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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020년 요한계시록 12강 `천 년 동안 왕 노릇 하리라`(요한계시록 19-20)2020-02-10 0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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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요한계시록 12강


천 년 동안 왕 노릇 하리라


말씀/ 요한계시록 19-20장

요절/ 요한계시록 20:6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 하리라”


그 동안 어려운 요한계시록 말씀을 공부하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이제 그 막바지를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천년 동안 왕 노릇 하리라는 말씀의 의미를 깊이 깨닫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19:1-9절은 장차 있을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7-9절을 보십시오. “또 내가 들으니 허다한 무리의 음성과도 같고 많은 물 소리와도 같고 큰 우렛소리와도 같은 소리로 이르되 할렐루야 주 우리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시도다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으므로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고 또 내게 말하되 이것은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이라 하기로”


혼인 잔치를 기다리는 시간은 큰 기대와 설레임의 시간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성도로 살아가는 시간은 마치 신부가 혼인잔치를 기다리는 것과 같은 시간입니다. 신부가 혼인 잔치 때 신랑과 결혼식을 올리고 그 이후로 신랑과 함께 동거에 들어갑니다. 그 때 꿈같은 신혼생활을 누리게 됩니다. 하지만 신부가 결혼을 하기 전에도 신랑을 만나 데이트를 할 수 있습니다. 이와같이 성도들도 이 땅에서 신랑되신 주님이 주시는 은혜를 체험하고 기쁨을 누립니다. 저도 목자생활을 하면서 주님께서 특별하게 은혜를 넘치게 부어주시는 그러한 때가 있음을 체험합니다. 놀랍게 기도를 들어주기도 하시고 ministry 가운데 성령의 은혜를 부어주십니다. 그러한 때는 주님이 바로 내 곁에 계신 것처럼 느껴지고 기쁨과 감격이 넘칩니다. 그런데 또 어떤 때는 광야에 홀로 남겨진 것처럼 느껴지는 때가 있습니다. 그런 때는 예비 신부가 예비 신랑과 휴대폰으로 전화를 하면서 서로 함께 하지 못하는 아쉬움을 달래는 것처럼 성경 말씀과 기도를 통해 주님과 교제하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혼인 잔치에 참여하게 되면 주님이 바로 내 곁에 계신 그러한 은혜와 기쁨과 감격이 항상 있게 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가장 기뻤던 그러한 은혜와 감격을 항상 누리게 됩니다. 더 나아가 신랑되신 그리스도와 신비한 연합의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그 기쁨은 이 땅에서 말로 표현하기 어렵습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 나라에서 각자 직접 체험해 볼 수밖에 없습니다. 사실 다 모르는 부분, 신비한 부분이 남겨져 있는 것이 좋습니다. 그것이 실제 혼인 잔치 때 더 큰 기쁨과 놀라움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11-21절은 백마 탄 자의 전투와 승리를 보여줍니다. 11-16절을 보십시오. “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그것을 탄 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 그 눈은 불꽃 같고 그 머리에는 많은 관들이 있고 또 이름 쓴 것 하나가 있으니 자기밖에 아는 자가 없고 또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더라 하늘에 있는 군대들이 희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고 백마를 타고 그를 따르더라 그의 입에서 예리한 검이 나오니 그것으로 만국을 치겠고 친히 그들을 철장으로 다스리며 또 친히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겠고 그 옷과 그 다리에 이름을 쓴 것이 있으니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 하였더라”


본문에서 백마 탄 자는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습니다. 어떤 이는 이 피가 십자가에서 흘린 보혈의 피라고 해석합니다. 그러나 보혈의 피는 구원받은 성도들을 위한 것입니다. 본문의 문맥은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이들과 피흘리는 전쟁을 위해 나아가는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므로 대적자들이 흘린 피로 보는 편이 낫습니다. 그의 입에서 예리한 검이 나와 만국을 치고 그들을 철장으로 다스립니다.


