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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021년 요한복음 3강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킨 예수님 ⁠`(요한복음 2:1-25)2021-03-22 02:02
작성자
2021 요한복음 3강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킨 예수님 

말씀/ 요한복음 2:1-25
요절/ 요한복음 2:9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도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 연회장이 신랑을 불러” 

뉴튼은 사과나무에서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제자들도 뉴튼처럼 한 가지 사건을 통해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발견했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도 제자들처럼 예수님이 어떤 분이지를 발견하는 귀한 은혜가 있기를 기도합니다.

1,2절을 보십시오. “사흘째 되던 날 갈릴리 가나에 혼례가 있어 예수의 어머니도 거기 계시고 예수와 그 제자들도 혼례에 청함을 받았더니” 예수님이 빌립과 나다나엘을 제자로 부르신지 사흘째 되던 날 갈릴리 가나에 결혼식이 열렸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이미 그곳에 계시고 예수님과 제자들도 결혼식에 초청을 받았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결혼식은 모든 사람에게 기쁨과 흥겨움을 주는 잔치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1년 전부터 결혼식을 준비해서 무려 1주일간 결혼 잔치를 벌였습니다. 

3절을 보십시오. “포도주가 떨어진지라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이르되 저들에게 포도주가 없다 하니”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결혼식 잔치가 한창인데 포도주가 떨어졌습니다. 포도주는 결혼식의 흥을 돋워주고 하객들의 마음을 즐겁해 해주는 중요한 음료입니다. 오늘날로 치면 피로연에서 주 메뉴가 중간에 떨어진 것과 같습니다. 주 메뉴가 스테이크인데 스테이크가 다 떨어져 식사를 못한 손님들은 단무지하고 파전 남은 거하고 김치랑 식사를 해야 할 상황이 되었습니다. 첫 출발을 하는 신랑 신부를 축하해주기 위해 바쁜 시간을 쪼개 멀리서 온 하객들은 웅성거리며 불만을 터뜨리기 시작했습니다. “아니, 이것이 뭐하는 짓이여. 하객들을 이렇게 무시해도 되는겨.” 

이때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이 문제를 들고 예수님께 나가 긴급히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저들에게 포도주가 없다” 이에 예수님은 어떤 반응을 보이셨습니까? 

4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예수님은 “어머니” 이렇게 부르는 대신 “여자여”라고 불렀습니다. 원문상 “여자여”라는 표현은 한국말의 “여자여”라는 표현보다는 훨씬 정중한 표현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어머니를 이렇게 부르는 것은 마리아의 마음에 상처를 주었을 것입니다. 그 다음 말씀은 더 놀랍습니다.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이 말씀은 포도주가 떨어진 일이 예수님과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지막 말씀이 의미심장합니다.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얼핏 들으면 매몰찬 거절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곰곰히 생각해 보면 뭔가 깊은 의미가 있는 것 같습니다.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습니다.” 이 말씀이 무슨 의미일까요? 

본문에서 때는 영어로는 ‘hour’, 원문상으로는 ‘호라’입니다. ‘호라’는 어떤 일이 이루어질 결정적인 때를 의미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자세히 관찰해 보면 세상 만사에 다 하나님이 정해놓으신 때가 있습니다. 전도서를 보면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 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전 3:1-11)”

지금까지 예수님은 30년간 마리아의 아들로 살았습니다. 젊은 날 남편을 잃고 과부가 된 어머니 마리아를 예수님은 극진히 섬겼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더 이상 마리아의 아들이 아닌,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서, 메시야로서 공적인 삶을 사셔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어머니가 부탁했다고 해서 그것을 무조건 들어줄 수 없었습니다. 

