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후서 7강 이 은혜에도 풍성하게 할지니라 말씀 고린도후서 8,9장 요절 고린도후서 8:7 “오직 너희는 믿음과 말과 지식과 모든 간절함과 우리를 사랑하는 이 모든 일에 풍성한 것같이 이 은혜에도 풍성하게 할지니라” 어떤 목사님이 노방전도를 하다가 한 사람을 만났는데 그 사람은 교회가면 헌금 이야기하는 게 싫어서 교회가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우리교회는 헌금 이야기를 거의하지 않지 않으니 염려말고 오라고 했습니다. 주일에 보니 그 사람이 와서 앉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전할 말씀이 헌금에 대한 말씀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강해설교를 하기 때문에 순서가 오늘 같은 헌금에 관한 말씀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목사님은 최대한 그 사람을 배려해서 부드럽게 설교를 했습니다. 그런데 아니나다를까 다음주 부터 나오지 않았습니다. 뭐든지 의미를 모르면 부담이 되고 회피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의미와 가치를 알면 기쁨으로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본문을 통해서 헌금의 의미와 가치와 축복에 대해서 잘 배우고 즐겁게 헌금생활을 하기를 기도합니다. 고린도 교회의 헌금생활을 돕는 데 있어서 바울은 다른 교회의 좋은 모범을 들어서 돕고 있습니다. 헬라지역은 크게 마게도냐 지역과 아가야 지역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마게도냐에 있는 교회는 빌립보, 데살로니가, 베뢰아 교회 입니다. 그리고 아가야 지역에는 아덴과 고린도, 겐그레아 교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게도냐 교회들은 어떻게 구제헌금에 동참했습니까? 풍성한 연보를 넘치게 했습니다(2). (welled up in rich generosity) IMF 때 금모으기 운동이 있었습니다. 경제를 살리기 위해 수많은 국민들이 가지고 있던 금붙이들을 내놓았습니다. 금붙이를 가져오는 행렬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마게도냐 성도들의 헌금은 샘솟듯이 계속되었고 헌금이 차고 넘칠 정도였습니다. 그들이 부자여서 그렇게 헌금을 많이 한 것입니까? 그들은 많은 환난과 시련을 겪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극심한 가난 중에 있었습니다. 원어로 보면 바닥을 모를 정도의 가난의 골짜기에 있었습니다. 이 정도면 신앙자체에 대해서 불신을 가지고 교회를 떠나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마게도냐 교회는 놀라운 역설의 신앙을 보이고 있습니다. 어떻게 그게 가능했을까요? 첫째로, 그들은 시련중에도 기쁨이 넘쳤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시련을 믿음의 눈으로 해석했습니다. 시련 중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았습니다. 자신들을 연단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섭리를 아니, 기쁨이 넘쳤습니다. 이때 그들은 믿음에 굳게 서서 오히려 고난중에 있는 다른 교회를 돌아 볼 수 있었습니다. 둘째로, 그들은 극심한 가난을 통해 가난으로 허덕이는 사람들을 깊이 이해하고 섬길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능력껏 헌금하는 정도를 넘어 능력을 벗어나는 헌금을 했습니다. 예를 들면 생활비가 50만원이 남았습니다. 그렇다면 5-10만 원 정도 하는 것이 능력껏 한 것이고 형편에 맞게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50만원 전부를 헌금해 버렸습니다. 그들의 헌금은 어떤 면에서 지나쳤습니다. 대책이 없는 헌금, 계산하지 않는 헌금이었습니다. 이런 헌금을 바울이 강요하고 지시했다면 문제가 됩니다. 그것은 이단적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헌금은 기쁨으로 자원하여 한 것이었습니다. 대개 사람들은 무엇인가를 받는 일에는 앞장서지만 내는 것은 은근슬쩍 빠집니다. 