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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017년 누가복음 제 32 강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누가복음 21:1-38)2017-10-01 2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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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32강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말씀 누가복음 21:1-38

요절 누가복음 21:36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하시니라”



저명한 역사학자가 쓴 “역사란 무엇인가” 란 책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역사란 과거와 현재와의 대화이다” “역사란 역사가가 만드는 것이다”라는 구절 등이 뭔가 의미있게 다가왔습니다. 그러나 “정작 역사란 무엇인가?” “무엇을 향해서 흘러가는 가?” 와 같은 정말 알고 싶은 내용은 없어 실망이었습니다. 역사가 무엇인지 모를 때 내달리는 호랑이 등에 탄 것처럼 불안하고 두렵습니다. 그러나 역사가 무엇인지를 알면 롤러코스트같은 상황속에서도 담대함과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이시간 우리는 세상에 종말이 있다는 것을 배우고자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그 종말을 담대하고 여유있게 준비할 수 있을지를 잘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4절 말씀은 가난한 과부의 헌금을 칭찬하신 예수님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이 눈을 들어 부자들이 헌금함에 헌금 넣는 것을 보셨습니다. 부자들은 풍족한 중에서 헌금을 했습니다. 예를 들어 100억, 10억 부자인데 1데나리온쯤(10만원)을 헌금합니다. 그는 당시 화폐로 1 데나리온을 렙돈으로 바꾸어 124개의 렙돈을 헌금함에 한 개씩 떨어뜨립니다. 그러면 2분 넘게 헌금함 앞에서 서 있을 수 있고 사람들의 주목을 끌 수 있습니다. 이렇게 부자들은 자신들이 많은금액을 헌금하는 것을 과시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떤 가난한 과부가 두 렙돈을 넣는 것을 보시더니 그녀가 다른 모든 사람들보다 많이 넣었다고 칭찬하셨습니다. 4절을 보십시오. “저들은 그 풍족한 중에서 헌금을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 자기가 가지고 있는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 여기서 예수님이 칭찬하시는 포인트는 액수보다 비율입니다. 부자들의 헌금은 객관적인 액수는 컸지만 자신들의 생활비 전체에서는 작은 비율이었습니다. 과부가 헌금한 두 렙돈은 1/64분지 1 데나리온으로 1500원으로 급식소 한끼 식사 비용 정도입니다. 이 액수는 객관적으로 큰돈은 절대 아니지만 가난한 과부에게는 생활비 전부였습니다. 열왕기상 17장에 보면 사르밧 과부가 나옵니다. 그녀는 통에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이 조금 있었습니다. 이것은 작은 떡 하나를 만들 수 있는 재료였습니다. 그런데 사르밧 과부는 이것으로 떡을 만들어 하나님의 종 엘리야를 위하여 드립니다. 가난한 과부가 남은 생활비 전부를 하나님께 드렸다는 것은 그녀가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하고 의지하였는가를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액수보다 절실하고 간절하게 드리는 헌금을 기뻐하십니다. 그것은 그 헌금에 드리는 자의 마음과 믿음이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5-6절은 화려하고 부티나는 성전의 멸망을 예고하신 말씀입니다. 어떤 사람들이 성전을 가리키며 아름다운 돌과 헌물로 꾸민 것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다른 복음서를 보면 이것은 제자들이 성전에 대해서 감탄한 것입니다. 아마 거기서 일하는 종교지도자들을 부러워했을 것입니다. 제자들이 감탄한 성전은 아름답고 큰 대리석 기둥과 부호들이 바친 금은, 귀금속으로 꾸며져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이런 성전의 겉모습만 보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성전의 부패함과 그 미래를 보셨습니다. 6절을 보십시오. “너희 보는 이것들이 날이 이르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예수님은 겉 행위만 보시지 않고 마음과 믿음을 보셨듯  화려한 건물보다 교회조직의 내부가 어떠하냐에 더 관심을 가지셨습니다.  


