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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017년 성탄 2강 '한 아기' (이사야 9:1-7)2017-12-17 2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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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성탄 2강 


한 아기 



말씀/ 이사야 9:1-7 

요절/ 이사야 9:6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Merry Christmas! 구주 성탄을 감사 찬송합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이 오시기 전 730여년 전에 한 아기의 모습으로 오실 메시야에 대한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의 말씀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한 아기로 오신 예수님이 우리 마음에도 오셔서 구주 성탄의 기쁨과 감사와 찬송이 넘쳐나기를 기도합니다. 


이미 알고 계시는 분도 많지만 정리하는 의미에서 당시 북이스라엘과 남유다가 처한 국제 정세를 잠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당시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신흥 강대국 앗시리아가 점차 팔레스타인 쪽으로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두려움을 느낀 수리아 왕국의 르신은 북이스라엘과 남유다에게 함께 힘을 합하여 앗시리아에 맞서 싸우자고 제안을 했습니다. 당시 북이스라엘 왕 베가는 이 제안을 받아들였습니다. 한편 남유다의 아하스 왕은 앗시리아를 의지하기로 결심하고 이 제안을 거부했습니다. 


7장에서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아하스에게 보내 앗시리아를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하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믿을 수 있도록 징조를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미 앗시리아를 의지하기로 결심한 아하스는 징조를 구할 것을 거부했습니다. 결국 아하스로부터 막대한 금품과 함께 도와줄 것을 요청받은 앗시리아의 왕 티글랏 빌레셋은 대군을 몰고 와 수리아의 르신을 죽이고 수리아를 멸망시켰습니다. 또 북이스라엘의 스불론과 납달리, 갈릴리 지역의 수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앗수르에 포로로 끌고갔습니다. 결국 베가는 친앗수르파이며 북이스라엘의 마지막 왕인 호세아에게 쿠데타를 당하여 살해당하게 됩니다. 


본문의 9장은 1차적으로 장차 앗수르(앗시리아)의 침입으로 큰 고통을 당하게 될 북이스라엘의 스불론, 납달리, 또 갈릴리 지역의 백성들에게 주시는 예언의 말씀입니다. 


1절을 보십시오. “전에 고통받던 자들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이 멸시를 당하게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쪽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은 과거 우리나라의 함경도와 같은 지역입니다. 함경도에 사는 사람들은 늘 여진족을 비롯한 이민족의 침략과 약탈을 당했습니다. 특히 추수 때만 되면 배고픈 여진족들이 쳐들어와 큰 고통을 주었습니다. 스불론과 납달리도 역사적으로 이런 고난을 많이 겪었습니다. 특히 사사기 때 미디안으로 인한 수탈을 심하게 당하였습니다. 이제는 곧 임박한 앗수르의 침입으로 큰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이번 침략 때에는 백성들이 대거 앗수르에 포로로 사로잡혀가게 됩니다. 앗수르의 통치 이후로도 바벨론, 페르시아, 이집트, 시리아에 의해 통치를 받았고 그 때마다 백성들은 포로로 끌려가고 다른 민족이 이주해 왔습니다. 비록 유대 마카비 혁명 이후 유대 지역의 종교적 성향이 강한 유대인들이 갈릴리로 대거 이주해 오긴 하였지만 여전히 유대인들에게 이곳은 유대땅이 아닌 이방 지역, 외국땅으로 인식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역사적으로 유대인들은 이곳을 이방의 갈릴리(Galilee of the Gentiles)라 부르며 멸시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스불론과 납달리 땅으로 하여금 이민족의 침략으로 많은 멸시를 당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납달리 지역에 속한 해변 길과 요단 저쪽 이방의 갈릴리는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영어 성경을 보면 영화롭게 하실 것이라고 미래형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본문에서 과거형으로 표현된 것은 이 일이 반드시 일어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주어진 이 약속의 말씀은 BC 730여년 경 지금으로부터 약 2750여년 전 주어졌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갈릴리를 어떻게 영화롭게 하셨습니까? 사실 갈릴리는 그렇게 특별히 볼 것이 있는 곳은 아닙니다. 갈릴리보다 훨씬 더 아름다운 관광지도 많습니다. 그럼에도 오늘날 갈릴리는 전세계 수많은 사람들이 사모하는 곳이고, 평생에 꼭 한 번은 가보고 싶어하는 곳입니다. 갈릴리 바다와 그 해변을 바라보며 깊은 감동에 사로잡힙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예수님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곳 갈릴리 해변에 서서 주옥같은 하나님 나라의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이 해변길을 걸으며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을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여 실패한 베드로에게 숯불에 구운 고기를 건네주며 숯불보다 더 뜨거운 사랑을 보여주던 곳이 바로 이곳 갈릴리 해변입니다. 


