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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2019 신년 1강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요한복음 17:1-26)2018-12-31 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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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신년 1강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말씀/ 요한복음 17:1-26

요절/ 요한복음 17:21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2018년이 가고 대망의 2019년의 새해가 밝아오고 있습니다. 이 시간 세계 대표이신 윤모세 목자님을 통해 주신 2019년 신년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이 말씀을 통해 2019년의 우리 모임 전체의 내적 방향을 잘 잡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이르시되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본문에서 때가 이르렀다는 것은 십자가를 지실 때가 이르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영화롭게 되시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십니다. 십자가의 죽음은 비참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죽음으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죄인들을 죄에서 구원함으로 영광이 됩니다.


2절을 보십시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만왕의 왕, 만주의 주가 되십니다. 이를 통해 그를 믿는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십니다.


3절을 보십시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영생은 단지 영원히 사는 것만 의미하지 않습니다. 영생의 보다 더 근본적인 본질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아는 것은 지식적인 앎이 아니라, 체험적인 앎을 의미합니다.


4절을 보십시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하라고 주신 일을 이루심으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그러면 아버지께서 예수님에게 맡기신 일이 무엇입니까?


첫째, 아버지를 세상에 나타내는 것입니다. 6절 상반절을 보십시오.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자신을 창조된 만물을 통해 나타내십니다. 매일 아침 창공을 뚫고 힘차게 떠오르는 저 태양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크고 강한 손이 있지 않고서야 어떻게 매일 아침 이런 경이로운 일이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 만물을 촉촉히 적시는 저 빗소리를 들어보십시오. 하나님의 자비로운 사랑의 손길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이에 더하여 하나님은 모세와 선지자들을 통해 기록된 성경을 통해 자신을 나타내셨습니다. 마치 편지를 읽어보면 편지를 쓴 사람의 숨결이 느껴지는 것처럼 하나님의 편지인 성경을 읽을 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여기에 더하여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보내사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나타내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십니다(히 1:3). 예수님을 본 자는 아버지를 본 자입니다(요 14:10). 예수님의 말씀과 그의 인격과 그의 사역을 통해 하나님을 가장 정확히 알 수 있습니다.


둘째, 하나님은 예수님께 메시야로서 죄인을 구원하는 일을 맡기셨습니다. 하나님은 죄인일지라도 사랑하십니다. 그러나 그 죄문제가 해결되지 않고서는 그 누구도 거룩한 하나님 나라에 들어올 수 없습니다. 죄문제는 죄를 범한 자가 피흘려 죽음으로만 해결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죄 없으신 예수께서 죄인들을 위해 대신 십자가에 피흘려 죽으심으로 이 죄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제 이 일을 십자가에서 온전히 이루십니다.


셋째, 하나님이 예수님께 맡기신 일은 교회의 기초가 되는 열 두 제자를 양성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열 두 제자들을 통해 온 세상에 복음이 전파되도록 하셨습니다.


이와같이 예수님은 33년의 짧은 삶 가운데 30년간 준비기간을 가지시고 공생애 3년동안 아버지께서 맡기신 일을 다 이루셨습니다. 이 일을 이루실 때 예수님은 사람들의 인정이나 비판에 휘둘리지 않으셨습니다. 사람들과 다투지도 않으시고 분을 내지도 않으셨습니다. 오직 아버지께서 하라고 하신 그 일을 묵묵히 감당하며 정진하셨습니다(마 12:19).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숨을 거두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다 이루었다”


예수님의 삶을 볼 때 비록 짧지만 하나님께서 하라고 맡기신 일을 다 이루심으로 가장 위대한 삶을 사신 것을 보게 됩니다. 100세 시대를 맞아 오래오래 장수하는 것도 복이지만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신 일을 다 이루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2019년 우리 각자에게 맡기신 일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도 작은 예수가 되어 나를 통해 주변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구원의 복음을 전함으로 생명을 살리는 것이요, 주님의 제자들을 세우는 것입니다. 2019년 주님이 맡겨주신 이 일에 전심전력하는 한 해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6-19절은 제자들을 위한 기도입니다. 제자들을 위한 예수님의 구체적인 기도제목이 무엇입니까?