17-18절을 보면 천사가 큰 음성으로 새들을 향해 와서 하나님의 큰 잔치에 모여 왕들의 살과 장군들의 살과 장사들의 살과 말들과 그것을 탄 자들의 살과 자유인들이나 종들이나 작은 자나 큰 자나 모든 자의 살을 먹으라 하였습니다.


19장의 주제는 잔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장차 한 잔치가 열립니다. 이 잔치는 어린 양의 혼인 잔치입니다. 하나님은 이 혼인 잔치에 세상 모든 사람들을 다 초청하였습니다. 어떤 이는 이 초청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잔치를 위해 시간을 따로 빼두고 잔치에 입을 옷을 준비하는 등 미리 준비하였습니다. 반면 어떤 이들은 잔치 참여를 거절했습니다. 또 어떤 이들은 말로만 간다고 하고 잔치 시간에 다른 일정을 잡기도 하였습니다. 또 잔치 때 입어야 할 잔치 예복도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잔치 시간이 되었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은 잔치에 응하고 준비함으로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참여하는 사람과 그를 대적함으로 심판의 잔치에 참여하는 두 부류의 사람들로 나뉘게 됩니다. 사도 요한은 이 잔치의 초대 앞에 어떤 선택과 준비를 할 것인지를 묻고 있습니다.


이 자리에 계신 모든 분들도 다 이 초대장을 받으셨을 것으로 압니다. 그리고 잔치에 참여하겠다고 답하신 것으로 압니다. 문제는 그 잔치를 위해 일정을 비워두셨나요? 그 잔치를 위해 예복을 미리 준비하셨나요? 일정을 비워두었다는 것은 늘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삶을 의미합니다. 예복을 미리 준비하였다는 것은 하나님 한 분만을 경배하며 믿음으로 사는 삶을 준비한 것을 의미합니다. 일정을 비워두지 못하고 다른 스케쥴을 잡으신 분은 지금 바로 그 스케쥴을 다 취소하시기 바랍니다. 예복을 아직 준비하지 못하신 분은 오늘 바로 귀한 예복으로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이 자리에 계신 모든 분들이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참여하는 은혜가 있기를 기도합니다.


20장의 주제는 천년 왕국입니다. 20:1-3절을 보십시오. “또 내가 보매 천사가 무저갱의 열쇠와 큰 쇠사슬을 그의 손에 가지고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용을 잡으니 곧 옛 뱀이요 마귀요 사탄이라 잡아서 천 년 동안 결박하여 무저갱에 던져 넣어 잠그고 그 위에 인봉하여 천 년이 차도록 다시는 만국을 미혹하지 못하게 하였는데 그 후에는 반드시 잠깐 놓이리라”


사도 요한이 보니 천사가 무저갱의 열쇠와 큰 쇠사슬을 가지고 하늘로부터 내려왔습니다. 천사는 용을 잡았습니다. 용의 정체가 무엇입니까? 용은 곧 옛 뱀이요 마귀요 사탄입니다. 옛 뱀이란 창세기 3장에서 아담과 하와를 유혹하여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고 범죄하게 한 그 뱀과 그 배후세력을 가리킵니다. 마귀는 헬라어로 ‘디아볼로스’로 참소자, 고발자(accuser)라는 뜻입니다. 사탄은 히브리어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라는 의미입니다. 여기에서 옛 뱀, 마귀, 사탄은 다 동일한 한 존재를 가리키며 그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로서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을 범죄하도록 유혹하며 그가 범죄하였을 때 그를 비난하고 참소하는 자입니다.


천사는 무저갱의 열쇠와 큰 쇠사슬을 가지고 이 옛 뱀, 마귀, 사탄을 잡아 결박하여 무저갱에 던져 넣은 후 잠그고 그 위에 인봉하였습니다. 그 기간은 천 년입니다. 천 년이 차기까지는 다시는 만국을 미혹하지 못하게 하였는데 그 후에 반드시 잠깐 놓이게 됩니다.


여기에서 무저갱은 Abyss로 이는 바닥이 없는 구덩이(a bottomless pit)를 가리킵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무저갱이 우주 안에 있는 어떤 물리적인 공간을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이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사탄의 힘과 능력이 완전히 제압된 상태에 있다는 것입니다.


