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2강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말씀 요한복음 1:29-51 요절 요한복음 1:29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요새 대한민국 사람들은 누구를 바라보고 있습니까? 문재인 대통령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를 한반도문제를 핸들링 하는 운전사로 주목하면서 많은 기대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 마음에는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바라는 간절한 마음이 있습니다. 본문은 우리가 정말 주목해야 할 분은 누구인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왜 우리가 예수님을 바라봐야 합니까? 우리가 예수님의 핵심사역을 이해하고 예수님을 더욱 주목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때는 세례요한 조사단이 다녀간 다음 날이었습니다. 세례요한은 예수님이 자신에게 오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외쳤습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29) 여기서 ‘보라’는 것은 헬라어로는 ‘이두’라는 말로 감탄사입니다. 이는 깊은 관심가운데 눈을 돌려 그 대상을 감탄하며 주목하라는 것입니다. 본문에는 ‘보라(29,39,46)’ ‘보매’(32), ‘보거든’(33), ‘보고’(34,36) 등 ‘본다’는 말이 많이 나옵니다. 우리는 볼 것이 많은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인천공항 2 터미널이 개통되었는데 세계로 나아가는 여행객들이 많아졌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감탄할 만한 세계의 여행지를 찾아서 이곳저곳으로 떠납니다. 국내에도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곳들이 있습니다. 한때 TV 채널이 많아져서 사람들은 TV앞에 서면 무엇을 봐야 할지 몰라서 고민할 정도였습니다. 게다가 요새는 인터넷과 스마트폰에 수많은 볼만한 동영상과 정보들이 있어서 고민은 더 깊어졌습니다. 그 가운데 사람들은 별로 중요하지 않는 것들을 보면서 시간을 낭비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왜 우리가 예수님을 주목해야 합니까? 예수님은 우리 인생들의 행복과 관련하여 가장 중요한 문제의 해결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세상이 근본적으로 불행한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경제와 복지문제일까요? 평등과 인권문제일까요? 평화와 안전 문제일까요? 질병과 건강 문제일까요? 성경은 세상이 불행한 이유를 죄문제 라고 봅니다. 정말 죄문제가 세상불행의 근본문제일까요? 우선 우리가 죄의 정의를 알아야 합니다. 어떤 분은 죄를 한자로 분석하여 ‘罪 는 더 이상 용납할 수 없는 행위이다’ 라고 정의했습니다. 한자를 분자하여 ‘네 번부터는 아니다’ 라고 해석한 것입니다. 그런데 무엇이 그처럼 용납할 수 없는 행위인지는 사람마다 다르고 국가마다 다릅니다. 때문에 정확한 정의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또한 이 개념은 대개 도덕윤리적인 죄의 관념으로 지엽적인 죄의 정의에 불과합니다. 죄를 뿌리부터 알려면 성경적인 죄의 개념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성경에서 죄는 헬라어로 ‘빗나가다’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이 마땅히 자기본분을 저버리고 빗나간 삶을 사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보는 사람의 본분은 무엇입니까? 자신의 창조주인 하나님을 경외하고 동료인간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는 십계명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죄는 이것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죄의 뿌리는 사람이 하나님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대신에 자신이 우주의 주인이 되어 삽니다. 자신의 판단, 정욕, 감정대로 삽니다. 이렇게 자신의 창조자를 부정하는 삶은 근본적으로 허망하고 어떤 가치관도 세워지지 않는 영적 어둠의 삶입니다. 창조자를 부정하기 때문에 동료인간도 결국은 우연의 산물이요 기껏해야 고등동물에 불과합니다. 때문에 진정한 의미에서 사람에 대한 존중과 사랑을 실천하기 어렵습니다. 로마서 1:18-32 내용을 보면 이렇게 인간이 자신의 본분을 벗어날 때 어떻게 비인간화되고 황폐화되고 부끄러운 존재로 전락하는 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죄는 결과가 어떠합니까? 먼저 영적인 죽음을 불러옵니다. 영적 죽음이란 피조물인 인간이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단절되는 것 입니다. 죄의 결과는 영적 죽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성경은 죄의 삯을 사망(롬 6:23)이라고 했습니다. 