세례 요한은 유대 광야에서 백성들의 죄에 도전하여 회개하고 세례를 받으라고 선포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나아가 죄를 고백하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거국적인 대 회개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사람들은 혹시 그가 그리스도인가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을 그리스도로 보기에는 어려운 점들이 있었습니다. 첫째로, 그리스도는 다윗의 후손으로 유다 지파에서 나온다고 예언되었는데 요한은 제사장 사가랴의 아들로서 레위 지파 사람이었습니다. 둘째로, 메시아는 오시면 많은 기적을 행하신다고 예언되어 있는데 세례 요한은 기적을 행한 것이 없습니다. 무엇보다 그 자신이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도리어 예수님을 지목하며 그가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라고 증거했습니다. 자기는 예수님의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는 자라고 말했습니다. 모든 백성은 이런 요한을 하나님께로부터 온 선지자로 인정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물으십니다.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냐 사람으로부터냐(4)’ 그들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5,6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서로 의논하여 이르되 만일 하늘로부터라 하면 어찌하여 그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 것이요 만일 사람으로부터라 하면 백성이 요한을 선지자로 인정하니 그들이 다 우리를 돌로 칠 것이라 하고.’ 그들은 서로 의논했습니다. 여기서 ‘의논했다’는 것은 원어적인 의미로 '계산하다', ‘의논하여 이해득실을 따진다’는 말입니다. 사건의 진실성 여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답해야 더 좋은 결과를 얻을까 계산한 것입니다. 


그들의 의논의 결과가 무엇입니까? '만일 하늘로부터라 하면 어찌하여 그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 것이요 만일 사람으로부터라 하면 백성이 요한을 선지자로 인정하니 그들이 다 우리를 돌로 칠 것이라' 했습니다. “이것 참 난감한데, 에이, 모르겠다고 대답합시다” 하였습니다. 


7절을 보십시오. '대답하되 어디로부터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니' 이들은 진리 편에 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목자가 아니라 종교를 직업으로 삼는 삯꾼들이었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문제는 한마디로 외식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들도 젊은 시절에는 하나님을 위해 살고자 하는 뜻을 정하였을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을 뜨겁게 사랑하고자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랫동안 신앙생활하며 점점 형식화, 습관화 되었을 때 그 마음이 점점 부패하게 되었습니다. 

이 사실이 우리에게도 큰 경고가 됩니다. 처음 신앙생활 시작할 때는 순수하게 주님을 사랑하고 진리를 사랑합니다. 옳은 것은 ‘옳다’ 그른 것은 ‘그르다’ 단순하고 깨끗합니다. 그러다가 연륜이 쌓이면서, 직분을 맡으면서, 하나님보다 사람들을 의식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외식하고 결국 하나님을 대적하게 됩니다. 


존 폭스의 ‘순교자 열전’을 읽어보면 순교당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세상의 정치적 세력에 의해서 순교당한 것이 아닙니다. 종교 세력에 의한 것입니다. 14세기 종교 개혁의 샛별이라 불리는 옥스퍼드 대학의 존 위클리프는 롤라드(평신도 성경선생)를 양성하여 전국 각 지역에 보내어 성경을 가르쳤습니다. 그 일로 박해를 받았습니다. 윌리엄 틴데일은 성경을 번역했다는 죄로 죽임을 당했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번역된 성경을 가지고 다닌다고 죽임을 당했습니다. 존 번연은 옥외 대중 설교를 했다고 12년간 브래드포드 감옥에서 옥살이를 했습니다. 전부 종교 교권자들에 의한 핍박입니다. 


우리가 언제든지 신앙의 순수성, 진실성을 잃으면 그렇게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우리 마음 중심의 기도가 무엇이 되어야 하겠습니까? ‘주여, 나의 중심이 오염되지 않게 하시고, 진실함과 순수함으로 주를 섬기게 하여 주소서. 일생동안!“ 


종교지도자들에 대한 예수님이 대답이 무엇입니까? 8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대답할 필요가 없으십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세례 요한이 하늘로부터 온 자임을 알고 있었고, 예수님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분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고의적 거부의 문제였습니다. 예수님은 대답을 하지 않으심으로 그들 스스로 양심의 소리를 듣기를 원하셨습니다. 이런 그들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욕심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의 욕심의 문제를 돕기 위해서 한 비유를 주십니다. 9절을 보십시오. “그가 또 이 비유로 백성에게 말씀하시기 시작하시니라.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어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가서 오래 있다가.”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었습니다. 이 사람은 아주 부유한 분이고, 16절에서 농부들을 진멸했다는 것을 볼 때 강력한 힘이 있는 왕과 같은 주인입니다. 그가 포도원을 만들었습니다. 땅을 일구고 묘목을 심고 포도주 짜는 틀도 만들고 저장소도 만들었습니다. 망대도 세우고 울타리도 둘렀습니다. 모든 시설을 다 만들고 종들에게 세를 주고 타국에 가서 오래 있게 되었습니다. 