하지만 마게도냐 성도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그들은 자신들이 구제헌금에 꼭 참여하게 해달라고 간구했습니다. 자신들이 가난하다 해서 헌금하는 대상에서 제외시키지 않기를 부탁했습니다. 마게도냐 교인들의 헌금은 모든 면에서 바울의 예상을 뛰어 넘어섰습니다. 그들의 헌금이 바울을 감동시킨 이유가 무엇입니까? 5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바라던 것뿐 아니라 그들이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우리에게 주었도다. 그들은 먼저 자신을 주님께 드렸습니다. 자신을 완전히 드려 무엇을 하는 것을 보면 누구나 감동을 받습니다. 창세기에 보면 사람이 하나님께 드린 첫 예물이 나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한 사람의 것은 받으시고 다른 사람의 것은 받지 않으셨습니다. 예물이전에 드리는 자를 받고 안 받으셨다는 언급을 볼 때 한 사람은 자신을 하나님께 드렸고 다른 사람은 예물만 드렸습니다. 그러면 헌금할 때 자신을 주님께 드린다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일까요? 리빙스턴처럼 자신을 헌금바구니에 집어넣는 것일까요? 마음을 드리는 것입니다. 마음을 드리지 않은 헌금은 하나님께 의미가 없습니다. 바울은 이제까지 구제헌금의 좋은 예인 마게도냐 교회의 예를 들었습니다. 헌금을 말함에 있어서 실례를 드는 것이 왜 중요할까요? 헌금을 드리는 것은 매우 실제적인 믿음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열왕기 상 17장에 나오는 사르밧 과부는 자신과 자식이 먹고 죽을 마지막 남은 밀가루와 기름을 하나님의 종을 섬기는 데 썼습니다. 이때 어떻게 되었습니까?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않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않는 기이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한 사모님은 남편을 잃었지만 남편있을 때의 십일조를 드리기로 결단했습니다. 그리고 기회되는 대로 선교사님들이나 어려운 목자들을 도왔습니다. 하나님은 친척 등 여러 손길을 통해 그 사모님에게 물질을 끝없이 채워주셨습니다. 그래서 네 자녀를 키우고 수많은 목자들을 세우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친히 그분의 남편이 되어주셨습니다. 정말 그녀는 성경의 사르밧 과부 이상의 믿음의 체험을 했습니다. 이처럼 헌금에 대한 믿음의 체험을 들으면 우리 가슴이 뜨거워집니다. 이 때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결론적으로 무엇을 촉구합니까? 일 년 전에 약속했던 예루살렘 구제헌금을 실제로 감당하라고 합니다. 헌금에 대한 이야기는 오해를 불러 일으킬 수 있기 때문에 그냥 내버려 두기 쉽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이 시작했던 구제헌금을 끝까지 성취하라고 돕고 있습니다. 그것은 어떻게든지 그들에게서 물질을 뽑아내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의 삶에 넘치는 은혜가 있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다같이 요절 말씀인 7절을 읽겠습니다. “오직 너희는 믿음과 말과 지식과 모든 간절함과 우리를 사랑하는 이 모든 일에 풍성한 것같이 이 은혜에도 풍성하게 할지니라” 바울은 헌금하는 것은 은혜라고 표현했습니다. 8,9장에서 은혜라는 말이 9번 나옵니다. 헌금은 손해가 아니라 은혜입니다. 은혜란 받는 것입니다. 누리는 것입니다. 구제헌금을 드리라고 하는 것은 그들이 풍성한 은혜를 누리게 하려 함입니다. 고린도교회는 신앙의 다른 부분에서 열심이 있었고 훌륭했습니다. 믿음의 은사들을 추구했고 뛰어난 언변을 가진 말씀의 종들도 있었고 신령한 지식을 추구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또한 간절히 기도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또한 선교사님들에게 열심히 편지를 쓰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구제헌금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열정이 부족했습니다. 그 이유는 다른 것은 영적으로 유익하고 의미 있다고 생각했지만 구제헌금에 대해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구제헌금이 왜 그렇게 유익하고 중요합니까? 