잔 번연의 천로역정을 보면 주인공 크리스챤이 천성길을 향해 갈 때였습니다. 그가 한 산 꼭대기에 이르렀을 때 반대쪽에서 그를 향해 허겁지겁 달려오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들 중 하나의 이름은 겁쟁이였고, 다른 하나는 불신이었습니다. 왜 천성의 반대쪽으로 달려오는지 묻자 그들은 그들의 길 앞에 사자 두 마리가 누워있었는데 그놈들이 잠들었는지 깨어있는지 확실하게 알 수 없지만 가까이 다가가기만 하면 금방 달려들어 우리 몸을 갈가리 물어뜯어 버릴 것만 같았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크리스챤은 말합니다. “당신들의 말을 들으니 나도 두려운 생각이 드는군요. 그렇지만 안전하게 지나가려면 어디로 가야 할까요? 그렇다고 해서 고양으로 돌아가자니 그곳은 곧 유황불로 타버릴 멸망의 도시로 예정된 곳이니 결국 난 죽게 될 것이고, 천국으로 들어갈 수만 있다면 틀림없이 거기선 안전할 것이니 위험을 무릅쓰고 그곳을 가야겠습니다. 집으로 돌아가면 단지 죽음만이 남아있지만 계속 천국을 향해 앞으로 나아가면 비록 죽음의 공포는 있지만 그것을 뛰어넘으면 영생의 구원이 기다릴 것입니다.” 이 말을 마치고 크리스챤은 길을 갔습니다. 그가 보니 정말 사자 두 마리가 길을 막고 누워 있었습니다. 막상 사자를 보니 크리스찬도 겁이 덜컥 났습니다. 지금 죽느니 돌아갈까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때였습니다. 그가 멈칫하며 돌아가려는 모습을 보고 어떤 이가 그를 향해 사자가 사슬에 매여 있으니 용기를 내어 길 한 가운데로 걸어오라고 하였습니다. 크리스챤은 너무 두려웠지만 그의 말을 믿고 용기를 내어 길 한가운데 걸어갔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사자의 위험을 통과할 수 있었습니다.


천로역정에 나오는 것처럼 사탄은 크리스챤들을 해할 아무런 힘과 능력과 권세가 없습니다. 우리가 대한민국 법을 잘 지키는 한 경찰이나 검사가 우리를 해할 아무런 힘과 능력과 권세가 없습니다. 그러나 일단 법을 어기는 순간 대한민국 경찰과 검사가 얼마나 무서운 존재로 다가오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저승사자의 말처럼 느껴집니다. 나의 행동 하나 하나를 다 조사하고 캐내는 가운데 모든 숨은 죄를 다 드러내고 그것을 조서로 작성한 후 그 내용을 인정하는 의미인 손도장을 찍도록 할 때에 숨이 콱 막히고 죽음의 공포가 찾아옵니다.


이와같이 고발자요 참소자인 사탄의 힘과 권세와 능력은 우리가 죄를 범했을 때 행사됩니다. 그런데 우리 구주 예수께서 나의 모든 죄를 대신하여 그 형벌을 십자가에서 다 받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사탄은 더 이상 우리에게 어떤 힘과 능력과 권세를 행사할 수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십자가의 은혜를 저버리고 고의적이고 반복적으로 죄를 범하는 경우 사탄은 그 무서운 힘과 능력을 다시 발휘하게 됩니다.