첫째, 그들을 보전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11절을 보십시오.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그들은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은 세상에 계시는 동안 제자들을 세상으로부터 보호해주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님이 세상을 떠나심으로 이제부터는 아버지께서 그들을 보호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아버지께서 그들을 보전, 곧 보호해주시고 지켜주시면 어떻게 됩니까? 다시 한 번 11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그들을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여기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제자들이 하나가 되지 못하는 문제는 단지 개성이나 성격상의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마지막 날이 임하기까지 잠시 세상을 주관하고 다스리는 사탄의 영으로부터 보호받지 못한 결과라는 사실입니다. 사탄이 가장 원하는 것은 제자들이 서로 미워하고 다투는 것입니다. 불신하게 만들고 사랑이 식게 합니다. 분열시키고 무너지게 합니다. 오직 아버지께서 보호하여 주실 때에만 제자들은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은 서로 다른 인격(Person)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러면서도 성령 안에서 두 분이 하나가 되십니다. 서로에 대한 깊은 친밀함과 사랑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러면서도 서로의 인격을 존중합니다. 성자 예수께서 십자가의 모진 고난을 당하실 때 성부 하나님은 결코 이것을 강제로 요구하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인간이 죄로 인해 장차 받게 될 무서운 심판과 이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이 무엇인지 말씀해 주셨습니다. 성자 예수님은 온전히 자원하는 마음으로 성부 하나님의 선하고 아름다운 뜻, 인간들을 향한 크신 하나님의 사랑의 뜻을 받들었습니다. 성부 하나님은 이 성자 예수님을 자기 생명과 같이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보전하여 주심으로 제자들도 이와같이 서로 하나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십니다. 서로가 분명히 다른 인격과 개성을 가지고 있지만 서로가 상대방의 인격과 생각을 존중하는 가운데 하나님 아버지의 기쁘신 뜻을 섬기기 위해 자발적으로 순종하고 사랑으로 섬기는 사랑의 공동체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십니다.


14절을 보십시오.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그들을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으로 인함이니이다” 제자들이 아버지의 보호하심이 필요한 또다른 이유는 세상이 그들을 미워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근본적으로 하나님보다 돈과 쾌락을 더 사랑합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면 돈과 쾌락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스스로도 옳지 않게 보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없다고 주장합니다. 설령 계시더라도 뭔가 무능하고 무기력한 분으로 묘사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고 돈과 쾌락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합니다. 이러한 제자들의 삶은 세상 사람들의 양심에 강한 충격을 줍니다. 하나님보다 돈과 쾌락을 더 사랑하는 그들의 삶이 얼마나 잘못되었고 가치가 전도된 삶인지, 얼마나 부끄러운 삶인지 제자들이 일깨워줍니다. 그들은 이로 인해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할 수도 있지만, 오히려 분노하고 제자들을 미워하고 박해할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이는 그들이 악한 세상을 주관하는 사탄에게 속하였고 제자들은 하나님께 속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제자들을 세상으로부터 지켜주시고 보전해 달라고 기도하십니다.


둘째, 예수님은 제자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17절을 보십시오.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거룩(holy)이라는 단어의 가장 기본적인 뜻은 ‘구별되었다(separated)’는 의미입니다. 어떤 사람이 제사의식에 쓰려고 그릇 몇 개와 접시 몇 개를 특별히 따로 떼어 구별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거룩이라는 단어는 바로 이런 상황에서 그 어원을 두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다(God is holy)”는 의미는 하나님은 죄나 악으로부터 온전히 구별되셨다, 하나님 안에는 죄나 악한 것이 조금도 없다는 뜻이 됩니다. 우리 인간의 내면을 깊이 꿰뚫어 보면 지극히 선해 보이는 마음이나 행동에도 그 안에 악한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는 그러한 것이 전혀 없습니다. 그 분 안에는 절대적으로 온전한 선함(goodness)과 거짓됨이 없는 순결하고 진실한 사랑이 있습니다.