2절을 보십시오.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 당시 이 지역에 살던 백성들은 이스라엘 왕 베가의 통치를 받으며 살았습니다. 그들은 앗수르의 위협 앞에서 역사적으로 적대 관계에 있었던 수리아와 동맹을 맺는 것을 보고 왕이 어련히 알아서 잘 하시겠지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앗수르의 공격을 받아 비참한 고통을 받게 된 것이었습니다. 사랑하는 가족이 죽고 포로로 끌려가는 것을 지켜보며 그들의 가슴은 슬픔과 절망으로 무너져 내렸습니다. 그들이 겪은 슬픔과 절망은 비유하자면 앞이 보이지 않는 캄캄한 어둠 속을 헤매는 것과 같았습니다. 또 주변의 사람들이 하나씩 죽어가는 죽음의 땅에서 자신도 얼마남지 않은 죽음을 기다리는 것과 같았습니다. 그런데 이런 그들이 큰 빛을 보게 됩니다. 절망뿐인 삶에 다시 소망을 갖게 되고 죽음의 그림자가 가득한 삶에 다시 생명의 기운이 움트게 됩니다. 


신약성경 중 하나인 요한복음을 보면 예수님을 빛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이 빛이라(요 1:4)” 누가복음에서도 세례 요한의 아버지 사가랴는 예수님이 오시는 의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예언하였습니다: “주의 백성에게 그 죄 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알게 하리니 이는 우리 하나님의 긍휼로 인함이라 이로써 돋는 해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여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치고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눅 1:77-78)” 


역사적으로 이사야 당시 스불론과 납달리 사람들은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만나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 예언을 통해 고통과 아픔과 멸시의 땅인 이곳 갈릴리에 큰 생명의 빛이 임하게 될 것을 알았습니다. 이것이 그들에게 큰 위로요, 소망이 되었습니다. 


3-4절을 보십시오. “주께서 이 나라를 창성하게 하시며 그 즐거움을 더하게 하셨으므로 추수하는 즐거움과 탈취물을 나눌 때의 즐거움 같이 그들이 주 앞에서 즐거워하오니 이는 그들이 무겁게 멘 멍에와 그들의 어깨의 채찍과 그 압제자의 막대기를 주께서 꺾으시되 미디안의 날과 같이 하셨음이니이다” 당시 백성들에게 있어 최고의 기쁨의 때는 추수할 때입니다. 매서운 바람이 부는 날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고 1년 동안 잘 가꾸어 마침내 추수하게 되었을 때 그 기쁨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또한 전쟁에 나갔던 군인들이 대승을 거두고 전리품을 여러 수레에 가득 가져왔을 때 그 기쁨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하나님은 압제당하여 멸망에 이르게 된 이 나라를 크게 번영하도록 하여 주십니다. 또 그 나라 백성으로 사는 것이 추수하는 농부처럼, 전리품을 획득한 군인처럼 기쁜 일이 되도록 하여 주십니다. 


