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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017년 누가복음 제 10 강 '듣고 행하는자' (누가복음 6장 20절 ~ 49절)2017-04-23 2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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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누가복음 10강 
 
듣고 행하는 자 
말씀/ 누가복음 6:20-49 
요절/ 누가복음 6:47 

“내게 나아와 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마다 누구와 같은 것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주시는 위로와 격려, 또 그들이 바라보고 나아가야 할 비범한 목표에 관한 말씀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예수님의 제자로 살기를 소원하고 기도하는 우리가 가져야 할 비범한 내면성을 알고 또 그러한 내면성을 덧입고자 기도하는 귀한 시간 되기를 기도합니다. 
 
20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이르시되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본문에서 가난하다는 단어는 원문상 구걸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극심한 가난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당시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는 세리 마태처럼 부자로 잘 살 수 있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가난한 자들이 되었습니다. 예수님도 가난하셨으므로 그들은 늘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필요한 것들을 위해 기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따르다가 굶어죽을줄 알았는데 신기하게 하나님께서 그들을 먹이시고 입히시는 것을 체험하였습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께서 그들의 아버지가 되심을 체험하였습니다. 
 
저는 12년 전 외대 근처로 이사를 오게 되었습니다. 당시 그 집은 곧 재개발이 예정된 곳이었으므로 비교적 저렴한 전세비로 이사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제 어머니는 전세비가 틀림없을 오를 것이니 미리 저축을 잘 해두라고 신신당부하셨습니다. 저는 돈이 좀 생기면 말씀연구한다고 컴퓨터 등 필요한 것을 마음껏 사고 또 양들 밥도 사주고 하느라 전혀 저축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곧 재개발한다던 그곳이 12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재개발을 시작하지 않아 12년 전 전세비 그대로 옥탑방이 딸린 2층 집에서 잘 살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께서 나의 아버지가 되어주심을 체험하고 있습니다. 
 
21절을 보십시오. “지금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지금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설움 중 가장 큰 설움이 배고픈 설움입니다. 훈련생은 늘 춥고 졸립고 배가 고프다는 말처럼 제자들은 언제나 배가 고팠습니다. 또 제자들은 예수님 때문에 많은 눈물을 흘렸습니다. 사랑하는 예수님이 종교 지도자들의 악한 모함과 멸시와 비난을 당하는 것을 보며 울었습니다. 예수님이 아니었으면 만나보지 못했을 수많은 사람들의 삶의 애환과 슬픔과 아픔과 고통을 보며 눈물을 훔쳤습니다. 
 
우리에게도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기 때문에 흘리는 눈물이 있습니다. 학생들은 주말에 꼭 가야 하는 스케쥴을 희생하고 주말 소감 모임을 이루는 아픔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때 발표하는 소감은 꼭 희한하게 은혜가 많아 눈물이 흐릅니다. 목자님들은 오랜 기간 소망을 두고 도왔던 학생이 떠나갈 때 눈물을 많이 흘립니다. 논문을 정직하게 쓰다가 제 때에 논문패스가 되지 않아 눈물 흘리는 대학원생도 있습니다. 정직하게 일처리를 하다가 어려움을 겪고 눈물을 흘리는 직장인도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없이 세상을 살면서도 눈물을 많이 흘렸는데 제자의 삶에도 이런 아픔과 눈물이 있어야 하는가 생각합니다. 그러나 구름과 비가 없이 날마다 밝은 태양만 비추이는 곳은 마침내 사막이 되고 맙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웃음만 가득한 제자의 길은 축복이 아니라 재앙입니다. 제자의 마음에 애통함의 먹구름이 몰려들고 비통함의 번개가 치며 마침내 눈물이 떨어질 때 그의 마음밭은 하나님의 말씀이 잘 심겨지고 자라날 수 있는 옥토가 됩니다. 그 옥토에서 많은 생명의 열매가 맺힐 때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고 눈물이 변하여 웃음이 됩니다. 
 
