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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020년 마태복음 13강 `바람과 바다를 잔잔케 하신 예수님 `(마태복음 8:18-34)2020-05-24 1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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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마태복음 13

    

바람과 바다를 잔잔케 하신 예수님

    

말씀/ 마태복음 8:18-34

요절/ 마태복음 8:26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하시고 곧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니 아주 잔잔하게 되거늘

    

오늘 말씀은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아직 제자로서의 삶을 결단하지 못하신 분들은 오늘 말씀을 통해 제자의 삶을 결단하는 귀한 은혜의 시간 되기를 기도합니다.

 

18절을 보면 많은 무리가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이는 예수님을 통해 병을 고침받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짧은 공생애 기간 병고치는 사역만 할 수는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병을 고치는 일을 넘어 복음을 완성하셔야 했고 그 복음사역을 섬길 제자들을 양성하셔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자기를 따르는 이들에게 배를 타고 갈릴리 호수 건너편으로 가자고 명하셨습니다.

 

19-20절을 보십시오. “한 서기관이 나아와 예수께 아뢰되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따르리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막 배를 탈 준비를 할 때였습니다. 한 서기관이 예수님께 나아와 말하였습니다. “선생님, 어디로 가시든지 제가 선생님을 따르겠습니다.” 예전에 홍콩 영화를 보면 무술을 배우기 원하는 젊은이가 한 노인이 사실은 숨은 무림의 고수임을 알아보고 무릎을 꿇고 请老师教我一招말하며 그를 스승으로 모시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사실 랍비여, 랍비가 어디에 계시든지 랍비를 따르겠습니다.” 이 말은 당시 상대방을 율법 선생으로 모시고 그로부터 배우겠다는 결단의 선포였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대학원생이 한 교수님을 찾아가 자신의 지도교수가 되어달라고 요청하는 것과 유사합니다.

 

본문의 서기관은 아마도 예수님의 산상수훈의 설교를 주의깊게 들었던 것 같습니다. 사실 그는 이미 서기관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엄밀히 말하면 대학원생이 교수님을 찾아갔다기보다는 이미 해당 분야에 전문적인 식견이 있는 사람이 그 분야에 정말로 탁월한 사람을 알아보고 그로부터 개인적인 사사를 받고자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서기관으로서 율법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 바로 한 세대 전 최고의 율법학자 중 한 사람이 힐렐(BC 110 ~ AD 10)이었습니다. 그는 본래 바벨론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나이 40이 되어 예루살렘에 가서 율법을 공부하고자 하는 소원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너무 가난하여 비싼 수업료를 지불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몰래 굴뚝으로 올라가서 강의를 엿들었습니다. 그러다가 하루는 그만 그 자리에서 잠이 들고 말았습니다. 다음날 그로 인해 굴뚝이 막힌 것을 발견한 다른 제자들로 인해 그는 그날부터 무료로 랍비교육을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후 그는 율법의 대가로 성장하여 그 유명한 힐렐 학파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그는 당대 다른 율법학자와 달리 율법의 세부적인 내용보다 그 정신을 지키는 것을 중요함을 강조하였습니다. 하루는 한 이방인이 거만한 투로 그에게 말했습니다. 내가 한 쪽 다리를 들고 서 있는 동안 율법의 핵심내용을 정리해서 말해보시오. 이때 그는 대답했습니다. “당신이 싫은 것을 남에게 강요하지 마시오. 이것이 곧 율법의 핵심이요 나머지는 해설입니다.”

 

