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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021년 민수기 6강 `탐욕을 징계하신 하나님⁠`(민수기 11:1-12:16)2021-10-25 0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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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민수기 6강


탐욕을 징계하신 하나님


말씀/ 민수기 11:1-12:16
요절/ 민수기 11:4


“그들 중에 섞여 사는 다른 인종들이 탐욕을 품으매 이스라엘 자손도 다시 울며 이르되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랴”


여러분 지금 현재 행복하십니까? 사람들은 나에게 무언가 결핍되었기 때문에 행복하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결핍의 문제만 해결된다면 행복해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경제적인 어려움이 있는 사람은 몇 억원의 돈이 생긴다면 이 불행감이 다 사라지고 행복해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외모에 대한 콤플렉스가 심한 사람은 연예인처럼 멋진 외모를 갖게 된다면 너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학벌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는 사람은 세상에서 알아주는 명문대를 다닌다면 너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큰 착각입니다. 에덴 동산에서 하나님이 주신 은혜로 부족할 것이 없었던 아담과 하와도 선악과를 먹을 수 없다는 그 한계와 결핍감으로 인해 불행했습니다. 이러한 결핍감과 불행감은 삶의 질을 심히 저하시킵니다. 현재 나에게 있는 것, 또 내가 하고 있는 일을 시시하게 생각하게 만들고 집중력을 떨어뜨립니다. 우리가 때마다 이런 결핍감과 불행감을 느끼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의 말씀은 이 문제를 깊이 다루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가 결핍감과 불행감을 느끼는 근본 원인이 무엇인지 발견하고 말씀을 통해 이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3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들으시기에 백성이 악한 말로 원망하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진노하사 여호와의 불을 그들 중에 붙여서 진영 끝을 사르게 하시매 백성이 모세에게 부르짖으므로 모세가 여호와께 기도하니 불이 꺼졌더라 그 곳 이름을 다베라라 불렀으니 이는 여호와의 불이 그들 중에 붙은 까닭이었더라”

1-3절은 11장과 12장에서 다룰 전체 주제를 미리 보여주고 있습니다. 드라마로 비유하자면 드라마가 시작하기 전 미리 주요 내용을 보여주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은 앞으로 전개될 내용의 중요한 주제가 이것이니 그것을 염두에 두고 본문을 읽으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11장과 12장에서 다룰 주제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악한 말로 원망하는 것이 하나님의 불타오르는 분노를 불러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떤 말로 원망했습니까?


4-6절을 보십시오. “그들 중에 섞여 사는 다른 인종들이 탐욕을 품으매 이스라엘 자손도 다시 울며 이르되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랴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없이 생선과 오이와 참외와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 이제는 우리의 기력이 다하여 이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 것도 없도다 하니”

4절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 섞여 사는 다른 인종들이 탐욕을 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가장 중요한 키워드가 바로 이 ‘탐욕’입니다. 11장과 12장의 핵심 주제인 ‘탐욕’은 이 탐욕 문제가 광야생활을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최대의 걸림돌이요, 근본문제임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러면 탐욕이란 무엇입니까? 탐욕은 영어로 covetousness입니다. 탐욕은 자신에게 허락되지 않은 것을 소유하려는 욕망입니다.


창세기 2장에서 첫 사람 아담과 하와에게 허락되지 않은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선악과를 먹고 선악에 대한 지식을 갖는 것이었습니다. 뱀은 이 결핍의 문제를 일깨웠습니다. 에덴 동산에 온갖 좋은 나무와 과실이 있지만 이 선악을 알게 하는 지식의 나무의 열매를 먹지 않는 한 결코 행복할 수 없다고 충동질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이 유혹에 넘어가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고 하나님이 허락하시지 않은 선악과의 열매를 먹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는 우리가 잘 알다시피 죽음이었습니다.

다시 본문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 중 섞여 사는 다른 인종들이 탐욕을 품었습니다. 그 탐욕의 구체적인 내용은 광야에 고기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이집트에 살 때에는 공짜로 생선과 오이와 참외와 부추와 파와 마늘을 먹었습니다. 그런데 광야에는 이런 것이 없습니다. 먹을 것이라고는 ‘만나’밖에 없었습니다. 만나는 기름섞은 과자 맛이었습니다. 이런 것은 간식으로 먹으면 모를까 어떻게 매일 하루 세끼 만나만 먹고 사느냐고 불만을 표했습니다.