이 종들은 아주 큰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직장 잡기 힘든 시대에 잘 만들어진 포도원 관리를 하게 되었습니다. 주인은 타국에 갔는데 비행기도 없던 시대이기 때문에 한번 가면 몇 달, 몇 년 있다가 오는 것입니다. 종들은 주인의 간섭을 전혀 받지 않고 전문 경영인으로서 전권을 가지고 관리할 수 있었습니다. 


농부들은 처음에 너무나 감사했을 것입니다. 열심히 일했습니다. ‘자, 소출을 많이 내서 주인에게 드리고, 우리도 많이 얻자!’ 기쁨이 넘쳤습니다. 땀 흘려 일했습니다. 포도원은 너무나 아름답고 잘 지어져 있었습니다.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숙소도 아파트 식으로 잘 되어 가족들을 데리고 와서 잘 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점점 그들의 마음에 ‘아, 이 포도원이 우리 거라면 좋겠다’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또 지내다보니 일이 쉽지만은 않았습니다. 땡볕에서 땀을 흘려야 되었습니다. ‘주인은 타국에서 시원한 그늘에서 잘 쉬고 있는데 우리는 이게 뭐야’하는 불만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생각과 불만이 조금씩 커갔습니다. 그렇게 수 년이 지나자 이런 생각은 욕심으로 변했고 불만은 배반하려는 결심으로 변했습니다. 제어되지 않는 생각과 불만은 브레이크가 파열된 자동차처럼 파국을 향해 달렸습니다. 


삼년쯤 되어 첫 추수가 시작되었습니다. 탐스런 포도열매가 많이 났습니다. 그때까지 주인으로부터 아무 연락이 없었습니다. ‘혹시 주인이 세상 뜬 거 아냐?’ ‘아, 그럼 얼마나 좋아~’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한 사람이 포도원을 찾아왔습니다. 10절을 보십시오. '때가 이르매 포도원 소출 얼마를 바치게 하려고 한 종을 농부들에게 보내니 농부들이 종을 몹시 때리고 거저 보내었거늘' 그는 주인이 보낸 종이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저는 이 포도원 주인님께서 보내신 종입니다. 소출을 받으러 왔습니다.’ 


농부들은 세 가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첫째는, 자기들이 주인과 양도계약이 아닌 위임계약을 맺은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둘째는, 주인이 세를 받으러 종을 보낼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셋째는, 여기 온 종이 바로 그 주인이 보낸 종인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소출을 주기 원치 않았습니다. 준다는 것은 소출 일부를 덜 갖는다, 손해 본다는 정도의 의미가 아니었습니다. 자기들이 소작인, 곧 위임계약하에 일하는 일꾼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었습니다. 

소유주가 아님을 인정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시비를 겁니다. “당신이 과연 주인의 종인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지?’ ‘신분증명서 있어?’ ‘요즘에 포도원을 돌아다니며 사기치는 자들이 많은데 너도 그 중의 하나 아니야?”했습니다. 그러면서 몹시 때리고 빈손으로 보냈습니다. 주인에게 주는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주인양반, 이 포도원은 이제 우리가 잘 관리해 드릴 테니 신경쓰지 마세요”이었습니다. 


한편 주인의 심정은 어떠했겠습니까? 목발을 짚고 절뚝거리며 빈손으로 돌아오는 종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농부들을 이해하는 편에 섰습니다. “아, 뭔가 오해가 있었나보다. 이 종이 겸손히 행하지 않았나보다. 증명서를 주어 보냈어야 했는데..”하였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친필 편지와 함께 겸손한 한 종을 다시 보냈습니다. 


농부들은 이 두 번째 종을 어떻게 했습니까? 11절을 보십시오. “다시 다른 종을 보내니 그도 몹시 때리고 능욕하고 거저 보내었거늘” 첫 번째 종에게 한 것에 ‘능욕’까지 더했습니다. 능욕은 멸시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종에게 욕을 하며 함부로 대했습니다. 이는 주인을 모독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인은 다시 세 번째 종을 보냅니다. 농부들은 그 세 번째 종도 상하게 하고 내쫓았습니다. 비유에서 세 번 보냈다는 것은 더 이상 할 수 없을 정도까지 보낸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말에도 ‘삼세번까지’라는 말이 있습니다. 한자어도 네 번째 ‘사’(四)는 ‘아니다’하여 아닐 ‘비’(非)를 써서 ‘죄’(罪)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더 이상 종을 보내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이때 주인은 어떤 결심을 합니까? 13절을 보십시오. “포도원 주인이 이르되 어찌할까 내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혹 그는 존대하리라 하였더니” 여기서 아들은 단수로서 독생자를 의미합니다. 주인은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을 보내기로 합니다. 세상에는 물론 이런 주인이 없습니다. 비유니까 가능한 것입니다. 