죄를 범한 인간은 죄의 삯으로 때가 되면 죽습니다. 이것을 ‘육적 죽음’이라고 합니다. 육적인 죽음으로 끝나면 좋겠지만 하나님의 심판이 있습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히 9:27) 죽음 이후에 영원히 하나님과 분리되어 고통 하는 ‘영원한 죽음’이 예비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둘째 사망’이라고 합니다. 죄가 인간의 총체적 죽음을 불러오는 것을 볼 때 죄문제는 결코 작은 문제가 아닙니다. 죄는 단지 교리적인 문제에 그치지 않습니다. 실제적인 문제입니다. 탐욕과 게으름의 죄 때문에 빈부격차가 생깁니다. 교만의 죄 때문에 갑질문제와 인권탄압문제가 있습니다. 정욕의 죄 때문에 성추행, 정신질환, 가정파괴, 낙태 등의 문제가 생깁니다. 미투 운동을 통해 우리는 정욕의 죄가 얼마나 실제적으로 사람들을 부끄럽고 고통스럽게 만드는지를 보았습니다. 죄 문제는 죄를 지은 이들의 인격과 현재의 삶과 가정과 그 미래를 파괴합니다. 어떤 사람은 대통령후보에서에서 멀어졌습니다. 어떤 대학교수는 그만 극단적인 선택을 했습니다. 정욕 죄 문제는 그들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들의 일상 속에서 반복되는 우리들의 문제입니다. 죄문제는 인간의 근본문제입니다. 때문에 경제와 복지, 평화와 안전, 질병과 건강 문제를 해결해도 죄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사람은 결코 행복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 죄 문제를 해결하시고자 ‘하나님의 어린 양’을 예비하셨습니다. 성경에 어린 양은 아벨의 제사에 처음 등장합니다. 아브라함이 이삭대신에 어린 양을 제물로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리고 출애굽시 죽음의 천사가 애굽전역을 심판할 때에 어린 양의 피를 바른 집은 그냥 넘어갔습니다. 하나님은 그 후 율법으로 어린 양을 속죄 양으로 드리도록 방향을 주셨습니다. 어린 양은 아무런 죄가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죽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피를 보시고 사람의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인간의 죄를 위해 무수한 어린 양들이 피를 흘렸습니다. 그러나 동물의 피는 사람의 죄를 단번에 영원히 속죄할 수는 없었습니다. 이에 하나님은 세상 모든 사람의 죄를 단번에 영원히 속죄할 하나님의 어린 양을 준비하셨습니다. 그 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특별히 예수님이 세상 죄를 지고 간다고 할 때 구약성경에 나온 아사셀 염소를 떠올릴 수 있습니다. 레위기 16:21,22 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사셀이란 ‘떠나는 염소’란 뜻입니다. 대제사장 아론은 두 손으로 살아있는 아사셀 염소의 머리에 손을 얹고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불의와 그 모든 죄를 하나님께 아룁니다. 이렇게 죄를 염소의 머리에 전가합니다. 그리고 미리 정한 사람의 손에 맡겨 광야로 보냅니다. 그 염소는 죄인들의 모든 불의를 지고 무인지경의 광야에 이릅니다. 그 염소를 그곳에 놓으면 그 염소는 울부짖어도 누구의 도움도 받을 수 없는 그곳에서 사나운 맹수들에게 찢겨 피 흘리며 죽어갑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정하신 아사셀 염소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세례요한은 예수님이 세상 모든 죄인들의 추악한 죄들을 지고 가시는 것을 영적인 눈으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외쳤습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보라, Look!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말씀을 통해서 무엇을 배울 수 있습니까? 첫째로 우리가 자기 죄보다 나의 죄를 지고 가신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죄의 기억과 결과는 아무리 지우려해도 지워지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바라볼 때 주홍같이 붉은 나의 죄가 사해집니다. 흰 눈처럼 깨끗해집니다. 흰 페인트로 더러운 낙서가 말끔히 지워지듯 말입니다. 우리의 죄가 동쪽이 서쪽에서 멀 듯이 우리에게서 멀어집니다. 미투 운동의 가해자로 지목되었던 한 사람은 자신의 부끄러운 삶을 지우고자 목숨을 끊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한다고 죄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런다고 해서 죄가 지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것이고 그 모든 죄가 다시 드러날 것입니다. 죄는 하나님 앞에서 청산될 때 비로소 해결됩니다. 