성전파괴는 이스라엘의 멸망을 의미했습니다. BC 586년에 제 1 성전이 파괴되었을 때 이스라엘은 바벨론에 의해서 멸망하였습니다. 지금 제자들이 감탄하고 있는 헤롯대성전은 스룹바벨이 재건한 제 2성전을 개축한 것입니다. 이 성전이 파괴된다는 것은 이스라엘이 다시 멸망당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제자들은 심각해져서 언제 그런 일이 있고 그런 일이 일어날 즈음에 어떤 징조들이 있을 것인가를 물었습니다. 이는 그 때를 알아서 대비하고자 함이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예루살렘의 멸망으로 시작하여 세상의 종말까지 언급하셨습니다. 


8-19절은 종말에 있을 징조들입니다.

첫째 영적 미혹입니다(6). 미혹이란 길을 잃게 하는 것으로 영적인 사기를 당하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것입니다. 사기꾼들은 살짝 속입니다. 다 틀린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살짝씩 틀린 말을 하여 영혼을 미혹하여 나중에는 큰 파멸의 구렁텅이에 몰아 넣습니다. 특히 그들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와서 자신이 재림 예수라고 할 것입니다. 그리고 종말의 때가 가까이 왔다며 자신을 따르라고 할 것입니다. 


둘째 전쟁에 대한 소문과 함께 전쟁이 많이 일어납니다.(9,10) 난리와 소요에 대한 소문은 사람들을 불안하게 합니다. 한반도에도 전쟁이 있지 않을 까 많은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종말의 때에 민족간의 전쟁, 나라와 나라간의 전쟁이 많이 일어납니다. 유럽에서는 지난 300년동안, 300 차례 전쟁이 있었고 20세기에는 세계 1,2차 대전이 있었고 6000만명 정도가 죽었습니다. 21세기에 들어서는 코소보, 보스니아, 쿠르드족, 크림반도 반도 등에서 민족간 학살과 전쟁이 있었고, IS들로 인한 공포가 있었습니다. 이제 북한과 미국의 전쟁이 있지 않을까 세상 모든 사람들이 떨고 있습니다. 만약 전쟁이 일어나면 6.25때는 200만명이 죽거나 실종되었는데 더 큰 참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셋째로 땅과 바다, 하늘에 무서운 징조들이 있습니다.(11,25,26) 지구의 지진은 땅의 지진과 바다의 지진으로 나뉩니다. 바다의 지진은 쓰나미 현상을 동반합니다. 또 이상기온과 자연재해로 기근과 전염병이 돕니다. 최후에는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립니다. 지구는 오늘날 점점 흔들리며 배기가스를 내뿜는 폐차 전의 자동차의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런 가운데 꼭 있을 일이 또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인들에게 환란과 박해가 있습니다.(12-19)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대대적인 박해를 받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의 도덕적인 잘잘못과 무관합니다.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미움을 받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세상에 속해있지 않기 때문에 세상이 제자들을 미워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15:19-21) 그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을 미워하는 이유는 근본적으로 영적 무지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모르고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작게는 가족들과 친구들이 미워합니다. 또한 사회와 국가권력으로부터 박해를 받습니다. 이 가운데 두려워할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머리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몇몇은 순교도 당하게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은 뜻가운데 허락하신 것입니다. 이 가운데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을 끝까지 지키고 최후의 영적 승리자가 되어야 합니다.  

13절을 보십시오. “이 일이 도리어 너희에게 증거가 되리라” 가족이나 친구, 사회나 국가권력로부터 핍박을 받을 때 이 때는 복음을 증거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됩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면서 “왜 그런 것을 믿고 왜 그렇게 사냐”고 이해할 수 없어하는 말들을 할 것입니다. 그때는 우리가 믿음의 이유를 분명히 밝혀 복음을 전할 좋은 기회가 됩니다. 우리가 주님을 간절히 의지할 때 주님은 우리가 조리 있고 지혜롭게 복음을 증거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이번 추석명절 기간도 복음을 전할 좋은 기회로 삼기를 기도합니다.


20-28절은 예수님이 예루살렘 멸망과 세상의 종말을 구체적으로 말씀하신 내용입니다. 

