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메세지

제목2018년 요한복음 제15 강 '길 되신 예수님'(요한복음 14:1-31)2018-06-25 13:32
작성자

2018년 요한복음 제 15 강

 

길 되신 예수님

 

말씀 / 요한복음 14:1-31

요절 / 요한복음 14: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지난 강의에서 우리는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것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이 그와 같이 하신 목적이 무엇이죠? 이는 주요 선생이신 예수님이 본을 보여주심으로 제자들도 서로 발을 씻어주는 사랑을 실천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세족식 이후 제자들은 그들 중 하나가 예수님을 팔 것이라는 것, 그리고 예수님 자신도 어디론가 가실 것이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지난 3년 반 예수님만을 따라 왔는데 어디로 가신다니, 그리고 자기들은 따라갈 수 없다니.. 그러면 도대체 우리는 어떻게 되는가? 하는 근심과 불안이 몰려왔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은 이런 그들을 위로하시고 자신이 하나님 나라로 가는 길이 되심을 증거하십니다. 본문을 통해 우리가 길 되신 예수님을 새롭게 영접하고 이 길을 힘차게 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예수님은 제자들의 마음에 근심이 있음을 아셨습니다. 국어사전을 보니 "근심"이란 "해결되지 않는 일 때문에 속을 태우거나 우울해 하는 것"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제자들에게는 무엇인가 해결되어야 할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 문제가 해결이 안 되어 마음속이 탔고 우울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에게 두 가지를 말씀하십니다.

  

첫째,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이 말씀이 NIV에는 "Trust in God; trust also in me"로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또 나를 신뢰하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말씀하심으로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과 동등된 분임을 나타내셨습니다. 예수님은 근심 많은 제자들에게 "염려마라, 내가 갈릴리 은행에 너희를 위해 엄청난 돈을 넣어두었다" 하지 않으십니다. "장관자리 하나씩 보장한다"고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을 믿고 또 그의 보내신 자 예수님을 믿으라고 하십니다. 사람이 근심한다는 것은 앞으로 무슨 일이 잘 안될까 봐 염려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근심이 있습니다. 실상 인생살이가 근심의 연속입니다. 웃을 때에도 마음에 슬픔이 있고 즐거움의 끝에도 근심이 있습니다(잠14:13). 근심은 미래의 일을 걱정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미래 일은 누구에게 달려있나요? 하나님께 달려있습니다. 우리는 1분은 커녕 1초 앞도 내다 볼 수 없습니다. 세상 모든 일의 주관자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미래를 주관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를 사랑하사 독생자까지 내어주신 사랑의 하나님을 믿을 때 우리는 모든 근심과 두려움을 이길 수 있습니다.

  