하나님이 예비하신 하나님의 어린 양 예수님을 바라보고 그 피를 마음에 받아들일 때 모든 죄문제가 해결되고 그는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나게 됩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피는 우리안의 영적 혈관을 타고 흘러서 우리가 죄를 이길 힘을 갖게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점점 죄와 거리가 먼 거룩하고 깨끗한 사람이 되게 합니다. 들러붙은 거미줄 같은 죄의 세력에서 벗어나 창공을 나는 나비나 독수리처럼 자유로운 존재가 되게 합니다. 1850년 1월 6일 눈이 아주 많이 오고 눈보라치는 날이었습니다. 한 소년이 자신의 교회에 가다가 도중에 다른 교단의 교회에 갔습니다. 눈보라 때문에 목사님이 오시지 않았습니다. 할 수 없이 한 평신도가 단상에 올라가 이사야 45:22 절을 읽었습니다. “땅 끝의 모든 백성아 나를 앙망하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 나는 하나님이라 다른 이가 없음이니라.” 그리고 10분 간 짧게 설교를 했습니다. 그 평신도 설교자는 그 교회에 특별히 처음 온 그 청년을 보면서 외쳤습니다. ‘당신은 왜 불쌍하게 떨고 있소? 당신은 지금 예수를 영접하고 구원을 얻으십시오. 하나님의 어린양을 바라 보십시오. 바라보는 것은 힘들지 않습니다.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면 삽니다. 지금 당장 그분을 바라보시오’ 그 청년은 깜짝 놀라 자리에서 반쯤 일어났습니다. 그 때 그 청년은 자신의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 예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 순간 그의 가슴에 꽉 차 있던 구름은 걷히고, 그의 영혼에 구원의 빛이 비치어 왔습니다. 그는 감격했습니다. 그 순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예수님의 귀한 보혈과 단순하고도 명확한 복음을 찬송하고 싶은 마음으로 충만해 졌습니다. 그토록 오랫동안 지고 왔던 죄의 무거운 짐이 바로 그의 어깨 에서 영원히 굴러 떨어짐을 체험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고백했습니다. “주님! 십자가에서 그 모든 것이 해결 됐었군요.” “아, 나의 그 무거웠던 죄가 모두 다 사라졌다...” 이후 그는 42년 동안 19세기 유럽을 뒤흔든 위대한 설교자가 되었습니다. 그가 바로 찰스 스펄젼 목사 입니다. 스펄젼은 후에 이렇게 간증했습니다. “그때 저는 그 분을 보았고 그 분은 저를 보았습니다. 그 후로 나는 그리스도와 영원한 하나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죄를 지은 자신을 바라보며 절망하고 있습니까? 자신만 바라보면 불의감으로 미칠 것같고 영원히 거기서 벗어날 수 없을 것같습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면 그 피가 놀라운 힘을 발휘합니다. 죄의 고통이 말끔히 치유됩니다. 어느새 건강하고 자유로운 내면을 갖게 합니다. 그러니 우리가 나의 죄보다 나의 죄를 지고 가신 하나님의 어린 양 예수님을 바라보기를 기도합니다. 날마다 바라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둘째로, 다른 무엇보다 예수님을 바라봐야 함을 배웁니다. 왜 우리가 우리 눈을 예수님께 고정시켜야 합니까? 예수님의 희생과 헌신보다 더 아름답고 가치있는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대신하여 모진 고통을 당하시며 죽으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어린 양 예수님을 생각한다며 히브리서 기자의 말처럼 우리 눈을 예수님께 고정시킬 수 있습니다.(히12:2)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은 언제까지나 우리가 그분을 생각하면 가슴이 뛰어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를 위해서 온 몸을 피투성이로 내어주신 예수님의 몸서리치는 사랑에 감동하고 그분을 바라봐야겠습니다. 예수님보다 더 우리 눈을 사로잡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무엇을 바라보고 있습니까? 권력과 이생의 자랑으로 가득찬 세상을 바라고고 있습니까? 가상의 창인 스마트폰만 바라보고 있습니까? 미모의 자매님, 키크고 멋지게 생긴 형제님에게 넋이 나가있진 않습니까? 음란과 육신의 정욕으로 유혹하는 세상에 우리의 소중한 눈을 내어주고 있진 않습니까? 이러다간 우리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미투의 대상이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매일 감탄하고 매일 그분을 주목하기를 기도합니다