여기에서 생각해 볼 문제는 왜 성경은 이것을 ‘탐욕’이라고 규정했을까 하는 점입니다. 나같아도 매일 하루 세끼 식사로 바나나 비슷한 만나면 주면 ‘내가 무슨 원숭이인줄 아느냐?’ 하며 화가 날 것 같습니다. ‘매일 천막을 치고 걷고 행군하는 광야 생활이 이렇게 힘든데 바나나만 주면 무슨 힘으로 광야행진을 하겠는가, 고기를 주지 않으면 더 이상 행군하지 않겠다.’ 하며 파업을 하고 싶은 생각이 들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이들의 주장은 탐욕이라기보다는 누구라도 충분히 공감이 가능한 ‘합리적인 요구’ 쪽에 더 가까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들의 요구를 분명하게 ‘탐욕’이라고 규정합니다. 이것이 탐욕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광야기간 동안 만나를 먹도록 말씀하셨는데 만나에 만족하지 못하고 만나보다 맛있어 보이는 고기를 먹으려 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광야 기간 동안 ‘만나’를 먹도록 하신 것은 영적인 훈련의 의미가 있습니다. 광야는 눈에 보이는 화려한 것이 없습니다. 광야가 아닌 도시에 가면 눈을 즐겁게 해 주는 것이 많습니다. 시장에 가면 저 멀리 아라비아에서 온 진기한 상품이 진열되어 있습니다. 예쁜 옷을 입고 돌아다니는 아가씨들도 있고 최신 기법으로 지어진 멋진 건물도 있습니다. 하지만 광야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황량한 광야뿐입니다. 이런 광야에 있다보면 자연스럽게 눈에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추구하는 영성이 계발됩니다. 아무도 없는 황량한 광야에서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더욱 가까이 느껴집니다.


복음송가 중에 ‘광야를 지나며’라는 찬양이 있습니다.

왜 나를 깊은 어둠속에 홀로 두시는지
어두운 밤은 왜 그리 길었는지

나를 고독하게
나를 낮아지게
세상 어디도 기댈 곳이 없게 하셨네

광야
광야에 서있네

주님만 내 도움이 되시고
주님만 내 빛이 되시는
주님만 내 친구 되시는 광야

주님 손 놓고는
단 하루도 살 없는 곳
광야
광야에 서 있네

주께서 나를 사용하시려
나를 더 정결케 하시려
나를 택하여 보내신 그곳 광야

성령이 내 영을 다시 태어나게 하는곳 광야 광야에 서있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를 지나는 그 기간 눈에 보이는 것에서 기쁨을 찾지 않고, 눈에 보이는 것에서 소망을 찾지 않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게서 기쁨을 찾기 원하셨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게서 소망을 발견하기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 생활하느라 힘든 것을 이해하시고 아침은 만나로, 점심은 햄버거로, 저녁은 삼겹살로, 거기에다 야식으로 라면과 떡볶이를 제공하실 수 있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담백하고 간단한 ‘만나’로 식사하도록 하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자극적인 음식으로 오감을 자극하는 것이 영성에 방해가 되기 때문입니다.

세례 요한은 메시야의 길을 준비하며 청년의 때에 광야로 들어갔습니다. 그곳에서 메시야에 대해 예언한 구약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가운데 장차 오실 메시야를 담대하게 선포할 준비를 했습니다. 그가 광야에 들어간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여러 세상 소식으로 인해 마음이 분산되지 않기 위해서였습니다. 오직 곧 오실 메시야가 어떤 분인지, 그 분을 어떻게 선포해야 하는지 이 한 가지에 집중하기 위해셨습니다. 세례 요한이 광야에서 어떤 음식을 먹었습니까? 메뚜기와 석청을 먹었습니다. 만약 세례 요한이 메뚜기와 석청대신 삼겹살을 먹고 야식으로 라면과 떡볶이, 또 불고기 양념 치킨을 먹었다면 어땠을까요? 그의 영성이 현저하게 떨어졌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불교나 도교의 고승처럼 자기백성이 금욕적인 생활을 하는 것을 원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때로는 오감을 자극하는 것에서 멀리 떠나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추구하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깊은 관계성을 맺는 영성훈련을 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이를 위해 때로는 우리를 광야로 보내십니다. 늘 우리와 함께 하며 내 이야기를 들어주고 공감해주었던 친구들이 이상하게 하나씩, 하나씩 나로부터 멀어지게 하십니다. 나에게 눈으로 보는 기쁨과 즐거움을 주었던 것들이 하나씩 하나씩 사라지게 하십니다. 성공대신 실패를 맛보게 하시고, 축제와 같은 즐거움 대신 세상에 홀로 남은 것같은 외로움을 느끼게 하십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광야로 보내신 것입니다. 광야에서 나와 데이트하자고 하나님께서 나에게 비밀 초청장을 보내신 것입니다.

