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요한복음 제 1 강
말씀이 육신이 되어
말씀 / 요한복음 1:1-18 요절 / 요한복음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2018년 봄학기에 생명의 말씀 요한복음을 공부하게 되어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요한복음의 저자는 예수님의 사랑하시는 제자 사도요한입니다. 그는 이미 공관복음서와 바울서신들이 나온 후인 AD 90~95년경에 이 글을 집필하였습니다. 다른 저작들을 참고하며 자신이 직접 보고 들은 바를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가운데 기록하였습니다.
요한복음은 사복음서 중에서 예수님에 대해 가장 신적이고 우주적인 성격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도요한은 독자들이 이 복음서를 통해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알고 그를 믿어 생명을 얻게 하려고 썼다고 밝히고 있습니다(20:31).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아는 것이 생명을 얻는 길입니다(17:3). 영생의 소망 가운데 이 땅에서도 생명력이 넘치는 삶을 사는 길입니다. 우리가 이번 요한복음 말씀을 통해 생명을 얻고 생명력이 충만한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여기서 '태초'는 영어로 "In the beginning"으로 되어 있습니다. 어느 시작점을 의미하는 "At the beginning"이 아닙니다. 처음이 없는 영원 전을 말합니다. 시작도 없는 영원 전부터 계신 분이 있었습니다. 사도요한은 그 분을 '말씀'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14절을 보면 이 분이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신 예수님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라는 이름은 이 땅에 태어나셨을 때 주어진 이름(마1:21)이기 때문에, 그 전에 계신 때에 그 이름으로 지칭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요한은 이 땅에 오시기 전에 존재하신 그 분을 무엇이라고 칭할까 고민도 하고 기도도 많이 하였던 것 같습니다. 그는 영원 전 부터 계신 그 분을 '말씀'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헬라어로 '로고스', 영어로 대문자로 시작하는 'Word'입니다. 우리말로 '말씀'이지만 보통명사가 아니라 고유명사로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예수님을 ‘로고스’로 표현한 것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당시 헬라문화권에서 '로고스'라는 단어는 '만물의 이치' 또는 우주를 다스리고 주관하는 '지배적 이성'을 의미했습니다. 그래서 헬라문화권에 사는 사람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그 단어를 사용했다고도 합니다. 그러나 고린도전서 1장 24b절을 보면, 바울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요한도 여기서 예수님이 오신 목적과 그 역할을 가장 잘 표현하는 단어로 '말씀'을 사용한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본체의 형상(히1:3, the exact representation of God)이십니다. 곧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우리에게 그대로 계시하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에 대해 말씀하심으로 하나님을 드러내셨습니다. 이런 점에서 요한이 예수님을 ‘말씀’이라는 단어로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1절을 다시 한 번 보십시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태초에 계신 말씀, 곧 영원 전에 계신 예수님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은 곧 하나님이십니다. 표현이 단순하지만 이해하기 어려운데 쉽게 표현하면, "태초에 예수님이 계셨습니다. 그 예수님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도 하나님이십니다"라는 말입니다. 곧 아들이신 예수님도 하나님이시고 아버지이신 하나님도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부터 기독교 신앙의 삼위일체 교리가 나옵니다.
삼위일체는 사람이 만든 이론이 아니라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말씀하시는 바를 그대로 담으려고 하니 그렇게 이해할 수밖에 없어 나온 이론입니다. 삼위일체에 대해 여기서 말하기 시작하면 시간이 부족하니 "태초에 계신 성자 하나님은 성부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는 정도로 이해하고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2절 말씀은 이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3절을 보십시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만물이 무엇입니까? 세상에 있는 모든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하늘과 땅, 그리고 그 가운데 있는 모든 것들입니다. 지구 밖의 태양계, 은하계, 모든 별들입니다. 더 나아가 눈에 보이지 않는 천사와 영과, 천국과 지옥, 사람의 영과 혼, 사랑과 미움, 명예심과 감정 등 모든 것입니다. 현대 과학자들은 우주의 기원에 대해 빅뱅이론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최초에 아주 밀도가 높은 작은 알갱이가 있었는데 그 작은 알갱이가 대폭발하여 오늘날의 우주가 만들어졌다는 이론입니다. 과학자들은 그 맨 처음에 있던 거대 에너지를 가진 알갱이가 어디서 왔는지는 모른다고 합니다. 만일 빅뱅이론이 옳다고 하더라고, 그 맨 처음에 있는 물질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존재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창조하기 전에 존재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3절은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로 이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랑하며 섬기는 예수님은 보통 분이 아니십니다. ‘손오공이 날아봤자 부처님 손바닥’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손오공이 구름을 타고 한참을 날아가 보니 웬 기둥 다섯 개가 보이자 아, 드디어 세상의 끝에 왔다고 인증하는 낙서까지 써놓고 돌아옵니다. 나중에 보니 그 기둥들이 부처님 손가락이었다는 이야기입니다.