셋째로, 우리가 예수님을 전하는 일에 대해서 확신을 가지고 감당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한번 밖에 없는 인생을 가장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일을 위해 살다 죽기를 바랍니다. 당시 사람들 중에는 이스라엘의 독립을 간절히 바라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이를 위해 목숨을 걸고 무장봉기한 젊은이들도 있었습니다. 열심당입니다. 우리나라도 비슷했습니다. 민주화를 열망했습니다. 민주화가 이루어진 지금 우리는 경제와 복지를 꿈꾸고, 더 나아가 통일한국을 기대합니다. 많은 사람들의 노력과 헌신으로 우리나라는 변화되었고 더 나아지고 있습니다. 어떤 통계를 보니 우리나라는 지난한해 가장 모범적인 국가 2위에 올랐습니다. 가장 사회가 바람직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해서 그렇게 뽑혔습니다. 2차 대전이후에 독립한 나라 중에 모든 면에서 가장 위대한 나라로 도약했습니다. 우리나라는 자타가 공인하는 세계에서 가장 잘사는 나라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인터넷속도 세계 1위이고 대중교통이 가장 잘 발달된 나라입니다. 편의점이 항상 열려있고 배달이 어디서나 이루어집니다. 값싼 음식들이 널려있고 반찬을 무료로 무한리필하는 나라입니다. 치안도 잘 되어 있습니다. 만원이면 사우나에 가서 목욕하고 잠도 잘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외적인 조건이 좋아도 사람들의 각자의 죄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인생은 결코 행복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다른 무엇보다 죄문제의 해결자 되시는 예수님을 전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저는 86년 1학년 때 시위에 참가하여 법대 옥상에서 하루 밤을 지낸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저는 민주화를 위해 살 것인가? 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 진지하게 고민해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옥상에 더 있다가는 잡혀가 감옥에 들어가 민주투사가 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민주화가 결국 우리나라와 이 세상을 진정으로 행복하게는 할 수는 없다는 것을 깨닫고 옥상에서 내려와 예수님의 제자요 목자의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두려워서가 아니라 무엇이 더 근본문제를 해결하는 일인가를 생각해서입니다. 제가 바른 방향가운데 한번 밖에 없는 인생을 가장 근본적인 문제해결을 위해서 헌신하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이 일은 대통령의 일보다, 대북특사의 일보다 더욱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일입니다. 제가 이 일에 더욱 확신을 남은 인생을 헌신하기를 기도합니다. 요한은 예수님이 자기 뒤에 오시지만 자기보다 앞선 분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예수님보다 인간적으로 6개월 먼저 난 사촌 형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그보다 앞선 것은 그가 나기 전부터 계신 분이요 영원 전부터 계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비둘기 같이 하늘에서 내려와 예수님위에 머물렀습니다. 요한도 처음에 예수님을 알지 못했지만 요한에게 물세례를 베풀라고 하셨던 하나님께서 성령이 그 위에 내리시는 분이 성령세례를 베푸시는 분임을 알라 하셨습니다. 성령세례는 ‘불세례’로도 불리우는 데 죄를 소멸시키는 세례 곧 ‘죄사함의 세례’입니다. 요한의 물세례는 회개를 인증하는 ‘회개의 세례’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베푸시는 성령세례는 죄를 사하고 존재를 거듭나게 하고 새 사람 되게 하는 세례입니다. 예수님에게 성령이 비둘기같이 임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비둘기는 매나 독수리 같은 맹금류에 비해서 평화를 상징하는 새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우리와 하나님사이에 죄문제를 없이함으로 평화의 관계를 만드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세례요한은 예수님을 보고 하나님의 아들이라 증언했습니다. 하나님의 어린 양이 하나님의 아들이어야 하는 이유는 무죄하신 분만이 우리 죄를 대속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음날 세례요한은 자기 제자중 두 사람과 함께 있다가 예수님이 다니심을 보고 예수님을 증거했습니다. 그러자 그 두 제자는 예수님을 따르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무엇을 구하는 지를 물으셨습니다. 두 제자는 예수님의 거처를 물었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거처가 정해져 있지 않기 때문에 예수님이 계신 곳을 알아 예수님과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예수님이 과연 하나님이 보내신 그리스도인지를 확신하고자 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을 기꺼이 초청하셨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하룻밤을 보냈습니다. 다음 날 두 사람 중 한 사람이었던 안드레는 그 형을 찾아가 감격적으로 말했습니다.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이 세상에서 가장 의미 있는 발견이 무엇입니까? We have found the Messiah!! 사람이 금광발견에 올인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것을 발견하면 인생이 바뀌기 때문이었습니다. 