그런데 사탄이 결박되어 무저갱에 갇힌 기간이 천 년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천 년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4-6절을 보십시오.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에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를 증언함과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목 베임을 당한 자들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고 그들의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 하니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 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 이는 첫째 부활이라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 하리라”


본문에서 보좌에 앉은 자들은 하늘에 존재하는 교회 공동체를 가리킵니다. 그들에게 사탄을 심판하는 권세가 주어졌습니다. 예수를 증언함과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목 베임을 당한 자들은 순교자들을 가리킵니다. 순교자들은 분명히 죽었습니다. 죽었으니까 순교자라고 부르겠지요. 그런데 사도 요한이 보니 순교자들이 죽음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다시 살아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천 년 동안 왕 노릇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곧 첫째 부활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첫째 부활은 성도가 믿음으로 살다가 죽으면 그 즉시 그리스도와 함께 이 세상을 다스리는 그러한 일을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 김갈렙 목자님이 아주 좋은 통찰을 주셨는데, 예를 들어 믿음으로 살다가 순교한 손양원 목사님, 주기철 목사님이 살아있는 우리보다 훨씬 더 위대한 일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남긴 그 믿음의 본, 그 원수사랑의 실천의 본, 또 신사참배하지 않고 믿음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그 순교신앙의 본이 살아있는 우리가 하는 일보다 훨씬 더 크고 위대한 일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그들은 살아서 위대한 일을 한 후 죽은 지금은 쉬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죽은 후 첫째 부활을 하여 지금 그리스도와 함께 이 세상을 통치하고 있습니다. 계시록 앞부분을 보면 순교자들이 우리가 흘렸던 피의 값을 갚아달라고 신원하는 내용이 나오는데 하나님은 이러한 순교자들의 탄원과 기도를 들으시고 이 세상 역사를 이끌어 가십니다.


정리해 보면 첫째 부활은 아직 몸의 부활은 아닙니다. 몸의 부활, 그러니까 죽지 않고 썩지 않는 몸, 신령한 몸을 새로 덧입는 몸의 부활은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 그 때에 주어집니다. 다음 강의에 나오지만 새 하늘과 새 땅이 임하고 새 예루살렘 성이 임할 때 그 새 하늘과 새 땅에 살기에 적합한 그러한 신령한 몸이 주어집니다. 물 안에 사는 물고기에는 물 안에 살기에 적합한 몸이 주어지고, 하늘을 나는 새에게는 하늘을 날기에 적합한 몸이 주어지는 것처럼, 새 하늘과 새 땅, 새 예루살렘 성 안에 사는 자에게는 거기에 살기에 가장 적합한 새 몸을 하나님이 주십니다.


그러나 이러한 영광스러운 몸의 부활이 있기 전 믿음으로 살다가 죽은 이들은 첫째 부활을 합니다. 아직 새 하늘과 새 땅은 보지 못합니다. 영광스러운 새 예루살렘 성도 보지 못합니다. 새 하늘과 새 땅, 새 예루살렘은 성도들 중에 오직 사도 요한만 그 조감도를 살짝 본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함께 왕노릇하는 기쁨과 영광에 참여하게 됩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살다가 죽으면 곧바로 첫째 부활을 하여 그러한 기쁨과 영광에 참여하게 됩니다.


한편 다시 4절 하반절을 보면 짐승과 그 우상에게 경배하지 않고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 않은 이들의 경우 살아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 년 동안 왕노릇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를 믿는 성도들은 죽기 이전에도 그리스도와 함께 왕노릇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베드로전서 2:9절은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은 믿는 우리를 왕 같은 제사장들로 세우셨습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서 하셨던 것처럼 천국 복음을 선포하고 전파하는 복음 전도자들이요 이들을 위해 기도하는 왕 같은 제사장들로 세우셨습니다. 이와같이 이 땅에서 복음을 영접하여 영혼이 거듭나고 왕같은 제사장으로 살아가는 삶 역시 첫째 부활에 해당합니다.


종합해 보면 복음을 영접하고 믿음으로 사는 성도는 살아서도 첫째 부활에 참여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왕노릇합니다. 그는 죽어서도 천 년의 기간이 차기까지, 곧 예수님의 재림과 새 하늘과 새 땅이 임하기까지 왕노릇합니다.


