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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021년 디모데후서 2강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디모데후서 2:1-26)2021-02-01 0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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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디모데후서 제2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

 

 

말씀 / 디모데후서 2:1-26

요절 / 디모데후서 2:15


얼마 전 달인 프로그램을 보았습니다. 세상에는 참 많은 달인이 있습니다. 생활의 달인, 소통의 달인, 찐빵의 달인, 연속극의 달인, 마인 크래프트의 달인, 맨손 잡기의 달인 등 그들의 하는 일이나 손놀림을 보면 가히 입이 벌어질 정도입니다.그런데 그들의 특징이 있는데 하나같이 타고난 사람은 없이 달인이 되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했다는 것입니다.우리 UBF는 말씀의 달인을 키우는 곳입니다. UBF선서에 보면 나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군이다.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며 기독교 인생관을 확립한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에 우리도 말씀의 달인이 될 준비를 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이 바로 그 말씀입니다.너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라 하셨습니다. 저희가 말씀을 통해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께 힘써 드리기를 기도합니다.

 

지난 시간 사도 바울은 두려워하고 낙심하는 디모데에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말씀을 통해 구체적으로 디모데가 사역자로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 은혜 안에 강하라고 했습니다. 1절을 보십시오. “내 아들아 그러므로 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가운데서 강하고왜 은혜 안에 강하라고 했을까요? 지도자가 연약하면 짐이 되기 때문입니다. 디모데는 청결한 양심과 깨끗한 마음의 소유자로 그의 성품은 온유하고 충성되었습니다. 목자의 심정이 충만했지만 자주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는 몸도 약하고 위장병도 있었습니다. 그는 에베소 교회의 책임자가 되었지만 연소하고 연약했습니다. 이에 강해져야 했습니다. 마음이 연약하면 남의 말에 쉽게 상처를 받고 관계가 틀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마음이 강하면 넘어갈 수 있는 문제를 마음이 약해 힘들어합니다. 이에 상처를 받고 고통받아 할 수 있습니다.지도자가 상처를 받으면 항상 웃는 얼굴로 나타나 뭔가를 해야 하는데 이를 숨기지 못해 그 파장이 큽니다. 이는 자기를 위해서 공동체를 위해서도 강해야 합니다.복음의 원수들과 싸우고 양들을 지키려면 강해야 했습니다. 본문에서 강하라는 현재 수동 명령으로서 날마다 강해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럼 이런 디모데가 어떻게 강해질 수 있습니까?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가운데서 강하게 됩니다.사람이 강하게 되는 것은 개인적인 능력이나 의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은혜를 힘입을 때 강해집니다.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날마다 십자가 앞에 나올 때 강해집니다. 사람들 앞에 자신을 가져가는 사람은 화가 납니다. 늘 분노가 일어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십자가의 은혜 앞에 나아갈 때 어떤 가운데서도 이를 감당할 힘을 얻게 됩니다.


사실 이 서신을 쓰고 있는 사도 바울은 옥중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상황이었습니다. 고난으로 말하면, 힘들기로 하면 바울이 더 힘든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어떻게 흔들리거나 위축되지 않고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입니까? 그가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자신이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나를 위해 자신을 주신 그 그리스도의 사랑안에 거하기에 그는 힘들어하지 않았습니다.그분의 나를 향한 사랑을 알고 그분의 뜻을 알고 그 인도하심을 믿을 때 그는 강하고 담대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연약한 가운데서 어떻게 강하게 됩니까? 우리의 모든 영적인 힘과 은혜의 근원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나를 위해 모든 것을 주신 그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 앞에 나아갈 때 강해집니다.나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그분을 붙들 때 그 은혜가 나를 강하게 합니다. 저희도 그 십자가의 은혜 앞에 나아가 강하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두번째 충성된 자들을 세우라 하십니다. 2절을 보십시오. “또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저희가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디모데가 은혜 속에서 강하여져서 힘써 해야 할 일은 복음의 역사를 계승하여 섬길 일군을 세워나가는 일입니다. 충성된 사람에게 부탁하라는 것은 충성되고 신실한 주님의 제자를 양성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디모데를 제자로 세웠듯 디모데와 같이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충성된 사람을 키우라는 것입니다.하나님 역사의 줄기는 바로 신실한 자’ ‘충성된 자입니다. 하나님 역사는 충성된 사람들을 통해서 계승됩니다. 이에 우리도 충성된 주님의 종을 키우는 것에 집중해야 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내가 먼저 주님께 충성된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충성된 제자를 키우도록 기도해야 합니다.그럼 그들이 또 그런 충성된 자들을 키워냅니다.