메시아를 발견한 것은 금광을 발견한 것보다 더한 소득입니다. 내가 메시아를 만났다는 고백보다 더 행복한 고백은 없습니다. 안드레가 데려온 시몬을 보시자 예수님은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말씀하셨습니다. 게바는 반석이란 뜻입니다. 예수님은 시몬이 연약하지만 장차 반석과 같이 튼튼한 교회의 기초가 될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예지’가 아니라 예수님의 ‘의지’입니다. 미켈란젤로의 손에 잡히면 꼼짝없이 어떤 대리석도 아름다운 조각으로 태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손은 미켈란젤로의 손보다 더욱 강하고 정교합니다. 틀림없이 그 의지대로 만들어내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손에 붙들린 인생은 실패가 없으며 반드시 주님의 영광을 드러낼 자로 변화됩니다. 베드로는 대단히 충성스럽고 모범적인 제자였습니다. 그러나 위기가 찾아오자 예수님을 부인하고 배반했습니다. 그는 무엇에 씌인 사람처럼 연약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가 정신을 차렸을 때 그는 사랑하는 주님을 배반하고 배신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제 그는 수제자 자격도 없고 아무 의도 내세울 수 없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연약함 때문에,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드린 것으로 통곡하며 울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를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찾아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심으로 그를 다시 수제자로 세워주셨습니다. 그는 주님의 소망가운데 교회의 반석이 되어 갔습니다. 우리를 택하시고 그 영원한 사랑가운데 빚어 가시는 주님의 한결같으신 사랑과 인도하심을 찬양합니다. 다음 날 예수님은 갈릴리로 가시다가 빌립을 만나 자신에게로 부르셨습니다. 빌립은 안드레와 베드로와 같은 동네 사람이었습니다. 빌립은 예수님을 만난 뒤에 친구 나다나엘을 찾아서 예수님을 증거했습니다. 그는 구약성경이 기록한 그 분을 만났다고 고백했습니다. 빌립과 나다나엘은 모두 성경에 일가견이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나다나엘이 한수 위였습니다. 그는 어떻게 메시야가 갈릴리 출신일 수 있는지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메시야는 유다 땅에서 태어나신다고 성경에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말문이 막힌 빌립은 “와보라” 초청했습니다. 직접 예수님을 보고 확인해 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다나엘을 보고 진실한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칭찬해주셨습니다. 나다나엘은 어떻게 자신을 그렇게 잘 아시는 지 궁금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자신이 그를 무화과나무아래에서 보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무화과나무 아래는 성경을 읽거나 기도하는 장소입니다. 나다나엘은 예수님께 나오기전 무화과나무 아래서 뭔가 그와 하나님만 아는 어떤 묵상과 대화가 있었습니다. 그가 참으로 진실한 사람임을 나타내는 묵상이나 기도였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신성으로 그것을 아셨습니다. 이에 놀란 나다나엘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요 이스라엘의 임금 곧 그리스도로 고백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을 따르면 앞으로 더 놀라운 일들을 보게 될 것이라 하셨습니다. 이상은 안드레, 베드로, 빌립, 나다나엘이 그리스도를 만난 이야기입니다. 세상에서는 예쁜 여친, 멋진 남친을 만난 것, 페친 많은 것을 행운으로 알고 자랑거리로 삼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만난 사람이 제일 부러운 사람입니다. 세상에는 여러 가지 만남이 있습니다. 잘못된 만남도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다윗과 밧세바의 만남입니다. 우리가 다른 무엇보다 그리스도를 만나기를 기도합니다. 결론입니다.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만나고 전하는 것보다 더 행복한 사람, 성공한 사람은 없습니다. 아직 소소한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고 낙심하지 마십시오. 나는 가장 행복한 사람입니다. 우리가 확신가운데 내가 만난 예수님을 가족, 친구, 양들에게 전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아직 예수님을 못 만난 분들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꼭 만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