현대과학이 발달할수록 알게되는 것은 우주가 얼마나 큰지 상상할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 큰 우주를 누가 만드셨습니까? 예수님이 만드셨습니다. 예수님의 손가락으로 지으신 것입니다. 온 우주는 예수님의 손바닥 안에 들어갑니다(사40:12). 한때 갈릴리 바닷가를 걸으셨던 예수님, 제자들과 함께 떡을 나누며 사랑의 교제를 하셨던 예수님은 그처럼 엄청나고 위대한 창조주이십니다. 예수님은 또한 어떤 분이십니까? 4절을 보십시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예수님 안에 생명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피조된 생명체에 모든 생명을 부여하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여기 4절에서의 생명은 특별히 어둠에 있는 사람들의 빛이 되는 참 생명을 의미합니다. 사람들은 어둠에 있습니다. 눈이 있으나 참 빛을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육신적으로는 살아 있으나 빛과 생명이 없어 죽은 것과 같습니다.
오래 전에 제가 대학에 입학했던 때를 기억합니다. 새봄이 되어 따스한 햇살이 가득한 캠퍼스는 참으로 아름다웠습니다. 그러나 제게는 세상이 너무나 어두웠습니다. 대학을 목표로 열심히 공부하여 들어왔지만 이제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방향이 없었습니다. 인생의 목적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왜 대학에서 또 열심히 공부를 해야 되는지 아무도 말해 주지 않았습니다. 좋은 학점을 얻고자 강의실 앞자리를 자치하려고 애쓰는 학생들에게 앞자리를 양보했습니다. 학점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성적이 시들시들했습니다. ‘앞으로 좋은 직장을 위해?’ 저는 ‘그래서?’ 하는 냉소적인 마음이 가득했습니다. 캠퍼스에서 해가 쬐는 맑은 날에도 검정 우산을 받쳐 들고 다녔습니다. 제 내면은 끊임없는 좌절감과 불만족으로 늘 비가 내리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집에서는 제 방의 창문을 검은 담요로 가렸습니다. 작은 스탠드만 켜고 어둠 속에서 지냈습니다. 돌이켜보면 제 마음에 빛 되신 예수님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나중에 성경공부를 하는 가운데 예수님이 제 안에 빛으로 임하셨습니다. 그러자 모든 것이 변했습니다. 예수님의 빛이 저의 내면을 비추자 제 안의 죄의 어두움이 물러갔습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죄사함과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는 이론이 아니었습니다. 저를 지배하고 있던 '하면 뭘 해' 하는 모든 허무주의, 냉소주의가 사라졌습니다. 인생의 방향이 분명해졌고 생명력과 기쁨이 넘치게 되었습니다.
사람이 육신의 생명이 있다고 다 살아있는 것이 아닙니다. 참 생명 되신 예수님, 빛 되신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그저 살아있는 것이지 사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우리 마음에 모실 때 비로소 우리 마음의 어두움이 물러가고 주위를 밝게 보게 되며 방향을 올바로 잡게 됩니다. 이번에 캠퍼스에 많은 새내기들이 들어왔습니다. 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생명입니다. 빛입니다. 예수님 안에 생명의 빛이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 외에는 전혀 소망이 없다는 것을 깊이 명심하고, 어찌하든 이들에게 예수님을 힘써 전하기를 기도합니다. 5절을 보십시오.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세상에 빛이 비추었지만 어두운 세상은 빛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스스로 빛으로 나올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세상을 돕기 위해 하나님은 한 사람을 보내셨습니다. 6절을 보면 그는 세례 요한이었습니다.
