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메세지

제목2020년 마태복음 19강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서야 `(마태복음 12:22-50)2020-07-05 17:15
작성자

2020 마태복음 19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서야

 

 

말씀/ 마태복음 12:22-50

요절/ 마태복음 12:29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강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강탈하리라

 

오늘 말씀은 예수님의 사역이 보여주는 결정적인 증거에 대한 반박과 그에 대한 재반박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예수님이 누구신지 배우는 귀한 은혜의 시간 되기를 기도합니다.

 

22절을 보면 한 귀신들려 눈 멀고 말 못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현대 의학의 관점에서 보면 일반적으로 눈이 멀고 말을 못하는 것은 질병에 의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의 경우처럼 사람이 귀신의 세력에 사로잡힐 때 정상적인 기능이 마비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사로잡고 있던 귀신을 쫓아내 주심으로 그를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23절을 보십시오. “무리가 다 놀라 이르되 이는 다윗의 자손이 아니냐 하니예수께서 다윗의 자손이라는 것은 마태복음의 중요한 주제입니다. 마태복음은 1:1절에서 다음과 같이 시작합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사무엘하 7:16절을 보면 하나님은 다윗의 나라가 영원하고 다윗의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약속하셨습니다. 또 이사야 11:1-2절을 보면 다음과 같이 예언하고 있습니다. “이새의 줄기에서 (다윗의 후손 가운데)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그의 위에 여호와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강림하시리니무리들은 귀신들린 한 청년에게서 귀신이 나가는 사건을 통해, 또 지금까지 예수님의 모든 행적을 통해 이 분이야말로 이스라엘이 대망하던 다윗의 자손, 곧 메시야가 아닌가 하는 믿음의 싹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실로 기독교는 예수께서 메시야시라는 이 믿음 위에 건설되었습니다. 만약 예수께서 메시야라는 이 믿음이 흔들린다면, 더 나아가 예수께서 메시야가 아니라는 결론이 내려질 수 있다면 기독교는 뿌리채 흔들리고 역사 가운데 사라질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무리들의 마음 가운데 싹트기 시작한 이 믿음, 곧 예수께서 메시야시라는 이 믿음이 자라고 성장하여 2천년이 지난 지금 우리들의 영혼에 구원에 대한 확신을 주고 하루하루를 살아갈 힘을 주고 능력을 주고 기쁨을 주고 소망을 주고 있습니다.

 

24절을 보십시오. “바리새인들은 듣고 이르되 이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느니라 하거늘예수님 편에서 볼 때 무리들의 마음에 이 믿음의 싹이 난 것은 참으로 소중한 것이었습니다. 반면 이 소식을 들은 바리새인들은 엄청난 위기의식을 느꼈습니다. 그들에게는 예수께서 정말 메시야이신가 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더 중요한 것은 그들이 현재 누리고 있는 명예와 사회적 지위, 기타 종교 권력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사회적 특권층이었습니다. 오늘날 버전으로 한다면 호텔에 갈 경우 호텔 지배인이 바리새인의 경우 무조건 특실로 안내했으며 그가 가진 명성에 따라 50% 세일, 혹은 전액 무료로 해 주었습니다. 그가 거리를 활보할 경우 그를 보고 사람들은 고개를 숙이고 존경의 마음을 표했습니다. 오늘날 국회의원이 금배지를 차고 다니며 여러 특권을 누리는 것과 여기에 더하여 존경스러운 교수님이 학생들에게 받는 것과 같은 인정과 사랑의 대접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위선과 율법적인 면, 또 사랑없음을 날카롭게 지적하신 바가 있습니다. 만약 백성들이 이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고 따른다면 그들은 지금까지 누리던 사회적 특권과 인정을 한 순간에 다 잃을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아이돌 수퍼스타가 하루 아침에 인기를 잃고 아무도 그를 알아보지 못할 때 느끼는 상실감, 혹은 저명했던 작가가 어느날 그가 쓰는 글을 아무도 관심갖고 읽어주지 않을 때 느끼는 상실감과 유사한 것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어떻게 하면 예수께서 메시야가 아닌가 하는 이 백성들의 여론을 잠재울 수 있을지 모여서 의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이 생각해낸 비책은 흑색선전이었습니다. 곧 예수께서 이런 메시야처럼 보이는 능력을 행하는 것은 그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바알세불은 사탄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곧 그가 사탄이 주는 능력으로 이런 일을 행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흑색선전에 대해 어떻게 대처하셨습니까?