예수님이 오심으로 건설된 하나님의 나라, 곧 교회는 날로 창성하여졌습니다. 인류 역사상 그 어떤 위대한 제국도 날이 갈수록 창성하지 못하였습니다. 진시황제가 건설한 통일 진나라도, 징기스칸이 건설한 원제국도, 알렉산더가 건설한 헬라 제국도 영원하지 못하였고 때가 되어 쇠퇴하여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으로 열 두 제자를 통해 시작하신 하나님의 나라는 2천년이 지난 오늘날 날이 갈수록 더욱 창성해지고 있습니다. 우리 UBF를 통한 하나님의 나라만 살펴보아도 56년 전만 해도 절망에 빠진 대학생들에게 성경을 가르쳐야겠다고 결심한 두 사람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2009년 현재 91개국에 1,740명의 자비량 선교사, 336명의 가정교회를 이룬 현지인 리더가 서게 되었습니다. 또한 놀라운 것은 그 하나님 나라에 속해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체험하는 기쁨입니다. 세상의 그 어떤 나라, 그 어떤 모임과 비교하여 보아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위에 건설된 하나님의 나라 백성만큼 그 얼굴이 밝고 환하고 기쁨으로 빛나는 사람들이 가득한 곳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노래를 불러도 슬픔과 탄식과 절망의 노래를 부르지 않습니다. 기쁨과 찬양과 소망의 노래를 부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는 주께서 그들의 어깨에 무겁게 멘 멍에와 채찍과 압제자의 막대기를 꺾고 자유와 승리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사사기 때 이스라엘 사람들은 메뚜기떼처럼 추수 때만 되면 몰려와 모든 것을 싹쓸이해가는 미디안으로 인해 큰 고통을 당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때 기드온을 사사요 구원자로 보내주시고 그를 통해 그들을 미디안의 압제로부터 해방시켜주셨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예수님을 구원자로 보내주셔서 죄와 죽음으로부터 자기 백성을 구원해 주십니다. 물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산다고 해서 여러가지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어떤 문제도 죄문제, 또 죽음문제보다 더 심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잠간 근심하지만 가장 큰 문제인 죄문제, 죽음문제가 해결되었으므로 근심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이가 세상을 떠날 때 잠간 슬퍼하지만 곧 다시 만날 것이기에 슬퍼하지 않습니다. 


5절을 보면 또한 앞으로 다시는 전쟁이 없을 것이므로 어지러이 싸우는 군인들의 신과 피 묻은 겉옷이 불에 섶 같이 살라지게 됩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런 일들이 일어납니까? 어떻게 멸시받던 이방의 갈릴리가 영화롭게 되며,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추수하며 탈취물을 나눌 때의 즐거움을 누리게 됩니까? 


6절을 보십시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됨으로 가능하게 됩니다. 이스라엘의 왕, 메시야는 장군이나 영웅의 모습으로 오지 않으시고 연약한 한 아기의 모습으로 오십니다. 신약성경은 바로 그 한 아기가 2천년 전 마리아의 몸을 통해 태어나 구유에 누이신 예수 그리스도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 아기의 이름이 무엇입니까? 


첫째, 기묘자라, 모사라. 우리말 개역개정 성경과 KJV 성경은 기묘자와 모사를 각각 별개의 이름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볼 수 있습니다. 사사기 13:18절을 보면 여호와의 이름을 묻는 마노아에게 여호와의 사자는 “어찌하여 내 이름을 묻느냐 내 이름은 기묘자라” 답하였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이름을 만들 때는 항상 두 단어씩 묶어서 만드는 관습이 있는 점, 또 본문에서 뒤에 나오는 이름들이 전부 두 단어로 된 점 등을 기초로 볼 때 기묘자, 모사 이렇게 둘로 나누는 것보다는 한 이름으로 보는 것이 대다수 성경번역자들의 견해입니다. 곧 Wonder, Counselor 이렇게 나누는 것보다 한 단어로 Wonderful Counselor라고 번역합니다.


