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출애굽기 제 7 강
여호와를 경외하며 믿었더라
말씀/ 출애굽기 13:17-15:21 요절/ 출애굽기 14:31 “이스라엘이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행하신 그 큰 능력을 보았으므로 백성이 여호와를 경외하며 여호와와 그의 종 모세를 믿었더라”
오늘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마른 땅으로 건너는 사건입니다. 하나님은 출애굽한 백성들을 위해 홍해를 가르시고 안전하게 통과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애굽 군대를 바다에서 몰살시키셨습니다. 이를 통해 여호와 하나님이 전능하신 분이요 유일하신 참 신이심을 드러내셨습니다. 우리가 오늘 말씀을 통하여 유일한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에 대해 새롭게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이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덧입기를 기도합니다.
지난 말씀을 보면, 하나님이 애굽에 내리신 10번째 재앙, 곧 장자 재앙을 계기로 출애굽이 시작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라암셋을 떠나서 숙곳에 이르렀습니다. 라암셋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했던 고센의 중심 도시였고, 숙곳은 고센의 다른 지역에서 거했던 백성들도 다 함께 모인 집결지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숙곳에 모여 군대와 같이 질서 정연하게 애굽을 나왔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그들을 어떻게 인도하십니까?
13:17절입니다. "바로가 백성을 보낸 후에 블레셋 사람의 땅의 길은 가까울지라도 하나님이 그들을 그 길로 인도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이 백성이 전쟁을 하게 되면 마음을 돌이켜 애굽으로 돌아갈까 하셨음이라." 숙곳에서 가나안 땅으로 가는 가장 가까운 길은 '가자'라고 하는 해안 도시를 통한 해변 길이었습니다. '가자'는 지난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중에 뉴스에 많이 나왔던 '가자'지구를 말합니다. 그 도시를 통과하는 길이 해변 길입니다. 이는 낮고 평평한 지대로 고대의 상인들과 군대가 주로 사용하던 길이었습니다. 애굽에서 나온 백성들이 그 길로 가면 일주일이면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을 어디로 인도하십니까? --> 그림1 그 가까운 길로 인도하지 않으십니다. 홍해의 광야 길로 인도하십니다. (18a)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는 이스라엘 백성이 전쟁을 하게 되면 마음을 돌이켜 애굽으로 돌아갈까 우려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해변길로 가는 북동쪽에는 애굽의 국경수비대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막강한 병력으로 국경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이들과 부딪치게 되면 이스라엘 백성은 겁을 먹고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고자 할 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멀리 아래쪽 우회로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노예 백성이었던 그들의 연약함을 잘 이해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잘 이해하시고 섬세하게 인도하십니다. 갑자기 감당하기 힘든 문제를 주셔서 우리로 엎드러지게 하지 않으십니다. 사탄 마귀는 우리가 하나님을 따르기로 결단하면 우리가 중간에 그만두게 되어 아니함만 못할 것이라는 의심을 심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천천히, 섬세히 우리의 믿음을 키우며 인도하십니다. 이 하나님을 믿을 때 우리는 미리 겁을 먹을 필요가 없습니다. 하루하루 주어진 길을 믿음으로 가면 되는 것입니다.
18b,19절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대열을 지어 나올 때에 모세가 요셉의 유골을 가졌으니 이는 요셉이 이스라엘 자손으로 단단히 맹세하게 하여 이르기를 하나님이 반드시 너희를 찾아오시리니 너희는 내 유골을 여기서 가지고 나가라 하였음이더라." 모세는 애굽을 나올 때 요셉의 유골을 갖고 나왔습니다. 창세기 50:25절을 보면 요셉이 이렇게 유언합니다. "요셉이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맹세시켜 이르기를 하나님이 반드시 당신들을 돌보시리니 당신들은 여기서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 하라 하였더라." 여기서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는 것은 "You shall carry my bones up from here" (NAS)입니다. "You shall" 장차 반드시 그렇게 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창세기의 요셉은 애굽의 전무후무한 탁월한 총리였습니다. 애굽을 기근에서 구원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성대한 장례식과 함께 거대한 피라미드에 묻힐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애굽에서 살면서도 언제나 조상들이 묻힌 가나안 땅을 소망하였습니다. 이는 그가 애굽의 화려한 문명보다 하나님의 나라를 사모한 것을 의미합니다. 그에게는 역사의식이 있었습니다. 자기가 애굽에 온 것이나, 동족들이 애굽에 정착하게 된 것이나 모두 하나님의 구속역사의 계획 가운데 있음을 믿었습니다.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실 것을 믿었습니다. 이 믿음으로 자기의 유골에 대해 유언한 것이었습니다.
