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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019년 창세기 19강 `벧엘의 하나님`(창세기27:46-28:22)2019-08-04 2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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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창세기 19강


벧엘의 하나님


말씀 창세기 27:46-28:22


요절 창세기 28:16 야곱이 잠이 깨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내가 처한 삶의 현장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삶이 달라집니다. 지금 이 순간, 이 자리는 가장 불안하고 막막한 자리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곳에 하나님이 계신다면 삶의 대전환이 올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 시간 지금 이 자리에 계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27:42-45절을 보면 리브가가 야곱을 불러 형 에서가 죽이려 하니 외삼촌집이 있는 밧단 아람 의 하란으로 피신하도록 조언합니다. 28:1-4절은 이삭이 야곱을 축복하고 당부하며 하란으로 보낸 내용입니다. 우선, 당부의 내용은 믿음의 결혼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이삭이 축복보다 당부를 먼저 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27:46절을 보면 리브가가 이삭에게 한 말이 있습니다. 며느리 곧 에서가 취한 여자들 때문에 자기 삶이 싫어졌다고 하소연하는 내용입니다. 리브가는 아주 밝고 강인한 여성입니다. 그런데 이런 리브가가 삶이 싫어졌다고 하면 보통상황이 아닙니다. 우울증 걸릴 정도라는 말입니다. 믿음 있는 부모님들의 가장 큰 기쁨은 자녀들이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반면에 가장 큰 고통은 자녀들이 믿음으로 살지 않는 것입니다. 에서는 그러지 않아도 믿음이 없고 영적 가치관이 안 되어 있어 믿음 있는 여성과 결혼해서 그의 동역을 받아야 겨우 기본적인 믿음을 가질까 말까 합니다. 그런데 믿음이라고는 전혀 없는 며느리들이 들어와 에서의 없는 믿음을 초토화시키고 불신자와 같이 만들었습니다. 리브가는 만약 야곱도 그런 믿음 없는 가나안 여인들과 결혼한다면 아무런 삶의 낙이 없을 것이라 말했습니다. 이에 이삭은 리브가의 말에 충분히 공감하고 야곱에게 절대로 가나안 여자들과 결혼하지 말고 외삼촌 집에 가서 믿음의 여인들중에서 한 사람과 결혼하도록 신신당부하고 이어서 야곱을 축복합니다(3,4).


6-9절은 에서가 세 번째 아내를 맞이한 내용입니다. 에서가 이삭이 야곱에게 축복하며 밧단아람으로 보내며 가나안 사람의 딸들과 결혼하지 말라고 한 것을 들었습니다. 또한 자기 아내들이 아버지를 전혀 기쁘게 하지 못함도 보았습니다. 이에 에서는 아브라함의 서자 이스마엘에게로 가서 그의 딸 마할랏을 새 아내로 맞이했습니다. 에서는 가나안여인과 결혼해서는 안 된다는 것만 알았지 제대로 된 믿음의 여인과 결혼해야 한다는 사실은 몰랐습니다. 에서의 문제는 뒤늦게 깨닫는 것이요, 비슷하게 하지만 제대로 순종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10-22절은 야곱의 일생에서 잊을 수 없는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만남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야곱이 브엘세바를 떠나 하란으로 가던 중이었습니다. 브엘세바에서 하란까지는 직선거리로 800km인데 부산에서 신의주를 찾아가는 것과 같습니다.


한 곳에 이르러 해가 졌습니다. 브엘세바에서 루스까지는 90km 이기 때문에 집 떠난 지 삼일 째 되는 밤이었습니다. 들판에서 노숙을 한 것을 볼 때 주위에 인가가 없었습니다. 해가 지고 어둑어둑 해지더니 칠흑처럼 깜깜해졌습니다. 어디서 여우 우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들짐승들이 다가 올 수 있기 때문에 야곱은 불도 피우지 못했을 것입니다. 야곱은 한 돌을 가져다가 베개를 삼고 잠을 청했습니다. 두려움과 근심과 걱정으로 잠이 오지 않아 뒤척였지만 너무 고단해 어느새 잠이 들었습니다.