 

25-26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이르시되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질 것이요 스스로 분쟁하는 동네나 집마다 서지 못하리라 만일 사탄이 사탄을 쫓아내면 스스로 분쟁하는 것이니 그리하고야 어떻게 그의 나라가 서겠느냐예수님은 그들의 악한 의도를 아셨지만 감정적으로 대응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양들을 위해 그들의 주장이 얼마나 비논리적이고 허황된 것인지를 드러내셨습니다.

 

현재 예수님은 단지 한 두 사람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갈릴리 온 지역에서 역사하는 귀신을 다 쫓아내셨습니다. 영적으로 볼 때 예수님이 사역하신 지역은 아시아와 유럽, 아프리카를 잇는 요충지입니다. 이곳에서 귀신의 세력이 물러가고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생겨날 때 아시와와 유럽, 아프리카가 순식간에 복음화될 수 있습니다. 귀신의 왕인 사탄이 정신이 나가지 않고서야 자기들이 세력을 잡고 있던 이런 요충지를 내줄리가 없습니다. 세상 역사를 살펴보아도 상대방을 기만하기 위해 아군에게 잠시 피해를 주는 전략을 펴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주력부대를 내어주는 피해를 감수하면서, 혹은 전략적 요충지를 내어주면서 기만 전술을 펴는 장수나 전략가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27절을 보십시오. “또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면 너희의 아들들은 누구를 힘입어 쫓아내느냐 그러므로 그들이 너희의 재판관이 되리라역사문헌을 연구하는 이들에 의하면 당시 바리새인들이 귀신을 쫓아내는 사역을 했다는 기록은 찾아보기 어렵다고 합니다. 이는 그들이나 그들의 제자들 가운데 귀신을 쫓아내는 사역이 드물게, 아주 가끔 있었음을 암시합니다. 그러한 경우 그들은 성령의 능력이 나타났다며 호들갑을 떨고 지역 신문에 싣는 등 크게 자랑을 하고 선전을 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수많은 귀신을 쫓아내자 사탄의 능력으로 하였다고 흑색선전을 하고 있습니다.

 

28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만약 예수님이 사탄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라면 그것은 속임수일뿐 사람들은 여전히 사탄의 통치를 받고 있는 셈이 됩니다. 만약 예수님이 사탄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냈다면 눈멀고 보지 못하는 그 사람의 외적인 증상만 나아졌을뿐 그의 내면은 여전히 사탄의 통치를 받고 있으므로 사탄이 주는 어둠과 절망, 두려움으로 고통할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 어떻게 되었습니까? 예수님을 통해 귀신이 나간 자의 마음에 빛이 임하고 생명이 임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며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렸습니다. 더 나아가 거라사의 광인의 예에서 나온 것처럼 그 지역에 예수님을 전파하는 복음의 선전부장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사역을 통해 사람들의 마음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였다면 그것은 예수님이 사탄의 능력으로 귀신을 쫓아내신 것이 아니라, 생명의 성령의 능력으로 귀신을 쫓아내신 증거가 됩니다.

 

29절을 보십시오.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강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강탈하리라당시 유대인들은 사탄이 얼마나 강한 자인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귀신이 집단적으로 나간 것과 이를 통해 사탄이 자기 소유로 붙잡고 있던 이들을 예수께서 해방시키신 것은 예수님이 그 강한 자를 결박하셨다는 증거가 됩니다.

 

그러면 사탄은 어떤 점에서 강한 자입니까?

 