5절을 보십시오. “그의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니라” 예수님의 매몰찬 거절에 마리아는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놀랍게도 그녀는 하인들에게 “예수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너희는 그대로 하라”고 하인들의 마음을 준비시켰습니다. 마리아의 행동은 얼핏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일반적인 경우라면 “뭐 여자여? 네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매몰차게 엄마를 여자여라고 부를 수 있니?” 서운해하며 눈물을 쏟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예수님이 자신을 여자여라고 부를 때 그 “여자여”라는 말을 통해서 자신과 예수님의 관계를 새롭게 정립하게 되었습니다. “여자여”라는 말을 통해 그녀는 예수님이 더 이상 자기 배에서 낳은 자기 자식이 아닌, 하나님께서 다만 자기 태를 통해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물론 마리아가 단순히 “여자여”라는 그 말 한 마디만을 통해서 그것을 깨닫게 된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을 처음 잉태할 때 천사로부터 들은 수태고지를 통해 예수님이 평범한 아이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다만 지난 30년간은 좋은 아들로서 가정과 어머니를 잘 섬겼기 때문에 그 사실을 잊어버리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본문의 “여자여”라는 말씀을 통해 예수님과 자신의 관계를 하나님의 어린 양이요 메시아신 주님과 그 메시아의 구원이 필요한 죄인으로 새롭게 관계를 재정립하게 되었습니다. 

마리아는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다’는 주의 말씀을 거절이 아닌, 때가 되면, 그것이 하나님의 뜻에 맞다면 도와주겠다는 의미로 이해했습니다. 이에 그녀는 하인들을 불러 예수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고 말함으로 하인들의 마음을 미리 준비시켰습니다. 

본문의 마리아를 통해 우리는 귀한 교훈을 얻게 됩니다. 우리는 주님께 무언가를 구할 때 그 구하는 것이 내가 원하는 때에,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주님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때에, 하나님이 원하는 방식으로 나의 기도를 들어주십니다. 그러므로 내 기도가 얼핏 거절당한 것 같아 보여도 절대 실망하면 안됩니다. 주님을 신뢰하고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면 기도하고 믿음으로 가만히 기다리고만 있으면 됩니까? 아닙니다. 참된 믿음은 본문의 마리아처럼 기도한 후에 때가 되어 주님이 일하실 수 있도록 그 때를 위한 환경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인류의 역사를 살펴보면 모든 것이 점진적으로 조금씩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어떤 결정적인 때가 있습니다. 그것을 역사의 변곡점이라고 부릅니다. 그 때가 바로 하나님의 때요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때입니다. 하나님은 그 때 미리 준비되어 있는 자들을 귀하게 쓰십니다. 

성경을 보면 야곱의 사랑하는 아들 요셉이 형들의 미움을 받아 이집트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요셉이 노예가 된 때 그의 나이는 대략 17세 정도였습니다. 그는 하루아침에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던 아들에서 비참한 노예로 전락했습니다. 그는 운명을 탓하며 죽지 못해 하루하루 살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처한 환경에서 최선을 다했습니다. 외국어인 이집트어를 열심히 공부하여 익혔습니다. 또 주변의 일들을 잘 관찰하며 어떻게 일을 잘 할 수 있을지 연구하여 맡겨진 일들을 성공적으로 해냈습니다. 이런 그는 노예들 중 가장 높은 자리에 올라갔습니다. 하지만 우여곡절끝에 성추행범으로 누명을 받아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감옥에서도 그는 감옥에 갇혀온 정치범 고위인사들을 성실히 섬겼습니다. 이 모든 과정을 통해 요셉은 이집트의 언어와 문화, 정치, 경제, 궁중생활, 주요인사의 인적 상황 등을 전부 익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때가 되었을 때 이런 요셉을 이집트의 총리가 되게 하셨습니다. 더 나아가 단 몇 십명에 불과하던 요셉의 가족을 약 400년 후 2백만명에 이르는 큰 민족이 되게 하셨습니다. 