22-23절을 보십시오. “인자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 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그들의 조상들이 선지자들에게 이와같이 하였느니라” 22절은 출교(excommunication)를 의미합니다. 당시 유대사회에서 출교당하는 자와는 일체의 사회적 접촉이 금지되었습니다. 심지어 출교당하는 자는 돌로 쳐 죽여도 죄가 되지 않았습니다. 
 
오늘날에도 예수님 때문에 미움받고 멸시받는 일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특히 전도할 때에 그런 일을 많이 당합니다. 멀쩡하던 사람에게 전도하면 갑자기 인상을 찡그리며 경멸스러운 표정을 짓습니다. 어떤 이들은 욕설을 내뱉기도 합니다. 전도하다가 그런 일을 당하면 당황스럽고 마음에 상처를 받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멸시한 것은 내가 아니라, 내가 전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당신 때문에 멸시당한 우리에게 기뻐하고 뛰놀라고 하십니다. 이는 주님께서 그러한 자를 특별한 상으로 갚아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현재 외대에서는 학생들을 중심으로 매주 캠퍼스 전도 crew 모임을 이루고 있습니다. 취업난 시대에 학업으로 바쁜 학생들이 시간을 쪼개어 지나가는 학생들에게 열심히 예수님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때 어떤 학생들은 뭐야 하며 멸시와 경멸의 표정을 짓고 지나갑니다. 또 아는 친구나 교수님이 쟤 뭐하냐 하는 표정으로 빤히 쳐다보며 지나갈 때 전도하다가 자의식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서로 격려하며 다시 힘과 용기를 내어 예수님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모습이 우리 주님 보시기에 얼마나 귀하고 아름답겠습니까! 주님께서는 이들을 위하여 특별히 귀한 상을 준비해두고 계심을 믿습니다. 
 
24-26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그들의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같이 하였느니라” 세상 만사에 반드시 먼저 겪어야 하는 과정이 있습니다. 1년 내내 봄인 나라에 사는 사람들은 봄이 무엇인지 잘 모릅니다. 죽었던 만물이 기적처럼 부활소생하는 봄의 생명력과 그 신비를 느낄 수 있으려면 기나 긴 겨울의 혹독한 추위를 먼저 겪어야 합니다. 이와같이 참된 위로를 경험하기 위해서는 먼저 아픔과 슬픔이 있어야 합니다. 아픔이 클수록 위로도 큽니다. 웃기 위해서는 먼저 웃을 수 없는 시간이 있어야 합니다. 24시간 웃는 사람은 필시 실성한 사람일 것입니다. 칭찬받기 위해서는 먼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고독과 외로움이 시간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나라는 정의의 나라입니다. 이 땅에서 이미 모든 것을 다 누린 사람에게 하나님의 나라에게서 줄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위로하고 회복시켜주는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27-28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너희 듣는 자에게 내가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27절부터는 제자들이 가져야 할 비범한 내면성에 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원수를 사랑할 수 있는 비범한 내면성을 가져야 합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이는 원수같은 우리를 위해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체험한 사람에게만 가능한 일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손양원 목사님은 여수 반란 사건 때 자신의 두 아들을 죽인 공산당 청년을 자신의 양아들로 삼았습니다. 그의 딸 손양희 권사는 사랑하는 두 오빠를 죽인 원수를 새 오빠로 삼으라는 아버지의 말씀을 도저히 순종할 수 없었습니다. 이런 그에게 손양원 목사님은 다음과 같은 간곡한 말로 권면하였습니다: “양희야, 내가 지난 5년간 감옥에서 그 모진 옥고를 치룬 까닭이 무엇이냐? 그것은 우상에게 절하지 말라하신 하나님의 제 1계명을 지키기 위함이 아니었더냐? 그런데 그 계명을 지키기 위해 모진 옥고를 치루었으면서, 네 원수를 사랑하라는 주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다면 그 옥고가 다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이냐? 내 어찌 우상에게 절하지 말라하신 주님의 말씀은 지키면서, 네 원수를 사랑하라는 주님의 말씀은 지키지 않을 수 있단 말이냐?” 
 