첫째로 구제헌금은 사랑의 진실함을 증명하기 때문입니다. 8절을 보십시오. “내가 명령으로 하는 말이 아니요 오직 다른 이들의 간절함을 가지고 너희의 사랑의 진실함을 증명하고자 함이로라” 마게도냐 성도들은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을 나 몰라라 하지 않고 어찌하든지 도왔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우리 삶의 제일 되는 목적입니다. 이기적인 인생은 행복한 것 같지만 사실은 허무하고 무의미합니다. 우리가 사랑을 실천할 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자신도 행복해집니다. 사랑은 립서비스보다 실천이 중요합니다. 사랑의 실천과 증명이 구제 헌금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요한 웨슬리는 “지갑이 회개하기까지 나는 당신들의 회개를 믿지 않는다”라고 했습니다. 구제헌금에 인색한 사람은 상대적으로 사랑이 없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헌금을 통해서 사랑의 진실함을 증명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사랑을 실천하는 감동과 행복이 넘치기를 기도합니다. 둘째로 예수님을 잘 배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9절을 보십시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은 하늘의 영광과 존귀와 부요를 누리던 분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늘 영광을 버리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춥고 냄새나는 마구간 말구유에 누이셨습니다. 그리고 가난한 목수의 삶을 사셨습니다. 머리 둘 곳없는 삶을 사셨습니다. 한 벌 옷에 만족하는 삶을 사셨습니다. 마침내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자기 생명을 버리셨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무소유가 되셨습니다. 이렇게 하신 것은 우리를 영육 간에 부요하게 하기위해서 였습니다. 우리 신앙생활의 목표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예수님을 배우는데 남을 부요하기 위해 자신이 가난하게 되신 것을 배우지 않으면 예수님을 배웠다고 할 수 없습니다. 구제헌금을 할 때 내가 좀 더 여유롭고 풍성하게 쓸 수 있는 것을 절제합니다. 나를 위해 쓰고 싶은 것을 내려놓습니다. 우리가정을 위해 쓰고 싶은 것을 줄입니다. 나의 자녀를 위해 쓰고 싶은 것을 포기합니다. 우리 센터를 위해 쓰고 싶은 것을 뒤로 합니다. 이것은 제 살을 도려내는 아픔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런 아픔을 감당하고 물질을 다른 사람을 위해 쓸 때 우리는 예수님을 배웁니다. 그럴 때 아픔이 있지만 또한 기쁨이 넘칩니다. 헌금 내지 구제헌금을 통해서 보석보다 귀한 예수님을 배우게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셋째로 구제헌금을 통해서 균등과 절제가 이루어집니다. 13,14절을 읽겠습니다. “이는 다른 사람들은 평안하게 하고 너희는 곤고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요 균등하게 하려 함이라 이제 너희의 넉넉한 것으로 그들의 부족한 것을 보충함은 후에 그들의 넉넉한 것으로 너희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균등하게 하려 함이라” 여기서 구제헌금의 목적은 균등을 이루는 것입니다. ‘균등’이란 공산주의식으로 기계적으로 완전한 소유의 평등을 이루는 것은 아닙니다. 형제자매의 부족함을 채워, 최소한 기본적인 삶을 영위하도록 돕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구제헌금을 연보라고 하는데 연보(捐補)란 ‘돈을 내어 부족한 것을 보충한다’는 뜻입니다. 야고보서에 보면 부자들에 대한 경고가 나옵니다. 거기에 보면 부자들이 쓰지 않은 것들이 심판의 증거가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왜 쌓인 금과 좀먹은 옷이 심판의 증거가 됩니까? 