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봄맞이 수양회 주제 2강
하나님의 용사 다윗
말씀/ 사무엘상 17:1-58 요절/ 사무엘상 17:45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오늘 말씀에서 하나님은 골리앗으로 인해 절체절명의 위기에 놓인 이스라엘을 구하기 위해 다윗을 쓰십니다. 다윗은 이 위기에서 하나님을 동역하여 위대한 승리를 이루어냅니다. 오늘날 캠퍼스 복음역사는 침체되어 있습니다. 목자들은 ‘해도 안 된다’는 패배의식에 젖어있습니다. 하나님 역사가 위기에 처했습니다. 그러나 위기는 곧 기회입니다. 이 가운데 하나님께서는 다윗과 같은 종을 세우시고 새 역사를 이루고자 하십니다. 우리가 본문말씀 통해 다윗과 같은 하나님의 동역자가 되고자 하는 소원을 덧입기를 기도합니다.
Ⅰ. 소년 다윗(1-37)
1절을 보십시오. 오늘 말씀의 배경이 나와 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그들의 군대를 모으고 싸우고자 하여 유다에 속한 소고에 모여 소고와 아세가 사이의 에베스담밈에 진 치매(1)” 블레셋은 이스라엘에게 있어 목에 가시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들은 선진 철기문화를 받아들여 철로 된 무기들을 가지고 강력한 군사력을 확보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블레셋이 유다 땅 소고를 침범하여 에베스 담밈이라는 곳에 진쳤습니다. 에베스 담밈은 당시 이스라엘의 수도 역할을 하던 기브아에서 불과 30km 떨어져 있었습니다. 왕 사울은 즉시 계엄령을 선포하고 군사들을 모아 블레셋 진영 맞은편 엘라 골짜기에 집결시켰습니다(2). 블레셋과 이스라엘 군사들은 골짜기를 사이에 두고 팽팽한 긴장감 가운데 전투를 준비했습니다(3). 그런데 그 때 블레셋 진영에서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탱크 같은 존재가 나오고 있었습니다. 그가 누구입니까?
4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의 진영에서 싸움을 돋우는 자가 왔는데 그의 이름은 골리앗이요 가드 사람이라 그의 키는 여섯 규빗 한 뼘이요(4)” 골리앗이라는 싸움을 돋우는 자가 나왔습니다. 그는 키가 3미터 가까이 되었습니다. 놋 투구를 쓰고 갑옷을 입었는데, 갑옷 무게만 해도 58킬로그램이었습니다(5). 다리에는 놋각반을 찼고, 어깨에는 베틀채같은 창자루에 철 6킬로그램의 창날을 가진 단창을 메고 있었습니다(6). 그 앞에는 방패 든 호위병이 가고 있었습니다(7). 그 거대하고 무서운 모습은 사람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습니다. 3000년이 지난 오늘날 불레셋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한국에서도 이 골리앗은 유명하여 거대한 크레인을 골리앗크레인이라고 하고 또 빈대 중에서 가장 큰 빈대를 골리앗 빈대라고 부르고 있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이런 그가 큰소리로 이스라엘의 군대를 모욕했습니다. “삼울인지 사울인지 하는 겁쟁이 부하들아- 우리 바알신의 부하도 못되는 여호와의 졸개들아- 애굽에서 노예질이나 할 것이지. 어디 겁도 없이 우리와 싸우려 드느냐. 당장 한 사람을 택해 내게 보내라. 그가 나와 싸워 나를 죽이면 우리가 너희의 종이 되겠다. 그러나 내가 만일 그를 죽이면 너희는 우리 노예가 되는 거다. 자 나와 싸울 자를 어서 보내라!(8-10)” 골리앗은 덩치도 크지만 음성도 웅장하여 그 소리는 이스라엘 진영을 덮었습니다. 그런데 봅시다. 그렇게 자신 있으면 공격을 감행할 것이지, 왜 굳이 이렇게 대놓고 싸움을 돋울까요? 이는 블레셋의 심리전술이었습니다. 손자병법에 “백전백승하는 것이 최선이 아니라, 싸우지 않고도 적을 무너뜨리는 것이 최선이다(是故 百戰百勝 非善之善者也 不戰而屈人之兵 善之善者也)”라는 말이 있습니다. 골리앗은 덩치만 큰 것이 아니라 손자병법도 읽어본 것 같습니다. 이 전략은 기가 막히게 먹혀들어갔습니다. 11절을 보십시오. “사울과 온 이스라엘이 블레셋 사람의 이 말을 듣고 놀라 크게 두려워하니라(11)” 왕 사울부터 기가 꺾였습니다. 왕이 그러니 백성들은 놀라고 크게 두려워하는 것이 당연했습니다. 이제 사울이 흰 깃발을 들고 골리앗 앞에 가는 것은 시간문제였습니다.