요셉은 110세에 그 유언을 하고 죽었습니다. 그로부터 약 360년 후에 출애굽이 이루어집니다. 그는 30세에 애굽의 총리가 되었는데 야곱 자손들이 애굽에 도착한 때는 요셉의 나이 39세 때였습니다. (창45:11) 지난 360년 간 이스라엘 백성들은 요셉의 유언을 기억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출애굽 때 가지고 나온 것입니다. 요셉은 그의 선지자적인 유언을 통해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믿음과 소망을 심었습니다. 그는 애굽에서 유명한 사람이었지만 애굽에 소망을 두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나라에 소망을 두었습니다. 우리도 이 땅에서 요셉과 같이 세상의 편안함과 화려함에 매몰되지 않고 하나님 나라에 소망을 두고 살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어떻게 인도하십니까? 21,22절입니다. "여호와께서 그들 앞에서 가시며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기둥을 그들에게 비추사 낮이나 밤이나 진행하게 하시니 낮에는 구름 기둥, 밤에는 불기둥이 백성 앞에서 떠나지 아니하니라." 이스라엘 백성은 지금 길이 없는 광야를 가는 중입니다. 우리는 늘 이미 만들어진 길을 다닙니다. 다른 사람이 가보지 않은 길을 가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실제로 길이 없는 곳을 간다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산에서 한번 길을 잃어본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길을 벗어나 보면 땅도 험하고 장애물도 많습니다. 위험합니다. 그런데 비록 광야 길을 갈지라도 하나님과 함께 가면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앞장서서 길을 인도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길이 없는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하셨습니다. --> 그림2 학자들은 이는 두 개의 기둥이 아니라 하나의 기둥이었다고 봅니다. 그 윗부분은 우산처럼 퍼져서 온 진을 덮었던 것으로 봅니다. 광야는 낮에는 뜨겁고 밤에는 춥습니다. 하나님은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광야의 뜨거운 햇볕을 차단해 주셨습니다. 밤에는 열기를 방출해 추위에서 보호해 주셨습니다. 이 기둥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 생활 40년, 전 기간 동안 함께 있어 그들을 가나안으로 인도하였습니다. (느9:19) 이 기둥은 하나님의 임재의 표시였습니다. 그들은 광야에 버려진 존재들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과 늘 함께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때로 광야와 같은 세상에 버려진 듯한 느낌이 듭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그 어느 곳이나 천국입니다. 어떤 사람은 천국 가서 모든 즐거움을 누리되 하나님은 안 계셔도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천국입니다. 초막이나 궁궐이나 하나님이 계시는 곳 그곳이 복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비록 광야를 지나지만 하나님의 함께 하심으로 복된 백성들이었던 것입니다.
13:20절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첫째 숙영지인 에담에 장막을 쳤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모세에게 무슨 명령을 하십니까? 14장 1,2절입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돌이켜 바다와 믹돌 사이의 비하히롯 앞 곧 바알스본 맞은편 바닷가에 장막을 치게 하라." 여기서 '돌이켜'라는 말은 "turn back"입니다. 되돌아가라는 것입니다. 지금 한 시가 바쁘게 애굽에서 최대한 멀리 가야할 시점입니다. 언제 애굽 군사들이 쫓아올지 모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오던 길을 되돌아 가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바알스본 맞은편 바닷가에 장막을 치라고 하십니다. 이곳은 바다를 앞에 두고 양옆에는 산이 있는 지형입니다. 앞으로도 옆으로도 더 나아갈 수 없는 곳입니다. 한 마디로 막다른 골목입니다. 거기에 장막을 치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는 바로가 이 소식을 들으면 이스라엘 백성이 방황하다가 궁지에 몰렸다고 오판을 하고 그들을 추격할 것을 아셨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바로와 그의 군대로 인하여 영광을 받게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4)
아니나 다를까 바로는 엄청난 병력을 이끌고 추격해옵니다. 14장 7절입니다. "선발된 병거 육백 대와 애굽의 모든 병거를 동원하니 지휘관들이 다 거느렸더라." 오늘날로 말하면 탁월한 장교들이 이끄는 최정예 전차 600대와 다른 모든 전차들을 동원하여 그들을 추격한 것입니다. 10절입니다. "바로가 가까이 올 때에 이스라엘 자손이 눈을 들어본즉 애굽 사람들이 자기들 뒤에 이른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심히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부르짖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니 애굽 군대가 중무장을 한 채로 전차들을 앞세워 흙먼지를 날리며 자기들에게 오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주인으로 섬겼던 애굽인들이 얼마나 강하고 잔인한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반면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전혀 무장을 하지 않았습니다. 많은 부녀자들과 아이들, 노인들을 생각할 때 아무런 저항을 할 수도 없었습니다. 앞으로 나아갈 수도 없고 옆으로 도망갈 수도 없습니다. 독 안에 든 쥐 같은 형편이었습니다. 그들은 몰살당할 것 같은 공포에 떨었습니다.