3절을 보십시오. 그리고 디모데에게 무엇이라고 했습니다. “너는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병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으라했습니다.먼저 너는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병사라고 하였습니다. 병사는 전쟁터에 나가서 싸우는 자들을 말입니다. 어려움과 죽음 앞에서도 불가능 앞에서도 생명을 걸고 앞으로 나가야 하는 자들입니다. 우리의 싸움도 보이지 않지만, 사단 마귀와의 싸움입니다. 이런 영적인 전쟁에 그리스도의 좋은 병사로 부르심을 입었습니다.


그럼 좋은 병사는 어떤 자들입니까? 3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무엇보다 좋은 병사는 고난을 받는 자입니다.왜 고난을 받으라고 했을까요? 고난이 그를 좋은 병사로 만들기 때문입니다. 좋은 병사와 나쁜 병사는 고난을 대하는 자세를 보면 압니다. 그리스도 병사는 자기 생활과 하나님의 일을 둘 다 해야 하기에 고난이 따릅니다. 사명도 감당해야 하지만 생활도 감당해야 합니다.이에 고난스럽습니다.그렇다고 사명으로 인한 고난을 피해버리면 어떻게 될까요? 만약 고난이 무섭고 부담스럽다고 피하면 목자 생활이 자유스러워지고 편하여집니까? 아닙니다. 사명을 잃고 방황합니다. 사명을 피하는 순간 심령이 위축되고 소심하여졌으며 무기력해집니다. 한때는 용맹스러운 군사였던 자가 연약해지게 됩니다. 고난을 피하면 사람이 능력이 떠나가고 사랑이 식으며 온갖 세상 욕심에 시달리게 됩니다. 자기 사랑에 빠져 작은 어려움에도 힘들게 됩니다. 그러나 고난을 받으면 어떻게 됩니까? 그 고난이 도리어 그를 강하게 합니다.


저는 전에 신병교육대 조교로 군 복무를 했습니다. 우리가 신병들 처음 들어오면 병아리들 같아 보입니다. 다 큰 20대 젊은이들이 햇살만 보이면 옹기종기 모여 앉아 시름시름 졸고 앉아 있습니다. 그런데 조금 훈련 받으면 알아서 땅도 파고 알통구보하는 병사로 변합니다.훈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고난은 참으로 그를 좋은 군사로 만듭니다. 처음에는 5킬로 간편 복장 행군도 가네. 못가네. 할 수 있네. 없네. 환자다. 열외자다.’ 하며 힘들어합니다. 그러나 이들이 좀 훈련을 받으면 10킬로 15킬로 단독군장도 능히 감당합니다. 그리고 후에는 40완전군장에 천리행군도 능히 감당하는 용사가 됩니다. 훈련을 통해 강해졌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고난을 피하지 않고 감당하다 보면 어떤 고난도 능히 감당하는 강군이 됩니다. 몸이 고난을 기억합니다.이에 영적 민방위였다가도 일반 병사가 되고 좋은 병사가 됩니다.나중에는 날아가는 비행기에서도 낙하산 하나 매고 눈 하나 깜짝 않고 떨어지는 공수 특전단이 될 수 있습니다. 도리어 병사로써 받는 그 고난이 내 생활의 어려움도 이기게 합니다. 임전무퇴의 군인정신으로 하면 안 될 게 없습니다. 내 생활 정도는 생활의 달인 수준으로 감당할 수 있습니다. 또한 받은 그 고난이 내 내면에 일어나는 안일한 마음과 은밀한 죄의 유혹과 싸워 이기게 합니다. 또한 양들 안에 역사하는 죄와 사단과 끊임없이 싸워 이길 힘을 줍니다. “피할 수 없는 고통은 즐겨라는 말이 있습니다. 나중에는 어떤 고난도 쓱 웃으며 즐기는 무시무시한 자가 됩니다.