광야에서 눈요기를 좀 못하면 어떻습니까? 혀를 즐겁게 하는 맛난 것들 좀 참고 먹지 않으면 어떻습니까? 하나님과의 데이트가 나를 기다리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과의 교제가 나에게 가장 큰 기쁨을 주지 않겠습니까?


불행하게도 이스라엘 백성은 다른 인종이 품은 탐욕을 그들도 동일하게 품었습니다. 마치 하와가 먼저 탐욕을 품었을 때, 아담도 함께 그 탐욕을 품은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른 인종들의 탐욕을 동일하게 품었습니다. 4절을 자세히 보면 이스라엘 자손이 울었다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어떻게 애도 아니고 고기를 못 먹는다고 울 수가 있습니까? 사람은 불행하고 슬플 때 눈물을 흘리며 웁니다. 본문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울었다는 것은 그들이 심한 불행감과 좌절감을 느꼈다는 의미입니다.

과연 이스라엘 백성이 눈물을 흘리며 울어야 할 정도로 불행할까요? 그들의 말처럼 광야에서 고생하면서 이집트에서 먹었던 고기와 부추, 파와 마늘을 먹지 못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소중한 ‘자유’를 얻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과거 이집트에 노예로 있을 때 그들은 피라미드, 국고성 건축과 같은 대형공사에 동원되었습니다. 피라미드 건축은 현대 건축의 눈으로 보았을 때 기적과 같은 건축물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큰 돌덩어리를 아름다운 삼각형으로 높이 쌓을 수 있는지, 현대 건설장비로도 쉽지 않은 일을 해낼 수 있었는지에 대해 경의를 표합니다. 건설장비 없이 단지 둥그런 나무만 가지고 거대한 돌을 옮길 때 얼마나 많은 히브리 노예들이 눈물과 땀과 피를 흘렸을까요?

영화 ‘십계’를 보면 모세의 어머니가 돌을 옮기는 과정에서 넘어졌습니다. 그런데 이집트 감독은 공사를 중단시키지 않고 그녀를 그냥 깔고 지나가도록 명령을 내립니다. 노예 한 명쯤 죽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여겼습니다. 이집트 왕은 이스라엘 백성의 수가 너무 많아지자 인구수를 조절하기 위해 남자가 태어나면 나일강에 던져 죽이라는 잔혹한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런 고난과 고통 가운데 있던 그들이 하나님이 보내신 구원자 모세를 통해 자유를 얻게 되었습니다. 이 자유는 얼마나 소중한 것입니까? 그들이 비록 힘들고 어려운 점이 있다 할지라도 이 자유 한 가지만 해도 무한한 기쁨과 감사를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에게 주어진 소중한 자유를 인해 기뻐하고 감사하기보다 그들이 먹을 수 없는 고기와 부추, 파와 마늘로 인한 심한 결핍감과 불행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탐욕’이 가져오는 무서운 결과입니다. 사람이 불행한 것은 무언가가 결핍되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사람이 불행한 것은 그의 내면 안에, 그의 마음 안에 ‘탐욕’이 있기 때문입니다.