신약성경에 나타난 예수님의 모습은 참으로 기묘한 상담자가 되십니다. 예수님은 오랫동안 율법을 지키며 신앙생활했지만 하나님의 나라가 보이지 않아 고통하는 니고데모에게 근본적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고 상담해 주셨습니다. 끝없이 이상적인 남편을 찾아 목마름 가운데 방황하는 사마리아 여자에게 참 남편 되신 그리스도를 만나야 이 목마름 문제를 해결받을 수 있다고 상담해 주셨습니다. 다른 사람이 도와주지 않아서 이렇게 누워있을 수밖에 없다고 말하는 38년된 병자에게 예수님의 말씀을 의지하여 스스로 일어나 자기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상담해 주셨습니다. 또 간음 중에 잡힌 여자를 모세의 율법대로 돌로 쳐야 하는지, 예수님의 평소 가르침대로 사랑으로 용서해야 하는지 묻는 바리새인들에게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라고 상담해 주셨습니다. 또 당시 그들을 통치하고 있던 로마 정부에 세금을 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첨예한 문제에 대해 질문하는 이에게 로마 황제 카이사르의 얼굴과 그를 칭송하는 글씨가 새겨진 동전을 가져오도록 하시고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돌려주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는 상담을 해 주셨습니다. 


모든 것이 급변하는 불확실성의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늘 상담이 필요합니다. 이런 상담을 위해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있습니다. 전문가들은 자기 분야에 대해 그 누구보다 많이 알고 있으므로 가장 정확한 상담을 해 줄 수 있다고 자부합니다. 그런데 얼마전 우리 사회에 공상 소설이나 영화에서 나오던 AI(Artificial Intelligence, 인공지능)가 등장하였습니다. AI가 놀라운 점은 인간이 오랜 세월 쌓은 데이터를 빠른 시간 내에 습득하여 그 지식을 이용하는 수준에서 벗어나, 기본 원리만 가르쳐주면 스스로 셀프 학습을 하여 인간이 수백년, 수 천년 연구하여 내리는 판단보다 훨씬 더 뛰어난 판단을 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작년 초 프로 바둑 기사 이세돌을 이긴 알파고는 인류가 수백년 연구해 쌓은 바둑 데이터를 기초로 학습하여 이세돌을 이겼습니다. 이 알파고는 계속 업그레이드되어 중국의 커제도 이겼습니다. 그런데 그 후에 나온 알파고 제로는 이름 그대로 아무 데이터를 입력하지 않고(제로 데이터) 다만 바둑의 원리만을 가르쳤고 자기 혼자 바둑을 둬 보면서 스스로 학습하도록 하였습니다. 그 결과 학습을 시작한지 불과 8시간만에 인간을 이기는 것은 당연하고 이세돌을 이긴 알파고의 업그레이드 버전인 알파고 마스터를 이겼습니다. 이것은 AI가 인간보다 뛰어난 지성을 가질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 놀라운 사건입니다. 


급기야 지난 11월 22일 한 구글 출신 엔지니어가 인공지능을 신으로 섬기는 종교(Way of the Future)를 창시했습니다. 그는 AI가 인간보다 현명하다면 그것이 곧 신이 아닌가 반문하였습니다. 중국 베이징의 용천사에는 AI 스님 “셴얼”이 등장하였는데 인간 스님보다 불경을 더 잘 외우고 사람들의 질문에도 답변을 할 수 있다고 합니다. 이제 사람들은 내면에 불안과 초조, 두려움과 같은 심리적인 문제가 생기면 심리학자나 전문 상담자보다 훨씬 더 인간의 심리를 잘 분석하는 AI에게 가서 물을 것입니다. 대입시에 대해 불안하고 정확한 정보가 필요하면 역시 선생님보다 AI에게 가는 것이 낫고, 법률문제 역시 법률 전문가보다 AI에게, 아파도 AI 의사에게, 결혼문제도  연애 및 결혼 전문 AI에게 가서 이 사람과 결혼하는 것이 얼마만큼 성공확률이 있는지 자문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입니다. 