어제 종로7부 송년의 밤 시간에 유스팀 형제 자매들이 만든 드라마를 상영하였습니다. 최근에 상영된 ‘완벽한 타인’이라는 영화를 패러디한 드라마였는데 서로가 서로에게 중요한 사실을 감추고 살아가는,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도 결코 보여줄 수 없는, 그것을 들킨 순간 헤어지거나 관계가 파괴될 수밖에 없는 비밀을 가지고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삶을 잘 보여주었습니다. 이러한 현대인들은 진실하지 않고 그 안에 비밀이 있고 죄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거룩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아버지께서 보전하여 주지 않으실 때 이와같이 될 수 있습니다. 몇 년간 같이 장막 공동생활을 하였는데 아무도 알지 못한, 결코 사소한 것이 아닌 상대방이 반드시 알아야만 하는 중대한 비밀이 있을 수 있습니다. 팀 동역자 간에도, 부모와 자녀 사이에도 반드시 알아야 하지만 감추고 있는 비밀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거룩하지 못한 것입니다. 여기에는 죄와 부패가 있습니다. 부패한 곳에서 냄새가 나듯 은밀한 비밀이 있는 곳에 죄의 썩은 냄새가 납니다. 머리가 아프고 토할 것 같습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진리의 말씀으로 다시 깨끗하여지는 것입니다. 진리의 말씀 앞에서 자신의 숨은 죄를 진실하게 고백하고 회개할 때 성령께서 죄로 더러워진 그의 마음을 다시 정결케 하여 주십니다. 거룩하게 하여 주십니다. 제자들이 이와같이 할 때 완벽한 타인이 아닌 진정한 하나, 완벽한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임 가운데 말씀 앞에서 자신의 숨은 죄를 진실하게 회개하는 소감쓰기를 은사로 주셨습니다. 우리가 이 귀한 은사를 불일듯 하여 2019년에는 더욱 진실하게 숨은 죄를 고백함으로 거룩하게 되고 온전한 하나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20-26절은 12 제자들을 통해 예수님을 믿게 될 모든 신자들을 위한 기도입니다. 21절을 보십시오.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의 친밀함은 어느 정도입니까? 그것은 아버지께서 예수님 안에, 예수님께서 아버지 안에 있는 것입니다. 수학에서 A가 B에 속하고, B가 A에 속하면 A=B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은 두 인격이지만 완전히 하나입니다. 이것은 친밀함의 극치입니다. 두 인격이 서로 하나됨의 신비입니다. 최고의 사랑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통해 믿게 될 모든 신자들이 이 사랑의 연합 안에 들어오도록 기도하십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기도입니까. 이 얼마나 우주적인 기도입니까.


한 예화가 있습니다. 어떤 두 목회자가 서로 뜻이 맞지 않아 다투었습니다. 아무리 논쟁을 해도 결론이 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한 목회자가 말했습니다. “자, 이제 그만 둡시다. 당신은 당신의 길을 가시오. 나는 주의 길을 가겠소.” 사람은 근본 자기 중심적이어서 자기만 옳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우리가 어떻게 하나가 될 수 있습니까?


첫째, 인생목적이 같을 때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아무리 주의 일을 열심히 한다고 해도 그가 그 일을 하는 근본 목적과 동기가 자기를 위한 것일 때 제자 공동체가 결코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반면 어떤 사람이 좀 부족하고 연약해도 그 근본 목적과 동기가 하나님을 위한 것일 때 제자 공동체가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팀 스포츠에서도 각각의 플레이어가 플레이를 하는 근본 동기와 목적이 자기가 돋보이고 자기 연봉이 올라가는 것을 위한 이기적인 플레이가 될 때 그 팀의 조직력은 와해되고 그 팀은 콩가루 팀이 되고 맙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거듭나 신자가 되었지만 주의 일을 하는 과정에서 나도 모르게 과거 자기 명예와 자기 영광이 일을 할 수 있는 힘의 원동력이 되었던 옛본성이 살아나 사역의 근본동기가 오염이 될 수 있습니다. 이 과정은 너무 교묘하고 은밀하게 이루어져 자기 자신도 미처 알아채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이 일을 하는 동기가 무엇인가 스스로 돌아보고 때마다 온전히 주님을 위한 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진정한 하나가 될 수 있고 그 진정한 하나됨에서 강력한 힘이 나오게 됩니다.