본문의 서기관은 예수님의 산상수훈의 말씀을 듣고 난 후 율법의 근본정신을 꿰뚫어보는 이 분이야말로 그 위대한 힐렐에 버금가는, 아니 그보다 더 빼어난 율법학자인 것을 확신하였습니다. 그는 그가 강의하던 대학의 교수직을 포기하고서라도 이 예수님을 따르기로 결단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그에게 무어라 말씀하십니까? “들의 여우도 굴이 있고 있고 공중의 새도 안식처가 있으나 인자, 곧 사람의 아들에게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어느 시대든 양 한 사람 얻기 어려운 법인데 양도 아니고 제자로 성장하겠다고 결단하고 따르는 그에게 예수님은 다소간 냉정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이와같이 냉정해 보이는 말씀을 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그가 배움에 대한 열망을 가진 것을 보셨습니다. 그것은 귀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열망이 세상 어디에서도 배울 수 없는, 오직 예수님에게서만 배울 수 있는 깊이있는 율법 지식에 대한 열망으로 치우쳐 있는 것을 보셨습니다. 더 나아가 그 자신도 예수님에게 사사받아 장차 힐렐에 버금가는 대 율법학자로 성장해보고 싶은, 힐렐처럼 자기가 한 말과 행동이 탈무드에 기록되어 대대로 전해져 내려가는 그러한 위대한 율법학자로 성장하기 원하는 마음의 소원이 있는 것을 보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따르는 삶은 지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혹은 자기가 가진 능력을 최대한 계발하는 것도 아닙니다. 혹은 자기 마음 깊은 곳에 숨겨진 근원적 욕망을 실현하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삶은 다른 어떤 것이 아닌 십자가와 부활의 삶입니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한 마리의 애벌레가 먼저 애벌레로서의 자신을 죽이지 않으면 결코 나비가 되어 날아갈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예수님이 가신 고난의 길, 십자가의 길에 동참하는 것이요 그 이후 하나님께서 주시는 부활의 영광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 진리를 알고 위대한 학자가 되거나, 성공적인 목회자나 되거나 세상에서 유명한 사람이 되는 것이 목적이 아닌,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에 동참하기를 원하는 예수님의 좋은 제자들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본문에서 서기관에 대한 기록이 더 이상 나오지 않은 것을 볼 때 그는 예수님의 말씀에 깊은 충격을 받고 예수님을 떠나간 것으로 보입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21-22절을 보십시오. “제자 중에 또 한 사람이 이르되 주여 내가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니라서기관이 물러난 후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 중 한 사람이 말했습니다. “주여 내가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그의 말에 대해서 여러가지 해석상의 견해가 있습니다. 그 중 하나는 아버지가 방금 돌아가신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돌아가신지 약 1년이 되어 부패가 마감된 부친의 시신의 뼈를 다른 곳으로 옮기는 고유한 유대 장례 절차를 지키게 해 달라는 요청이라는 것입니다. 또 한 견해는 부친이 돌아가신 것이 아니고 돌아가실 날이 가까우니 돌아가실 때까지 아버지를 섬기다가 돌아가시면 그 때 장례를 마치고 다시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요청이라는 것입니다. 가장 문자적인 해석은 정말로 방금 아버님이 돌아가셨기 때문에 약 1주일 정도 걸리는 아버님 장례의식을 다 마치기까지 휴가를 달라는 요청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위의 세 가지 견해 중 그 어떤 것이라도 당시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는 소홀히 할 수 없는 중요한 것들이었습니다. 또한 구약에서 엘리야도 엘리사를 후계자로 부를 때 그가 가족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오는 것을 허락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본문의 예수님의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산상수훈에서 예수님은 너의 오른 눈이 너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하거든 너의 오른 눈을 뽑아버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그만큼 죄와 적당히 타협하지 말고 죄와 피흘리기까지 싸우라는 의미일 것입니다. 본문에서도 돌아가신 부친의 장례를 치르는 것은 그 어떤 일보다 더 우선권을 가지는 일입니다. 그러나 세상에서도 간혹 부친의 장례를 치루는 것보다 더 우선시되는 일이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자신이 책임맡고 있는 조직에서 무슨 중대한 사고가 발생한다면, 예를 들어 원자력 발전소의 운영 책임을 맡고 있는데 원전사고의 위험성이 발생할 경우, 그러한 경우에는 부친의 장례보다 그 일을 수습하는 것이 더 우선시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사복음서를 통해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종합적으로 살펴볼 때 예수님이 천륜을 무시하고 오직 하나님 나라의 일에 올인하라는 의미로 본문의 말씀을 주지는 않으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실 때 제자 요한에게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이제 너의 어머니가 되었으니 너의 어머니로 여기고 평생 모셔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이를 볼 때 예수님은 효심이 극심한 효자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의 삶을 살 적에 그것을 세상 어떤 일보다 중요한 것으로 생각하고 참으로 진지한 자세로 감당하라는 의미로 볼 수 있습니다.

 

대학을 갓 졸업한 사람이 첫 직장생활을 할 때 어떤 자세로 합니까? 출근하기 전 미리 입을 옷을 준비하고 거울로 외모를 살피며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출근길에 오릅니다. 출근한 후 자신을 주관하는 직속 상사의 말을 경청하며 주의 깊게 듣습니다. 그가 한 말을 토씨까지도 메모지에 기록하며 성경말씀을 암송하듯 마음에 새깁니다. 다른 회사에 출장을 갈 때면 내가 한 말 한 마디, 나의 행동 하나하나가 우리 회사를 대표하는 것이다 생각하고 주의를 기울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바로 이와같아야 합니다. 예배를 드리러 올 때면 사회 초년생이 두근거리고 설레는 마음으로 출근을 하듯 몸과 마음을 준비하여 예배의 장소로 나와야 합니다. 나의 직속상관이신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노트에 새기고 내 마음에 새겨 듣고 경청하며 따라야 합니다. 내가 한 한마디 말, 행동 하나하나가 주님의 몸된 교회를 대표하는 것임을 생각하고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또 예를 들자면 각 분야에 전문가들이 있습니다. 전문가와 아마추어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아마추어는 그저 취미활동으로 하는 것입니다. 만약 어떤 아마추어가 어떤 활동을 정말 열심히 한다 하더라도 그가 만약 자신의 모든 것을 다 쏟아붓는 자세, 자기의 생명을 다 드리는 자세로 하지 않는다면 그는 여전히 아마추어입니다.