먼저 사탄에게는 죄와 그로 인한 죽음의 형벌을 빌미로 한 영혼을 사로잡을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어떤 악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어떤 사람을 유혹하고 속여서 죄를 짓도록 만들었습니다. 이후 그는 그것을 약점으로 잡고 그에게 돈을 요구하였습니다. 돈을 주지 않을 경우 가족들과 모든 지인들에게 그가 범한 죄를 다 알리겠다고 협박했습니다. 그는 협박에 못이겨 돈을 줍니다. 그런데 돈을 준다고 해서 협박이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계속 돈을 요구합니다. 돈이 없으면 사채라도 얻어서 돈을 달라고 협박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가 은밀히 범한 죄를 전부 다 알리겠다고 협박합니다. 이 경우 죄의 약점이 잡힌 그 사람은 악한 이에게 완전히 사로잡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탄은 바로 이와 같습니다. 그는 죄를 범한 영혼을 포로로 사로잡고 그의 영혼을 자기 마음대로 쥐고 흔들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다음으로 사탄에게는 악한 지혜가 있습니다. 창세기 3장에 잘 나오는 것처럼 사탄은 악한 지혜가 얼마나 뛰어난지 그의 말을 들으면 많은 이들이 의심과 회의에 빠지게 되고 영적인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예수님의 사역이 사탄의 능력을 힘입은 것이라는 흑색선전은 다름 아닌 사탄이 준 지혜입니다. 창세기 3장에 나오는 것처럼 사탄은 사람의 귀에 대고 어떤 말을 속삭일 수 있는, 혹은 어떤 생각을 불어넣어주는 그런 능력이 있습니다. 간혹 뉴스 기사를 보면 이것은 도저히 사람이 했다고 생각할 수 없는 그런 끔찍한 범죄에 대한 기사를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십중팔구 사탄이 그런 악한 생각을 불어넣어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범죄에 대한 책임이 사탄에게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 범죄에 대한 책임은 자신에게 있습니다. 이처럼 사탄은 악한 생각을 불어넣고 그 악한 생각으로 인한 행위에 대한 책임은 본인 자신이 지도록 합니다.

 

마지막으로 사탄이 무서운 것은 그가 하나님과 철천지 원수이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하나님을 미워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을 매우 미워합니다. 사탄의 마음에는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에 대한 조금의 동정심도 없습니다. 사탄이 느끼는 유일한 쾌락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이 철저히 파괴되는 것입니다. 창세기 4장에서 형 가인이 동생 아벨을 비참하게 죽임으로 부모인 아담과 하와는 하루에 두 아들을 잃어 가정이 파괴되고 이 가정에 흑암과 같은 어둠이 임하게 되었습니다. 의심의 여지없이 이 끔찍한 사건의 배후에는 사탄이 있었고 그는 이 끔찍한 사건을 즐겼습니다.

 

예수님 당시 사탄은 갈릴리 지역의 수많은 영혼들을 파괴하며 쾌락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자기 자녀들이 죄로 인해 사탄의 포로가 되어 망가져 가는 모습을 보며 고통하는 부모들을 보며 사탄은 사악한 웃음과 함께 기쁨을 느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예수님에 의해 그가 사로잡았던 수많은 영혼들을 다시 빼앗기게 되었습니다. 이는 마치 자기가 가진 큰 재산으로 기쁨을 누리던 부자가 어느날 그가 가진 대부분의 재산을 빼앗긴 것과 같았습니다. 한 장수가 큰 군대를 거느림으로 세력을 과시하며 떵떵거리고 있었는데 어느날 그가 가진 군대를 대부분 빼앗긴 것과 같았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되었을까요? 그가 예수님과 비밀리 협약을 맺었기 때문일까요? 전혀 아니올시다. 그것은 그가 예수님에 의해 완전히 제압되었기 때문입니다. 마치 쿠데타를 일으켰다가 정부군에 의해 체포된 군인처럼 그가 예수님에 의해 제압되고 결박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어떻게 사탄을 결박하실 수 있으셨습니까?

 

다시 28절을 보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으로 귀신을 쫓아내셨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으로 사탄을 결박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하나님의 성령이 사탄을 결박할 능력이 있으신 것을 보게 됩니다. 창세기 1장을 보면 보면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하나님의 성령이 그 말씀이 그대로 성취되도록 하는 능력이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은 곧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무에서 유를 만드시는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캄캄한 흑암 가운데 빛을 만들어 내셨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해와 달을 만드시고 해로 하여금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달로 하여금 밤을 주관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땅의 티끌과 같은 먼지로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이 하나님의 능력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탄을 결박할 힘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사탄을 결박하셨습니다.