이제 수많은 전문가들이 직장을 잃을 위험에 처해있습니다. 인간은 인간보다 더 똑똑한 AI에게 뭐든 물어보며 의존해서 살아가야 하는 시대가 코앞에 다가왔습니다. 이것은 인간이 스스로 똑똑한 인간이 되어 다른 인간들을 상담할 수 있다는 오만의 결과입니다. 그러나 AI가 아무리 똑똑한 채 하여도 그는 인생의 근본문제에 대해 전혀 상담해줄 수 없습니다. 만약 AI가 니고데모를 상담했다면 종교생활의 패턴을 좀 바꿔보라고 한다든지, 그의 관심을 좀 더 깊이 다루고 있는 동양종교를 한 번 접해보라고 조언해 주었을 것입니다. 또 사마리아 여인을 상담했다면 그가 찾는 이상형의 남편을 몇 사람 검색하여 사귀어 보라고 추천해 주었을 것입니다. 또 38년간 누워있던 사람을 상담했다면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고 포기하고 마음이라도 편해지는 것이 답이라고 상담해주었을 것입니다. 또 간음 중 잡힌 여인을 상담했다면 다음 생에 다시 태어나면 그 때는 간음하지 말라고 상담했을지 모르겠습니다. 


인간의 근본문제는 죄와 죽음의 문제입니다. 이 문제를 돕고 상담할 수 있는 유일한 분은 한 아기로 오신 예수님 한 분입니다. 그 분은 이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이제는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 인생에서 당하는 모든 문제에 대해 근본적인 상담을 해 주십니다. 


둘째, 전능하신 하나님. 신약 성경에 나타난 예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냈습니다. 특히 죽은 지 이미 나흘이 지나 시체썩는 냄새가 나기 시작한 나사로를 그의 무덤 앞에서 “나사로야 나오라” 명령하심으로 그를 나오게 하신 사건은 전능하신 하나님으로서의 예수님을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돈이 가진 힘을 믿습니다. 인생에서 큰 재난이나 사고를 당해도 돈만 있으면 어느 정도 그 문제에 대해 대처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회생활을 하다가 여러 문제가 생기면 돈으로 메꾸고 수습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보다 해결할 수 없는 것들이 훨씬 더 많습니다. 자녀의 존경과 사랑은 돈으로 살 수 없습니다. 기쁨과 참된 행복도 돈으로 살 수 없습니다. 죄와 죽음 문제도 돈으로 해결할 수 없습니다. 오직 전능하신 하나님되신 예수님만이 이 문제를 도우실 수 있습니다. 


셋째, 영존하시는 아버지. 아버지는 보호와 든든한 지지, 속깊은 사랑의 상징입니다. 또 잘못된 길로 나갈 때 바른 길로 인도해주는 삶의 인도자입니다. 이런 아버지가 계시다는 것은 얼마나 든든한 일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아버지가 영원히 살아계시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어린 시절 나의 삶에 기둥과도 같았고 그 쩌렁쩌렁한 음성을 들으면 정신이 번쩍났던 아버지는 어느새 백발이 성성하고 나의 도움이 없이는 거동도 불편하며 이제는 내가 모시고 섬겨야 하는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그래도 이렇게 아버지다운 아버지를 모신다면 행복입니다. 오늘날 수많은 청년들이 아버지답지 못한 아버지로 인해 고통합니다. 정욕 문제로 가정을 지키지 못하고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준 아버지. 술로 인해 때마다 가정을 풍지박산을 만들어 고통을 준 아버지. 늘 못마땅하다는 말과 눈초리로 자존감을 낮춘 아버지. 경제적 무능력으로 안정감없는 청소년기를 보내도록 한 아버지. 이런 아버지로 인해 많은 청년들이 고통하였고 그들 자신도 결혼하여 어린시절 보고 배운대로 똑같은 아버지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이런 그들에게 예수님은 영존하시는 아버지가 되어 주십니다. 깊은 사랑으로 늘 보호해 주시고 지지해 주시고 격려해 주십니다. 잘못된 길로 나가면 가끔 사랑의 훈계도 아끼지 않고 하여 주십니다. 