우리도 심각한 심리전에 직면해있습니다. 캠퍼스에는 양들을 지배하는 사탄이 포진하고 있습니다. 사탄은 물질주의, 인본주의, 쾌락주의의 골리앗을 내세워 심리전을 시작합니다. 캠퍼스 골리앗이 심리전을 걸어옵니다. “그렇게 피싱한다고 낚은 것이 있어? 있냐 말이야? 야 너 지금 몇 년 째야 응? 가서 발 씻고 누워 텔레비나 봐, 응? 오늘저녁에 여자 숏 트랙 단체전 한단다.” 학교 방침이 외부인은 신입생 상대로 전도하지 말라는 거야. 그러다 학교에서 쫓겨날 수 있어” 어떤 골리앗은 험한 인상을 쓰며 소리지릅니다. “귀찮게 말란 말이야. 한번만 더 옆에 오면 꽉 뭉개버릴 거야. 알간?” 사탄은 그렇게 우리 내면에 싸움 의지를 박탈하고 스스로 포기하게 합니다. ‘그럼 이렇게 캠퍼스 역사를 포기해야 하나요? 이대로 항복선언 해야 할까요. 아닙니다. 여기 사단의 공갈에 넘어가지 않은 한 사람이 있습니다.
본문은 전운이 감도는 전장에서 소년 다윗에게로 잠시 눈을 돌립니다. 우리는 장군이요 시인이요 음악가요 왕인 다윗에 대해서는 많이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전신인 소년다윗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이 시간 소년다윗이 어떤 분이었는지 본문을 통하여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소년 다윗은 순종의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은 베들레헴 에브랏 사람 이새의 여덟 아들 중 막내였습니다(12). 이새의 장성한 세 아들은 사울을 따라 전쟁에 나간 반면 다윗은 베들레헴에서 그의 아버지의 양을 쳤습니다(15). 그 다윗이 여느 때처럼 양떼를 몰고 집에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그의 아버지가 말했습니다. “형들에게 가서 볶은 곡식과 떡을 전해주고, 천부장에게는 치즈를 전해주거라. 형들 안부 살피는 것도 잊지 말고”(17) 이는 전장에 있는 형들에게 도시락을 좀 갖다 주고 오라는 부탁이었습니다. 다윗은 이런 허드렛일이나 하는 것이 못마땅하다며, “그런 일은 종들이나 시키시죠. 저 오늘 꽃순이를 만나러 가요”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어떻게 했습니까? 20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다윗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서 양을 양 지키는 자에게 맡기고 이새가 명령한 대로 가지고 가서 진영에 이른즉 마침 군대가 전장에 나와서 싸우려고 고함치며(20)” 다윗은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하였습니다. 이새의 명령대로 엘라 골짜기까지 갔습니다. 이 때 만약 다윗이 심부름을 거절했으면 어떠했을까요? 다윗은 그렇게 평생 아버지 양이나 치며 살다 죽었을 것입니다. 이는 사소한 심부름 같았지만 하나님께서 다윗을 위대한 구속역사에 데뷔시키는 하나님의 경륜이었습니다.
