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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021년 디모데후서 1강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디모데후서 1:1-18)2021-01-24 1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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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디모데후서 제 1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

 

말씀 / 디모데후서 1:1-18

요절 / 디모데후서 1:7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

 

디모데후서는 옥중에 있는 바울이 에베소교회의 디모데에게 최후로 보낸 유언적 서신입니다. 그는 성격상 소심한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은 이런 그에게 담대한 마음으로 직무를 감당하도록 말합니다. 오늘날 코로나와 그로 인한 경제적 문제, 또 캠퍼스와 각자의 어려운 상황은 우리로 두려움에 빠지게 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가 어떻게 두려움을 극복하고 맡기신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지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바울은 어떻게 사도가 되었습니까? 그는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약속대로 사도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되었다는 것은 그가 교회와 단체에 의존하기보다도 하나님 앞에서 사도의 직분을 감당했음을 알게 해줍니다. 그가 사도의 직분을 감당하는 이유는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섬기는 것이었습니다. 생명의 약속은 예수님을 믿을 때 또한 그가 그 믿음에 기초하여 사도의 삶을 살아갈 때 받게 될 영생의 약속을 말합니다. 그는 이 영생의 약속을 믿고 또한 오직 그것을 소망하고 바라보며 사도로서 살아왔습니다.

 

그는 디모데에게 편지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바울은 디모데를 형제나 동역자로 부를 수도 있지만 오늘 말씀에서 아들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디모데가 1차 전도여행 때 루스드라에서 바울의 설교를 듣고 그리스도를 영접했고 거듭났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그를 위해 밤낮 기도하였고 그를 보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를 생각할 때 하나님께 감사하며 특별히 디모데의 눈물을 생각했습니다. 눈물은 그가 때뭍지 않은 순수한 신앙의 소유자였음을 나타냅니다. 그의 믿음은 바울 자신이 조상적부터 청결한 양심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있듯이 그의 외할머니와 어머니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참되고 진실한 믿음이었습니다. 이로 인하여 바울은 소아시아에서 가장 큰 에베소 교회를 맡길 정도로 그를 신뢰했습니다. 오늘날 진실된 신앙의 증거인 눈물이 메마른 세상에서 진실한 신앙으로 말씀에 순종하는 믿음의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큰 소망이 됩니다. 하나님은 지금까지 우리 모임 가운데 수양회와 1:1을 통해 귀한 믿음의 후배들을 많이 세워주셨습니다. 그들이 거듭나 회개하고 변화된 새 삶을 살고 자신과 같은 영혼들을 먹이는 목자의 삶을 사는 것은 우리들의 삶에 가장 큰 보람입니다. 이번 학생수양회에는 무려 20명 이상의 학생들이 참석하기로 했습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이 세워주신 사람들과 그들의 믿음의 삶을 위해 섬기고 기도함으로 목자의 삶에 참된 감사와 기쁨이 넘치기를 기도합니다.

 

6절을 보십시오. 디모데에게 바울은 무엇을 깨우쳐 주고자 했습니까? 그것은 디모데의 은사를 다시 불일 듯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은사는 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선물을 말합니다. 디모데전서 4장에서 그는 장로회에서 바울에 의해 안수받아 하나님께 대한 직무를 부여 받은 바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은사는 말씀을 분별하고 그것을 가르치는 은사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디모데는 현재 그것을 잘 감당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마치 불이 꺼져가듯이 명맥만 유지하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바울은 이런 디모데에게 그의 말씀의 은사와 직분을 불일 듯 하게 하기를 바랍니다. 그것은 디모데가 자신의 직무를 적극적으로 감당하는 것을 말합니다. 형식적으로 어쩔 수 없이 하는 것이 아니라 열정적으로 감당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디모데에게는 그의 은사를 발휘하지 못하게 하는 결정적인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무엇이었습니까? 두려워하는 마음이었습니다. 두려워할 때 소심하여 뭐든 잘 할 수 없습니다.

 

그가 두려워 한 것이 무엇이었을까요? 첫째로 사람이었습니다. 에베소 교회에서 그는 상대적으로 나이가 어린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그는 나이나 신앙연수가 많고 경험이 많은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보고 소심해지는 문제가 있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문제는 그가 자기의 은사를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직무수행을 잘 감당하지 못하게 했을 것입니다. 피겨스케이팅을 하는 선수가 얼음판 위에서 점프를 하고 회전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 관중을 의식할 때 불안하여 넘어지기 쉽고 자신의 기술을 결코 멋지게 선보일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삶도 대부분이 인간관계입니다. 직장인에게 있어서는 상사가 두려운 존재이고 학생들은 성적을 평가하는 교수님 앞이 두렵습니다. 복음을 전할 때 말씀을 전할 대상들이 두렵게 느껴집니다. 힘과 권력이 있는 사람들이 나를 좌지우지하거나 사람들에 의해 무시받고 모욕을 당할까 두렵습니다.