주인은 사랑하는 독생자를 보내며 무슨 기대를 합니까? “그들이 혹 그는 존대하리라.” 존대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honor’ 공경한다는 것입니다. 아들을 존대하기만 하면 그 동안의 모든 죄를 용서하고 모두 없던 일로 하겠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자비로운 주인입니까? 여기서 우리는 주인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아들을 존대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주인을 존대하는 것입니다. 주인을 주인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본문에는 얼마나 세를 줄 건지에 대한 언급이 없습니다. 10%, 20%, 50% 언급이 없습니다. 이는 그 양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소출을 드림으로 주인과 일꾼의 관계성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앞의 10절 말씀도 다시 한번 보십시오. '때가 이르매 포도원 소출 얼마를 바치게 하려고 한 종을 농부들에게 보내니 농부들이 종을 몹시 때리고 거저 보내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종을 보낸 이유가 무엇이죠? 포도원 소출 얼마를 ‘받고자’ 함이 아닙니다. 포도원 소출 얼마를 ‘바치게 하려고’입니다. 그들이 바치도록 돕기 위해서, 바치는 행위를 하도록 하기 위해서 종을 보낸 것입니다. ‘아, 우리는 일꾼이구나, 이 포도원은 우리 것이 아냐, 우리가 주인 밑에서 겸손하고 성실하게 일할 때 주인이 주는 모든 복을 누릴 수 있어’ 이를 잘 알도록 돕기 위해서 종을 보낸 것입니다. 주인은 이런 올바른 관계성 가운데 농부들이 계속해서 일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농부들은 포도원을 찾아온 그 아들을 어떻게 대했습니까? 14절을 보십시오. “농부들이 그를 보고 서로 의논하여 이르되 이는 상속자니 죽이고 그 유산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자 하고.” 농부들은 아들이 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단번에 그가 주인의 아들임을 알아차렸습니다. 3년 전 주인집에서 계약서를 쓸 때 주인 옆에 서 있던 바로 그 아들이었습니다. 농부들은 이 아들을 어떻게 할지 서로 의논했습니다. 14절에 ‘서로 의논하여 이르되‘는 앞부분 5절의, ’서로 의논하여 이르되‘와 정확히 같은 표현입니다. 그들의 결론이 무엇입니까? “이는 상속자니 죽이고 그 유산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자.” 그들은 포도원 안에 들어온 아들을 체포했습니다. 포도원 밖으로 끌어냈습니다. 거기서 죽였습니다. 


이들의 악행은 너무나 끔찍합니다. 그들의 죄는 너무나 자명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15절 하반절에서 질문하시고 16절 상반절에서 스스로 대답하십니다. '그런즉 포도원 주인이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하겠느냐?’ ‘와서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리라 


농부들은 주인에 대해 착각했습니다. 주인은 힘없는 늙은이가 아니었습니다. 주인은 군대를 동원하여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넘겨주었습니다. 

이 비유를 들은 사람들은 그 의미를 잘 알았습니다. 이스라엘 종교지도자들이 진멸당하고 복음의 주도권이 이방인에게 넘겨질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되지 말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무엇이라고 하십니까? 17절입니다.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그러면 기록된 바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함이 어찜이냐.” 이 말씀은 시118:22절의 예언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대로 이 땅에 주인의 아들로 오셨지만, 농부들의 배척으로 죽임을 당하십니다. 하나님 나라 건설의 일차적 책임을 맡았던 이스라엘 백성들로부터 버림을 받으실 것을 증거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버림받으신 예수님을 택하사 모퉁이의 머릿돌로 쓰십니다. 


지금은 강철 빔을 땅에 박고 건물을 올리지만 불과 백 년 전만 해도 기초석을 놓고 그 돌을 중심으로 돌을 쌓아 건물을 지었습니다. 모퉁이의 머릿돌은 건축할 때 가장 중요한 기초석이었습니다. 그 돌을 중심으로 좌우 벽을 쌓아 나가고, 그 위로 돌이 올라가 집이 만들어집니다. 건물의 모든 돌은 기초석을 기준으로 바르게 쌓아져야 되었습니다. 


건축자들이 버린 돌을 모퉁이의 머릿돌로 삼으시는 하나님은 또한 그를 어떤 돌로 삼으십니까? 18절을 보십시오. “무릇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그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하시니라.” 건축자들이 버린 돌 예수님은 또한 심판의 돌이 되십니다. 누구든지 그 돌 위에 떨어지면 깨어지고 그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그는 가루로 흩어져 버립니다. 


