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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021년 요한복음 2강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한복음 1:19-51)2021-03-15 00:42
작성자
2021년 새봄학기 요한복음 2강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말씀 요한복음 1:19-51
요절 요한복음 1:29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요새는 영상의 시대입니다. 여러 분들은 지금 예배도 컴퓨터나 핸드폰 화면으로 보고 있습니다. 무엇을 보느냐에 따라 삶이 생명을 얻기도 하고 무기력해지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세례요한은 우리가 무엇을, 누구를 보아야 한다고 말합니까? 우리가 오늘 말씀을 통해서 세상 죄를 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 예수님께 주목하고 그 예수님을 보라고 증거하는 이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19절을 보십시오.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 “네가 누구냐”고 물었습니다. 이 때 요한이 드러내어 말하고 숨기지 않았습니다. 드러내어 말했다는 것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누구냐를 밝히는 데 애매모호한 태도를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분명히 말했습니다. 당시 세례 요한은 민중들로부터 그리스도가 아닌가 할 정도로 인기와 영향력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인기가 최절정일 때 자신을 부정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적당히 침묵함으로 그리스도로 높임 받는 것을 즐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런 마음에 찬 물을 끼얹듯, 칼로 무를 베듯이 자신이 그리스도가 아님을 적극적으로 증언했습니다.

21절을 보십시오. 그러자 조사단은 “그러면, 네가 엘리야냐” 물었습니다. 그러자 세례요한은 즉각 “나는 아니라”라고 대답했습니다. 세례요한 수태고지 때 천사는 세례요한을 가리켜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사역할 사람이라고 하였고(눅 1:17), 예수님도 세례요한을 가리켜 오리라 한 엘리야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17:10-12, 말 4:5). 세례요한도 엘리야 같은 복장을 하고 사역을 했습니다. 그런데 세례요한이 자신이 엘리야임을 부정한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조사단이 말하는 엘리야는 하늘에서 실제 강림한 신비한 존재로 그리스도의 선구자 정도가 아니라 메시아 급의 인물이었습니다. 즉 당신이 엘리야냐 하는 질문은 당신이 그리스도냐는 질문과 같은 셈이었습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은 오해의 소지를 제공하지 않고자 단호하게 답변한 것입니다. 

이에 조사단은 “네가 그 선지자냐” 물었습니다. 그 선지자는 모세가 예언한 것(신 18:15)으로 그리스도를 의미하는 말로 이해되고 있었습니다. 이에 이번에도 요한은 짧고 단호하게 “아니라”라고 즉각 대답했습니다. 참고로 그의 대답을 영어로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I am not the Christ” “I am not” “No” 점점 짧아집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누군지에 대해 장황하게 말하기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요한은 자신에 대해 아주 간단하고 짧게 대답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잘 나갈 때 자기관리를 잘한 세례요한을 배웁니다. 박태선이란 사람은 자신을 주님의 걸레자루라고 말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에게 신유의 은사를 부어주시고 수많은 성도들과 목회자들마저 자신에게 무릎을 꿇고 안수를 받자 점점 마음이 교만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더니 자신을 ‘하나님’으로 선포하고 스스로 천부교를 창시했습니다. 이런 그는 결국 폐암으로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이런 그의 삶과 결말은 사람이 얼마나 교만하여지기 쉽고 착각에 빠지기 쉬운 가를 보여줍니다. 사람은 자신이 뭘 잘하고 잘나가더라도 그 본질이 먼지에 불과함을 알아야 하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어야 합니다(시 103:14). 위대한 종들은 이것을 잘 했습니다. 사도바울도 잘 되었을 때 다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라고 고백했습니다(고전 15:10a) 그렇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은혜를 거두어 가시면 우리는 한순간에 초라하고 무능한 자로 전락할 뿐입니다. 

우리가 세례요한처럼 적극적으로 자기를 부정하므로 마귀가 주는 교만의 시험에 들지 않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22절을 보십시오. 조사단이 세례요한에게 “누구냐” “우리를 보낸 이들에게 대답하게 하라” “너는 네게 대하여 무엇이라 하느냐” 다그쳤습니다. 도대체 당신은 누구냐는 질문이었습니다. 그러자 세례요한이 이번에는 적극적으로 자신이 어떤 사람인가를 밝힙니다. 23절을 보십시오. “이르되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 로라 하니라” 세례 요한은 이사야 40:3 절에 기초해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고히 세우고 있었습니다.   

인터넷 용어로 “나는 누구? 여긴 왜?”라는 말이 있는 데, 멘붕상태가 된 것을 표현한 말이라고 합니다. 자신이 누군지도, 왜 여기에 있는 지도 모르는 사람은 삶이 형성도 안되었거나 아니면 삶이 붕괴된 상태에 있는 사람입니다. 이에 비해 세례요한은 분명한 자기인식이 있었습니다.  