그들은 완전 패닉하여 지도자 모세를 원망합니다. 11,12절입니다. "그들이 또 모세에게 이르되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우리에게 이같이 하느냐 우리가 애굽에서 당신에게 이른 말이 이것이 아니냐 이르기를 우리를 내버려 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냐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 애굽은 땅이 넓은 광대한 나라입니다. 매장지는 얼마든지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세가 그들을 "이끌어 내었다"고 말합니다. 나오지 않고자 하였는데 강제로 끌려 나왔다는 것입니다. 이는 사실이 아닙니다. 그들은 모세를 통해 하나님의 출애굽 계획을 들었을 때 하나님께 감사하며 경배했었습니다. (4:31;12:27) 그들은 이제 죽게 되었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애굽에서 종 노릇 하면서라도 길게 사는 게 나았던 것이 아니냐? 라고 불평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은 아직 자유인으로 사는 것의 귀중함을 모릅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사는 특권을 모릅니다. 아직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믿음과 품격이 갖추어지지 않았습니다. 믿음이 보배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사람이 추해집니다. 남을 탓하고, 있지도 않은 말을 만들어 냅니다. 믿음이 없으면 당장의 고난을 피하기 위해 하나님을 배반하기도 합니다.
13,14절입니다.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온 백성들이 패닉하고 원망 불평하고 있을 때 모세는 담대하게 말합니다.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모세가 어떻게 이와같이 담대할 수 있었을까요? 이는 그가 애굽에서의 10 재앙 사건을 통해 살아계신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배웠기 때문입니다. 백성들은 10 재앙 사건 가운데 믿음을 배우지 못했습니다. 그저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만을 기쁘게 여겼습니다. 고센 땅에는 재앙이 없는 것을 다행이라고만 여겼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을 구별하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매 재앙 때마다 그 재앙을 내리시는 하나님을 생각했습니다. 실제적인 사건들을 통해 하나님이 전능하신 참 신이심을 깊히 영접하였습니다. 이런 그는 애굽 군대들이 추격해 온 이 상황에서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출애굽하게 하신 하나님이, 지금의 이 문제를 반드시 해결하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는 이제 실제적인 문제 앞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소유자가 된 것입니다. 이를 볼 때 우리는 어려운 상황일 때, 위기의 때에 그 문제 해결에 급급할 것이 아니라 믿음을 배워야 함을 봅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합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능력을 덧입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덧입은 사람에게 불가능이 없습니다. 살아계신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있는 사람은 불가능한 상황에 처할 때 도리어 감사합니다. 믿음이 점프할 수 좋은 기회로 여깁니다.
저는 지난 주에 중남미 국제수양회를 통하여 개척자 안요셉 선교사님의 믿음을 새롭게 배웠습니다. 1980년대 초, 이 종은 외교관 평신도 선교사로 멕시코에서 캠퍼스 개척을 시작하였습니다. 양을 얻기가 어려웠습니다. 제가 그 당시 이 종이 멕시코에 있을 때 선교 편지를 많이 보냈었습니다. 라울이라는 형제가 유일하게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양을 위해 기도를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안요셉 선교사님이 외교관 임기가 끝나 후임자 황아브라함 선교사님에 그 양을 인계하고 다른 나라도 갔습니다. 그러자 그 양도 떠나 버렸습니다. 당시 중남미는 비교적 부유한 나라들이었고 날씨도 좋고 부족한 것이 없었습니다. 특히 쇠고기를 주식으로 먹는다는 말을 들었을 때 가난한 한국 백성으로써 부러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들은 모든 것이 풍요하여 영적인 소원이 부족하고 춤추는 것만 좋아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나라를 개척한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라고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안요셉, 마리아 선교사님은 낙심하지 않고 하나님을 믿고 도전하셨습니다. 라틴 아메리카 개척을 위해 줄기차게 기도하셨습니다. 양 한 명을 얻기 어려웠던 그 땅에, 지금은 중남미 20여 나라가 개척되었고, 일천 명이 넘는 리더들이 세워졌습니다. 이번 멕시코 국제수양회에도 약 700명이 참석하였습니다.--> 그림3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그 믿음이 큰 열매를 맺은 것입니다. 저는 우리 모임 가운데 안요셉, 마리아 선교사님 같은 이러한 믿음의 용사들이 다수 있음을 크게 기쁘게 생각합니다. 우리도 이 땅에 사는 동안 이러한 믿음의 본을 남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지만 우리 쪽에서는 고난을 통과하는 가운데 배우는 것입니다. 우리가 고난의 때에 낙심하지 않고 도리어 믿음을 배울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여기길 기도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귀히 쓰임 받는 종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13,14절을 볼 때 모세는 백성들에게 무엇을 하라고 합니까? 아무 것도 하지 말라고 합니다. 가만히 있으라고 합니다. 그저 가만히 서서 이제부터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보기만 하라고 합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지금 이 시점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필요한 것은 애굽과 싸울 수 있는 막강한 군사력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단지 하나님을 믿고 그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보는 것 뿐이었습니다.