그는 무엇을 하러 왔습니까? 7,8절을 보십시오. "그가 증언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언하고 모든 사람이 자기로 말미암아 믿게 하려 함이라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언하러 온 자라." 요한복음 5:35절을 보면 예수님은 "요한은 켜서 비추이는 등불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는 참 빛은 아니었습니다. 잠시 켜서 비추는 등불로 사람들에게 참 빛에 대하여 증언하고 모든 사람이 예수님을 믿게 하도록 하기 위해 온 것입니다. 9절을 보십시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여기서 참 빛은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요한복음에서 '참'은 '거짓'에 반대되는 개념으로의 '참'이 아니라, 주로 불완전한 것에 대한 반대, 곧 '완전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세상에 여러 종류의 빛이 있었습니다. 동양에서는 공자, 맹자의 빛이 있었습니다. 서양에서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등 철학의 빛이 있었습니다. 윤리와 도덕의 빛이 있었습니다. 명상과 고행의 동양종교의 빛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마치 어둠을 조금 밝혀주는 촛불과 같았습니다. 그런 세상에 참 빛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그 분의 빛은 강력한 태양과 같이 솟아올라 온 세상을 밝혔습니다. 그래서 중국의 지성을 대표하는 세계적 인물 임어당(林語堂, 1895-1976)은 '이교도에서 기독교로' 라는 자서전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촛불을 끄라, 태양이 떠올랐다!" 참 빛은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었습니다. 참 빛을 영접하는 것은 민족적, 국가적으로 할 일이 아닙니다. 각 사람이 개별적으로 결단해야 하는 문제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셨지만 세상은 그를 알지 못하였고 그의 백성들은 그를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영접하는 자에게는 어떤 권세가 주어집니까? 12절을 보십시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예수님을 영접한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그 이름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그 이름을 믿는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우리가 누구를 믿는다고 할 때 그 의미는, 그가 하는 말을 참된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를 신뢰한다, 그를 의지한다 또는 그에게 소망을 둔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내가 세상의 재물을 의지하지 않고 예수님을 의지한다, 세상의 지식과 사상을 받아들이지 않고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인다, 세상에 소망을 두지 않고 예수님께 소망을 둔다는 말입니다. 그와 같이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십니다.
하나님의 자녀(the children of God). 왜 ‘하나님의 종’이 되는 권세, 또는 하나님이 쓰시는 ‘천사가 되는 권세’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라고 하였을까요? 성경에서 자녀라는 말이 나오면 그 말은 '상속'이라는 말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천사나 종이 아무리 훌륭해도 상속권이 없습니다. 그러나 자녀는 아무리 어리고 미련해도 상속권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모든 소유를 상속받습니다. 영원한 나라를 이어받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할 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두 가지 측면에서 나타납니다. 첫째는 법적인 측면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일방적인 언약으로,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할 때 하나님이 자녀의 권리를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 자체가 진리요 법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시고 그대로 시행하지 않으시는 경우가 없으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하는 순간 법적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양자가 된 것입니다.
둘째는 내적인 측면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가 된 자들 안에 성령을 보내주십니다. 성령께서는 우리 안에서 일하심으로 우리로 하여금 점점 더 하나님의 자녀의 내적 성품을 갖도록 해 주십니다. 이러한 놀라운 은혜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일방적인 은혜로 주시는 것입니다(13).
14절을 보십시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태초에 계신 말씀이 어떻게 되셨습니까? 육신이 되셨습니다. 태초에 성부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성자 하나님이 육신이 되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여기서 육신이 되셨다는 것은 영어로 ‘became’ 인데 ‘changed’가 아닙니다. 성자 하나님이 사람으로 변화되신 것이 아니라, 육신을 입고 오셨다는 것입니다.
사도요한이 쓴 서신 요일4:2절은 이 점을 좀 더 명확히 말하고 있는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셨다"고 합니다. (Jesus Christ has come in the flesh) 이를 새번역은 '육신을 입고 오셨다', 공동번역은 '사람의 몸으로 오셨다'로 말하고 있습니다. 빌립보 2:8절은 예수님이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다고 말합니다.
이를 요약하면, 예수님은 하나님이신데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완전한 하나님이시요, 완전한 인간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 아닌 때는 한 순간도 없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신성과 사람의 인성이 예수님 안에 한 인격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양성이 한 인격에 있게 되었습니다.
어떤 분은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인 것을 믿으면 되지 뭐 그렇게 복잡하게 양성이 한 인격에 있다든가 하는 것을 따질 필요가 있는가? 그런데 예수님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중요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그리스도에 대한 바른 자세를 갖게 되고, 그리스도의 대속의 진리를 확실히 이해하고 믿을 수 있게 됩니다.