손양원 목사님이 이와같이 말할 수 있었던 것은 원수같은 죄인들을 용서하시고, 용서하실뿐만 아니라 사랑하여서 독생자를 내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체험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원수사랑은 성자처럼 비범한 소수의 사람들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원수 사랑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체험한 사람은 누구든지 할 수 있고 또 해야 하는 것입니다.  
 
29-30절을 보십시오. “너의 이 뺨을 치는 자에게 저 뺨도 돌려대며 네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도 거절하지 말라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 것을 가져가는 자에게 다시 달라 하지 말며” 이 말씀은 원수사랑의 연속선상에 있습니다. 나의 이 뺨을 치는 사람에게 주먹질과 발차기로 즉각 대응하면 속이 후련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할 경우 그 사람은 영원히 예수님을 떠나고 말 것입니다. 그 사람을 예수님을 닮은 일체의 온유함으로 대하고 “그렇게 화가나서 견딜 수 없으면 내 이쪽 뺨도 때리세요. 그렇게 해서라도 당신의 분이 조금이라도 풀릴 수 있다면 그렇게 하세요.”라는 자세로 대할 수 있다면 그는 저가 믿는 예수란 자는 도대체 누구인가 하는 마음의 변화를 일으킬 가능성이 있습니다.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까지도 주는 것 역시 같은 맥락입니다. 겉옷이 없어서 빼앗으려 하는 자의 형편을 살펴서 그에게 속옷도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자발적으로 내어줄 수 있다면 이 역시 그의 마음에 감화를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31절을 보십시오.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 말씀은 이른 바 황금률(golden rule)이라 불리우는 제자의 삶의 대원칙입니다. 우리가 살다보면 서운한 때가 있습니다. 저 분이 나를 인정해주지 않고 무시하는 것 같아 서운합니다. 서운하십니까? 그렇다면 먼저 그를 찾아가 인정해주고 존중해 주십시오. 저 분이 나의 형편을 이해해주지 않고 배려해주지 않아 서운합니다. 그렇다면 먼저 그에게 가서 그의 형편을 이해해주고 배려해주십시오. 남이 나에게 해 주었으면 하고 기대하는 그대로 내가 먼저 그에게 가서 그대로 행하십시오. 이것이 곧 제자의 모든 행동의 대원칙입니다. 
 
35절을 보십시오.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시니라” 자기를 사랑하는 자만을 사랑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죄인들도 하는 일이요 특별히 칭찬받을 점이 없습니다. 자기에게 친철한 자를 친절하게 대하는 것 역시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받기를 바라고 꾸어주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는 것은 비범한 일입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이 주시는 큰 상이 있습니다. 또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받게 됩니다. 사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받는 것 자체가 최고의 상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더하여 큰 상이 있다고 하니 상상조차 하기 어렵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서 기독교 신앙의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인지 배우게 됩니다. 그것은 죄인의 마음을 벗어버리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마음을 본받고 닮은 자가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보라 저기 하나님을 닮은 사람이 있다, 보라 저기 하나님의 마음을 본받은 사람이 있다’라며 놀라움과 경이로움 가운데 외치는 것입니다. 
 
36절을 보십시오. “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 하늘 아버지께서 얼마나 자비로우십니까! 우리는 신문지상에서 흉악한 범죄를 저지른 자는 영원한 불구덩이에 떨어져 무한한 고통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자비로우신 하나님은 그러한 자라도 심판받기를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그러한 자라도 어찌하든 회개하여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을 본받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곧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서의 영향력입니다. 한 줄기 작은 빛이 세상을 비추고 적은 분량의 소금이 큰 맛을 내는 것처럼 이러한 비범한 내면을 가진 소수의 사람들이 세상에 큰 영향력을 끼치게 됩니다. 
 
37-38절을 보십시오. “비판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본문에서 비판과 정죄는 법정 용어로서 법정에서 재판관이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도 하나님이 주신 분별력과 말씀을 통해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재판관의 자리에 앉아서 사람을 최종적으로 비판하거나 정죄할 수 없고 또 해서도 안됩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께만 속한 권한입니다. 재판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고 사람이 할 일은 용서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도 그의 죄를 용서하여주시고 그에게 선대하여 주실 것입니다. 
 