3절 하반절과 4절을 보십시오. 둘째 좋은 병사는 자기 생활에 매이지 않아야 합니다. 자기 생활이 없을 수 없습니다. 가정생활, 직장생활도 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러다가도 급한 상황이 되면 바로 전쟁에 나갈 수 있어야 합니다.세탁기를 돌려 빨래를 하다가도 잠깐 정지 버튼을 누르고 냉큼 뛰어나갑니다. 손에 퐁퐁을 묻히고 설거지를 하다가도 소집이 되면 그릇 얼른 업어놓고 뛰어갑니다.그러나 많은 이들이 자기 생활에 매여 있습니다. 얽매인다는 것은 양이 가시에 걸려서 옴짝달싹 못 하는 상황, 그래서 아무것도 못 하고 상황, 능력을 잃어버린 그런 상황을 말합니다. 어떤 분은 물질에 매여 있습니다.어떤 분은 생활의 염려에 매이고 어떤 분은 직장 일에 매여 마음마저 온통 붙들려 있습니다.이에 때로는 자기의 부르심을 망각하고 생활에 매여 그냥 생활인으로 살아갑니다. 그리스도의 병사가 아니라 생활인이나 군기가 다 빠진 민방위로 살고 있습니다. 병사가 자기 생활에 빠지면 생활인이 됩니다. 사명인이 아닙니다.이에 사명인의 정체성을 잃은 체 세상에서 방황합니다. 자기 생활에 매여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서 늘 갈등합니다. 정체성을 잃고 헤맵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 좋은 병사는 자기 생활에 얽매여서는 안 됩니다.병사에게 얽매이는 것, 생활에 얽매이면 이게 가시가 될 수 있습니다.


4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세번째 좋은 병사로 모집된 자는 모집한 자를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병사된 우리의 목적은 그를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좋은 병사와 나쁜 병사의 차이는 그 인생 목적을 보고 알 수 있습니다.좋은 병사는 그 모집한 자를 기쁘시게 하는 데 있습니다. 내 마음은 늘 생각이 하나님께 있습니다. 내가 세상에 있지만 그러나 내 삶이 모집한 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하기에 내 가슴에도 늘 기쁨이 있습니다. 나를 이 어두움과 절망에서 모집하신 그리스도를 생각할 때 마음에서 눈물이 있습니다.그리고 늘 그분이 기뻐하실 것을 생각하니 마음에 눈물이 납니다. 비록 지금은 내가 직장이나 학교나 집에서 일하고 있지만 나를 부르신 그 하나님을 생각하니 가슴이 뜨겁습니다. 그리고 언제든 부르시면 뛰어나갈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무엇에도 순종하고자 마음먹고 있습니다. 버튼만 누르면 다시 움직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인생의 목적이 자기에게 있는 자들도 있습니다. 이는 나쁜 병사들입니다. 그들은 자기를 기쁘게 하고자 하기에 자기만족이 우선입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사령관을 따르다가도 중요한 결단의 순간에 이를 따를 수 없습니다. 그러나 빌1:20,21절에서 사도 바울이 말했습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그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은 자기가 살든지 죽든지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그는 죽는 것도 유익하다고 했습니다. 그 인생의 목적이 그리스도께 있었습니다. 그때 위대한 삶을 살았습니다. 우리 인생의 목적도 어디에 있습니까? 저희가 나를 부르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인생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5절입니다. 경기하는 자가 법대로 경기하지 아니하면 승리자의 관을 얻지 못합니다. 6절입니다. 수고하는 농부가 곡식을 먼저 받습니다. 경기선수는 땀을 흘러야 하고 농부가 눈물로 씨를 뿌려야 열매를 얻듯 그리스도의 병사는 고난을 받을 때 좋은 병사가 됩니다.5절을 하반절을 다시 보십시오. 무엇보다 이런 우리에게는 승리자의 관이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가르쳐 주신 가르침과 복음을 따라 살 때 승리의 면류관이 예비되어 있습니다. 그 고난에 면류관이 있습니다.7절에서 이를 생각하여 보라고 했습니다.