요즘에 우리나라 정세가 급변하고 있습니다. 북미회담 이후 북한은 중국과 긴밀히 공조하며 한반도 정세를 주도하려 하고 있습니다. 트럼프나 김정은에 의해 우리의 미래가 결정되는 것 같습니다. 나라의 장래가 근심이 됩니다. 그런데 저는 엊그제 잠언서 말씀을 묵상하면서 큰 위로를 얻었습니다. 잠언 21:1 "왕의 마음이 여호와의 손에 있음이 마치 봇물과 같아서 그가 임의로 인도하시느니라." 보가 무엇인지 아시죠? 둑을 쌓아 흐르는 물을 막고 그 물을 담아두는 곳입니다. 그 물이 가득 고이면 농부가 봇물을 터줍니다. 그러면 그 터준 쪽으로 물이 확 빠집니다. 그와 같이 하나님은 왕의 마음을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트럼프나 김정은이 무슨 일은 계획하던, 하나님이 그 마음을 안 움직이시면 되는 일이 없고, 또 움직이시면 안 되는 일이 없습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께 달려있습니다. 그래서 ‘아, 내가 정치 기사를 많이 읽기보다 성경을 묵상하며 기도하는 것이 지혜롭구나’하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미래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모든 근심을 이기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예수님은 근심하는 제자들에게 진정한 보장(Security)을 약속하십니다. 2,3절을 보십시오.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예수님은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다’고 하십니다. ‘거할 곳’은 원어로 ‘모나이’인데 KJV은 이를 'mansions'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맨션은 궁궐과 같은 저택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위해 궁궐같은 처소를 예비하러 가십니다. 예수님이 예비하시는 처소는 지상의 일시적인 처소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영원한 처소입니다. 실상 제자들의 근심의 뿌리는 장래에 대한 불안이었습니다. 세상에는 그 무엇을 획득하든 진정한 보장(security)이 없습니다. 이는 세상의 보이는 그 어떤 것도 결국 사라져 버리기 때문입니다. 하늘나라의 처소만이 제자들의 완벽한 보장이 됩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하심으로 제자들에게 하늘나라의 소망을 심으셨습니다. 우리에게도 하나님의 나라가 진정한 소망입니다. 이 소망은 우리가 이 땅에서 살면서 무엇을 얻든 잃든 우리로 하여금 항상 기쁨이 넘치게 하는 보장입니다. 우리가 이 보장을 확신하는 가운데 세상에서의 모든 근심, 걱정을 능히 이기기를 기도합니다.

  

4절을 보십시오.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너희가 아느니라." 예수님은 이미 여러 번 자신이 하나님께로 가는 길 되심을 말씀하셨습니다(요10:9, 마7:14). 그런데 도마는 예수님이 어디로 가는지 알지도 못하고 그 길도 모른다고 합니다. 이에 예수님이 무엇이라 하십니까? 6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첫째, 예수님은 길이십니다. 가끔 길을 가다보면 "도를 아십니까?” 물으며 접근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대순진리회에서 나온 사람들입니다. "도가 뭐죠?" 하며 그들을 따라가면 돈을 내고 제사를 지내게 합니다. 제가 아는 어떤 학생도 그렇게 따라가서 돈을 내고 제사를 지냈습니다. 모든 사람은 길을 찾고 있는 구도자들입니다. 누구나 길을 알기 원합니다. 이는 모든 사람이 아버지께로 돌아가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인류역사는 첫 사람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후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는 길을 찾고자 애쓰는 역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공자는 논어, 이인편 제8장에서 "조문도 석사가의"(朝聞道 夕死可矣)라고 했습니다. "아침에 도를 듣고 깨우쳤다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는 말입니다. 공자는 도를 깨우치지 못했습니다. 그의 제자 계로(季路)가 "스승님 과연 죽음이란 무엇일까요?" 묻자 공자는 "내가 삶도 제대로 모르는데 어찌 죽음을 논하랴?"하였습니다. 그는 길 되신 예수님을 알지 못했고 하나님께로 가는 길을 몰랐습니다. "어디가 길이냐?" 이는 모든 종교, 모든 구도자의 공통적인 절규요 외침입니다. 이러한 세상에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I am the Way" "내가 길이다". “내가 바로 하나님께로 가는 길, 잃었던 낙원으로 돌아가는 길”이라 하십니다.

  

창세기 3장 마지막 절에 보면 하나님은 범죄한 사람을 추방하시고 생명나무가 있는 동산을 천사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지키게 하십니다. 동산으로 들어가는 좁은 길이 있는데, 그 길을 불 칼(a flaming sword)이 앞뒤로 오가며(flashing back and forth) 가로 막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칼 때문에 누구도 동산으로 다시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그 길로 되돌아가고자 하는 인간의 시도는 철저히 실패하였습니다. 이런 세상에 예수님은 그 길을 여는 어린 양으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성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나요? 지성소를 가렸던 두꺼운 커튼이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져 두개가 되었습니다(막15:39). 히브리서 기자는 휘장 가운데 찢어져 난 이 길이 우리를 위해 열어놓으신 새로운 산 길이라고 말합니다(히10:20). 이제 예수님은 다시 생명나무가 있는 낙원으로 들어가는 새로운 길을 내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the Way’이십니다. 오시리라 약속된 ‘그 길’이십니다. 유일한 길이십니다.