우리는 사소한 일이라고 무시하지 않습니까? 저는 1998년 대학 3학년 때 마음에 드는 여자 친구를 스토킹 하는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별로 성과가 없어 고시원에서 누워있었습니다. 그런데 학교에서 우연히 만난 과동기인 김미아 자매님(지금은 손미아 사모님)이 여름 수양회 가자고 하였습니다. 저는 여름 수양회를 여름 수영회로 잘못 듣고 수영할 수 있겠구나 하고 등록했습니다. 가보니 “수영”의 “수”자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소한 일이 하나님의 명령이었고 수영으로 알고 등록한 것은 저의 엉터리 같은 순종이었습니다. 이 순종은 제 인생을 바꾸었습니다. 전능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위대한 역사의 전초였던 것입니다. 저의 인생이 근본적으로 변하는 위대한 서막이었습니다. 자매님을 스토킹하며 아무 열매도 맺지 못할 인생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영육 간에 풍성한 열매를 맺는 목자가 되었습니다.
둘째, 소년 다윗은 부지런했습니다.
20절 전반부를 다시 한 번 보십시오. “다윗이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양을 양 지키는 자에게 맡기고” 다윗은 아버지의 명령에 따라 형들에게 가기 위해 아침 일찍 일어나 준비하였습니다. 마지못해 하며 늑장을 부리지 않았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명령을 부지런하게 순종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부지런한 것이 주의 종이 갖추어야 할 필요조건임을 알 수 있습니다. 목자는 부지런해야 합니다. 초창기 우리 선배들은 일주일에 10팀 내지 20팀의 1:1은 뉴스도 아니었다고 합니다. 일주일에 1팀 내지 2팀도 힘들어 하는 저희들에 비하면 그들이 얼마나 부지런하게 주의 일을 감당하였는지 회개의 심정이 듭니다. 사실 저는 일주일에 조강형제님, 황휘동 형제님과 1:1로 2팀의 1:1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이는 저희 센터에서 무시 못 할 숫자에 해당합니다. 이 게으름을 회개하고 금년에는 2배로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새벽에 일찍 일어나 기도하고 하루를 감당할 힘과 방향을 얻어야겠습니다. 이것이 습관화되어야 소년다윗과 같이 하나님께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셋째, 소년 다윗은 책임감이 있었습니다.
다윗은 아버지 심부름을 한다며, 그가 돌보던 양들을 방치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가장 먼저 한 일은 양을 양 지키는 자에게 맡기는 것이었습니다. 아버지가 자기에게 도시락 심부름을 시켰으니 양은 아버지가 알아서 하시겠지 하고 양들을 방치하고 그냥 가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의 책임을 다하고자 했습니다. 오늘날은 무책임의 시대라고 합니다. 책임은 지지 않고 권리만 주장하는 시대입니다. 이러한 시대 분위기가 센터에도 들어왔습니다. 목자들은 양이 힘들어지고, 자기 요회나 센터 역사가 어려워져도 별 관심이나 책임을 갖지 않습니다. 인정은 받기 원하지만 책임은 지려 하지 않습니다. ‘내가 아니라도 요회목자님이나 스텦목자님이 알아서 하겠지’라는 무책임한 태도로 방관합니다. 그렇게 해서는 하나님의 종으로 쓰임 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양, 요회, 센터를 자기 일처럼 책임감을 갖고 감당하려는 자를 크게 쓰십니다.
넷째, 소년 다윗은 하나님을 위해 분노할 줄 알았습니다.