 

둘째로 그는 고난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현재 바울은 감옥에 있습니다. 그는 교회 지도자로서 핍박이 일어날 때 가장 먼저 그것을 받아내야 할 위치였습니다. 그도 사람인지라 죽음을 무릅써야 하는 고난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이렇게 고난을 두려워할 때 그에게 맡겨진 사명을 온전히 수행할 수 없었습니다. 이것은 마치 싸움을 싸워야할 군인이 안전한 참호 속에 웅크리고 있는 것과 같았습니다. 그가 소극적인 자세를 가질 때 상대적으로 안전했지만 이것은 그가 주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감당하여 주님께 풍성한 열매를 드릴 수 없게 했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코로나라는 외적 고난의 상황이 있습니다. 전세계적으로 많은 확진자가 발생하며 의료시스템이 붕괴되고 있습니다. 질병에 걸릴 것과 죽음에 대해 두려워하는 마음이 많이 있습니다. 비대면이 생활화됨에 따라 모든 일상 생활을 비롯해 말씀 전하는 일도 위축되고 포기하기 쉬운 상황입니다.

 

다음으로 그는 연약하고 부족한 자신의 능력으로 크신 사명을 감당하려고 할 때 두려웠습니다. 고난을 감당하며 에베소 교회를 담당하고 말씀을 전하는 일은 자신의 능력에 비해서 더 크고 감당할 수 없는 일로 보였습니다. 양을 섬기며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시간이나 물질적인 면에서 많은 노력이 필요합니다. 또한 세련되고 웅장한 캠퍼스 건물과 젊은 학생들을 볼 때 나이 차이가 많이 나고 인간적인 면에서 부족해 보이는 자신이 과연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오랫 동안 도와도 잘 변화되는 것 같아 보이지 않는 사람들을 볼 때 캠퍼스 양을 섬기고 그들을 돕는 일을 하는 것은 정말로 어려운 미션 임파서블로 보입니다.

 

바울은 이런 디모데에게 그가 어떻게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지 말해줍니다. 먼저 두려워하는 마음은 하나님이 주신 마음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두려워하는 마음을 하나님은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여호수아서 1장에서 모세는 여호수아에게 두려워하지 말고 담대하라고 여러번 당부했습니다. 시편 56:11절에서는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은즉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이까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명령을 지키며 하나님을 두려워할 때 사람에 대한 두려움을 이길 수 있습니다. 저는 소심하고 두려움이 많은 자이어서 사람 앞에 나서서 무슨 말을 하기가 심히 부담이 됩니다. 하지만 제가 두려워할 때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감당하고 완수할 수 없음을 생각할 때 두려운 마음을 극복하고자 노력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과 명령을 따라 두려운 마음을 극복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다음으로 고난 가운데서 죽음을 각오하는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한 목자님은 자신과 자신의 자녀들의 목숨이 실제로 핍박자에 의해 위협이 되는 상황에서 죽음을 각오하고 살기로 결단하였을 때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죽음도 허용하실 수 있음을 인정하고 설사 그렇게 된다 하여도 이미 영생을 얻었기에 여한이 없고 감사할 수 있는 부활신앙과 순교신앙을 갖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비록 연약한 우리이지만 우리에게 직무를 맡기시고 감당할 능력을 약속하신 하나님을 믿을 때 두려움을 이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무엇입니까? 7절을 보십시오. 같이 읽겠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먼저는 능력입니다. 사도행전 1:8절을 보면 하나님은 연약한 제자들에게 세계 선교라는 그들로서는 참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명령을 주셨지만 동시에 권능도 약속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모세도 200만명의 이스라엘 자손을 이끌고 출애굽하는 것은 너무나도 힘든 일이었지만 하나님은 그가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능력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 사명은 핑계를 대자면 할 수 없는 일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가보지 못한 외국에 선교사로 가는 것이나 캠퍼스 양들을 섬기는 것이나 직장일, 자녀를 섬기는 일, 학업을 감당하는 일들도 모두 무엇 하나 결코 쉽지 않은 것들입니다. 우리가 부족하기 그지없는 사람들이지만 약속하신 능력을 구할 때 하나님은 능력을 주셔서 우리가 세계선교를 감당하고 우리가 기도하는 양들을 능히 구원하게 하실 것입니다.