8절을 보십시오. 바울은 그리스도를 기억하라고 했습니다. 내가 전한 복음대로 다윗의 씨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라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죽음으로 끝나지 않으셨습니다. 죽은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삶도 고난을 받을 때 죽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살게 됩니다.고난과 죽음은 영광의 전재입니다. 반드시 고난을 받는 사람은 영광에 이르게 됩니다.


9절을 보십시오. 바울도 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고난을 받되 죄인과 같이 매이는 데까지 고난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하나도 헛되지 않았습니다. 그가 전한 하나님의 말씀은 메이지 아니하고 증거되었습니다. 자기가 이렇게 고난받음으로 로마 사회에 복음이 전파되었습니다. 10절입니다. 도리어 그는 택함 받은 자들을 위하여 이 모든 것을 참았습니다. 그가 이렇게 참음은 그들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원의 영원한 영광과 함께 받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이 고난을 통해 택함 받은 자녀들이 영원한 영광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11절과 12절 상반절을 보십시오. 바울이 말합니다.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또한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 할 것이요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입니다. 또한 참으면 함께 왕 노릇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주와 함께 고난받는 자가 함께 죽는 자에게 다시 살 소망이 있습니다. 미쁘신 주님이 약속처럼 주와 함께 죽은 자는 주와 함께 부활하고 영광을 받게 됩니다.


13절을 보십시오.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항상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할 수 없으리라하셨습니다. 미쁘다는 것은 충실하다 성실하다는 뜻으로 주님은 미쁘셔서 자기의 말씀하신 것을 부인하실 수 없으십니다. 이 말씀하신 것을 신실히 지키십니다. 우리가 어떻게 이 길을 갈 수 있습니까? 우리가 연약해도 이 믿음의 길을 갈 수 있는 것은 이 미쁘신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저희가 은혜 안에 강하기를 기도합니다. 저희가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고 주님의 병사로 함께 고난을 받기를 기도합니다. 영광의 면류관을 받는 자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럼 이렇게 그리스도 좋은 병사 된 우리는 무엇에 집중해야 합니까? 먼저 14절입니다.바울은 디모데에게 너는 그들로 이 일을 기억하게 하여 말다툼을 하지 말라고 하나님 앞에서 엄히 명하라 하셨습니다. 본문의 그들은 당시에 예배소교회에 있던 이단들 영지주의자들을 말합니다. 16~18절에 보면 이들은 망령되고 허탄한 말로 사람들의 믿음을 무너뜨렸습니다. 또 어떤 이들은 부활이 지나갔다 말하는 이도 있었습니다. 이런 이들은 말은 악성 종양과 같았습니다. 이에 이런 이들과 말다툼하며 싸우지 말라는 것입니다.이는 유익이 하나도 없고 도리어 듣는 자들을 망하게 하려 함입니다. 19절입니다.이들이 아무리 이렇게 해도 하나님의 견고한 터는 섰습니다. 즉 하나님의 교회는 견고합니다. 인침이 있어 일렀으되 즉 하나님이 구원하실 자신의 백성을 아시고 구원하실 자들을 구원하십니다.이에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이런 불의에서 떠나라고 하였습니다.