다윗이 이새의 명령대로 형들에게 문안할 때, 마침 골리앗이 나와서 전에 하던 대로 이스라엘을 모욕하는 말을 했습니다(23). “어이 겁쟁이들! 하나님은 어디 출장간 모양이야! 너희 같은 놈들의 신이 어련하겠어?” 이스라엘 모든 사람이 골리앗을 보고 심히 두려워 도망하였습니다. 누구하나 나설 생각은 하지 않고, 골리앗을 죽이는 사람에게 주어질 혜택만 떠들고 다녔습니다(25). 참으로 가관이었습니다. 그러나 소년 다윗은 가만있지 않았습니다. 26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다윗이 곁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이 블레셋 사람을 죽여 이스라엘의 치욕을 제거하는 사람에게는 어떠한 대우를 하겠느냐 이 할례 받지 않은 블레셋 사람이 누구이기에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겠느냐(26)” 다윗은 하나님의 군대가 모욕당하는 것에 대한 분노가 솟구쳤습니다. 성경은 다윗의 말을 정제하여 표현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이랬을 것입니다. “저 할례 받지 않은 개 같은 새끼가! 어떻게 살아계신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한단 말인가!” 심리전은 두려움을 이용한 전략입니다. 심리전에서 맞서는 최선의 방법은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다윗은 성공했습니다. 두려워하기보다 하나님의 이름이 모욕받는 것에 대해 분노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디에 분노합니까? 같은 진영에 있는 동역자가 나를 무시하는 말을 하고, 섭섭하게 대우하였다고 원한을 품고 분노하며 힘을 빼지 않습니까. 우리가 그럴 것이 아니라 캠퍼스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우습게 여김 받고, 복음이 포스트모더니즘으로 인해 힘을 잃고 있는 현실에 분노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이로써 사탄의 심리전에 휘말리지 않고, 승리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28절을 보십시오. 다윗이 분노를 일으키자 큰형 엘리압이 이를 듣고 있다가 핀잔을 주었습니다. “네가 어찌하여 이리로 내려왔느냐 들에 있는 양들을 누구에게 맡겼느냐 나는 네 교만과 네 마음의 완악함을 아노니 네가 전쟁을 구경하러 왔도다(28)” 엘리압은 두려움에 떠는 자신과 달리 용감한 다윗을 시기 질투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이 상황에서 어떻게 대처했습니까? 그는 “내가 무엇을 하였나이까 어찌 이유가 없으리이까”라고 말하며 전혀 위축되지 않았습니다(29, 30). 이런 다윗의 말과 행동은 사울에게까지 전해졌습니다(31). 다윗은 왕에게 나아가 자신이 골리앗과 맞서 싸우고자 하는 이유와 근거에 대해 말하였습니다. 37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또 다윗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를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건져내셨은즉 나를 이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사울이 다윗에게 이르되 가라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기를 원하노라(37)” 소년다윗이 아버지의 양을 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사자와 곰과 같은 맹수가 종종 양떼에게 달려들어 새끼를 물어가곤 하였는데, 다윗은 그 때마다 목숨을 걸고 맹수와 싸워 새끼 양을 건져내었습니다. 다윗은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했고, 그 도우심을 체험했습니다. 다윗은 책상에 앉아 공상 가운데서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지 않고 맹수가 들끓는 필드에서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능력을 체험하였습니다. 이 하나님의 도우심을 골리앗과 상대하여야 하는 현재 상황과 연결시킬 줄 알았습니다. 우리도 캠퍼스라는 우리의 미션필드에서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능력을 체험하여야겠습니다. 우는 사자가 들끓는 캠퍼스 역사 현장에서 양들을 먹기 위하여 채가는 우는 사자들에게 맞서 그 아가리를 치고 양들을 구하여 내는 역사를 감당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처음 다윗을 어린아이로 보았다가 필드에서 사자와 곰을 쳐서 죽이고 양들을 구하여 내었다는 다윗의 말을 듣고 사울의 마음이 움직였습니다.
사울은 소년 다윗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가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종임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가라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라고 말하며 소년 다윗을 장군 다윗으로 임명하였습니다.