서두에서도 말씀드린 것처럼 사람들은 자기에게 무언가가 결여되어 있기에 불행하다고 생각합니다. 돈이 없어 이 나이에 전세를 살고 있기 때문에 불행하다고 생각합니다. 빼어난 외모가 없어 사람들에게 인기를 얻지 못하고 불행하다고 생각합니다. 학벌이 없어, 스펙이 없어 불행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목자님들은 양이 없어 불행하다고 생각합니다. 혹은 자녀가 내 기대대로 잘 자라주지 않기 때문에 불행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가 불행한 것이 나에게 무언가가 결핍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내 안에 탐욕이 있기 때문임을 명확하게 지적합니다. 우리가 탐욕을 회개하고 내 마음에서 제거하면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것들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은사, 재능이 보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소중한 사람들이 보입니다. 그것으로 인해 감사하는 마음이 생기고, 그것을 가지고 열심히 일을 해서 하나님께 영광돌릴 수 있다는 비전이 보입니다. 없는 것에 집중하지 않고 있는 것에 집중하게 됩니다. 이번 주 본문 말씀을 묵상하면서 소감을 쓰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것들이 무엇이 있는지 돌아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것을 가지고 어떻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지 돌아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0-15절에서 고기를 먹지 못한다고 울며 불행해하는 백성들을 보며 모세는 억장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께 이들이 내가 낳은 자식도 아닌데 왜 나를 그들의 지도자요 영적인 아버지로 세우시고 그들을 돌보도록 하셨는지, 도저히 더 이상 못하겠으니 차라리 나를 죽여달라고 하소연했습니다.


16-23절에서 모세의 하소연을 들으신 하나님은 모세를 도울 70명의 동역자들을 세우도록 말씀하셨습니다. 모세에게 주신 영을 그들에게도 주셔서 그들이 모세의 짐을 함께 지도록 하셨습니다. 또 그들에게 한 달 동안 질릴 정도로 실컷 고기를 먹게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그게 과연 가능할지 의심하는 모세에게 하나님의 여호와의 손이 짧으냐 말씀하시고 이 일이 이루어질 것을 모세가 볼 것이라 하셨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이 말씀하신 장로 70명을 불렀습니다. 과연 하나님이 말씀하신대로 하나님의 영이 그들에게 임하여 그들이 예언을 하게 되었습니다. 한편 모세가 부른 장로들 중 엘닷과 메닷이라는 두 사람은 모세의 명을 어기고  모세가 있는 장막으로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에게도 하나님의 영이 임하여 예언을 하였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모세의 부관 여호수아가 모세에게 나아가 그들이 더 이상 예언을 하지 못하도록 말릴 것을 조언했습니다. 겸손한 모세는 하나님은 그의 영을 모든 백성에게 주셔서 다 선지자가 되기를 원하신다고 말했습니다.

31-35절에서 바람이 메추라기떼를 몰아 이스라엘 진영 사방에 떨어지게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무려 서울시만한 면적에 1미터 높이로 메추라기떼가 쌓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환호성을 지르며 메추라기떼를 모았습니다. 그러나 고기가 아직 이 사이에 있어 씹하기도 전에 하나님이 보내신 큰 재앙으로 인해 많은 이들이 죽었습니다. 그때 죽은 이들을 장사지내고 그곳 이름을 ‘기브롯 하다아와’ 곧 ‘탐욕의 무덤’이라고 지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요구를 들어주시고 그들에게 고기를 주신 것과 그 고기를 씹기도 전에 재앙으로 치신 것은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이것은 이렇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만약 그들에게 고기를 주지 않으셨다면 그들은 모세를 돌로 쳐 죽이고 이집트로 돌아갔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들의 요구를 들으시고 고기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만약 요구만 들어주시고 그들을 내버려두셨다면 그들이 탐욕이 죄인 것을 영원히 깨닫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들을 재앙으로 치시고 탐욕이 죄인 것을 깊이 깨닫게 하셨습니다.

12:1,2절을 보십시오. “모세가 구스 여자를 취하였더니 그 구스 여자를 취하였으므로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하니라 그들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모세와만 말씀하셨느냐 우리와도 말씀하지 아니하셨느냐 하매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

11장의 사건 후 모세가 구스 여자를 아내로 삼게 되었습니다. 그의 아내 십보라가 죽은 후 재혼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문제는 그의 아내가 구스 여자라는 사실이었습니다. 구스는 이디오피아를 가르키는데 아프리카계 여자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 문제를 가지고 모세의 누나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난했습니다. 여자 문제였기 때문에 아론보다 미리암이 주도적으로 모세를 비난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들이 비난한 것은 아마도 왜 이스라엘 처녀들을 놔두고 외모와 피부색이 현저히 다른 외국인하고 결혼을 하는가 하는 문제였을 것입니다. 출애굽기에서 아기였던 모세를 나일강에서 미리암이 돌보았던 것을 생각해보면 모세와 누나 미리암의 나이 차이가 꽤 있었을 것입니다. 오늘날로 치면 이모뻘에 해당하는 큰 누님이 야단을 친 것입니다.