세례요한은 자신을 ‘외치는 자의 소리’라고 하였습니다. 
첫째로, 그는 외치는 자였습니다. 외친다는 것은 모두가 반드시 알고 들어야할 진리를 소유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어떤 것도 주장하거나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가 정말 배려심있고 겸손해서 그런 것이라면 문제가 없습니다만 그것이 정말 전파해야 하는 신념과 진리가 없는 문제라면 그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 내부에 정말 소리 높여 외칠만한 가치와 진리가 있습니까? 내면이 진공상태로 텅 비어 있습니까? 

둘째로, 그는 소리였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내고 자신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자 하는 분명한 자세가 있었습니다. 그는 크신 그리스도의 존재감 앞에 자신을 심히 작은 존재로 여기는 자기발견과 심히 작은 자신에게 매이지 않는 자유함이 있었습니다. 그는 아마 그리스도는 지구만큼이나 크게 여기고 자신은 먼지만큼이나 작게 여겼던 것 같습니다.
25-27절을 보십시오. 조사단은 세례요한을 책망하듯이 물었습니다. “네가 만일 그리스도도 아니요 엘리야도 아니요 그 선지자도 아닐진대 어찌하여 세례를 베푸느냐” 본래 세례는 이방인들이 유대인으로 개종할 때 주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에게 세례를 베푼다는 것은 그들이 다시 태어나야 할 정도로 이방화되어 있다는 전제가 깔린 셈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문제시 되는 세례를 그리스도도 아닌 자가 종교지도자들의 허락도 안 받고 임의로 행하고 있냐며 책망을 한 셈입니다. 이에 대해, 세례요한은 그들의 관심을 무리들 가운데 계신 그리스도께 돌렸습니다. 그분은 너무나 높으셔서 자신은 그분의 신발 끈을 풀기도 합당치 않을 정도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다음 날 자신이 세례사역을 하는 이유가 그분을 이스라엘 가운데 나타내기 위함임을 말합니다(31).   

29절을 보십시오.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이것이 바로 외치는 자로 사역한 세례요한의 외침의 내용이었습니다. ‘보라’라는 말은 감탄사입니다. 여러분은 이제껏 사시면서 무엇을 보고 감탄했나요? 저는 자연의 모습이나 우주의 모습을 보면서 감탄한 적이 많습니다. 아름답고 멋진 사람들을 미모의 사람들을 보면서 감탄하고 눈이 돌아가는 경험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세례요한은 온 인류가 감탄하고 바라보아야 할 분은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어린 양의 모습이 세상에서 가장 감탄스런 광경이며 가장 주목해야 할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우리가 이렇게 저렇게 묘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구약성경에 정통하고 하나님의 영감이 충만했던 세례요한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묘사했습니다. 이 묘사는 예수님을 가장 잘 설명한 묘사입니다. 예수님이 왜 세상에 오셨는지를 이보다 더 잘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은 세상의 죄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오신 구원자 이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첫째로, 세상에서 가장 심각한 문제가 죄문제임을 알게 됩니다. 죄문제란 인간이 하나님을 부정하고 살면서 온갖 종류의 실체적인 죄를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지으며 그로인해 심각한 댓가를 치르는 것을 말합니다. 어떤 사람은 죄문제의 심각성을 모릅니다. 그러나 죄의 결과가 무엇입니까? 로마서 6:23절은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다고 하였습니다(히 9:27). 어떤 사람은 이런 죄문제를 스스로 인식하고 고통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죄에 대한 인식이 전혀 없습니다. 하지만 죄문제는 내가 죄인으로 자기발견을 하든지, 못하든지 심각한 결과를 초래합니다. 나중에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서 심판을 받고 영원한 지옥의 고통으로 떨어집니다. 현재도 하나님과 분리되어 우주고아요, 하나님의 원수로 살아갑니다. 그러니 죄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사람은 근본적으로 행복하지 못하며 그 어떤 성공과 소유에도 인생의 루저요 패배자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행복하려면 반드시 죄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둘째로, 죄문제는 오직 하나님의 어린 양만이 해결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스스로 자기 죄문제를 해결 할 수 없습니다. 고행을 하고 수행을 한다고 해서 사람이 의로워지지 않습니다. 자기 의의 한계에 대해 우리는 정말 의롭게 살고자 온갖 수행을 했던 성철 스님의 마지막 말을 참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죽기 전에 자신이 대중들을 속인 죄가 하늘에 닿고 수미산을 덮는다고 말했습니다. 사도바울도 죄를 극복하고 의롭게 살고자 하였지만 부패한 심령을 벗어날 수는 없어 탄식했습니다(롬 7:24). 죄문제는 하나님의 어린 양 예수님만이 근본적으로 해결합니다. 예수님은 죄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하나님이 준비하신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아담 때부터 어린 양이 하나님께 제물로 드려졌습니다. 그 후 무수한 희생 양들이 인간의 속죄를 위해 피를 흘리며 죽어갔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어린 양들의 죽음을 통해 죄의 심각성을 가르치고자 하셨습니다. 하지만 동물 어린 양들은 죄문제를 해결하는 피의 능력이 제한적이었습니다. 강력한 표백제와 같은 피가 필요했습니다. 또 무수한 동물의 희생과 희생제사의 번거로움도 그쳐야 했습니다. 이에 하나님은 마침내 인간의 죄악된 본성까지 표백시키는 그 아들의 피뿌림을 준비하셨습니다. 그 피가 너무나 귀하고 능력 있어 단번에 영원한 속죄의 능력을 갖는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그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어린 양 예수님을 바라볼 때, 우리의 어떤 추하고 악한 죄도 씻겨나감을 체험합니다. 그 피의 능력이 때마다 샘솟아 죄의 소원을 이기게 하고 우리로 하여금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로 날마다 바뀌어 감을 체험합니다.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어린 양 예수님을 주목하고 이분을 찬양하고 전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어린 양 예수님을 생각할 때 그 피의 능력과 함께 하나님이 죄악된 인생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 지 그 크신 사랑을 알게 됩니다. 또한 우리는 우리 죄인들을 위해 죽으러 오신 하나님의 어린 양 예수님을 생각할 때 그 사랑과 희생과 하나님께 대한 순종에 감사와 찬양을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하나님의 어린 양 예수님의 희생과 죽으심은 너무나 위대하기에 우리는 이 예수님을 영원히 찬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볼만한 것이 많은 시대이지만 하나님의 어린 양 예수님께 주목하고 그 희생에 감사하고 이 주님을 높이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또 사역자들로 자기에게 주목하고 양들이 허물많고 죄악된 자기를 주목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바라보고 예수님을 높이도록 하기를 기도합니다. 