Ⅱ. 장군 다윗(38-58)
장군 다윗에게는 골리앗과 싸우기 위한 무장이 필요했습니다. 처음에는 사울이 준 군복과 갑옷, 투구를 착용하고 칼을 찼습니다(38). 그러나 덩치 큰 사울이 사용하던 것들은 다윗에게 맞지도 않았고 익숙하지도 않았습니다. 이에 다윗은 이것들을 벗고 자신에게 맞는 무장을 갖추었습니다(39). 그것이 무엇입니까?
40절을 보십시오. “손에 막대기를 가지고 시내에서 매끄러운 돌 다섯을 골라서 자기 목자의 제구 곧 주머니에 넣고 손에 물매를 가지고 블레셋 사람에게로 나아가니라(40)” 다윗은 자신에게 가장 익숙한 무기들을 챙겼습니다. 매끄러운 돌 다섯 개와 물매가 그것입니다. 손으로 돌을 던지는 도구인 가죽재질의 물매는 전쟁무기로 사용되었으며, 실제로 당시 물맷돌 부대가 있었다고 합니다. 다윗은 양들이 대열을 이탈할 때 이 물매를 이용하여 양들의 앞쪽에 돌을 던져 돌아오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사자와 곰을 상대할 때도 물매질로 그들의 급소를 맞춰 기선 제압하였습니다. 그는 양을 치는 데 필수적인 물매질을 수천번, 수만번 연습하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눈감고도 할 수 있을 정도로 숙련되어 있었습니다. 목숨이 달린 전쟁에서 어떤 무기를 사용하는가는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만약 다윗이 사울의 큰 칼이 멋있어 보인다며 그 칼을 들고 갔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무거운 칼로 인해 싸우기도 전에 지쳐 쓰러졌을 것입니다.
캠퍼스 목자인 우리에게 있어 익숙한 무기는 무엇입니까? 말씀과 기도입니다. 외적인 타이틀이나, 화려한 언변이 아닙니다. 학생들에게 가서 나는 대학교수인데, 의사인데, 대기업 임원인데 라고 하며 피싱하면 말을 잘 들을까요? 아닙니다. 오히려 불순한 목적으로 접근하는 사기꾼이라 의심할 것입니다. 몇 년 전 서울대에서는 과학기술부 장관을 여러 차례 역임하고 대선후보로도 출마한 정근모 박사가 그 경력을 내세워 성경강의를 시도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학생들이 오지 않아 중단되고 말았습니다. 반면, 서울대 출신도 아니고, 학위도 없는 그냥 아줌마일 뿐인 어떤 사모님은 말씀과 기도만으로 ‘영재학교 출신 서울대 물리학과 수석졸업자’를 사단의 아가리에서 구하여 내었습니다. 또 어떤 사모님은 ‘자신을 신이라 생각하는 어떤 공대생’을 단 한번의 1:1로 무너뜨리고 제자 삼았습니다. 우리는 목자의 제구를 양들과 상황에 맞는 적절한 말씀들로 채워야 합니다. 이 익숙한 무기를 사용할 때 양들에게 역사하는 사탄의 세력을 제압할 수 있습니다. 골리앗은 이스라엘 진영에서 누군가 다가오는 것 같아 방패 든 사람을 앞세우고 전진했습니다(41). 누가 감히 자신과 싸우려드는가 유심히 보았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보아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때 방패든 자가 “아래를 보세요”하였습니다. 골리앗이 아래를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얼굴이 붉고 예쁘장하게 생긴 작은 소년이 오고 있는 게 아닙니까. 어이가 없었습니다. “꼬마놈이 엄마 젖이나 먹고 있을 것이지. 네가 나를 개로 여기고 막대기를 가지고 내게 나아왔느냐. 다곤 신의 이름으로 너를 저주하노라. 내게 오라. 네 살을 공중의 새들과 들짐승들에게 주리라.(43, 44)” 골리앗의 저주와 위협은 온 엘라 골짜기를 울렸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주눅 들지 않았습니다. 45절부터 47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넘기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목을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를 오늘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겠고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45-47)” 골리앗은 칼과 창, 단창으로 나아갔습니다. 반면, 다윗은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아갔습니다. 이 싸움은 전능하신 하나님과 그 하나님 앞에서 이쑤시개 같은 칼과 창을 들고 나오는 골리앗의 싸움이었습니다. 다윗은 다만 골리앗과 싸우시는 하나님의 동역자로 쓰임 받을 뿐이었습니다. 다윗이 이를 믿었을 때 ‘하나님이 골리앗을 넘기리라’ 확신했습니다. 이에 반해 골리앗은 다윗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아간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극도의 두려움을 느꼈을 것입니다. 개를 부릴 때 쓰는 막대기를 들고 나옴으로써 골리앗 자신이 하나님 앞에 개만도 못한 존재임을 일깨워준 다윗의 행동에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습니다. 다윗의 역심리전(逆心理戰)에 말려든 것이죠.