15절입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어찌하여 내게 부르짖느냐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앞으로 나아가게 하고"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제 그의 기도 대로 행하실 것이니 행동을 하라 하십니다. 먼저, 백성들에게 바다를 향하여 앞으로 나아가도록 명하라고 하십니다. 지금 애굽 군사들이 뒤에서 추격해오는 상황입니다. 이때 모세는 백성들에게 "바다를 향하여 앞으로 나아 가라!" 명합니다. 백성들은 "아니, 바다로 나아 가라고요? 죽으라는 것입니까?"라고 항의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가 그와 같이 먼저 백성들에게 명하고, 지팡이를 들고 손을 바다 위로 내밀어 바다를 갈라지게 합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 가운데서 마른 땅으로 걸어가게 됩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명하시고는 구름 기둥을 애굽 군사들과 이스라엘 진 사이에 위치하게 하셨습니다. 구름 기둥으로 인해 애굽 군대가 이스라엘에 접근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애굽 군대 쪽에는 구름과 흑암이 있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쪽은 밝았습니다. 21절입니다. "모세가 바다 위로 손을 내밀매 여호와께서 큰 동풍이 밤새도록 바닷물을 물러가게 하시니 물이 갈라져 바다가 마른 땅이 된지라." 모세가 바다 위로 손을 내밀자 큰 동풍이 불기 시작하였습니다. 밤새도록 불었습니다. 바닷물이 물러가 드디어 바다가 갈라져 그 가운데 마른 땅이 드러났습니다. 하나님은 "바다야 갈라지라" 명하여 즉시로 갈라지게 할 수도 있으셨습니다. 그러나 동풍이 밤새도록 불게 하여 바닷물을 물러가게 하셨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백성들이 밤새도록 그것을 보는 가운데 그들의 마음에 믿음을 심고자 하신 것입니다. 창세기 1:9절을 보면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천하의 물이 한 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그러자 그대로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이 창조 사역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가 갈라지는 일을 통해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을 체험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22절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 가운데를 육지로 걸어가고 물은 그들의 좌우에 벽이 되니." 전라남도 진도에 가면 신비의 바닷길이 있습니다. --> 그림4 세계적으로 유명합니다. 1년에 몇 차례 썰물 때에 바닷길 약 2.8 Km가 나타납니다. 그 길을 걸어갈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를 "모세의 기적"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바다가 갈라져 길이 난 것은 그런 밀물 썰물에 의한 자연 현상과는 전혀 다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갈라진 홍해를 걸어갈 때 물은 좌우에 벽이 되었습니다. 14:22절에 "물은 그들의 좌우에 벽이 되었다"라고 말하고, 29절에도 "물이 좌우에 벽이 되었"다고 반복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벽이 얼마나 높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수 십 미터의 물 벽이 양쪽에 세워졌을 것입니다. 중력의 법칙을 거스르고 이런 물 벽을 세우는 것은 오직 창조주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바다를 가르고 마른 땅으로 건너게 하는 것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이러한 놀라운 일을 행하사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은 영광의 하나님, 권능의 하나님이십니다. 이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다 가운데 세워진 물 벽 사이의 길로 들어가는 것은 심히 두려운 일이었습니다. 언제 물이 다시 합쳐질지 모르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1:29는 말하기를 이스라엘 백성들이 "믿음으로 홍해를 육지 같이" 건넜다고 합니다. 한편 애굽 사람들은 어떻게 하였습니까? 23절입니다. "애굽 사람들과 바로의 말들, 병거들과 그 마병들이 다 그들의 뒤를 추격하여 바다 가운데로 들어오는지라." 애굽 사람들은 한동안 전혀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갈라진 바다 사이로 들어가 바다를 건너는 것을 보고 있기만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구름 기둥이 이동하자 그들도 바다로 향하였습니다. 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믿음은 없었습니다. 노예 백성도 지나갔는데 우리라고 못할쏘냐 하는 인간적인 자신감이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물이 갈라진 상태가 계속되리라는 확신이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설마 갑자기 무슨 일이 일어나지는 않겠지 하는 요행심리였습니다. 그것은 한번 시험해 본다는 행동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애굽 군대를 어지럽게 하셨습니다. 바다 가운데 들어선 그들의 병거 바퀴를 벗겨버리셨습니다. 뒤에서는 밀려오는 데 병거는 앞으로 나가지 못하여 넘어지며 좌충우돌하였습니다. 그들은 그제야 여호와가 이스라엘을 위하여 싸우시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너무 늦었습니다. 모세가 다시 그 손을 바다 위로 내 밀자 바다의 힘이 회복되었습니다. 벽처럼 서 있던 바닷물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바닷물이 애굽 군사들을 덮었습니다. 무거운 갑옷과 장비를 걸친 애굽 군사들은 물속으로 수직 낙하하여 떠오르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의 중무장이 도리어 그들로 죽음에 이르게 하였습니다. 바로의 군대는 하나도 남지 않았습니다.(29)