400년이 지나 이스라엘이 이집트의 노예 백성이 되었을 때,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떠나는일에 하나님은 준비되어 있던 한 사람 모세를 들어 쓰셨습니다. 모세는 어떤 점에서 준비된 사람이었습니까? 그는 청년 시절에는 이집트의 왕자로서 열심히 공부하며 자신을 연마했습니다. 나이 40이 되어서는 뜻하지 않게 광야에서 양치는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어떤 분들은 아 왕자니까 당연히 열심히 공부했지, 또 뜻하지 않게 양치는 생활을 하게 되었으니 열심히 양을 쳤지 생각합니다. 그러나 세종대왕의 형 양녕대군처럼 왕세자로 책봉되었으면서도 개차반처럼 방탕한 삶을 산 경우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또 왕자 교육을 받은 인재가 자존심을 다 내려놓고 험한 양치는 일을 하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모세는 왕자일 때는 열심히 공부했고 양치는 일을 해야 할 때에는 열심히 양을 쳤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준비된 모세를 들어 쓰셨습니다. 200만명에 이르는 백성들의 불평과 불만을 온유한 마음으로 품고 감당하는 것은 그가 40년간 광야에서 양을 치며 양을 섬기는 훈련을 받았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가 말년에 구약 성경의 근간이 되는 모세오경 곧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를 저술할 수 있었던 것은 왕자로서 공부할 수 있을 때 열심히 공부해 두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결혼식 잔치 집에 포도주가 떨어진 것은 반드시 있어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이 부재한 상태입니다. 포도주가 없으므로 삶에 기쁨이 없습니다. 여러분의 인생에서 떨어진 포도주는 무엇입니까? 그것을 달라고 주님께 나아가 기도로 간구하십시오. 그리고 주님이 일하실 때를 대비하여 자신을 준비하십시오. 공부해야 할 때에는 열심히 공부하고, 알바를 해야 할 때에는 열심히 알바를 하면서 뭔가를 배우십시오. 혹 자신이 입학한 대학이나 학과가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고 실망하신 분이 계십니까? 내가 이런 대학, 이런 학과에 오려고 그렇게 열심히 공부했나 생각하며 술이나 마시며 하루하루를 허송세월할 생각을 품고 계신 분이 계십니까? 절대 그렇게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인도하신 삶의 현장에는 허투루 버릴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누가 압니까? 그곳에서 만난 친구, 그곳에서 만난 선배, 후배가 내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이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 목자님들 가운데 요즘 복음역사가 활발하게 일어나지 않아서 기쁨이 떨어진 분들이 있습니다. 삶에 포도주가 떨어졌습니다. 그러나 포도주에는 여러가지 종류가 있다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복음역사가 활발히 일어나고 청년들이 예수님의 좋은 제자가 되는 것은 확실히 우리 목자님들의 마음에 포도주같은 기쁨을 줍니다. 그러나 성경을 깊이 연구하고 주님과 기도로 깊이 교제하는 데에도 포도주의 기쁨이 있습니다. 레바논의 조스터드 선교사님은 중동에서 사역 중입니다. 이 분은 아무래도 중동에서 사역하다보니 자유롭게 복음을 전하는데 한계가 있고 또 직장일에 매여 있는 어려움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분이 성경 66권을 통달한 성경의 도사가 되고자 하는 방향 가운데 열심히 성경을 읽고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때부터 이분의 얼굴에 빛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기쁨이 충만했습니다. 아프리카 짐바브웨의 이 제임스 선교사님은 이제 정년퇴임을 몇 년 앞두고 정년 퇴임한 후 마음껏 성경을 공부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기쁨이 충만해졌습니다. 얼마 전 성경을 공부하는 것에 관련하여 잠시 통화를 하였는데 소풍을 앞둔 어린아이처럼 기쁨이 충만한 것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이 때가 되면, 역사의 변곡점이 이르면 새롭게 복음 역사를 이루어주시고 우리의 마음에 포도주같은 기쁨을 주실 것을 믿습니다. 우리 목자님들이 이 주님을 믿고 복음역사가 어려운 때에 성경을 자주 통독하고 또 깊이 연구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때가 되면 반드시 주님께서 귀하게 쓰실 것을 믿습니다. 

6-7절을 보십시오. “거기에 유대인의 정결 예식을 따라 두세 통 드는 돌항아리 여섯이 놓였는지라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신즉 아귀까지 채우니” 아니나 다를까 예수님은 마리아가 예상한대로 하인들에게 순종하기 쉽지 않은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유대인의 정결 예식을 위해 준비해둔 커다란 돌항아리 여섯개에 물을 가득 채우라는 말씀이었습니다. 돌항아리 하나 당 두세 통이라고 하였는데 보통 성인 한 사람이 우물가에 가서 길어올 수 있는 정도의 물이 한 통이니까 이 항아리가 얼마나 큰 항아리인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 항아리가 여섯 개 있는데 그 여섯 개 항아리에 전부 물을 채우라는 말씀입니다. 하인들은 마리아가 신신당부한 것을 기억하고 쉽지 않지만 포도주를 구해야 하는 이 긴박한 상황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항아리에 물을 아귀까지 가득 채웠습니다. 