그가 잠을 자고 있는 데 한 꿈을 꾸었습니다. 사닥다리가 서 있는데 그 사닥다리 끝이 하늘에 닿아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닥다리를 하나님의 사자들이 오르락내리락 했습니다.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 한 것은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요한복음 1:51절을 보면 나다니엘이 예수님의 신성을 접하고 놀래자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사닥다리는 연결의 상징성이 있습니다. 사닥다리는 하늘과 땅을 연결시켰습니다. 하나님의 사자들이 사람위에 오르락내리락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보호와 임재, 능력의 공급, 인도하심을 뜻합니다.


지금까지 야곱은 부모님의 우산아래 있었고 어머니의 코칭과 조언가운데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는 혼자가 되었습니다. 아무도 그를 보호해 주지 않습니다. 그의 하란으로 가는 길과, 앞으로의 인생길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릅니다. 하나님은 이런 야곱의 분리불안, 그리고 염려와 근심을 아셨습니다. 그의 영혼의 탄식과 기도를 들으시고 그에게 사닥다리의 꿈을 보여주셨습니다.


사닥다리의 끝에 계신 하나님이 그에게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13a절을 보십시오.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이르시되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하나님은 자신을 여호와라 소개하셨습니다. 여호와란 ‘하야(있다)’ 동사와 관련이 있고 그 뜻은 스스로 있는 자, 곧 자존자입니다. 여호와는 영원 전부터 스스로 존재하셨습니다. 그러기에 그분은 완전자시며 창조주이시며 전능자이십니다. 여호와는 참으로 높고 초월적인 분입니다. 너무나 높고 거룩하기에 유대인들은 그 이름도 함부로 부르지 않고자 ‘아도나이(주님)’로 대체했고, 어쩔수없이 부를 때는 ‘예호와’라고 불러 그의 거룩한 이름을 어찌하든지 부르지 않고자 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그 이름도 함부로 부를 수 없을만큼 크시고 높으시고 거룩하고 초월적인 분입니다. 그런데 이 초월적인 하나님이 인간의 역사 속에 오시고 사람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그와 100년간 동행하시며 그의 하나님이 되셨고 그의 아들 이삭과 현재까지 동행하셨습니다. 이를 볼 때 하나님은 인간역사에 ‘앗싸’가 아니라 ‘인싸’이십니다. “나는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다” 하나님이 하시고 싶었던 말씀의 결론은 뭘까요? “이제 내가 너의 하나님이 되려 한다.”입니다. 이 말은 21b에서 야곱이 드린 서원기도의 결론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어떤 분이 하나님은 무한히 크신데 그 이유는 우주보다 크시기 때문이고 동시에 하나님은 얼마나 작으신지 우리 마음에 오실 수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이제 야곱의 하나님 곧 ‘나의 하나님’이 되려 하신다는 말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첫째, 나를 도와주시겠다는 의미입니다. 내가 내 힘으로 살기 힘든 현실에서 나의 도움이 되시겠다는 뜻입니다. 둘째로, 나의 경배와 섬김을 받기 원하신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나와 교제하시고 나의 경배와 섬김을 받기 원하십니다.


13b, 14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그의 하나님이 되사 그를 어떻게 도와주실 지를 구체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누워 있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티끌같이 되어 네가 서쪽과 동쪽과 북쪽과 남쪽으로 퍼져나갈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나님은 이삭이 축복한 내용을 재확인하며 보충하셨습니다. 땅에 대한 약속은 ‘누워있는 땅’을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누워있는 땅’은 근심과 걱정과 두려움가운데 뒤척이며 겨우 잠든 땅입니다. 또 이 땅은 고향 자기 집으로부터 거의 100km 떨어진 땅으로 이 말은 결국 하나님이 가나안 땅 전체를 주시겠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또한 그의 자손이 번성케 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는 지금 자신의 생명 하나 보존하는 것을 염려하는 형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가 믿음의 결혼을 하게 하시며 그의 후손이 땅의 티끌처럼 많아지게 하십니다. 심지어 땅의 모든 족속이 그와 그의 자손을 통해 복을 받게 됩니다. 이는 이스라엘 민족이 제사장 나라가 되며 그 후손 가운데 구주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서 인류를 구원하시는 것을 말합니다.