그럼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15너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여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하였습니다.

먼저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라고 했습니다.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한다는 것은 원어로는 바르게 자른다는 뜻으로 말씀을 정확히 분석하고 다루는 것을 말합니다. 진리의 말씀을 바르게 해석해서 나눠주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입니다. 이 말씀은 사람들을 진리에 이르게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사람들이 진리를 깨닫고 구원에 이릅니다. 진리란 우주와 인생의 참된 이치를 말합니다. 진리를 분별해야 진정한 의미에서 인생이 시작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진리는 말씀 속에 풍성하고 확실히 계시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말씀을 옳게 분별해야 합니다. 교회가 어떤 곳입니까? 교회는 진리의 기둥의 터이며 (딤전 3:15) 사도의 말씀 사역 위에 세워진다(2:42)고 하였습니다. 이에 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여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 일을 하는 사람을 말씀 사역자라고 하며 디모데가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이에 디모데는 최고의 책임감과 자부심을 가지고 이 일에 헌신해야 합니다. 이 진리의 말씀을 분별하여 사람들로 진리에 이르게 하는 일에 달인이 되어야 합니다.왜 에베소 교회 가운데 이단들과 거짓 선생들이 나타났습니까? 왜 사람들이 망령되고 허탄한 말을 합니까?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크고 작은 말씀 사역자들입니다. 우리가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는 것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우리가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할 때 거짓됨을 드러내고 진리를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할 때 이 말씀이 나를 죄와 어두움에서 건져내고 자신과 양들을 지킬 수 있습니다.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할 때 그 말씀은 성령께서 하시는 말씀이 되어 사람들의 내면에 믿음과 순종의 역사를 일으킵니다. 이 진리의 말씀이 사람들의 내면에 감동과 결단을 일으킵니다.그래서 우리는 말씀 사역자들로써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말씀을 다루고 연구해야 합니다. 말씀을 이해하고 제시해야 합니다. 학자적인 자세를 가지고 말씀을 연구하고 받아드려야 합니다.

최근에 말씀 한마디를 잘못 해석해서 반사회적인 이단들이 많이 나왔습니다.통일교나 신천지 등은 성경의 말씀을 자의적으로 혹은 오해함으로 이루 말할 수 없는 망령되고 허탄한 일을 벌이고 있습니다.그리고 그 안에 사람들을 병 들이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기 위해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되어야 합니다. 부끄러울 것이 없다는 것은 말씀의 종이 말씀을 분별하는데 틀리게 해석하거나 잘못 해석해서 부끄러운 일 당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을 옳게 분별하는 면에서 인정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해 우리는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써야 합니다.15절 하반절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길 힘쓰라라고 하셨습니다.매일 일용할 양식을 먹고 소감을 쓰는 것 말씀을 분별하는 좋은 작업입니다. 우리 목자님들 가운데는 진리의 말씀을 분별하기 위해 말씀을 암송하기도 하고 팩튜얼 스터디를 하기도 합니다. 말씀을 필사는 분도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 앞에 자신을 힘써 드린 것입니다. 또 이렇게 할 때 나 자신도 능력의 종이 됩니다.