기독교 역사를 보면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성경적으로 정립하기 위해 무려 500년에 가까운 시간이 걸렸습니다. 여러 번의 공회를 거쳐 확립이 된 것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사실은 첫째, 예수님은 홀로그램같이 영으로만 존재한 분이고 실제로는 육체를 갖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가현설(假現說)을 배격합니다. 둘째, 예수님은 하나님이 아니라 비범하고 탁월한 인간이었다, 즉 오직 인간의 성품만 지녔다는 단성론(單性論)을 배격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으로서 죄 없으신 분이요, 육체를 가진 인간으로 우리의 모든 연약함을 아시며 우리를 대신하여 죽어줄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본래부터 무한히 존귀하시며 영광스럽고, 무한히 자유로운 분이 인간의 육신을 입는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일까요? 이는 마치 우리가 지렁이나 개미 같은 육체를 입는 것보다 더 한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왜 그러한 모습으로 오셨을까요? 이는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함이십니다. 우리를 도우시기 위해, 우리에게 하나님을 나타내시기 위해, 우리 대신 고난 받으시고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사도요한은 3년 반 동안 육신으로 오신 그 분을 가장 가까이 보고 만지고 함께 시간을 보냈습니다. 요한은 그 예수님에게서 무엇을 보았습니까? 14절을 다시 한 번 보십시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한은 그 예수님에게서 영광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의 몸은 평범한 몸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이미지를 할리우드스타 톰쿠르즈처럼 생각하지만, 도리어 그의 모습은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었습니다(사53:2) 머리 둘 곳 없이 사셨으니 노숙자 같은 모습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요한은 그에게서 무엇을 보았습니까? 영광을 보았습니다. 영광!
사람들은 영광이라면 로마황제처럼 옥좌에 앉아 왕관을 쓰고 천하를 호령하는 것을 생각합니다. 올림픽 트리플 금메달을 따면 영광이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진정한 영광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올림픽 금메달도 오래 두면 도금한 것이기 때문에 겉이 벗겨지고 때가 낍니다. 도리어 메달 목걸이 줄이 오래갑니다. 세상의 영광은 시간이 지나면 녹슬고 때가 끼고 결국 버리게 됩니다. 참된 영광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 영원한 가치가 있어야 합니다. 사도요한은 바로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에게서 그런 영광을 보았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첫째는 은혜가 충만한 것이요 둘째는 진리가 충만한 것입니다.
첫째, 은혜가 충만하신 예수님. 이는 예수님의 낮아지심을 의미합니다. 이를 겸손이라는 한 단어로 제한하기는 어려움이 있고 낮아지심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예전에 제가 쎈타에 나온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습니다. 주일예배 소감강사가 되어 토요일 밤에 쎈타에서 밤새 소감을 쓰고 있었습니다. 그때 전요한 박사님이 제게 오셔서 컵라면을 끓여주시며 격려의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저는 그때 박사님이 저 같이 보잘 것 없는 자를 낮아져 겸손히 섬겨주시는 것에 감동을 받았습니다.
요즘에도 저는 우리 한국대표이신 이모세 목자님과 동역하면서 많은 은혜를 받습니다. 이 종은 동역자들의 말을 귀담아 잘 들으시고 어린 학생들이나 연약한 학사님들도 낮아져 잘 품고 섬기십니다. 저는 이런 분들에게서 예수님의 아름다운 낮아짐의 성품, 곧 하나님의 영광을 봅니다. 사도요한이 본 영광은 바로 그러한 것이었습니다.
요즘 '갑질'이다, '태움'이다 하여 사회에 이슈가 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작은 권세만 있어도 그것을 휘두르고 떵떵거리고자 합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왕이시지만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하시고 이 땅에 낮아져 오셨습니다. 온갖 종류의 죄인들을 품고 섬기시느라 그 모습이 마른 넝쿨과 같이 되셨습니다. 모든 권세를 가진 분이시지만 우리를 위해 아무 권세가 없는 분처럼 사셨습니다. 이로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갖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낮아지심을 통해 그 영광을 나타내셨습니다.