 

오늘날 우리 시대에 여러 문제들이 있습니다. 하늘 높을 줄 모르고 치솟는 집값, 전세값 문제, 북한의 핵문제, 코로나 문제, 코로나로 인한 세계 경제 문제, 미국의 인종 갈등 문제 등 문제가 끝이 없습니다. 정치 지도자들은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며 여러가지 방안을 제시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문제를 해결하려 노력해도 결코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이 문제를 이렇게 해결하면 그 해결책으로 인해 다시 다른 문제가 생겨납니다. 또 그 문제를 이렇게 해결하면 다시 그 해결책으로 인해 예기치 못한 제 2, 3의 문제가 새롭게 생겨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미국의 대통령이 국내 경제 문제를 해결하려고 시도한 정책이 국제 갈등을 야기합니다. 국제 갈등을 해결하려고 언급한 정치 발언이 또 새롭게 국내 갈등을 야기합니다. 코로나 대책을 위한 정책이 경제 문제를 야기합니다. 경제 문제를 돕기 위한 정책이 다시 코로나 사태를 악화시킵니다.

 

이것은 우리의 개인의 삶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개인의 삶에서도 취업 문제, 가정 문제, 친구 및 직장 상사와의 인간관계 문제, 건강 문제 등 많은 갈등과 문제들이 있습니다. 이런 갈등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름대로 해결책을 생각해냅니다. 도움을 받기 위해 인간관계에 도움을 주는 책을 읽기도 하고 해당 분야의 권위자들에게 상담을 받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노력들이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합니다. 취업을 잘 하기 위해 공부를 해야겠다고 방향을 세우지만 문제는 공부에 전혀 집중이 안되는 산만한 내면입니다. 직장 상사와 인간관계를 잘 맺기 위해 책도 읽고 심리 컨트롤로 하며 이런 저런 노력을 하지만 정말 나를 미쳐버리게 하는 상사의 언행을 접할 때 그러한 노력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이와같이 사람이 자기 능력과 꾀를 의지하여 세상을 살아보려고 발버둥칩니다. 그런데 아무리 발버둥을 치고 애를 써도 세상을 사는 것이 너무 어렵고 힘들게만 느껴집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악한 자가 세상을 붙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악한 사탄이 바리새인들의 탐욕과 이기심을 이용하여 예수님을 비방했던 것처럼 이 세상은 악한 사탄이 많은 사람들을 붙들고 조종하고 있으므로 사람들은 철옹성처럼 강해 보이고 사는 것이 힘들고 어렵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가진 힘과 능력으로 세상을 살아보겠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입니까. 얼마나 큰 만용입니까. 내가 가진 힘과 능력으로 살아보겠다는 것은 마치 계란으로 쳐서 바위를 깨겠다는 생각과 다를 바 없습니다. 백전백패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의 영적인 눈을 열어 실상을 보아야 합니다. 이 세상은 악한 사탄과 그의 통치를 받는 이들에 의해 움직여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을 이기고 승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이러한 성령의 능력을 의지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의 멍에를 메고 그를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으심으로 바리새인들의 배후에 역사하는 악한 사탄의 정체를 정확히 파악하셨습니다. 그러기에 바리새인들과 혈과 육의 감정적인 싸움을 하지 않으시고 양들이 각각 바리새인들의 말과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스스로 분별할 수 있도록 도우실 수 있으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매사에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을 의지함으로 악한 사탄의 세력에 맞서 능히 승리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30절을 보십시오.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흑색선전에 미혹되기 쉬운 양들에게 지금 분명한 결단을 내릴 것을 촉구하십니다. 지혜로우신 예수님은 양들에게 실상을 알려주는 것으로 그치지 않으셨습니다. 귀가 얇은 양들은 집에 가면 또 생각이 바뀔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양단간에 결단을 내리도록 촉구하셨습니다.

 

31-32절은 바리새인들의 죄가 매우 큼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인자를 거역하는 것은 사람의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에 대한 오해와 편견, 무지 가운데 범하는 죄입니다. 이에 비해 성령을 거역하는 것은 자기의 사사로운 욕심을 위해 알면서도 고의적으로 성령의 역사를 훼방하는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죄는 영원히 사함을 얻을 수 없습니다.

 

33-37절에서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이 근본적으로 나쁜 열매를 맺는 나쁜 나무이며 그 마음에 악이 가득함을 신랄하게 지적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악한 말이 반드시 심판을 받게 됨을 말씀하셨습니다. 이를 통해 예수님은 이제 믿음을 갖기 시작한 양들이 더 이상 바리새인들의 또다른 흑색선전에 의해 흔들리지 않도록 도우셨습니다.