어린 시절 저는 우연히 알게 된 정욕행위를 자고 있던 여동생에게 몰래 행한 일로 깊은 죄의식과 수치심에 시달렸습니다. 저는 죄를 짓기 전의 상태로 되돌아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습니다. 저는 더럽혀진 자신에 실망하고 삶에 소망을 가질 수 없었습니다. 저는 저의 죄문제를 해결 할 수 없어 구원자를 찾았습니다. 어느 날은 하늘을 향해 탄식하며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그 기도 후 얼마 후에 친구가 저를 어린이 성경학교에 인도하였습니다. 저는 거기서 저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그랬을 때 저를 짓누르던 무거운 죄짐에서 자유케 됨을 체험하였습니다. 그러나 그후에도 청소년 시절 정욕의 죄에서 온전히 자유로울 수 없었습니다. 

이런 제가 대학에 와서 1학년 여름수양회에 초청을 받았고 십자가에 달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용서의 기도와 사랑을 덧입게 되었습니다. 수양회 마지막 날 저는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요21;15) 말씀을 통해 저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주님의 사랑을 깊이 감동되었고 그 사랑에 감격하여 울었습니다. 저는 수양관 옆을 흐르는 시냇물을 찾아 한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을 씻었을 때 새로운 하늘이 열리는 것을 체험했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어린 양되신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만 주목하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 때 그의 피의 능력이 제 삶에서 역사하였고 저는 청년의 정욕을 이기고 주님과 주님의 양들을 섬기는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라헬에게 꽂혔던 야곱처럼 저는 예수님께 꽂혀서 청년의 시기를 아름답고 행복하게 보낼 수 있었습니다. 제가 바라볼 것이 많지만 하나님의 어린 양 예수님을 바라봄으로 그 피의 능력을 덧입고 주님의 양들을 섬기는 삶을 계속하여 잘 감당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제가 본문을 통해 자신은 티끌이나 소리처럼 여기고  오직 하나님의 어린 양 예수님을 드러내고자 했던 세례요한을 통해서 많이 배웠습니다. 제가 사역자로서 자신이 찬양받고 높힘받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음을 돌아보고 회개하고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얼마나 어이없는 생각인지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제가 부패한 자신이 아니라 찬양받기에 합당하신 어린 양 예수님을 드러내고 주목케 하는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30-34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인간적으로 세례요한의 친척동생이지만, 신성으로는 태초부터 계셨던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러니 죄가 없는 분이고 그러기에 그의 죽으심이 대속의 효력을 갖습니다. 세례요한도 예수님을 잘 몰랐습니다. 그런데 그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라 하셨던 하나님이 누군가에게 성령이 임하는 것을 볼 때 그분이 성령세례를 베푸는 분임을 알라고 하셔서 예수님을 알아보게 되었습니다. 성령세례는 사람의 죄를 근본적으로 소멸시키고 거듭나 새 사람이 되게 하는 세례입니다. 