빌립보 2장은 말씀합니다.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2:8-11)


오늘 말씀을 통해 배우는 바를 세 가지로 정리합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극진하신 사랑입니다. 이 비유에 나오는 주인은 세상을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신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세상은 하나님이 그 주인인 것을 고의적으로 부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대적하였고 지금도 대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당장에라도 세상을 진멸할 수 있으십니다. 그러나 그 창조하신 사람들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외아들을 보내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6) 


아들만 영접하면 지금까지 지은 모든 악독한 죄를 용서해 주시고, 영생을 선물로 주기 위함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심으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롬5:8). 누구든지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님을 영접하고 공경하는 자는 영생을 얻습니다. 이전까지 지은 죄, 어떤 죄를 지었든 지간에 다 용서해 주십니다. 기억도 아니 하십니다. 이보다 더 큰사랑은 있을 수 없습니다. 이 사랑은 주인의 최후의 사랑이요, 최고의 사랑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인자하시고 용납하시고 길이 참으심이 풍성하십니다. 소작인들 같이 악독한 죄인들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사랑하신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찬양합니다. 


둘째는 감사하는 삶의 중요성입니다. 세상에서는 욕심을 부추깁니다. ‘부자 되세요’합니다. 물론 성실하게 열심히 일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욕심, 탐심을 갖는 것은 우리로 파멸케 하는 것입니다. 욕심은 조금씩 조금씩 우리 마음에 파고 들어옵니다. 개구리가 물의 온도가 조금씩 올라가면 자기도 모르게 익어버리듯이 조금씩 조금씩 들어오는 욕심은 치명적입니다. 본문의 농부들은 욕심으로 인해 영적인 눈이 감기고 자기들이 농부인 것을 망각하여 주인의 아들을 죽였습니다. 결국 그들은 진멸을 당했습니다. 


세상 욕심은 겉으로 달콤한 맛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약1:15). 세상 욕심, 재물 욕심, 명예에 대한 욕심은 우리를 죽이는 보이지 않는 킬러입니다. 우리는 욕심이 다가오면 거기서 나는 사망의 냄새를 맡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욕심을 이기는 길이 무엇입니까? 감사하는 것입니다. 나에게 생명을 주시고, 건강을 주시고, 재능을 주신 것을 늘 감사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하나님께 대한 감사가 없다면 영적인 빨간 불이 이미 켜진 것입니다. 숨 쉬고 말하고 걷고 먹고 마시고 이 모든 것이 실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겠습니까? 더욱이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우리를 불러주시고 영적인 포도원을 주시고 참된 수확을 얻는 일꾼의 삶을 살게 하신 것은 무한한 은혜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은 욕심을 물리치게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주신 크신 은혜를 늘 감사하기를 기도합니다. 


셋째로, 예수님은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십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연결이 되어야 합니다. 머릿돌 되신 예수님과 연결되어 생명의 관계성을 맺고, 예수님 위에서, 예수님을 향하여 지어져 나가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거룩한 하나님의 집으로 지어집니다.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버린 이유는 돈과 권력을 그들의 집의 머릿돌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신앙 양심보다 돈을 더 사랑 했습니다. 종교 권력을 지키기 위하여 예수님을 십자가 못 박아 죽였습니다. 


오늘날 사람들도 돈과 정년이 보장된 안정된 직장, 권력 등을 든든한 머릿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요, 권불십년(權不十年)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열흘 가는 꽃이 없듯이 십년 가는 권력이 없습니다. 외모가 권력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남자들은 키가 크고, 여자들은 아름다워야 출세하는 세상입니다. 그래서 남자들은 근육을 키우고, 여자들은 몸매를 가꾸기 위해 땀을 흘립니다. 외모지상주의가 사람들의 마음에 큰 돌이 되고 있습니다. 그 위에 올라서서 승승장구하는 자들도 있고, 그 돌에 짓눌려 좌절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또한 영원하지 않습니다. 세월과 함께 늘어나는 뱃살은 빠지지 않고, 얼굴의 주름은 지울 수 없습니다. 


요한복음 4장에 보면 사마리아 여인이 나옵니다. 그녀는 남편을 잘 만나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녀의 인생의 머릿돌은 남편이었습니다. 그는 남편을 중심으로 살았습니다. 하지만 어떤 남편도 그녀의 인생의 집의 든든한 기초가 되지 못했습니다. 그녀의 집은 여전히 미완성이었습니다. 마침내 예수님을 그녀의 집의 머릿돌로 삼았을 때, 비로소 아름다운 집이 완성되었습니다. 


예수님을 위한 삶, 예수님이 모든 면에서 기준이 되는 삶, 예수님을 중심으로 하는 삶, 이것이 생명의 길이요 우리 인생의 방향입니다. 그러한 삶이 또한 가장 안전이 보장된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는 심판의 절대 권세자이시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