 

38-41절을 보십시오. “그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 중 몇 사람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에게 표적 보여주시기를 원하나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 동안 땅 속에 있으리라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거니와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으며

 

흑색선전에 실패한 후 서기관과 바리새인들 중 몇 사람이 표적을 보여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그들은 출애굽기에 나오는 것처럼 홍해를 가르거나 흑암 재앙이 임하는 것과 같은 더 큰 메시야의 표적을 보여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예수님은 이에 대해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끝없이 표적을 요구하지만 선지자 요나의 표적 외에는 더 이상 보일 표적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요나는 큰 성 니느웨에 가서 심판의 메시지를 전하라는 하나님의 사명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요나는 원수의 나라에 가서 심판의 메시지를 전하기 싫었습니다. 혹시 그들이 회개하면 어떻게 하나 염려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배를 타고 니느웨 반대편으로 도망을 갔습니다. 배를 타고 가는 중 큰 풍랑을 만났고 심문 결과 이 풍랑은 요나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도망갔기 때문에 발생했다는 것이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결국 요나는 바다에 던져지게 되었고 그는 바다 속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큰 물고기가 요나를 삼켰고 요나는 물고기 뱃 속에 있는 동안 회개하고 주의 뜻에 순종하기로 결단했습니다. 삼일 만에 기적적으로 살아나온 요나는 니느웨에 가서 심판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40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하였습니다. 그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이 메시지를 듣고 왕부터 시작하여 심지어 짐승에 이르기까지 전부 회개를 상징하는 굵은 베옷을 입고 금식하며 회개했습니다.

 

당시 니느웨 사람들이 요나가 자기들에게 심판의 메시지를 전하기 싫어하여 도망갔다가 물고기 뱃속에서 삼일만에 살아나온 것을 알았을 수도 있고 몰랐을 수도 있습니다. 아무튼 결과적으로 그들은 요나의 표적과 그의 메시지를 믿었습니다. 이에 비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이 행하시는 수많은 표적을 보고도 그를 믿지 않았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보여주실 최후의 표적은 십자가와 부활의 표적뿐입니다.

 

42절을 보십시오.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음이거니와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구약성경을 보면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 끝에서 쉬바의 여왕이 수많은 진귀한 것들을 준비하여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지금 솔로몬보더 더 큰 이가 여기 있습니다. 예수님은 지혜의 근원이시며 지혜 그 자체이십니다. 그런데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지혜의 근본이신 이 예수님께 지혜의 말씀을 들으려 하기보다 자꾸 표적을 보여달라고만 하였습니다. 이들은 심판 때에 정죄를 받게 될 것입니다.

 

43-45절에서 예수님은 더러운 귀신의 비유를 통해 한 번 깨끗함을 받은 이가 자칫 잘못하면 나중 상황이 더 악화될 수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갈릴리 지역의 모든 귀신들을 다 쫓아내셨습니다. 이제 그들은 이 표적을 통해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어야 합니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을 경우 비유에 나오는 것처럼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악해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어느 정도 성경을 공부하고 기도의 응답을 체험했으면 이를 통해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어야 합니다. 우리가 젊은날 이 세상의 삶이 영원할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모든 것에 끝이 있듯이 우리의 삶도 끝날이 이르게 되고 그 때 우리는 주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때 주님으로부터 내가 너를 그렇게 말씀을 잘 가르쳐주는 교회에 보내주었고 특히 말씀을 사랑하고 말씀을 체계적으로 잘 가르쳐주는 11 목자님을 붙여주었는데 그랬는데도 믿지 않은 것에 대한 답변을 요구받게 될 것입니다.

 

46-50절에서 주님은 당신을 찾아온 어머니와 동생들에 대한 소식을 들으시고 누구든지 하늘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 곧 하늘 아버지께서 보내주신 예수님을 메시야로 영접하고 그의 멍에를 메고 배우는 자가 곧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결론입니다. 세상은 눈에 보이는 현상이나 사람이 아닌 사탄이 통치하고 있습니다. 이 사탄을 결박하고 승리하신 분은 예수님입니다. 이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고 그의 성령을 의지할 때 이미 결박된 사탄을 이기고 승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고 더 나아가 그의 성령을 의지함으로 매일매일의 삶에서 승리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