그것은 그들이 이웃에 대한 사랑이 없는 무정, 무자비한 자들이요 이기적인 삶을 살았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 자녀들이 균등하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이 부의 불평등을 허락하셨을까요? 왜 부자 나라가 있고 가난한 나라가 있습니까? 왜 부자 교회가 있고 가난한 교회가 있습니까? 왜 부자 목자가 있고 가난한 목자가 있습니까? 그것은 위에 살펴본 바와 같이 사랑을 실천하고 예수님을 배우는 기쁨을 누리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15절을 봅시다. “기록된 것같이 많이 거둔 자도 남지 아니하였고 적게 거둔 자도 모자라지 아니하였느니라” 이 말씀을 보면 하나님이 구약 교회인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에서 어떻게 먹이셨는지 볼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백성들에게 먹을 것을 1인분씩만 공급하셨습니다. 많이 거둔 자도 1인분, 적게 거둔 자도 1인분으로 바뀌게 하셨습니다. 일용할 양식인 만나에 신비한 역사가 있었습니다. 사람이 탐욕을 부릴 때 영적으로도 행복하지 않고 자신의 건강에도 좋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문제와 비극은 탐욕을 절제하지 못하여 생깁니다. 병들은 과식, 비만 등 욕심으로 비롯됩니다. 워런 버핏은 99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점심은 햄버거를 먹고, 차는 5000만 원짜리 낡은 롤스로이드를 탑니다. 그리고 많은 물질을 자기 재단도 아닌 빌게이츠 재단에 기부합니다. 균등의 원리는 다른 사람들을 행복하게 할 뿐 아니라 자신도 건강하고 행복하게 하며 탐욕으로부터 지켜줍니다. 그리고 언젠가 나도, 우리 가정도, 우리 센터도 가난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유할 때 베풀면 반드시 그는 도움을 받게 됩니다. 구제는 떡을 물에 던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반드시 다시 돌아오는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구제를 즐겨하는 사람은 은행투자보다 더 안정되고 확실한 미래가 보장된 삶을 사는 것입니다. 바울은 헌금역사를 위해 디도를 보내었고 디도가 기꺼이 순종하여 그들에게 나갔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디도와 함께 신뢰받는 한 형제를 같이 보냅니다. 그리고 또 한 형제를 추가로 보냅니다. 호사다마라는 말이 있습니다. 좋은 일에 마귀가 틈탄다는 것입니다. 디도는 바울이 신뢰하는 사람이지만 그도 물질의 유혹을 받을 수 있습니다. 두 사람도 중간에 마음이 맞아 헌금을 유용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지혜롭게 세 사람을 보냈습니다. 헌금은 관리를 잘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헌금한 사람들이 시험에 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9장 내용도 어찌 보면 8장 내용의 반복, 강조라 할 수 있지만 조금 다른 내용이 있습니다. 2-5절 말씀에 ‘준비’라는 단어가 무려 5번이나 나옵니다. 만약 헌금이 준비되지 않는 상태에 디도가 가서 헌금을 요구하게 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헌금이 무리한 헌금, 억지로 하는 헌금이 되어 버립니다. 그리고 이는 서로에게 은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니 준비된 헌금이 참 헌금답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준비된 헌금을 드릴 수 있을까요? 우리가 예배시간에 주머니를 뒤져서 내는 것은 준비된 헌금이 아닙니다. 그건 적선입니다. 만약 최소 하루 전에 예배시간에 드릴 헌금을 준비한다면 그것은 정말 준비된 헌금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어렸을 때 500원짜리 지폐를 받은 적이 있는 데 그것을 하나님께 드리고 싶었습니다. 그것은 제가 만진 최고의 돈이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것을 숯불 다리미로 다려서 정성스럽게 교회에 가서 드렸습니다. 헌금을 드리며 저는 제 인생을 하나님께 의탁했습니다. 