그러면 복음을 영접하지 않고 자기 죄 가운데 살다가 죽은 자들은 어떻게 됩니까? 11-15절을 보십시오. “또 내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이를 보니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 데 없더라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바다가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져지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지더라”


복음을 영접하지 않고 자기 죄 가운데 죽은 자들은 첫째 부활에 참여하지 못합니다. 5절을 보면 그들은 천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믿음으로 살다가 죽은 이들은 첫째 부활, 둘째 부활에 참여합니다. 그러나 복음을 영접하지 않고 자기 죄 가운데 죽은 이들은 첫째 사망, 둘째 사망을 받게 됩니다. 첫째 사망은 몸의 영혼의 분리입니다. 첫째 부활에 참여한 자들은 하늘나라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왕노릇하지만 첫째 부활에 참여하지 못한 이들은 죽은 상태 그대로 있습니다. 13절을 보면 마지막 심판의 때에 바다가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고 사망과 음부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준다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이 기록을 통해 아주 자세히는 알 수 없으나 첫째 부활에 참여하지 못하고 죽은 자들은 죽은 상태 그대로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살아서도 영원한 가치와 의미가 있는 일을 하지 못하였습니다. 또한 죽은 후에도 아무런 영향력을 끼치지 못하고 죽은 그대로 있습니다. 그들은 마치 재판을 앞둔 이가 유치장에 감금되어 있는 것과 같은 상태에 있습니다. 그들의 이름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하였고 죄인들의 명부에 있습니다. 그 책에는 마치 검사가 혐의 사실을 두꺼운 파일 안에 하나도 빼놓지 않고 그림까지 그려가며 다 기록해 놓은 것처럼, 그들이 평생동안 마음과 생각과 행동으로 지은 모든 죄가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 다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치 유치장에 감금된 이가 무서운 마음으로 재판날을 기다리는 것처럼 그들은 천 년의 기간을 기다리다가 최후 심판 때에 재판대 앞에 서게 됩니다. 그 재판석에서 공개되는 그들의 모든 부끄러운 죄에 대해 그들은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리고 그 형벌의 대가는 둘째 사망 곧 불못에 던져지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6절을 보십시오.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 하리라” 사도 요한은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다고 말합니다.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습니다. 장차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섰을 때 나의 모든 부끄러운 죄와 허물이 낱낱이 공개된다는 것은 얼마나 무서운 일입니까? 10절을 보면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져질 때 그 짐승과 거짓 선지지도 함께 던져져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 하였습니다. 그곳에서 낮에 한 순간도 쉬지 못하고 고통과 괴로움을 받습니다. 그런데 밤이 되어도 또 한 순간도 쉬지 못하고 고통과 괴로움을 받습니다. 그러한 일이 세세토록 곧 영원히 반복됩니다. 이 얼마나 무서운 일입니까. 그런데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그러한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습니다.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는 이들은 참으로 복된 자들입니다. 그들은 최후 심판이 있기 전 천 년의 기간 동안 살아서도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왕노릇합니다. 그리고 또한 죽은 후에도 첫째 부활에 참여하여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왕노릇합니다. 이 얼마나 감사하고 복된 삶입니까!


요즘 코로나 바이러스가 한반도를 강타하고 있습니다. 마치 대접 재앙을 당한 것 같습니다. 예수께서 초림하시어 하늘나라가 이 땅에 임한지 벌써 2천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아마도 1세기 성도들은 예수님의 재림이 이렇게까지 늦춰질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는 한 사람이라도 더 회개에 이르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 때문일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은 환경 재앙, 코로나 바이러스 등을 통해 이 지구촌이 영원하지 못하리라는 사인을 여러 방면으로 보여주고 계십니다. 이 기간 사람들의 마음을 부드럽게 하셔서 복음을 영접할 수 있도록 준비시키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이들이 회개하고 복음을 영접하도록 돕는 이 일에 우리를 왕같은 제사장으로 쓰고자 하십니다. 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아멘으로 화답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부활에 참여하지 못하여 무서운 둘째 사망의 길을 향해 달려가는 영혼들을 불쌍히 여기는 목자의 마음을 덧입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이들에게 줄 생명의 말씀을 잘 준비하여 봄학기 왕같은 제사장으로 귀하게 쓰임받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