 

다음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사랑입니다. 사람들을 사랑의 대상, 축복의 대상으로 여기고 품고 사랑하면 두려움이 없어지고 용기 있는 인간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무슨 일이든 동기가 불순하면 소심해지고 위축됩니다. 하지만 동기가 올바르면 떳떳하고 담대하고 자유한 마음으로 사람을 섬길 수 있습니다. 사랑이 모든 말과 행동의 동기가 되면 대하는 사람들을 의식하거나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요한일서 1:18절에서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는다고 말했습니다. 최근 뉴스에서 러시아의 한 농부가 자신의 가축을 지키기 위해 거대한 늑대를 맨손으로 때려 잡는 것을 보았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두려움에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삶을 살거나 손해보지 않고 이기적으로 살기 쉽습니다. 그러나 두려워하는 마음보다 사랑하는 마음이 강할 때 우리는 두려움을 이기고 사랑을 실천하고 나타냄으로 양무리를 지키는 주의 일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우리에게 주신 것은 절제하는 마음입니다. 죄를 짓는 삶을 살면 위축되고 두려움에 빠집니다.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확신할 수 없고 정죄의식에 빠져 두려워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절제하는 삶을 살아가면 심령이 강하고 담대하게 됩니다. 잠언 28:1절을 보면 악인은 쫓아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나 의인은 사자 같이 담대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세상은 신자들을 물질과 쾌락 등 갖가지 유혹으로 손짓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유혹에 빠지게 되면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담대하게 감당할 수 없음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유혹이 많은 세상에서 오히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름으로 담대하게 양무리를 가르치고 돕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지금까지는 에베소교회 안에서 디모데의 연약함으로 인해 위축될 수 있는 면을 지적한 바울은 감옥에 갇힌 자신과 복음에 대해서는 어떤 자세를 가지라고 합니까? 디모데에게 있어서 바울은 영적 스승이요 아버지와 같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현재 감옥에 있으며 고난을 받고 있고 그 고난으로 인해 죽을 수도 있음을 생각할 때 마음이 위축되었습니다. 그의 모습은 세상적으로 볼 때 전혀 성공적으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죄수의 신분으로 있는 바울을 부끄러워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디모데가 자신을 부끄러워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오히려 바울은 자신이 복음을 위해 고난을 받는 것을 자랑스러워하였고 디모데 역시 그 길을 가며 고난을 받도록 말했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고 소명자로 세우신 것은 하나님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안에서 주신 은혜에 기초한 것입니다. 이 소명이 각각 다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고난을 적게 받을 수도 있고 어떤 사람들은 고난을 많이 받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능력을 따라 택하신 것이 아니기 때문에 능력의 부족함이 문제가 되지 않고 아무리 부족한 자라 하더라도 하나님은 부르심에 순종할 때 그것이 무엇이든 우리에게 뜻하신 바를 이루시며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참으로 복된 인생으로 열매 맺게 하십니다.

 

현재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영적 환경이 어렵고 그렇기에 많은 고난과 희생을 감수해야 합니다. 한편 사역의 현상과 결과인 열매만을 보면 나의 삶이 초라하게 여겨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겉으로 볼 때의 외적인 모습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선택을 받고 부르심을 받아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감당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때 비록 세상에서 고난 받는 삶을 살 수 있지만 하나님께 있어서는 더없이 성공적인 삶을 산 것이 됩니다. 바울은 외적으로 고난을 받았고 죄수의 신분으로 다른 사람들은 그의 삶을 부끄럽게 여길 수 있었지만 그와 같은 신분에서 그는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신 고난을 감당했고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신 직분을 섬겨 주위에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또 교회들에게 편지하여 그들을 격려하고 도왔습니다. 외적으로 감옥에 있는 바울의 모습은 실상 하나님 안에서 그에게 주어진 자신의 사명을 누구보다도 충성되게 감당하는 모습이었습니다. 바울은 많은 고난을 당했지만 그만큼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빛나는 사명을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11절을 보십시오. 바울은 자신이 구체적으로 복음을 위해 어떤 자로 세우심을 입었다고 말합니까? 바울은 선포자 곧 복음 전파자로 세움을 받았습니다. 또한 사도로서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권위를 위임받고 보내심을 받은 대사였습니다. 다음으로 교사로서 성경지식을 가르치는 일을 했습니다. 바울은 이 부르심 때문에 많은 고난을 받았습니다. 말년을 감옥에서 보내고 죽게 됩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의 삶을 남들 앞에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그가 자신이 믿는 자를 알고 자신이 의탁한 것을 그가 능히 지키실 것을 확신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안다는 것은 경험을 통해 아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한 앎은 누군가에게서 배운 것이 아니라 그가 하나님을 섬기고 교제하며 경험을 통해 확실히 아는 바였습니다. 바울이 믿는 주님은 알지 못하는 막연하거나 불확실한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설령 다른 사람들이 그가 섬기는 주님을 부인하고 주님을 섬기는 그의 삶을 비웃는다 하여도 그는 자신이 섬기는 주님이 어떤 분인지 알고 있었고 그러므로 극단적인 죽음에 내몰리는 상황 속에서도 주님을 신뢰했습니다. 또한 의탁한다는 말은 적금을 든다는 표현과 같은 말입니다. 적금을 들 때 안전하게 그것이 보관되며 나중에 확실하게 되찾을 것을 믿고 맡깁니다. 바울은 죽지만 곧 참된 생명으로 부활할 것입니다. 또한 자신이 의탁한 복음 역사도 쇠퇴하지 않으며 오히려 자신의 죽음이 기폭제가 되어 성장할 것을 바라보았습니다. 그가 목숨을 바쳐 수고한 삶의 결과를 하나님은 어떠한 고난 속에서도 지켜주실 것입니다.