15절을 보십시오. 내가 너와 함께 있어서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하나님은 무엇보다 야곱에게 자신이 그와 함께 하실 것을 약속해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이 순간뿐 아니라 앞으로 야곱이 어디로 가든지 그와 함께 하십니다. 그를 지키시며 그를 인도하십니다. 그리고 그가 아버지 집에 무사히 돌아오게 하십니다. 그에게 허락하신 것 곧 땅과 자손과 그리스도의 계보를 이루는 것 등을 다 성취하기까지 결코 그를 떠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보다 더 든든하고 소중한 약속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 말씀은 하나님이 그의 종들에게 사명을 주실 때 늘 하셨던 말씀입니다. 모세가 애굽백성들을 구원하라는 말씀을 받았을 때 그는 그가 그 사명을 감당하기 힘든 점들을 말했습니다. 특히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하여 말을 잘 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가라 내가 네 입과 함께 있어서 할 말을 가르치리라”(출 4:12) 예수님은 아직도 의심하는 이가 있는 연약한 제자공동체에 복음전파와 세계선교사명을 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28:20) 하나님이 함께 하실 때 모세는 혈혈단신 애굽에 가서 당시 세계최강대국 애굽의 바로 왕을 상대하여 출애굽의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실 때 열두 제자들은 예루살렘에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고 복음을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전하였습니다. 우리도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할 때 사명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의 힘으로 생존도 버거운 이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함께 하실 때 번성할 수 있고 다스리고 정복할 수 있습니다. 나의 구원을 지키기도 버거운 존재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한국 캠퍼스와 전 세계에 전하는 목자요 선교사의 삶도 가능합니다. 유럽선교 50주년에 1000명이 모이는 유럽수양회가 그 증거입니다. 후진국이었던 지난 날, 유럽 선교사님들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여 독일, 영국, 프랑스, 불가리아, 체코, 그리스 등에서 지성인들을 제자로 삼는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연약한 이들과 함께 하사 세계선교 사명을 감당케 하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 어떤 사람은 자기 맘대로 살고 자기 정욕대로 살면서 이 약속을 자신에게 끌어다 붙입니다. 그러나 이 약속은 누구에게 해당됩니까? 야곱은 영적 명분을 소중히 여겨 결국 나그네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성도가 그리스도인이라는 명분을 선택한 결과 영적 순례자의 길을 걷는 것과 같습니다. 천로역정을 보면 주인공 크리스찬이 전도자가 전해준 책과 하늘의 음성을 듣고 순례의 길을 떠납니다. 그러다가 늪에 빠져 거의 죽을 뻔한 데 한 사람이 나타나 그를 건져내줍니다. 그리고 그가 말합니다. “당신을 돕는 이가 늘 가까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시오” 천성에 이르기까지 많은 난관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돕는 이가 문제보다 크시니 문제가 안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함께 하심과 도움은 영적 가치관을 가지고 하나님이 명하신 순례의 길을 걷는 이들에게 있습니다. 자기 길을 가는 망령된 자들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요절 말씀인 16절을 읽겠습니다. “야곱이 잠이 깨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야곱이 깨달은 바는 여호와 하나님이 여기 계신다는 사실이었습니다 (“Surely the LORD is in this place !”) 여기는 장소적인 의미와 함께 시간적으로 현재를 뜻합니다. 한마디로 야곱이 깨달은 것은 God is now and here!! 였습니다. 어떤 불신자 교수님이 칠판에 God is nowhere 라고 썼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동행하는 한 학생이 앞으로 나아가 God is now here 라고 고쳐 썼습니다.