의사들은 생명을 감당하는 자들로 의사가 되기 위해 예과부터 본과 6년을 학교에 다닙니다. 그리고 의사 국가고시를 패스하고 인턴과 레지던트4-5년을 거칩니다. 거기에 군의관 3년에 펠로우1년을 하고 전문의 시험을 보고 합격해야 합니다. 그 안에는 밤잠 못 자가며 환자를 보고 또 공부하기를 반복합니다. 피아니스트 악보를 보지 않고 건반을 치기 위해 수없는 연습의 나날을 머릿속으로 악보를 생각하며 그리고 또 그리기를 반복합니다. 현을 만지는 음악가들은 손에 피가 굳은살이 피도록 연습하고 또 연습합니다. 하나의 음이나 음색도 놓치지 않기 위해 집중하고 또 집중합니다. 발레리나의 발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녀의 겉으로 보이는 아름다운 웃음과 달리 토슈즈에 숨겨진 발가락은 다 뭉뚱그려져 있습니다. 다 뭉개져 토우 발가락 두개만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사이클 선수들도 연습을 너무 많이 해 무릎에 연골이 없습니다. 이에 그 근방 근육을 키워 싸이클을 탑니다. 그리고 경기를 위해 체중도 조절하고 심박도 조절합니다. 최대 산소량을 계산하고 경사도에 따른 발의 회전수와 심박을 수시로 조절합니다.세상에서도 이 정도 연습하는데 우리가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 해야 할까요! 그렇게 연구한 그 말씀은 그를 변화시키고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또 그렇게 연구한 말씀은 사람들 내면에 감동을 줍니다. 그 말씀은 내 영혼에 감동을 주고 진리에 굳게 서게 합니다. 내가 또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할 때 죄와 어두움 가운데 있는 이 시대 영혼들을 구원해 내고 또 이런 사단 마귀 이단들로부터 나 자신을 지키고 이 시대를 지키고 양들을 지킬 수 있습니다.


고 이 사무엘 선교사님은 UBF 초창기에 말씀을 분변하심으로 양들을 섬기시고 시대를 섬기셨습니다. 그 무렵 한국은 절망적이고 소망이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특히 대학생들은 어떤 꿈을 가질 수 없었던 시대였습니다. 그때 사무엘 말씀을 연구하셨습니다. 그리고 말씀을 통해 한국 백성들의 내면에 있는 깊은 운명 주의를 보셨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이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었습니다. 창세기 강의안을 쓰시며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말씀을 통해 한국 백성은 울 밑에선 봉선화처럼 운명적인 존재가 아니고 그들에게 복의 근원으로써의 소망을 심으셨습니다. 그 말씀이 그 젊은이들로 하여금 성서 한국과 세계선교를 위하여 헌신하게 하는 밑거름이 되었습니다.그 말씀의 분별이 사람들의 내면에 성령의 불을 일으켰습니다. 여기에는 진리의 말씀에 대한 분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므로 양들을 섬기고 시대를 섬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할 때 그 말씀이 사람들의 속에 들어가 불을 일으킵니다.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할 때 그 말씀이 나를 일으키고 사람들의 내면에 일으키게 합니다.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할 때 이 시대를 섬길 능력을 덧입게 됩니다. 자기만을 위해 살던 젊은이들이 주님의 거룩한 청년으로 일어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진리의 말씀을 분별할 때 죽은 영혼이 일어나게 사람들이 죄악을 끝고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할 때 성령이 임하십니다.


우리가 이 코로나 시대에 무엇을 해야 합니까? 우리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말씀을 분별하는 뛰어난 사역자가 되어야 합니다.말씀을 분별하는 것이 양들을 섬기는 일이요 시대를 섬기는 일입니다.죄악과 싸워 이기는 길입니다.우리가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기를 기도합니다.


20, 21절을 보십시오. 그리기 위해 자신을 깨끗게 해야 합니다. 금 그릇이라고 쓰임 받고 질그릇이라고 버림받는 것이 아닙니다.깨끗한 그릇이 귀히 쓰임 받는 것입니다. 아무리 금 그릇이어도 더러운 것이 있으면 쓸 수 없습니다. 22절을 보십시오. 이에 너는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따르라 하였습니다. 요즘은 65세까지 청년입니다.이에 청년이 깨끗하게 되려면 시간을 늘 하나님 앞에서 보내야 합니다.최문주 목자님 많은 시간을 하나님 앞에서 보냈습니다. 바쁜 업무에도 불구하고 이번에 사무엘 선교사님의 누가복음을 번역하여 책으로 출간했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누가복음뿐만 아니라 로마서, 요한복음, 마가복음도 번역하셨습니다. 이는 자신을 가장 깨끗하게 드린 경우입니다.