저는 얼마 전 한 학사님을 섬기면서 참으로 낮아지고 겸손해지기 어려운 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였습니다. 낮아질 수 있는 힘과 능력이 부족한 자신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묵상하며 낮아짐이, 겸손이 영광이라는 말씀이 크게 은혜가 되었습니다. 아! 바로 이것이구나!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그 영광스런 삶은 바로 끝없이 낮아지고 겸손해지는 것이구나 하는 것을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 진리를 영접하자 제 내면의 타락한 본성, 높아지고 교만해지는 욕망을 이기고 낮아져 다른 사람을 섬길 수 있는 힘을 덧입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해 낮아지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서는 안되겠습니다. 학생들을, 동역자들을 섬기기 위해 낮아지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서는 안되겠습니다. 도리어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우리 사랑하는 주님이 먼저 행하신, 영광스런 것이구나! 하는 확신을 갖고 이 길을 가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진리가 충만하신 예수님. 진리는 불변의 법칙을 말합니다. 무엇보다 여기서의 진리는 우리 자신의 생명과 깊은 관련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저 우주 밖의 별이 자라다가 거성이 되고 나중에는 초신성이 되어 폭발하여 사라진다는 과학적 진리가 나의 생명과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참 진리는 반드시 우리의 인생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이어야 합니다. 이런 진리가 세상에는 없습니다. 세상의 모든 과학과 철학의 진리들은 몇 세대만 지나면 언제나 부정됩니다. 세상의 윤리 도덕의 진리도 늘 바뀝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 인생이 믿고 따를 수 있는 절대불변의 진리, 구원과 영생의 진리를 우리에게 주십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으로부터 그 낮아지심의 은혜의 영광과 충만한 진리의 영광을 보고 외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우리가 예수님을 꾸준히 배워 나가는 가운데 성령께서 우리의 내면을 변화시켜주시며 예수님과 같이 낮아지며 희생하며 진리를 선포하는 영광된 삶을 살도록 도와주시길 기도합니다.
15절을 보십시오. "요한이 그에 대하여 증언하여 외쳐 이르되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하니라." 세례요한은 출생 면에서는 예수님보다 6개월 앞섰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이 태초에 계신 분이심을 알고 증거하였습니다.
16절입니다.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예수님 자체가 충만한 은혜이십니다. 0.00001% 도 부족함이 없는 온전한 은혜 덩어리이십니다. 그래서 그에게 나아가기만 하면 은혜를 받습니다. 그를 만지기만 해도 은혜가 쏟아집니다. 그에게 구하기만 하면 받습니다. 그를 사귀는 것은 은혜의 바다 속에서 헤엄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그로 인해 은혜를 받고 또 받습니다. 계속하여 받습니다. 세상 그 어디서도 우리의 영혼에 생명과 힘과 기쁨이 되는 은혜를 받을 곳이 전혀 없습니다. 우리가 은혜의 샘이 되시는 예수님께 날마다 나아가기를 기도합니다.
18절을 보십시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성부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아무도 그를 볼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자신을 100% 그대로 나타내신 분이 있습니다. 바로 아버지 품 속에 있는 예수님입니다. 품 속에 있다는 것은 완전히 친밀하다, 동등하다는 뜻입니다.
1950~60년대는 냉전시대였습니다. 특히 그때는 소련과 미국이 우주 개발 경쟁을 벌였습니다. 소련이 유인 우주선을 먼저 쏘아 올렸습니다. 1961년 최초로 지구 밖에서 유리 가가린(Yuri Gagarin)은 말했습니다. "우주에 하나님은 없다(I see no God up here)." 이에 대해 영국의 유명한 기독교 변증가 C.S. Lewis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발견될 수 있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이 계시해주어야 우리가 하나님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햄릿이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햄릿이 자기집 1층에 앉아 있다가 2층에 올라간들 거기서 셰익스피어를 찾을 수는 없습니다. 소설가 자신이 자기를 계시해 주지 않는 이상, 햄릿은 셰익스피어의 존재에 대해, 그의 성품에 대해 전혀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 작품을 쓴 사람이 있습니다. Dorothy Sayers, 여성으로서는 거의 최초로 1920년대 옥스포드에서 공부한 분입니다. 매우 지성적이며 창의적인 분으로 탐정소설을 주로 썼습니다.
그가 쓴 책(The late scholar)에 Mr. Peter Wimsey가 나오는데 그는 중년까지 결혼을 하지 못하고, 삶의 규모가 없고 우울한 삶을 사는 남자였습니다. 이런 그가 Harriet Vane이라는 여성을 만납니다. 해리엇은 옥스포드에서 공부한 여자로 매우 지성적이며 창의적인 여자입니다. Mr. 윔시는 해리엇과 결혼하여 행복한 삶을 살게 됩니다. 저자 Dorothy 가 자기를 해리엇으로 넣어 윔시에게 알려준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Mr.윔시는 비로소 자기의 작가 도로시가 어떤 사람인 줄 알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내신 해리엇과 같습니다. 진리되신 하나님을 우리에게 그대로 나타내주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진리를 온전히 계시하시는 예수님을 통해서만 참 진리를 알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은 태초부터 계신 성자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모든 영광과 권세를 버리시고 이 세상에 육신을 입고 오셨습니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낮아지신 예수님의 영광을 감사 찬양드립니다. 이 봄학기에 우리도 겸손히 낮아져서 어둠에 있는 캠퍼스 영혼들에게 생명의 빛을 전하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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