이뿐 아니라 장군 다윗에게는 이 믿음을 뒷받침하는 필승 전략이 있었습니다. 48, 49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블레셋 사람이 일어나 다윗에게로 마주 가까이 올 때에 다윗이 블레셋 사람을 향하여 빨리 달리며 손을 주머니에 넣어 돌을 가지고 물매로 던져 블레셋 사람의 이마를 치매 돌이 그의 이마에 박히니 땅에 엎드러지니라(48, 49)” 골리앗이 다윗에게로 가까이 전진했습니다. 이에 다윗은 골리앗을 향해 더 빠른 속도로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달리면서 주머니 속에 있던 돌을 꺼내 물매로 던졌습니다. 다윗의 손을 떠난 물맷돌은 휘융~하고 소리를 내며 날아가 얼굴 가리개와 투구 사이에 약간 빼곰이 보이는 빈공간으로 쏘옥 들어갔습니다. 초음속으로 날아든 물맷돌은 골리앗의 이마에 퍽하고 깊이 박혔습니다. 다윗은 골리앗을 처음 본 순간부터 이 빈 공간을 공략할 계산을 세워놓았습니다. 그리고 그 계산대로 행동했습니다. 결국 골리앗은 이마에 돌이 박힌 채 쿵하고 땅에 엎드러졌습니다. 다윗은 골리앗의 칼로 그의 머리를 베어 하늘 높이 쳐들었습니다. 기고만장하던 골리앗은 허망하게 목과 몸통이 분리된 시체가 되어버렸습니다. 사방에서 까마귀가 간만에 생긴 큰 먹잇감 냄새를 맡고 깍~깍~하고 몰려들었습니다. 블레셋 군인들은 기겁을 하며 도망했습니다(51). 반면 이스라엘 군사들은 사기충천(士氣沖天)하였습니다. 도망가는 블레셋 사람들을 쫓아가 노략하였습니다(53). 이로써 다윗과 골리앗의 세기의 대결은 다윗의 승리로 끝이 났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동역자로 역사의 무대에 데뷔하였습니다.
이상을 볼 때 골리앗과 같은 거대한 적과 싸워 이길 수 있는 비결이 무엇입니까? 캠퍼스 복음역사의 치열한 전투 가운데 양들을 사로잡는 사탄의 세력을 어떻게 제압할 수 있습니까?