먼저 예루살렘 멸망입니다.(20-24). 예루살렘은 군대에 에워싸입니다. 이 말씀대로 예루살렘은 AD 68년에 로마 장군 베스파시아누스에 의해 포위당했습니다. 이 때 네로가 갑자기 죽음으로 로마군대가 철수함으로 예루살렘은 위기를 모면합니다. 그러나 다시 AD 70년에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의 아들인 티투스(Titus)가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포위 3일만에 예루살렘을 함락시킵니다. 이 때 무려 110만 명의 유대인들이 로마군의 칼날에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그리고 약 9만 7천명이 로마로 끌려가게 됩니다. 


이런 대재앙가운데도 예수님은 살 길을 알려주셨습니다. 예루살렘이 군대에 에워싸일 때 그 곳을 도망쳐 산으로 가는 것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모두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으로 몰려들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을 지키실 것이므로 모두가 너나 없이 예루살렘에 모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영적인 상식이나 막연한 확신에 따라 움직이지 않고 하나님이 보내신 그리스도의 말씀을 순종했습니다. 그래서 베레아의 펠라라는 지역으로 도망쳤습니다. 도망친 사람들은 그 대재앙 중에서도 모두 살았는데 이는 유세비우스의 ‘교회사’에 기록된 사실입니다.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철저한 심판을 받습니다. 그래서 결국 이방인의 때가 차기까지 이방인들에게 짓밟힙니다. 이 말씀대로 예루살렘은 AD 70년에 파괴된 후 AD 1948년에 이스라엘 독립까지 이방인들에게 짓밟힙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놀라울 정도로 정확하게 성취되었습니다.


25-27절은 세상의 종말과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말씀입니다. 지금까지의 예루살렘 멸망의 예언은 중첩예언중 산으로 하면 중봉에 해당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이제부터는 정상에 해당하는 세상의 종말과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말씀입니다.


25절을 보십시오. 그동안의 종말의 징조들은 땅이 흔들리는 것에 그쳤습니다. 그러나 이제 마지막 징조는 하늘이 흔들리는 것입니다. 해와 달과 별들에 징조가 있습니다.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므로 만유인력의 법칙이 깨집니다. 만유인력의 법칙이 깨질 때에 바다와 파도가 해변을 덮치고 도시를 삼킵니다. 이 광경을 본 사람들을 너무나 당황하고 두려워 합니다. 그들은 앞으로 닥칠 일을 생각하고 무서움으로 기절합니다. 하늘이 흔들리는 것, 이것이 현 세상의 종말의 마지막 징조입니다. 


그러면 이게 끝입니까? 아닙니다. 27절을 보십시오. “그 때에 사람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예수님은 감람산에서 구름에 가리워 올리우셨습니다. 그 때 천사들이 하늘을 쳐다보고 있던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가심을 본 그대로 다시 오시리라 약속했습니다.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리라” 이 내용은 예수님이 처음 이야기하신 것이 아닙니다. 다니엘서 7:13,14절에 예언된 내용입니다. “내가 또 밤 환상 중에 보니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에게 나아가 그 앞으로 인도되매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다른 언어를 말하는 모든 자들이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의 권세는 소멸되지 아니하는 영원한 권세요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니라” 사람들은 다시 오시는 영광스런 주님을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이 예수님의 재림이 바로 역사의 완성입니다.


인간의 역사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물질적 폭발로 시작하여 물질적 격변으로 종료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창조로 시작된 역사는 예수님의 재림으로 종료됩니다. 예수님의 재림은 역사의 완성이며 우리의 소망입니다. 역사는 우연에 기초한 유물론의 역사가 아니라 목적과 방향이 있고 결론과 심판이 있는 도덕론 적이고 유신론적 역사입니다.  