39절을 보십시오.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맹인이 맹인을 인도할 수 있느냐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아니하겠느냐” 맹인이 맹인을 인도할 수 없는 것은 자명한 이치입니다. 맹인을 인도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40절을 보십시오. “제자가 그 선생보다 높지 못하나 무릇 온전하게 된 자는 그 선생과 같으리라” 제자가 선생보다 높아질 수 없습니다. 물론 어떤 경우는 청출어람이라고 제자가 스승을 넘어서는 경우도 있습니다. 엘리같은 스승 밑에서 사무엘같은 탁월한 하나님의 종이 나올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특별한 경우입니다. 또한 엘리가 사무엘의 스승이었다기보다는 하나님께서 친히 사무엘의 스승이 되어주셨으므로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제자는 스승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돕는 제자들은 내가 배우고 성장한만큼만 딱 거기까지만 성장할 수 있습니다. 또한 “무릇 온전하게 된 자는 그 선생과 같으리라” 하였습니다. 영어성경을 보면 “everyone who is fully trained will be like their teacher.”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는 훈련을 잘 받은 사람은 그 스승의 수준에 올라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훈련을 잘 받은 사람은 예수님의 수준으로까지 배우고 성장할 수 있습니다. 이른바 작은 예수(little Jesus)가 됩니다. 그러한 사람은 맹인과 같이 세상을 방황하는 영혼들을 능히 인도할 수 있습니다. 
 
41-42절을 보십시오.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너는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보지 못하면서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형제여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할 수 있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라 그 후에야 네가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리라” 이 말씀은 우리가 어떻게 다른 사람의 문제를 도와줄 수 있는 실력을 갖출 수 있을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다른 사람의 문제를 척척 도와줄 수 있는 유능한 상담가요 목자요 제자 양성가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들은 주위에 있는 여러 형제들을 도와주겠다며 이리 와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과감하게 핀셋을 들이대며 눈에 있는 티를 빼주려 합니다. 그러나 치명적인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핀셋을 든 사람의 눈에는 들보가 끼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눈에 들보가 끼어있는 사람은 모든 것을 왜곡된 시선으로 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는 티가 여기 있다고 생각하고 핀셋을 내밀지만 사실 티는 다른 곳에 있습니다. 형제는 그가 휘두른 핀셋에 돌이키기 어려운 큰 상처를 입고 맙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다른 형제의 문제를 정확하게 보고 도울 영적인 안목을 갖추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먼저 하나님 앞에서 들보와 같은 자기 문제를 발견하고 회개를 통해 그것을 빼내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자기 안에 있는 죄를 회개하여 극복하지 못한 사람이 결코 다른 사람 안에 있는 같은 죄를 도와줄 수 없습니다. 의사가 자기 실력만큼만 환자를 치료할 수 있는 것처럼 사람이 자기가 성장한만큼만 다른 사람을 도와줄 수 있습니다.
 
43-45절을 보십시오. “못된 열매 맺는 좋은 나무가 없고 또 좋은 열매 맺는 못된 나무가 없느니라 나무는 각각 그 열매로 아나니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또는 찔레에서 포도를 따지 못하느니라 선한 사람은 마음에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 이 말씀은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준행할 수 있는 중요한 원리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스스로 좋은 열매를 맺으려고 노력하기보다 먼저 좋은 나무가 되어야 합니다. 좋은 나무가 되는 비결은 참 포도나무되신 예수님께 접붙힘을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연합하여 예수님께서 주시는 성령의 은혜와 말씀의 은혜를 공급받을 때 자연스럽게 내면에 은혜가 풍성하게 흘러넘치게 됩니다. 삶 가운데서도 좋은 열매를 맺게 됩니다.
 
우리가 자칫 내 힘과 의지와 능력으로 주님의 말씀을 준행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상 자기 힘과 의지와 능력으로 자연인의 본성을 부인하고 주님의 말씀을 준행하여 원수까지도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이것은 결코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또 할 수도 없습니다. 이것은 포도나무되신 주님께로부터 흘러나오는 은혜와 말씀의 능력으로만 가능합니다. 포도나무되신 주님께로부터 흘러나오는 그 은혜의 수액, 주님께서 나에게 주시는 새 마음 - 그것을 받을 때에만 실천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포도나무되신 예수님께 접붙힘받을 수 있습니까? 
 