사람들 가운데는 하나님은 “어디에도 안 계신 분”, 즉 “하나님은 애초부터 안 계시는 분”이라고 생각하는 이도 있습니다. 또는 어떤 철학자는 세상 돌아가는 것을 보니 “하나님은 죽었다!!” 라고 말하기도 했고 “하나님은 노쇠하였다” 라고 조롱조로 말하는 이도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인정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하나님은 어떤 특정한 곳에만 계신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센터나 교회에만 계신다고 생각해서 집이나 학교나 직장에 가면 다른 사람이 됩니다. 어떤 선교사님은 해외로 선교사로 갈 때 하나님을 한국에 두고 가는 것 같다고 했습니다. 또한 어떤 분은 하나님은 과거에 분명히(Surely) 자신과 함께 하셨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현재는 모르겠다고 합니다. 현실이 나의 원대로 되지 않고 너무나 어렵고 절망스런 상태가 계속되기 때문입니다.


야곱도 하나님이 아버지의 하나님으로 고향 집에만 계신 분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자 그가 루스 들판에서 누워 잘 때 무섭고 외롭고 막막하고 걱정근심이 가득했습니다. 장래도 암당하기만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야곱은 깨달았습니다. 우리가 발견하고 깨달아 할 것이 많지만 가장 중대하고 유익한 깨달음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과연 여기 계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깨달을 때 한 사람의 삶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삶의 토운과 빛깔이 근본적으로 바뀝니다. 그 사람의 내면과 얼굴이 달라집니다. 경건한 두려움이 인간적인 두려움들을 사라지게 하고 경건한 두려움으로 하나님과 동행함으로 삶이 든든해지며 자신감이 생깁니다. 절제하며 거룩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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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하 6장에서 게하시는 아람군대가 쳐들어 왔을 때 두려워 떨었습니다. 그의 눈에는 무서운 아람군대의 병거와 말들만 보였습니다. 그러나 엘리사는 평강위에 평강을 누렸습니다. 그 비결은 아람군대를 포위하고 있는 하늘군대 곧 하늘에서 온 불말과 불병거들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눈을 떠서 지금 이 자리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볼 때 삶이 달라집니다. 요셉은 삶의 현장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았을 때 누가 보나 보지 않으나 직무에 충성할 수 있었으며 CCTV가 없는 곳에서도 상관의 아내의 강렬한 성적 유혹을 이길 수 있었습니다.

이 시간 우리가 야곱처럼 감겼던 영적 눈을 떠서 지금 여기에 계신 하나님을 바라보므로 삶의 대전환이 일어나길 기도합니다.