첫째, 나의 이름이 아닌, 하나님의 이름으로 싸워야 합니다. 캠퍼스 제자양성 역사는 목자의 언변과 능력, 의지로 감당하는 목자의 전쟁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싸우시는 하나님의 전쟁입니다. 목자는 그 전쟁에서 하나님의 동역자로 쓰임 받고자 해야 합니다. 그럼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동역자가 될 수 있을까요? 목자는 다윗과 같이 평소에 하나님과 인격적 관계성을 맺어야 합니다. 학교와 직장, 가정에서 만나는 여러 문제들 가운데 하나님을 의지하고 기도하여 그 도우심을 체험해야 합니다. 이러한 긴밀한 관계성 가운데 하나님의 일을 내 일로 여기며 캠퍼스에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우리를 동역자 삼아 캠퍼스 형제자매들에게 역사하는 사탄의 세력을 친히 박살내십니다. 둘째, ‘원샷 원킬’할 수 있는 영적 필살기(必殺技)를 갖추어야 합니다. 다윗은 평소 물맷질을 끊임없이 연습했습니다. 물맷질에 있어서는 세계 챔피언이었습니다. 우리에게 물맷질은 일대일 성경공부입니다. 평소 일용할 양식과 소감을 통해 끊임없이 말씀을 묵상하고, 현실에서 그 말씀을 적용해보아야 합니다. 즉, 단단한 물맷돌을 준비하여야 합니다. 또한 양들을 깊이 연구해야 합니다. 그를 괴롭히는 죄문제, 인생문제가 무엇인지, 그의 기질은 어떠한지 분석해야 합니다. 골리앗의 훤히 드러난 이마와 같은 빈틈을 찾아내야 합니다. 그리고 결정적 순간에 일대일 성경공부를 통해 준비된 말씀의 물맷돌을 양들의 이마에 박아 넣어야 합니다. 그 때 양들의 영혼에 역사하는 사탄의 세력은 쓰러지고, 생명의 말씀이 역사합니다.
저는 1998년 앞서본 바와 같은 사소해 보이는 목자님과의 약속을 계기로 여름수양회에 참석하여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2001년에는 관악5부 서울대 개척역사에 동참하게 되었습니다. 그해 요회목자가 되어 신입생 형제를 피싱하여 여름수양회에 참석시켰습니다. 그런데 그 이후 신입생을 피싱하고 섬기는 역사가 끊어졌습니다. 학교에 피싱하러 가면 투명인간 취급받아 풀이 죽어 내려오길 반복하였습니다. 학기 초 얼마간 관계성 맺은 양도 다 연락이 끊겼습니다. 그런 패턴이 10년 넘게 계속되다보니 해도 안 된다는 패배의식에 젖게 되었습니다. 사탄의 심리전에 굴복하였습니다. 이제 요회목자 체면을 위해 의무감으로 캠퍼스를 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저를 불쌍히 여기시고 작년부터 큰 은혜를 허락하셨습니다. 오랜 기간 제자리 걸음하던 조강형제가 요회의 르네상스를 이끌겠다고 나선 것입니다. 그는 앞으로 10명을 데려와서 제자양성하겠다는 구체적인 계획도 밝혔습니다. 그리고 추진력 있게 황휘동 형제님을 예배에 초청하였습니다. 저는 이를 통해 어찌하든 캠퍼스 복음역사를 이루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의지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더 이상 사탄이 심는 패배의식에 빠져있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하나님의 싸움을 하고자 하는 소원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소원을 따라 주중에는 황휘동 형제님을 심방하여 일대일하고, 주말에는 조강형제님을 센터에 초청하여 성경공부를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동역자가 되어 하나님의 이름으로 일대일 전투를 감당할 때 힘이 들지 않았습니다. 재미가 있었습니다. 패배주의에 젖어 두려움과 안일 가운데 있던 제 안에 하나님의 동역자로서의 DNA를 일깨워 주시고, 장군 다윗과 같이 캠퍼스 복음 역사를 섬기게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찬양을 드립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은 봄학기 시작될 캠퍼스 일대일 전투에 동역할 이 시대 장군 다윗들을 찾고 계십니다. 우리가 사탄의 심리전에 휘말려 두려워 떨고 있어야겠습니까. 아니면 복음이 힘을 잃고 하나님이 모욕당하는 현실에 분노하며 다윗과 같이 나아가야 하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캠퍼스에 가서 일대일 성경공부의 물맷돌을 던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동역자가 되어 위대한 승리의 역사 이룰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17:4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