  

요즘은 다원주의 시대입니다. 여러 길을 통해 산꼭대기에 오를 수 있다고 주장하는 시대입니다. 그러나 무조건 오른다고 정상에 이르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대학 2학년 때 친구들과 강원도 춘천에 있는 삼악산을 갔었습니다. 강촌 쪽에서 오르면 등선폭포를 경유한 완만한 능선입니다. 그러나 화천 쪽으로 내려오면 아주 험한 악산입니다. 내려오다가 길을 잃었습니다. 무조건 내려가면 평지에 닿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내려갔습니다. 사람들이 한 번도 가지 않은 계곡 길을 가시덤불과 나무를 헤치고 내려가는 것은 정말 힘들었습니다. 폭우가 쏟아지고 해는 어두워졌습니다. 내려가는 일은 여러 번 낭떠러지로 막혔습니다. 결국 모진 고생 끝에 다시 정상으로 올라와 길을 제대로 찾아 내려왔던 적이 있었습니다. 무조건 올라간다고 정상에 이르는 것도 아니고 무조건 내려간다고 평지에 이르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길을 잘 찾아야 합니다.

  

인생의 길도 마찬가지입니다. 인생을 살면서 길을 택하는 일이 작은 문제로 보이지만 그것이 우리 인생의 종착역을 결정합니다. 서울역에서 부산행 KTX를 타는 것과 목포행 KTX 타는 것은 3번 트랙에서 타는가 뒤를 돌아 4번 트랙에서 타는가 정도로 가벼운 문제입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아주 다릅니다. 부산행 KTX를 타고 가면서 그 안에서 아무리 착한 일을 하고 열심히 살아도 결단코 목포로 갈 수 없습니다. 승무원에게 잘 보이고 옆 좌석에 있는 사람을 섬겨도 소용이 없습니다. 제대로 가는 열차를 타야 합니다. 그와 같이 우리를 하나님 나라로 인도하는 길은 예수님 외에 다른 길이 없습니다. 예수님만이 우리를 하나님께 인도하시는 유일무이한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도 말했습니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행4:12)

  

예수님은 길이 되시지만 또한 그 길의 목적지인 진리와 생명이 되십니다. 진리는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로고스를 가리킵니다(요1:14). 예수님은 영원한 생명이 되십니다. 영원한 생명, 이 보다 더 귀한 것이 세상에 또 어디 있단 말입니까? 어떤 사람이 길거리에서 전도하는 신자들을 핍박하였습니다. 하루는 전도지를 빼앗아 찢어버렸습니다. 그날 집에 가서 주머니를 만져보니 찢어진 전도지의 작은 조각에 있는 글자를 보았습니다. "영원한 생명." 그 글을 보는 순간에 그는 큰 충격가운데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영원한 생명은 가장 귀한 보물 중의 보물입니다. 우리가 길 되신 예수님을 따라갈 때 영생의 소유자가 됩니다.

  

그러면 우리가 지금 눈에 보이지 않는 예수님을 어떻게 따라 갈 수 있나요? 예수님을 따라간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는 것일까요? 이는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마음 깊이 받아들이고 그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 인격의 중심인 마음이 모든 것입니다. ‘마음을 움직이지 못하면 당신은 아무 일도 한 것이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감사와 경외심으로 마음에 깊이 영접하여 나의 사상으로 삼고 순종하는 것이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다른 사람을 가르치라고 주신 것이기 이전에 나 자신을 위해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매일 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조금이라도 더 깊이 깨닫고 그 말씀을 마음에 새기는 가운데 길 되신 예수님을 잘 따라가기를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진리와 생명의 소유자들이 다 되기를 기도합니다.