큰 누님이 남동생을 야단치는 것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2절을 보면 이들이 의미심장한 말을 합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와만 말씀하셨느냐, 우리와도 말씀하지 아니하셨느냐?” 그리고 2절 하반부에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부분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구스 여인과 결혼하는 문제 자체보다 아론과 미리암, 특히 미리암이 모세의 직분과 자리에 탐욕을 품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도 성령의 감동을 주시고 말씀을 전하게 하시는데 모세와 내가 특별히 다를 것이 무엇이 있는가’ 하는 것이 미리암이 품은 속생각이었습니다.

미리암은 모세가 가진 특권과 영광을 부러워하고 시기했습니다. 실제로 오늘날 사람들은 출애굽의 위대한 지도자로 모세를 기억합니다. 미리암에 대해서 특별히 기억하고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사실 미리암이 한 역할은 적지 않습니다. 그는 모세가 죽을 뻔했을 때 나일 강에서 바로 공주에게 구원을 받고 생명을 건지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출애굽의 과정에서도 성경에 기록되지 않은 중요한 역할들을 했고 남모르는 헌신과 수고를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모든 영광은 모세가 혼자 다 받는 것을 보며 뿔따구가 났습니다. 이에 모세가 가진 특권과 영광을 나누기 원했습니다. 백성들이 볼 때 모세도 위대하지만 미리암도 모세와 맞먹을 정도로 위대하다는 그런 평가와 인정을 받기 원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보실 때 이것은 그녀에게 허락된 자리를 넘어서는 탐욕의 죄였습니다. 그녀가 범한 죄는 그 성격상 에덴 동산에서 하와가 자기에게 정해진 자리를 넘어서려 했던 것과 동일한 죄였습니다.

프랜신 리버스라는 사람이 쓴 ‘위대한 2인자 실라’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이 소설을 보면 우리가 잘 알지 못하지만 실라가 초대 교회에서 사도 바울 못지 않게 얼마나 큰 역할을 했는지 잘 나타납니다. 그러나 성경은 바울에 대해서만 지나칠 정도로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고 바울의 동역자였던 실라에 대해서는 지극히 미미하게 설명되고 있습니다. 소설에서 실라는 자신의 역할과 행적에 대해 자세히 기록된 두루마리를 불태워버립니다. 그것은 바울과 베드로가 교회의 지도자로 굳게 서는 것이 중요하며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모세 한 사람이 모든 것을 다 한 것 같은 인상을 받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모세를 동역했던 수많은 동역자들의 헌신과 수고가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도행전을 피상적으로 읽으면 사도 바울 혼자 다 한 것 같지만 사실은 수많은 동역자들의 헌신과 수고가 그 행간에 감추어져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곧 동역의 역사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지도자를 세우시는 것은 구심점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지도자만 훌륭한 것이 아닙니다. 어떤 점에서는 이름도 빛도 없이 지도자를 동역한 동역자가 더 훌륭합니다.

미리암은 모세를 동역하여 이 위대한 출애굽의 역사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 것, 그 자체를 깊이 감사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모세의 특권과 영광을 넘보는 탐욕을 품었을 때 하나님의 징계를 받고 문둥병에 걸리게 되었습니다. 아론의 부탁을 받은 모세는 미리암의 병을 고쳐주시도록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기도를 들어주셨습니다. 그러나 진밖에서 이레 동안 머물게 하셨습니다.

결론입니다. 우리 인생을 비참하게 하고 불행하는 것은 결핍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탐욕의 문제입니다. 우리 안에 어떤 탐욕이 있습니까? 오늘 말씀을 통해 내 안에 있는 탐욕의 문제를 발견하고 회개하여 그것을 내버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것을 발견하고 감사함으로 그것을 가지고 열심히 일하여 하나님께 영광돌려드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