 

노래를 부르는 가수도 아마추어 가수는 즐기면서 흥겨움에 노래를 부릅니다. 이에 비해 프로는 한 곡을 부르는데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붓습니다. 마치 이 한곡 부르고 난 후 이 세상을 하직해도 여한이 없다는 것 같은 그러한 자세로 온 마음과 목소리와 힘과 소울을 다해 노래를 부릅니다. 그러한 노래에는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는 힘이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를 때 바로 이와같은 자세로 예수님을 따라야 합니다. 참으로 진지하게 참으로 정성을 다해, 이 주님을 따르는 것이 내 생명처럼 귀하다, 아니 내 생명보다 더 귀하다 하는 그러한 자세로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본래 나이지리아 출신이면서 아프리카 가나 선교사였던 바나바 고조 목자는 수년 전 케냐 수양회에서 가나 선교보고를 할 예정이었습니다. 그날 아침도 그는 오전 성경공부 모임을 마음을 다해 진지한 자세로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는 아프리카인 특유의 반달형 적혈구 질환으로 인해 그날 아침 갑작스럽게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그가 숨지는 모습을 바로 옆에서 지켜 본 그의 아내 치아카 고조 사모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남편이 그날 저녁 하기로 예정된 가나 선교보고를 자신이 하늘로 떠난 남편 대신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녀는 그것이 참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날 저녁 그녀는 중간 중간 눈물을 흘리면서도 차분한 음성으로 남편이 생전에 작성해 두었던 가나 선교보고문을 낭독하였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를 때 바로 이와같은 진지한 자세, 생명을 다 드리는 자세로 예수님을 따라야 합니다. 소울을 다해 부르는 가수가 진정한 가수요,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는 것처럼 우리가 이와같은 자세로 예수님을 따를 때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고 하늘의 하나님께 깊은 감동을 안겨다 드립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악세사리나 취미가 아닌 이와같이 생명을 다하는 자세로 예수님을 따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말씀을 마치신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오르셨습니다. 배는 평화롭게 갈릴리 호수를 가로질렀습니다. 제자들은 신바람이 나서 콧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평화롭던 갈릴리 호수에 갑자기 먹구름이 몰려들기 시작했습니다. 바다 해수면보다 낮은 지중해 호수의 따뜻한 공기와 호수 북쪽 헬몬산에서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이 만나면 간혹 돌풍이 불곤 하였습니다. 그날이 딱 그런 경우였습니다. 갑자기 돌풍이 불면서 집채만한 파도가 일기 시작했습니다. 배는 곧 파도에 전복되기 일보 직전이었습니다. 상황이 이러한데도 예수님은 코를 골며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25-27절을 보십시오. “그 제자들이 나아와 깨우며 이르되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하시고 곧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니 아주 잔잔하게 되거늘 그 사람들이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이가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더라

 

제자들은 주무시는 예수님을 흔들어 깨우며 말했습니다.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 이에 일어나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먼저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라고 하셨습니다. 본문에서 무서움은 인생을 살면서 어려움을 겪을 때 느끼는 일반적인 무서움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이와같이 책망하는 어투로 말씀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누구든 무서운 일을 겪으면 무서워하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무서워하는 것은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의 삶을 사는데 예수님이 실제적인 문제에 있어서 도와주지 않으심으로 망하지 않을까, 죽지 않을까 하는 그러한 두려움입니다.

 

혹 우리 가운데 신앙생활을 하기는 하지만, 만약 예수님이 결정적인 순간 도와주지 않으실 경우를 대비하여 미리 자기만의 대비책을 몰래 세워놓으신 분이 계십니까?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놓으신 분이 계십니까? 그런 분은 오늘 본문 말씀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예수님을 믿고 따르기로 선택하고 결단했기 때문에 그 결단으로 인해 정말 망하게 되거나 죽게 될 위기에 처한, 예수님께 자신의 장래를 포함하여 모든 것을 믿고 맡긴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해당이 됩니다.