그 헌금사건은 제가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예배 시간에 빈 손으로 오면 헌금시간의 난처함을 경험합니다. 반복해서 그런 경험이 쌓이면 통과 의례로 알고 질끈 눈감고 잠시 난처함을 견딥니다. 헌금 순서는 예배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요? 개혁주의 교회에서는 예배를 ‘보는 것’이 아니라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배시간에 찬송을 드리고, 기도를 드리고, 헌금을 드려야 합니다. 신명기 16:16절을 보면 하나님 앞에 올 때는 빈손으로 오지 말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가 앞으로 빈손으로 예배에 참여하지 않고 적은 금액이라도 준비된 헌금을 가지고 예배를 드리므로 진정한 예배를 주님께 드릴 수있기를 기도합니다. 헌금이 축복임을 안다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앞 다투어 할 것입니다. 하루가 아니라 일주일 전부터 준비할 것입니다. 원어상 9장에 나오는 ‘연보’라는 단어는 8장과 다른데 8장에는 ‘자비’, ‘관대함’이란 뜻이고 9장에서는 ‘축복’, ‘은혜’란 뜻입니다. 바울은 헌금이 축복인 이유를 8장에서 언급하지 않았던 다른 이유들을 언급합니다. 첫째로 헌금은 심는 것입니다.(6-11a). 6절을 보십시오.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헌금할 때 그 돈이 내게서 영원히 사라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손해의식으로 헌금하기를 주저합니다. 그러나 헌금은 투자입니다. 어느 누가 은행에 저축하면서 손해의식을 갖습니까? 헌금은 심는 것입니다. 농사를 지을 때 심으면 식물에 따라 10배, 100배, 1000배, 2000배 정도의 수확을 거둡니다. 따라서 농부들은 땅이 조금이라도 비면 그곳에 뭔가를 심으려고 합니다. 이처럼 헌금에 대한 믿음이 있는 사람은 어떤 명목을 만들어서라도 헌금하고 가능한 많이 하고자 합니다. 반면에 헌금을 가능한 하지 않으려는 이들은 이런 믿음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8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은 구제 헌금하는 자의 삶을 넘치도록 채워주시고 그래서 계속하여 선행을 베푸는 삶을 살게 하신다 하십니다. 사람들이 헌금을 꺼려하는 이유는 한만큼 자신의 삶이 쪼들리고 곤핍하게 될 것이라는 생각때문입니다. 인간적으로 타당한 생각입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구제하는 사람의 삶에 역설적인 하늘나라의 셈법이 작동합니다. 바울은 시편 112:9절을 인용하여 구제하는 사람의 의와 영광이 영원할 것을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헌금하는 자에게 ‘씨와 먹을 양식’을 주십니다. 그 사람이 먹을 것을 주실 뿐 아니라 그가 계속 선행을 할 수 있도록 100배 1000배를 거둘 수 있는 ‘씨’를 주십니다. 그래서 계속 여유 있게 남을 돕는 삶을 살게 하십니다. 반면에 과도하게 아껴도 가난하게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도와주시지 않으므로 한 번의 큰 문제가 생기고 손실이 생겨 모든 것이 다 허망하게 사라져 버리는 경우입니다. 둘째로, 헌금으로 인한 많은 은혜의 역사가 일어납니다(11b-15). 우리가 구제에 힘쓸 때 구제받는 사람들이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립니다. 감동을 받고 우리를 진실한 신앙인들로 여깁니다. 그리고 그런 삶을 가능하게 한 위대한 기독신앙에 대해 알고자 합니다. 그러니 간접적으로 전도의 효과가 발생합니다. 그들은 우리를 존경하고 사모합니다. 또한 우리를 위해서 간절히 기도해줍니다. 헌금은 버리는 것이 아니라 심는 것이며 헌금으로 인한 많은 은혜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어떤 사람은 인생의 길이 막혔을 때 헌금을 함으로 인생의 활로를 뚫기도 합니다. 우리가 헌금생활의 축복을 알고 즐거운 마음으로 적극적으로 헌금생활하기를 기도합니다. 결론입니다. 우리가 다른 신앙생활도 열심히 하지만 헌금생활도 열심히 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헌금생활을 통해서 우리 신앙생활이 더욱 기쁘고 풍성해 지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