  

7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 제자들의 문제는 예수님이 바로 사람의 모습으로 오신 하나님이신 것을 알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을 기도하는 심정으로 가르치십니다.

  

9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예수님은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완전한 계시이십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십니다 (the exact representation of his being)(히1:3). 신비한 환상이나 꿈을 통해서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 광명의 천사도 하나님을 나타낼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만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12-15절은 근심하는 제자들에게 주시는 예수님의 희망의 말씀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여기서 배울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첫째, 예수님이 아버지께로 가심으로 인해 제자들은 예수님이 하신 것보다 더 큰 일을 하게 됩니다. 이는 예수님이 가셔서 성령을 보내시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능력을 덧입은 제자들은 영혼 구원 역사에 더 능력 있게, 더 많은 사람들이 회심하도록 도울 수 있게 됩니다. 둘째, 예수님의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구하면 예수님이 행하십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한다는 것은 그저 기도의 끝에 주문 외우듯이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내용과 목적이 예수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뜻에 따라 기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기도응답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역사에 계속하여 귀하게 쓰임 받는 사람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그는 소아(小我)를 떠나 오직 주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하는 인생 목적을 가진 자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자의 기도를 기쁘게 응답하시고 그를 더욱 귀히 사용하십니다. 셋째, 14절을 보면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 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기도의 주된 대상은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께 기도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 구할 때 예수님이 친히 행하십니다. 넷째, 기도 응답의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요 또한 제자들이 서로 사랑하게 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아무리 큰일을 이루어도 서로 사랑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사랑은 능력보다 귀합니다. 성공보다 귀합니다. 사랑은 모든 계명의 완성이요 최고의 덕목입니다.

  

예수님은 16절부터 보혜사 성령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16,17절을 보십시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예수님이 아버지께 구하여 우리에게 보내 주시는 분은 누구시죠? 성령이십니다. 성령은 어떤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힘, 기(氣), 에너지와 같은 비인격적인 '것'이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의 한 ‘위’로서 인격적인 존재이십니다.

  

그런데 저자는 성령을 "또 다른 보혜사"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보혜사란 헬라어로 "파라클레토스"인데 이 말은 "파라칼레오"라는 말에서 파생된 것입니다. "파라"는 "곁에서", "칼레오"는 "간청하다", "탄원하다", "권고하다", "훈계하다", 격려하다", "위로하다" 의 다양한 뜻을 가진 말입니다. 그래서 "파라클레토스"라는 말은 한 단어로 번역하기가 대단히 어려워 영어성경에도 여러 다른 단어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NIV는 "Counselor" 상담자, KJV는 "Comforter" 위로자, NRS는 "Advocate" 변호자, NAS는 "Helper" 돕는 자로 말합니다. 우리 성경에는 보혜사(保惠師), 보호하고, 은혜를 주시고, 스승으로서 가르치시는 분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16절을 보면 아버지께서 보내시는 성령을 "또 다른 보혜사"(NIV: another Counselor)라고 합니다. "또 다른" 이라는 말, 영어로 'another'라는 말은 한글이나 영어나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처음 것과 '전혀 다른', 다른 하나는 처음 것과 '같은 성질의' 라는 것입니다. 원어는 후자의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즉, 예수님도 보혜사이시고 오시는 성령님도 보혜사라는 것입니다. 다른 보혜사이신 성령님은 영원토록 제자들과 함께 하십니다(16b). 처음 보혜사 예수님이 하늘에 가시고 다른 보혜사 성령이 오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이 하나님이 뜻하신 경륜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사람의 몸으로 보내사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도록 하셨습니다. 이로서 인간의 죄 문제를 해결하시고 복음을 완성하셨습니다. 이제 예수님이 이루신 복음을 온 세상 사람들이 듣고 그 심령에 회심의 역사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심령에 내주하셔서 회심의 역사를 이루시기 위해서 영이신 하나님이 오셔야 되었습니다. 육신을 입으신 예수님은 시간과 공간에 제약을 받으셨지만 성령은 아무런 제약 없이 강력하게 복음을 적용하여 구원 역사를 섬길 수 있으십니다.