 

현재 본문의 제자들은 위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예수님을 믿고 배에 올랐습니다. 그런데 풍랑이 일어 죽음의 위기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가만히 보니 예수님은 코를 골고 주무시기만 하실 뿐 일어나 나를 도와줄 생각조차 하지 않고 계십니다. 이러한 때에 아 내가 잘못 믿었나 보다. 괜히 예수님께 올인했다가 나 이제 죽게 되었다.’ 하는 후회가 밀려옵니다. 동시에 죽음에 대한 공포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바로 이 때가 갈림길입니다. 이 때 지금까지 가졌던 모든 믿음을 다 잃어버리고 완전한 불신과 절망에 빠질 것인가, 아니면 다시 믿음을 붙들고 주님을 의지할 것인가. 이 결정적인 순간 주님은 말씀을 통해, 또 성령을 통해 우리의 믿음을 도우십니다.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은 작은 자들아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는 길에 죽을 것 같은 위기를 만난 것은, 바로 그 때가 정말로 살아계신 나의 주님을 만나고 체험할 기회의 때입니다. 이론적이고 추상적이었던 나의 작은 믿음이 실제적인 믿음, 체험적인 믿음, 살아있는 믿음으로 성장할 기회의 때입니다.

 

많은 이들이 롤러코스터같은 이 믿음의 길이 너무 심장떨리고 무서워서 승선하기를 주저합니다. 그러나 주님이 함께 하는 이 배에 올라타지 않는다고 해서 이 세상은 결코 안전한 곳이 아닙니다. 주님이 함께 하지 않는 세상에는 도처에 위험이 깔려 있습니다. 더 나아가 천로역정에서 크리스찬이 경고를 받았던 것처럼 이 세상은 장망성(장차 멸망할 도성)입니다.

 

넓은 길이 뚫려 있는 이 세상은 안전해 보이지만 사실은 가장 위험한 곳입니다. 이에 비해 우리 주님이 함께 하는 좁은 길, 우리 주님과 함께 하는 항해의 길은 위험해 보이지만 실상은 가장 안전한 곳입니다. 다만 의심하지 말고 믿으면 됩니다. 의심과 회의에 빠질 경우 정말로 죽게 됩니다. 불안과 낙심, 절망에 빠질 경우 정말 죽습니다. 그러므로 정신을 바짝 차리고 믿음을 붙들어야 합니다. 죽을 것 같은 상황 가운데서도 주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주님의 손을 꼭 붙들어야 합니다. 그 때 나를 살리시는 주님, 더 나아가 휘몰아치는 인생의 폭풍우와 파도를 순식간에 꾸짖어 잔잔하게 하실 나의 주님을 만나게 될 것을 믿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구약의 선지자들처럼 하나님께 기도하여 바람과 바다를 잔잔하게 하신 것이 아니라 직접 바람과 바다를 꾸짖어 잔잔하게 하신 것을 주목하였습니다. 이는 본래 창조주 하나님이 하시는 행위였습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이 사람이 도대체 누구인가 하는 깊은 의문을 갖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제자들 일행은 갈릴리 호수 건너편 가다라 지방에 도착하였습니다. 이곳은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들이 거주하는 지역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부정하게 여기는 돼지를 사육하는 돼지 사육장이 있었습니다. 또 그곳에 귀신들린 사람 둘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무덤 사이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낮에 아무도 없는 무덤가에 하루종일 있는 것도 으스스한데 밤중에도 그곳에 거하며 지낸 것을 볼 때 그들은 정상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또 그들은 매우 폭력적이었습니다. 몹시 사나워 아무도 그 길로는 지나다닐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일행이 오는 것을 보고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습니다. 귀신들린 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증거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장차 귀신들을 지옥에 가둘 자인 것을 인정하였습니다. 다만 아직은 때가 아닌 것 같은데 왜 벌써 오셨느냐고 부르짖었습니다. 귀신들은 만일 우리를 쫓아내실 것이면 돼지 떼에 들여보내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32절을 보면 예수께서 그들에게 가라하시니 곧 귀신들이 나와서 돼지떼에게로 들어갔습니다. 귀신들린 돼지들은 먹는 즐거움을 잃어버리고 더 나아가 삶에 대한 모든 의미와 가치를 잃어버리고 바다에 투신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왜 귀신들이 돼지떼에 들어가도록 허락하셨을까요? 본문은 그것을 정확하게 언급하고 있지 않습니다. 다만 추측건대 두 사람들 안에 있던 귀신의 정체와 실상을 제자들과 마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원하셨던 것으로 보입니다. 또 두 사람의 영혼이 수천마리의 돼지 떼보다 더 소중하고 가치있다는 것을 가르쳐주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예수님 자신이 자연을 통제하고 명령하는 주가 되실 뿐 아니라 악한 영을 다스리는 영계의 통제자요 주관자도 되심을 보여주셨습니다. 이것을 직접 보고 체험하는 은혜는 오직 예수님을 따라 배에 오른 제자들에게만 주어진 특권이었습니다.

 

결론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본문의 제자들이 주님을 따를 때 느꼈던 그런 두려움을 느낀 경험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살아계신 주님을 직접 나의 눈으로 보고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 때에 내 온 마음과 영혼으로 주님을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풍성하게 넘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