무신론자였던 한 학생이 성경을 공부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존재를 확실히 믿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던 중 기도에 대한 말씀 “구하라 그러면 주실 것이요”(눅 11:9) 말씀을 받고 처음으로 가출한 여동생을 위해 진지하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 만약 자기의 기도를 들어주신다면 과연 여기에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을 믿고 하나님을 섬기겠다고 했습니다. 한 달 후 지방의 어떤 도시에 갔습니다. 거기 길거리에서 그 여동생을 만났습니다. 감격하여 포옹하며 울었습니다. 그리고 여관에 돌아와 하나님의 임재앞에 전율하며 기도했습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그 기도 후에 그는 다음날 친구결혼식에 참석하지 않고 예배드리러 서울에 올라왔습니다. 그 이후로 그는 한 번도 예배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10년 후에 선교사로 나가도록 기도했고 매일 퇴근 후에 센터에 들러 기도했습니다. 9년쯤 되었을 때 하나님은 그를 회사의 유럽본부에 재정책임자로 발령 받게 하셨습니다. 대리급에서 부장급 발령이었습니다. 그렇게 발탁된 이유는 매년 큰 금액의 기부금을 납부하는 것을 보고(십일조생활) 회사임원들이 재정에 사심이 없어 재정관리를 맡길 수 있는 사람으로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이번에 유럽수양회 가는 길에, 이 선교사의 집에서 하룻밤을 자게 되어 그의 삶의 변화를 다시한번 묵상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변화는 삶의 현장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만날 때 삶의 대전환이 일어날 수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요한 형제님은 게임폐인으로 살다가 젊음을 탕진하고 비참한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찾지 못하는 곳에서 게임하기 위해 경기도 어느 게임방에 가서 연락을 끊고 15일간 게임을 했습니다. 조은누리 자매님은 10일 동안 집에 들어오지 않아 5800명의 군인과 22마리의 군견이 수색했고 그 엄마와 전 국민이 애 태웠습니다. 요한형제님은 15일간 실종상태였으니 그의 어머니는 조은누리 엄마 못지않게 애태우며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가 삶의 현장에 살아계신 하나님을 경외하게 되자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삶을 절제하고 거룩하게 살고자 애쓰게 되었습니다. 그때 죽쑤던 학점도 4.23을 얻게 되고 대한민국 최고의 대학원에도 진학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얼굴에 항상 기쁨의 미소가 있고 사람들에게도 기쁨을 주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어머니가 제일 기뻐하시는 것같습니다. 대학원목자로서도 늘 하나님을 경외하고 동행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삶의 현장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고 그분을 경외하고 그와 동행할 때 삶이 달라집니다. 절제하며 거룩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죄에 중독된 사람도 변화되어 쓸모있는 사람, 다른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어떤 자리에 있습니까? 문제가 많은 분들은 현재의 상황이 너무 부담스럽고 눌리고 피하고만 싶습니다. 반면 문제가 없는 분들은 오늘, 이 자리가 지루하고 권태롭기까지 합니다. 이런 분들에게는 죄의 유혹이 강력하게 들어오며 그들은 죄의 유혹을 받고 죄의 경계선을 왔다 갔다 하고 있습니다. 그가 만약 죄의 경계선을 넘으면 그는 죄의 벼랑으로 떨어져 다시 헤어 나올 수 없을 지경에 이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각자가 처한 현실은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상황에 있든지 중요한 것은 이시간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다는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순간부터 삶의 대전환이 옵니다. 경외심과 담대함을 가지고 살게 됩니다. 영적 순례의 길이 즐겁고 행복하고 기쁨이 넘치게 됩니다. 이런 기쁨이 이시간, 이번 주간에 우리 모두에게 임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야곱은 “두렵도다, 이곳이여” 하며 자기가 누운 곳이 다름아닌 하나님의 집이요 하늘 문입구였음을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웬지 모를 기운을 받고 다음 날을 맞이했을 것입니다. 아침 일찍이 일어난 야곱은 베개로 삼았던 돌을 가져다가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그곳 이름을 벧엘이라 지었습니다.


20-22절은 야곱의 서원기도입니다. 서원기도란 맹세하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약속대로 정말 하나님이 자신과 함께 하사 안전과 먹고 입는 문제를 해결해주시고 자신이 무사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하신다면 정말 하나님이 자기 하나님이 되실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또 만약 그렇게 되면 자신이 기념 석을 세운 이곳이 예배 처가 되고 예배를 드릴 것이며 소득의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드릴 것을 약속했습니다.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데 절실하고 구체적인 상황과 기도가 도움이 됩니다. 특히 서원기도는 헌신의 약속이 들어있기에 하나님이 잘 응답해 주십니다.


결론입니다. 하나님은 과연 이곳에 계십니다. 삶이 막막하고 불안하고 돕는 이가 하나도 없을 때는 바로 내가 나의 하나님을 만날 때입니다. 지금 이 자리는 나 홀로 서 있는 자리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나를 보고 계시고 나와 함께 하려 하십니다. 우리가 영적인 눈을 떠서 사닥다리 끝에 계신 하나님을 보고 이 하나님과의 행복한 동행을 시작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