46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내가 말하는 것을 행하지 아니하느냐”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 중 많은 이들이 예수님을 가리켜 “주여 주여”라고 불렀습니다. 주님이란 영어로 Lord로서 이는 주인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고대 시대 때에 하인들이나 노예들이 자신에 대한 모든 소유권과 권리를 가진 이를 향하여 “주인님, 혹은 주님”이라고 불렀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무엇인가 정의할 때 그 핵심 내용은 예수님을 자신의 삶의 모든 소유권과 지배권을 가진 주인님으로 인정하고 고백하는 사람이 곧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오늘날에도 말로는 예수님을 향하여 주님이라고 부르면서도 마치 Thanks a lot을 별 감사의 마음도 없이 형식적으로 내뱉는 사람들처럼 전혀 주님을 주님으로 인정하지 않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정말 주님이라고 그 진정한 의미를 알고 고백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자신의 생명의 소유권도 주님에게 있고 자신이 가진 시간과 능력과 재능에 대한 소유권도 역시 주님에게 있으며 자신의 삶의 미래에 대한 결정권도 역시 주님에게 있음을 인정하는 사람들입니다. 놀라운 사실은 자신의 모든 소유권과 지배권이 주님이 예수님께 있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은 주님과 신비한 생명의 연합을 이루게 됩니다. 포도나무되신 예수님께 접붙힘이 되어 예수님께로부터 흘러나오는 은혜와 생명력을 받게 됩니다. 그 힘으로 기쁨 가운데 주님이 주신 모든 말씀을 다 준행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반면 말로만 주여 주여 하면서도 주님이 말씀하신 것을 준행하지 않는 사람들은 실상은 예수님의 제자가 아닙니다. 그들은 자기 속에서 용암처럼 샘솟는 죄악된 본성과 욕구의 다스림을 받습니다. 그들은 내 인생의 주인은 나라고 절규하지만 실상 그들의 인생의 주인은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죄악된 본성이요, 또 그 배후에 있는 사탄입니다. 
 
47-48절을 보십시오. “내게 나아와 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마다 누구와 같은 것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집을 짓되 깊이 파고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사람과 같으니 큰 물이 나서 탁류가 그 집에 부딪치되 잘 지었기 때문에 능히 요동하지 못하게 하였거니와” 예수님을 말 그대로 주님으로 모시고 주님의 지배권을 인정하고 주님의 다스림을 받음으로 힘과 능력을 공급받아 주님께서 주신 말씀을 준행한 사람은 집을 짓되 깊이 파고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사람과 같습니다. 그 집은 큰 물이 나서 탁류가 부딪힐 때 견고하여 흔들리지 않습니다. 
 
49절을 보십시오.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주추 없이 흙 위에 집 지은 사람과 같으니 탁류가 부딪치매 집이 곧 무너져 파괴됨이 심하니라 하시니라” 반면 주님의 말씀을 듣고 “야 누가 저런 말씀을 지킬 수 있겠어. 저 말씀은 별을 도달할 수 없으나 별을 바라보라고 하신 것처럼 그냥 우리가 나아가야 할 이상향을 말씀하신 것뿐이야” 하면서 원수를 미워하고 복수하며 마음의 본성대로 사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신앙은 주추없이 흙 위에 집을 지은 사람과 같습니다. 인생의 역경과 시련, 죽음의 파도가 몰려올 때 와르르 무너지게 됩니다. 
 
결론입니다. 행함이 없는 신앙은 죽은 신앙입니다. 우리 자신에게는 예수님의 말씀을 준행할 힘이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접붙힘받아 주님이 주시는 새 마음을 덧입고 새 힘과 새 능력을 덧입을 때 준행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이 주시는 새 마음을 받아 원수까지도 용서하고 사랑하는 비범한 내면성을 덧입게 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