종말의 징후들이 나타날 때 일반인들은 그저 두렵고 당황해 합니다. 어찌할 바를 모릅니다. 답이 없는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집니다. 고작 할 수 있는 일이 비상식량을 사는 것입니다. 부자들은 지하벙커를 파고 숨는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유신론적 역사관, 기독교역사관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은 어떠해야 합니까? 일어나 머리를 들라고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이제 그리스도인들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입니다(28).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피로 영혼의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약하고 악하고 죽을 몸을 입고 있어 탄식하며 한계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이런 한계적인 몸이 예수님의 재림때 구원을 받습니다.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는 몸으로 바뀝니다. 또한 세상도 죄와 죽음이 없는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바뀝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완전한 구원, 구원의 완성입니다. 종말의 징후들은 바로 이 구원의 완성이 가까웠다는 것이 얼마나 기쁜 일입니까? “머리를 들라”이 말은 어사또가 된 이 몽룡이 성춘향에게 한 말이기도 했습니다. 본문에서 ‘머리를 든다’는 것은 담대해지는 것입니다. 희망과 기대감으로 다가올 미래를 맞이하는 것입니다. 신자들은 불신자들처럼 두려움으로 머리를 땅에 박고 숨을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종말을 징후들을 보고 주님의 재림과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대감가운데 소망하며 기뻐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29-33절은 세상의 종말과 예수님의 재림시기를 어떻게 분별할 수 있는 가에 관한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에서는 나무가 싹이 나면 여름입니다. 이것은 우리로 하면 코스모스가 피면 가을임을 아는 것과 같습니다. 세상종말과 예수님의 재림을 분별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자연히’ 안다는 것은 의외로 분별하기가 쉽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시기를 혹시 분별하지 못할까봐 지나치게 초조해 하거나 겁먹을 필요가 없습니다.  


예루살렘의 멸망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시점으로부터 약 35년 정도 후에 성취됩니다. 그래서 그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모든 일이 이루어질 것이라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천지는 없어질 지언정 예수님의 말씀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대로 됩니다. 


이제 남아있는 성경의 예언은 세상의 종말과 예수님의 재림뿐입니다. 세상의 종말, 예수님의 재림, 과연 이루어질까?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지요? 노아의 홍수, 예루살렘의 멸망도 그러했습니다. 설마, 설마 했습니다. 그러나 그 날은 오고야 말았습니다. 세상의 종말과 예수님의 재림, 그리고 새 하늘과 새 땅의 도래도 반드시 우리 앞에 현실이 될 것입니다.


34-38절은 세상의 종말과 재림에 관하여 마지막 당부입니다. 꼭 기억하고 명심해야 할 내용입니다. 우선, 스스로 조심하라고 하셨습니다. 종말과 재림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이 자신의 영혼을 보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노아에게 하나님은 “너를 위하여 방주를 지으라”고 하셨습니다. 신앙생활은 누구를 위해서 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에서 피동성은 가장 안타까운 자세입니다. 우리는 구원의 완성에서 제외되는 일이 없도록 스스로 조심해야 합니다. 특히 무엇을 주의해야 합니까? ‘방탕함’ ‘술취함’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는 것입니다. ‘방탕함’은 원어로 ‘도취’라는 뜻으로 쾌락에 취해 있는 상태입니다. 술취함은 쾌락에 도취된 것 중 대표주자 라 할 수 있습니다. ‘생활의 염려’란 이 세상에서 어떻게 먹고 살 것인가 근심으로 마음이 무겁게 짓눌린 상태를 말합니다. 예수님의 재림은 영혼이 깨어 있는 사람들에게는 얼마든지 분별할 수 있는 것이지만 세상쾌락과 세상일에 대한 염려가운데 영적으로 둔감해진 이들에게는 종말과 재림이 피할 수 없는 덫처럼 임할 수도 있습니다.  


재림에 관한 주님의 마지막 당부입니다. 36절을 보십시오.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종말과 재림을 거뜬히 피하여 예수님 앞에 여유 있고 당당하게 설 수 있는 비결을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는 것”입니다. 깨어있는 사람에게 종말과 재림은 결코 도적같이 오지 않습니다. 