 

현재적으로 하나님을 섬기며 우리의 현실을 인간적인 눈으로 바라볼 때 실패로 평가하며 절망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현재적인 모습으로만 우리의 삶을 단정하여 평가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삶은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며 주님께서 우리의 고난과 죽음을 헛되게 하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죽음 후에 하나님께로부터 받을 영광스럽고 최종적인 평가가 아직 우리에게 남아 있고 나의 죽음 후에도 주님께서 이루실 복음의 찬란한 역사를 기대할 때 주님을 위해 고난을 받은 우리의 삶은 죽음으로써 그 빛을 잃지 않습니다.

 

13,14절을 보십시오. 바울은 디모데에게 무엇을 지키라고 합니까? 바울은 들은 바 바른 말을 본받아 지키고 성령으로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고 당부했습니다. 바른 말은 바른 교훈 곧 복음 진리를 말합니다. 디모데는 이것을 거짓 가르침 가운데서 사수해야합니다. 또한 아름다운 것은 예수님의 성육신과 십자가에서 죽으신 희생적인 죽음과 사랑입니다. 디모데는 이러한 예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세대가 지나도록 기리며 지켜야 합니다. 현재적으로 바울은 바른 말과 아름다운 것을 지키지 않은 많은 사람들로 인해 안타까워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이 그를 버렸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과장법이겠지만 정말로 많은 사람이 복음과 바울을 등졌으며 이로 인해 그의 마음이 심히 아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중에는 부겔로와 허모게네도 있었습니다. 이 두 사람의 이름을 언급한 것을 볼 때 그들은 꽤 유명한 자들이었고 그들이 바울을 버린 일 또한 충격적인 일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디모데후서 4장에서 나오는 데마라는 사람을 살펴보면 그가 세상을 사랑하여 데살로니가로 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바울의 1차 투옥 때까지도 바울을 동역한 사림이었으나 2차 투옥 때 바울이 고난 가운데 죽음을 앞두게 되었을 때 등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만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오네시보로의 집에 긍휼을 베푸시도록 기원했습니다. 오네시보로는 유익한 자라는 뜻입니다. 그는 바울에게 참으로 도움을 주는 동역자였습니다. 그는 부겔로와 허모게네 같은 사람들이 바울의 어려움에 그를 등진 것과 매우 대조적으로 오히려 바울이 가장 어려웠을 때 바울을 자주 격려해주고 부끄러워하지 않고 부지런히 찾아와 만나주었습니다 이처럼 복음역사에는 정작 도움이 필요할 때 자기 유익을 구하고 믿음을 저버리는 사람이 있는 반면 어려움을 알고 끝까지 함께 하며 섬김과 필요한 도움을 베풀어주는 동역자들도 있습니다. 우리도 현재적으로 복음 역사의 어려움 가운데 있습니다. 이 가운데 부겔로와 허모게네와 같은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가운데 변함없이 충성스럽게 역사를 동역하는 귀한 동역자들이 있습니다. 현재 함께 예배를 드리고 있는 동역자 한 사람 한 사람이 우리에게 있어 바로 오네시보로와 같은 귀한 동역자들입니다. 우리가 어려운 복음 역사와 고난 가운데서도 끝까지 함께 하며 역사에 필요한 도움을 주는 동역자들이 됨으로 복음 역사 가운데 주어지는 견디기 힘든 고난을 능히 함께 감당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결론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라 능력, 사랑, 절제입니다. 우리가 두려움으로 떨며 소심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주신 마음을 덧입음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사명을 능력있게 감당하는 사람들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축복된 부르심을 온전히 이루며 고난을 능히 감당하고 풍성한 영적 열매를 맺는 하나님께 있어 성공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