둘째, 겸손히 낮아져 서로 섬길 때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진정한 존경과 신뢰는 말이 아닌 섬김에서 나옵니다. 미국 와싱턴 지부의 이 에스더 선교사님이 남긴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그는 초창기 지부장 사모로서 미국 목자들을 말로 지휘하며 이런 저런 방향을 주면서 리더쉽을 굳건히 하고자 하였습니다. ‘내가 지부장 사모니까 내가 말할 때 듣고 존중해’ 이런 자세를 가졌습니다. 이때 한 미국 자매 목자가 말하였습니다. “Esther, you have to earn your respect.” 에스더 선교사는 그 말을 듣고 큰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Earn이라는 단어는 일해서 번다는 의미입니다. 그는 미국인의 존경은 지부장 사모라는 포지션이 주는 것이 아니라 그가 미국 목자들을 섬길 때 얻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때부터 에스더 선교사는 틈이 나는대로 센터를 청소했습니다. 그리고 미국 목자들에게 어떤 섬김이 필요한지 살펴서 섬겨주었습니다. 그러자 콧대 높던 미국 자매 목자들이 에스더 선교사를 존경하고 사랑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도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십자가를 지심으로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요 만민의 구주로 인정받으셨습니다. 우리도 겸손히 낮아져 서로 섬길 때 진정한 존경을 얻게 되고 하나됨을 이룰 수 있습니다.


셋째, 서로 다름을 인정할 때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교회 공동체는 오케스트라와 같습니다. 서로 다른 개성과 인격을 갖춘 이들이 모여 지휘자되신 예수님의 지휘를 받아 아름다운 화음을 만들어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교회에 주신 고유한 개성과 정체성이 무엇입니까? 첫째는 대학생 선교 공동체입니다. 만약 대학생 선교가 더 이상 필요없어지는 날이 온다면 우리 교회는 존재의미를 잃을 것입니다. 그러나 대학생 선교가 하나님 보시기에 필요한 한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일하기 원하십니다. 둘째,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절대적으로 믿고 순종하는 모임입니다. 많은 이들, 심지어 사역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상대적으로 생각합니다. 말씀은 잠깐 이야기하고 주로 자신의 사상이나 철학, 생각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우리 모임은 철저히 자신의 생각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말씀을 앞세우고 그 말씀을 순종하기에 힘썼습니다. 우리가 만약 이런 정체성을 잃어버린다면 우리의 존재의미는 사라질 것입니다. 셋째, 가족 공동체입니다. 우리 모임은 회사와 같은 조직이 아니라 서로 형제요 자매요 부모와 같은 목자님을 둔 가족 공동체입니다. 넷째, 평신도 선교 모임입니다. 평신도들이 말씀으로 훈련을 받아 선교 및 제자훈련을 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춘 사역자가 되도록 돕는 모임입니다. 이런 부르심과 정체성만 동일하다면 얼마든지 서로의 다름과 개성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서로의 다름이 더욱 조화롭고 아름다운 화음을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와같이 주 안에서 서로 하나가 될 때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다시 한 번 21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우리가 이와같이 하나가 될 때 세상은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1세기 당시 기독교인들은 거대한 로마 제국에 비해 참으로 적은 무리요 초라한 집단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적은 무리의 기독교인들이 로마 제국을 정복하였습니다. 그들에게 무슨 힘이 있었을까요? 이는 사랑의 힘입니다. 로마 시대에 유약한 어린 아이가 태어나면 아버지는 아기를 갖다 버리도록 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그 버려진 아기를 데려다 길렀습니다. 또 로마 남자들은 첩을 두었고 정절에 대한 개념이 희박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인 남편들은 자기 아내만을 사랑하며 정절을 지켰습니다. 로마인들은 이러한 기독교인들의 삶을 보고 말했습니다. “보라, 이들은 얼마나 뜨겁게 서로 사랑하는가. 이들은 서로를 위해 기꺼이 죽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가.”


전도는 사랑으로 이루어집니다. “아 내가 이 공동체에 와보니 여기에는 세상에서 볼 수 없는 사랑이 있구나. 나도 여기에 속하고 싶다.” 이것이 가장 효과적인 전도입니다. 밖에서 들어온 사람은 안의 공기를 민감하게 느끼듯, 외부인이 우리 모임에 오면 누가 말하지 않아도 금세 느낍니다. 썰렁하고 냉랭한 모임, 서로에 대해 무관심한 공동체라고 느껴진다면 누가 이곳에 남겠습니까. 우리 모임이 말로만 아니라 실제 삶에서 서로 용서하고 사랑하며 겸손으로 섬기는 모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보라, 저 UBF 사람들은 얼마나 서로 뜨겁게 사랑하는가. 이들은 서로를 위해 기꺼이 죽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가. 나도 이 모임에 담기고 싶다. 나도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고 싶다.” 이런 말을 듣기까지 2019년 우리가 서로를 뜨겁게 사랑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