그럼 깨어 있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일까요? 새번역에 보면 “기도하면서 늘 깨어 있으라”로 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 깨어 있는 것과 기도하는 것은 같은 것입니다. 잠들지 않는 다는 것은 영혼이 잠들지 않았다는 것인데 영혼의 기능은 주님을 찾고 주님과 소통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사람은 깨어 있는 사람이요 깨어 있는 사람은 기도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결국 항상 기도하는 것이 주님을 담대히 맞을 비결입니다. 우리는 누가복음 18장을 공부하면서 항상 기도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배웠습니다. 기도가 영혼의 호흡이라면 훈련받으면 항상 기도할 수 있고 힘든 일도 압니다. 기도를 무릎꿇고 무엇을 청원하는 것이라고만 생각하면 항상 기도하는 것은 불가능한 고역입니다. 그러나 기도는 하나님과의 사귐입니다. 사귐은 어렵지 않습니다. 특히 좋은 사람과 사귐은 더욱 그렇습니다. 아시다시피 먼 길을 가장 빨리 갈 수 있는 방법은 비행기를 타는 것도, 고속열차도 이용하는 것도 아니고 좋아하는 친구나 연인과 같이 가는 것입니다. 사귐이 기도라면 우리는 항상 기도할 수 있습니다. 사귐은 심지어 침묵으로도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주님과 교제하는 사람이 바로 항상 영혼이 깨어 있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절대로 종말과 재림은 갑자기 임하지 않습니다. 간신히 피하는 재앙이 아니라 오히려 행복하게 손꼽아 기다리는 결혼식처럼 다가올 것입니다. 성경학자 윌리암 바클레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종말과 재림은 두려워할 것이 아니다. 우리가 매일 만나고 교제했던 주님을 역사적으로 만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항상 주님과의 사귐의 기도를 드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기도의 환경이 잘 갖추어져 그곳에 가기만 해도 기도하고 싶고 기도가 줄줄 나오는 곳이 있습니다. 하지만 여의치 못해 새벽에 못일어날 수도 있고 기도할 교회나 기도실이 없는 곳에 있을 수도 있습니다. 이런 분들에게는 달팽이 기도를 추천합니다. 달팽이는 집을 가지고 다니다가 언제든지 쉬고 싶으면 그 자리에서 집으로 쏙 들어갑니다. 그 집속으로 들어가면 누구도 그를 방해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있는 곳을 잘 활용하면 있는 그 자리에서 영혼의 안식처인 기도의 자리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화장실도 짬을 내어 기도하면 좋은 기도실이 됩니다. 전철을 타고 가는 시간도 묵상기도의 시간으로 활용할 수 있습니다. 줄서서 버스를 기다리는 시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연에 가면 자연속에서 하나님을 찬양을 하며 기도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우리는 1:1중에도, 대화중에도 기도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무시로 모든 환경을 기도실 삼아 주님과 교제하는 기도의 사람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항상 주님과의 교제가 살아있어 깨어 담대히 주님맞는 성도들이 다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어떤 신학생은 기도에 대한 논문을 썼는데 논문을 심사하던 교수님이 “학생은 하루에 얼마나 기도합니까?” 질문하자 그 학생은 “저는 삶이 기도라 항상 기도하고 있기 때문에 따로 기도하지는 않습니다”라고 답하여 교수님을 충격에 빠뜨렸습니다. 항상 기도한다고 하면서 따로 정해진 기도시간이 없는 사람은 궤변론자요 실제로 기도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무시로 기도하지만 시간을 정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연약함을 극복하고 많이 기도할 수 있는 비결입니다. 가능하면 하루를 시작할 때 기도하고, 중간에 한번 기도하고, 하루를 마감할 때 한번은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결론입니다. 쾌락에 도취되어 있고 세상염려에 눌려있는 사람에게 종말과 주님의 재림은 덫과 같이 오거나 간신히 피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항상 주님과 사귐의 기도를 드리는 사람에게 종말과 재림은 능히 피할 수 있는 것이며 그는 당당하게 주님앞에 섭니다. 우리가 항상 깨어 주님과 사귀는 기도의 사람들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