30절입니다. 짙은 어둠이 걷히면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다 드러났습니다. 애굽 군대를 보고 비명을 질렀던 백성들의 눈에 들어온 것이 무엇입니까? 애굽 군사들의 참혹한 시신들과 전차 바퀴들이 홍해 바닷가에 즐비하게 늘어져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백성들은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행하신 그 큰 능력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습니다. 31절입니다. "이스라엘이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행하신 그 큰 능력을 보았으므로 백성이 여호와를 경외하며 여호와와 그의 종 모세를 믿었더라."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이 백성들을 홍해로 인도하신 이유를 알게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시고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그 하나님을 경외하고 믿도록 하심입니다. 하나님의 종 모세의 영적 권위를 높여주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참으로 깊고 그 인도하심은 완벽합니다.
우리가 볼 때 때때로 하나님께서 나의 인생을 엉뚱하게 인도하시는 것 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실수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결정적일 때 역전의 드라마를 일으키시는 분이십니다. 때로 홍해가 우리 앞에 시퍼렇게 놓여 있어도 믿음으로 그 바다를 향하여 나아갈 때 반드시 갈라지는 것을 우리가 체험할 것입니다. 홍해를 가르신 하나님은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애굽 군대를 멸망시키는 일에 있어서 백성들이 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위대한 용사이십니다. 우리의 영적 전쟁에 있어서도 우리를 인도하시고 원수를 멸하시고 우리를 구하시는 분은 용사이신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이 하나님을 깊히 의지하기를 기도합니다. 홍해 사건을 우리의 체험으로 영접하며 유일하신 참 신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절대적인 믿음을 덧입기를 기도합니다.
15장 1-21절은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입니다. 이 찬양에서 몇 가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첫째, 이 찬송은 구약성경에서 처음으로 나오는 찬송이라는 것입니다. 이 찬송이 나온 이유는 모세와 백성들이 하나님을 실제 삶에서 경험하였기 때문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경험할 때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경외하며 찬송하게 됩니다. 우리의 예배가 마음에서 나오는 찬송으로 충만해지기 위해서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을 경험해야 합니다. 실제적인 문제 앞에서 믿음으로 나아갈 때 우리는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둘째, 하나님이 그의 백성들을 인도하시는 궁극적인 목적은 그들을 주의 처소로 삼고자 하심입니다. 15장 13절에서는 하나님은 그들을 ‘주의 거룩한 처소에 들어가게 하신다’고 하십니다. 17절에서는 그들을 ‘주의 처소로 삼으신다’고 하십니다. 이는 하나님이 그의 백성을 당신의 나라에 초대하사 영원히 그들과 함께 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출애굽의 최종목적은 하나님의 통치의 실현, 하나님의 나라가 백성들 가운데 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를 주기도문에서 "나라가 임하시오며"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셋째, 당시 최강국 애굽을 몰살시키신 여호와는 살아계신 하나님이요 전능한 분이십니다. 유일하신 참 신이십니다. 이 분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십니다. 홍해를 가르시고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계셔서 그를 믿는 자들을 통해 그 능력을 나타내십니다. 우리가 이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가운데 우리의 삶에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고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길 기도합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은 광야에 길을 내시는 분이요, 바다에도 길을 내시는 분이십니다. 이 하나님은 전능한 분이십니다. 유일한 참 신이십니다. 이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의 믿음을 통해 불가능한 일을 이루십니다. 우리가 이 하나님을 믿음으로 우리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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