넷째, 평강의 왕. 아담의 범죄 이후 하나님을 떠난 인간에게 가장 먼저 찾아온 것은 평강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늘 불안과 두려움, 초조, 공포의 감정을 기본적으로 느끼며 살아갑니다. 이는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님과의 관계가 파괴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우리 죄를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우리와 하나님 사이를 근본적으로 화목시켜 주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돌아와 하나님의 자녀가 되도록 새롭고 산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평강의 왕이 되십니다. 


이상에서 이사야의 예언은 2천년 전 갈릴리 바다에서 사역하심으로 그 지역을 영화롭게 하시고, Wonderful Counselor가 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이 되시고, 영존하시는 아버지가 되시며 평강의 왕이 되신 예수님이 바로 한 아기의 모습으로 오시리라 예언했던 이스라엘의 참된 왕임을 명확히 증명해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베가 왕과 아하스 왕의 통치를 받았을 때 비참한 삶을 살았습니다. 오늘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아하스나 베가를 좀 무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객관적으로 볼 때 그들은 당시 급변하는 국제정세를 읽고 능란한 외교술을 펼치는 똑똑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신앙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비해 예수님은 연약한 한 아기의 모습으로 오셨지만, Wonderful Counselor가 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 평강의 왕이 되시는 예수님의 통치를 받을 때 참된 기쁨과 평안과 번영을 누릴 수 있습니다. 물론 그 당시 예수님은 오지 않으셨습니다. 700년이나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 예수님을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한 하나님을 믿고 살면 절망을 딛고 일어나 소망 가운데 승리하는 인생을 살 수 있었습니다. 


7절을 보십시오.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한 아기로 오신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고 그의 통치를 받는 백성으로 이루어진 다윗의 나라, 하나님의 나라, 곧 우주적 교회는 날로 강성해지게 됩니다. 이는 왕되신 예수님께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정의와 공의로 그 나라를 지키고 보존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각 나라의 인간 지도자도 자국민의 번영과 행복과 안정을 위해 불철주야 일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도 자기 나라, 곧 교회를 지키기 위해 얼마나 그가 가진 모든 능력을 다 동원하여 열심히 일하시겠습니까! 이사야 선지자는 이 모든 일이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으로 이루어진다고 증거합니다. 열심이라는 단어는 원문상 얼굴이 빨갛다는 단어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빨갛게 상기된 모습으로 열심을 내어 일하십니다. 그러므로 이 일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교회가 잠시 어려움에 처할 수 있습니다. 또 개인적으로 어려움에 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왕되신 예수님께서 반드시 그 어려움을 돌아보시고 도와주시고 보존하여 주십니다. 때로는 바로바로 도와주지 않으시는 것 같아도 예수님이 보시기에 가장 좋은 때에 한 순간에 도와주십니다. 그러므로 너무 염려하지 않아도 됩니다. 이 예수님을 믿고 인내하며 소망 가운데 기도하면 됩니다. 이미 그 일이 이루어질 것을 믿고 근심과 염려대신 기쁨과 소망으로 지금 이 시간 해야 할 일을 잘 하면서 보내면 됩니다.


결론입니다. 예수님은 종합적인 면에서 한 아기로 오실 메시야의 예언을 그대로 성취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다른 메시야를 기다릴 필요가 없습니다. 이 예수님을 나의 구주, 나의 메시야로 모시고 이 예수님의 다스림을 받으면 됩니다. 이번 성탄에 한 아기로 오신 구주 예수님의 통치를 충만히 받게 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