그리고 온유함으로 훈계해야 합니다. 24~26절을 보십시오. 주의 종은 마땅히 다투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에 대해서 온유함으로 가르치기를 잘하며 참으며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훈계할지니 혹 하나님이 그들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함이라고 했습니다.


저도 말씀을 감당하며 제가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기 위해 얼마나 힘써야 하는가 깨닫게 되었습니다. 말씀을 분별하는 일에 우선순위를 두고 착념해야 하는가 깨닫습니다. 전에 종로에 있을 때 일만 열심히 했지, 말씀의 훈련을 받은 적이 없었습니다. 믿음으로 순종하여 더플 백 하나 메고 제주에 목자로 내려갔습니다. 심정은 있는데 말씀이 매우 부족했습니다. 이에 제가 말씀만 전하면 사람들이 이것도 메세라고 전했냐며따졌습니다.참으로 부끄럽고 숨고 싶은 시간이었습니다.이에 3년간을 울면서 기본적으로 말씀을 분석하고 받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몇몇 센터 시니어 스텝 목자님들을 찾아가 제발 저 좀 가르쳐 주세요하며 부탁했습니다.저는 한마디 말씀을 받기 위해 몸부림치는 투쟁을 감당했습니다. 이에 이런 제가 불쌍했는지 그 후로는 사람들이 저를 쫓아오지는 않았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말씀 앞에 투쟁이 저를 살게 했습니다. 16년간 개척 목자로 매주 말씀을 전하며 그 말씀을 연구하고 순종한 것이 저에게 힘을 주었습니다. 매주 가장 행복하고 기쁘고 즐거운 시간이 말씀을 파는 시간이었습니다. 산고의 과정은 힘들고 어렵지만, 말씀을 깨달을 때, 분별할 때 거기에서 오는 기쁨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었습니다. 누구 하나 보는 사람 없어도 누구 하나 뭐라는 사람 없어도 때로는 가족들만 데리고 말씀을 전해도 혼자서 말씀 때문에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신나서 뛰어다니고 또 그 말씀에 순종해서 캠퍼스에 올랐습니다.그 말씀을 믿음으로 순종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지금도 말씀을 분별하는 저의 자세는 많이 부족합니다.종로 시니어 목자님과 말씀 공부하며 순간순간 뜨끔할 때가 있습니다. 또 목자님들의 말씀을 사랑하고 말씀을 연구하며 말씀 공부 노트를 성실히 준비하는 것을 보고 한없는 부끄러움을 느낍니다.말씀에 감추인 뜻을 받기 위해서 저도 잘 모르는 헬라어 히브리어 원어를 연구하시고 그 뜻을 풀기도 하십니다. 또 그 말씀을 깨닫기 위해 말하기보다 듣고 배우고자 하십니다. 그러나 저는 이보다 도리어 여러 가지 행사나 모임 활동에만 신경을 썼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대한 문제의식도 별로 없었습니다. 제가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므로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말씀의 종으로 성장하기를 기도합니다. 말씀의 종으로써 학자로써 인정된 사람, 진리의 말씀의 공급자로 인정된 사람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제가 성장해야 양들이 성장하고 제가 섬기는 모임이 성장을 합니다. 제가 말씀을 옳게 분별해야 부끄러움 당하지 않습니다. 제가 말씀 연구에 힘쓰겠습니다. 이에 사무엘 선교사님처럼 말씀을 옳게 분별하므로 사람들의 마음에, 양들에 마음에 불을 일으키는 목자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말씀을 옳게 분별하므로 저를 살리고 양들을 살리는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주님 앞에 자신을 힘써 드리기를 기도합니다.

 

결론입니다.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은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는 고난을 감당하는 자입니다.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은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는 자입니다. 저희가 말씀의 중요성을 알고 말씀의 달인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학자와 같은 자세로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자신을 힘써 드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