  

예수님은 성령의 정체성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17a절을 보십시오. "그는 진리의 영이라"(the Spirit of truth). 예수님은 요한복음 15,16장에서도 성령에 대해 언급하실 때 그를 ‘진리의 성령’이라고 하십니다(요15:26, 16:13). 성령을 ‘진리의 영’이라고 할 때 그 ‘진리’는 다른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말합니다. 곧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이 어떠하며 그의 속죄 사역이 무엇인가를 설명하고 확신시켜주는 역할을 하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알고, 복음을 깨닫고 회심하는 것은 사람의 이성이나 능력으로 할 수 없습니다. 오직 진리의 영인 성령님이 하십니다. 이 진리의 영을 세상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압니다. 왜냐하면 성령님이 그들과 함께, 그들 안에 계셔서 자신의 존재를 알려주시기 때문입니다.

  

18-21절을 보십시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것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겠음이라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성령은 예수님의 영입니다(행16:7). 예수님은 성령으로 오셔서 신자들을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으십니다. 그들을 보호하고 위로하십니다. 거듭나게 하시고 하나님과 예수님, 신자 간의 연합을 이루십니다(20).

  

21절을 다시 한 번 보십시오.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는 그의 계명을 지킵니다. 그런 자에게 예수님은 자신을 나타내십니다. 자신을 나타내신다는 것은 신자의 심령에 영적으로 주님을 계시한다는 것입니다. 21절에서 예수님이 자기를 제자들에게 나타내신다고 하자 가룟인 아닌 유다(야고보의 아들 유다: 눅 6:16)가 이왕 나타내시려면 세상에 크게 한번 나타내셔야 되지 않느냐고 합니다. 이런 그에게 예수님은 그를 사랑하는 자는 세상에서 유명해지는 자가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지키는 자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유월절 전날 다락방에서 지금까지 제자들에게 여러 가지를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나 이제 시간이 부족합니다. 또한 그들이 영적인 진리를 다 이해하기에는 너무 연약합니다. 이에 예수님은 모든 것을 보혜사 성령께 맡기십니다. 열두 사도들은 보혜사 성령의 직접적인 가르침을 받습니다. 예수님이 그들에게 가르치셨던 것을 그대로 생각나게 하십니다. 그래서 복음을 올바로 증거하게 하시며 신약성경을 기록하게 하십니다. 27절을 보십시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Peace I leave with you" 이 말은 단순한 작별 인사가 아닙니다. 26절까지 가르치신 성령론의 결론입니다. 제자들이 그리스도의 사건, 곧 복음을 깨닫고 믿을 때 그들에게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보장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이 때 그들의 마음에 임하는 것은 평안입니다.

  

30절을 보십시오. "이후에는 내가 너희와 말을 많이 하지 아니하리니 이 세상 임금이 오겠음이라 그러나 저는 내게 관계할 것이 없으니" 이제 곧 세상 임금 사탄이 옵니다. 그러나 사탄은 예수님과 관계할 것이 없습니다. 관계할 것이 없다는 것은 He has no hold of me 로 흠잡을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죄가 있어야 사탄이 그것을 갈고리로 꿰어 참소를 할 텐데 예수님은 전혀 죄가 없으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죄가 있어서 십자가에 달리시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아버지께서 명하신대로 순종하여 행하시는 것입니다(31).

  

결론적으로, 모든 사람의 영혼이 갈망하는 바는 하나님 나라의 영원한 처소입니다. 예수님은 그곳으로 가는 유일한 길이십니다. 연약하여 그 길을 가기 힘든 우리를 위해 진리의 영,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가 성령님의 도움을 받아 그 길을 잘 가기를 기도합니다.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온 마음으로 영접하며 순종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