35,36절을 보십시오. 세례요한은 이튿날 예수님을 보고 다시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증거했습니다. 그러자 세례요한의 두 제자가 예수님을 따르게 되었습니다. 세례요한은 자기 제자들이 자기보다 예수님을 따르도록 도왔습니다. 그 두 제자는 예수님을 제대로, 깊이 알고자 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계신 데를 알아 예수님과 제대로 함께 했습니다. 그리고 두 제자중 한 사람인 안드레는 형을 찾아가 감격적으로 말했습니다.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그리고 형 시몬을 예수님께 인도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비전을 심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게바는 아람어로 반석이란 뜻인데, 예수님이 촌어부에 불과한 베드로를 하나님의 나라의 반석으로 삼으실 의지와 비전을 피력하셨습니다. 

두 제자에게 예수님이 무엇을 구하느냐고(38) 질문하셨는데, 이것이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이 최초로 하신 말씀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관심 갖고 구할 것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먼저 구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 인생의 근본문제의 해결자를 만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좋은 대학, 학점, 직장, 배우자, 물질을 구하는 것보다 더 중요합니다. 이런 면에서 두 제자는 매우 현명하였습니다. 주님은 그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주님이 모든 것을 더해주시지 않아도 우리는 먼저 메시야를 구해야 합니다. 그런데 메시야를 구할 때 모든 것을 더해주신다고 하니 우리가 먼저 메시야를 구하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43-51절은 안드레, 요한, 베드로 외에 두 제자가 더 부르심을 받은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베다니에서 갈릴리로 가시려다가 빌립을 만나셨고 그를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마침 빌립은 안드레, 베드로와 같은 동네 벳새다 출신이었습니다. 빌립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은 후에 자신의 베프 나다나엘을 찾아가 예수님을 소개했습니다. 그는 나다나엘이 성경을 잘 알고 있기에 구약성경이 약속한 그분을 만났다고 말했습니다. 이때 나다나엘이 뭐라고 했습니까?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46) 나다나엘은 성경실력이 꽤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리스도는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빌립의 말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이때 빌립이 사실은 에수님이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고 자라기만 나사렛에서 자랐다는 설명을 했으면 좋았으련만 그건 몰랐던 것 같습니다. 말문이 막힌 빌립은 뭐라고 하였습니까? “와서 보라” “와서 보라” 이 말은 말문이 막히거나 더 이상 어떻게 할지 모를 때 전도할 수 있는 지혜를 가르쳐 줍니다. 한마디로 그러지 말고 네가 직접 와서 질문도 하고 알아보면 되잖아 라는 뜻입니다. 나다나엘은 베프가 그렇게 말하니 한번 직접 자신이 경험해 보고자 예수님께 왔습니다. 이를 보면 우리가 예수님을 잘 몰라도 얼마든지 전도할 수 있습니다. 형이나 동생이나 베프에게 자신의 솔직한 감정과 체험을 나누면 됩니다. 말문이 막히면 “와보라”라고 말하면 됩니다. 저도 1학년 입학식 때 한 친구를 사귀게 되었고 그에게 좋은 데 있으니 한번 가보자 하니 따라왔고 나중에 요회목자요, 선교사까지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진짜 만난 사람의 두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로 내가 정말 예수님을 감격적으로 만난 날이나 시간까지 기억한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반드시 전도한다는 것입니다. 전도하지 않는 사람은 정말 예수님을 만났는 지 믿기 어렵습니다. 우리 모두가 우리의 인생문제의 해결자 메시야를 감격적으로 만나고 우리의 사랑하는 가족과 베프들을 주님께 인도하길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나다나엘이 간사한 것이 없는 곧 정직하고 순수한 사람임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나다나엘은 자신을 정확히 아시는 주님으로 인해 놀라며 예수님의 신성을 고백했습니다. 예수님은 그 신성으로 그가 무화과나무 아래서 무슨 기도를 드렸는지를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부르심 받기 전에 어디서 무엇을 했고, 어떤 기도를 했는지도 알고 계십니다. 주님께 부르심을 받을 때 이런 신비한 경험들이 있을 것입니다. 아직 주님을 깊이 만나지 못한 분들은 자신만의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진지한 기도를 드려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놀라는 나다나엘에게 앞으로 더 놀라운 일들을 많이 경험하게 될 것이라고 영적 소원을 심어주셨습니다. 


결론입니다. 정말 우리가 바라봐야 할 분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 예수님입니다. 죄문제는 심각하고 죄로 고통하는 영혼들이 많습니다. 우리가 세례요한처럼 예수님을 소리높여 캠퍼스 광야에서 전하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사역자들로 죄악된 자신을 드러내려 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어린 양 예수님을 드러내고 찬양하는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