8절을 보십시오.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 하시매 갖다 주었더니” 하인들은 마리아가 당부한대로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해 항아리에 물을 가득 채웠으니 이제 되었겠거니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예수님은 그 물을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는 것이었습니다. 포도주가 오기만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는 연회장에게 맹물을 갖다주면 어떻게 될까요? ‘뭐하는 짓거리냐? 지금 나더러 물먹으란 말이냐?’ 할 것이 뻔합니다. 성깔있는 연회장이라면 육두문자를 쓰며 바가지로 하인들의 머리를 두들길지도 모를 일입니다. 예수님의 두 번째 말씀은 처음 말씀보다 훨씬 더 순종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하인들은 마리아의 당부를 기억하며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9-10절을 보십시오.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도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 연회장이 신랑을 불러 말하되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하니라” 하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했을 때 어떻게 되었습니까?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었습니다. 포도주를 맛본 연회장은 신랑을 불러 칭찬했습니다. 사람들은 보통 잔치 초반에 좋은 포도주를 내놓고 사람들이 얼큰하게 취하면 질이 떨어지는 포도주를 내놓는 법인데 그대는 지금까지도 최고급 좋은 포도주를 두었다며 칭찬했습니다. 

저자는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도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 기록하며 연회장과 하인을 대조하고 있습니다. 연회장과 하인은 어떤 점에서 대조가 됩니까? 연회장은 물로 된 고급 포도주를 맛보며 즐겼습니다. 이에 비해 하인들은 그 포도주를 맛보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 포도주가 어디서 났는지 알았습니다. 

이 대조를 통해 본문이 말하려는 바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물이 포도주로 변화되는 과정에서 먼저 하인들의 순종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하인들의 순종이 없이도 얼마든지 포도주를 만들어내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인들의 순종을 통해 물이 포도주가 되는 변화의 능력을 나타내기 원하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이를 통해 하인들이, 더 나아가 이 장면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는 제자들이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알고 체험하기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물이 포도주가 되는 이 예수님의 능력이 우리의 삶 가운데 나타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먼저 순종이 필요합니다.

우리 선교사님들은 약 30년 전 선교지에 나갔을 때 마태복음 6:33절 주님의 약속의 말씀을 굳게 붙들었습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이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주일이 되면 예배를 드리고 평소에도 시간이 날 때마다 말씀을 연구하고 기도하고 캠퍼스에 나가 미국 청년 대학생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일주일 내내 일해도 먹고 살 수 있을까 말까인데 이렇게 살 때 망하지 않을까 두려운 마음이 들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약속의 말씀에 순종하여 늘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였습니다. 그랬을 때 그들의 삶에 놀라운 주님의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주님께서 먹을 것과 입을 것, 살 집을 공급해 주시고 그 외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 주셨습니다. 또 그동안 공부와 담을 쌓고 살다가 미국 대학생들에게 선교할 목적으로 대학에 편입학하여 공부를 시작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뜻하지 않게 박사가 되기도 하고 교수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선교사님들은 이 경험을 통해 마태복음 6:33절 약속의 말씀을 주신 주님께서 지금도 살아계신 참 주님이신 것을 체험했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과정에는 어느 정도 모험이 필요합니다. 지금 당장 포도주가 필요한데 물을 긷고 있는 하인들처럼 이 귀한 시간에 내가 지금 뭐하고 있나 하는 회의적인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포도주를 찾고 있는 연회장에게 포도주 대신 맹물 한 바가지를 가져다 주는 하인처럼 마음에 망하지 않을까 두려운 마음이 들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어려움을 극복하고 한 번 순종해 볼 때 어떻게 됩니까? 놀라운 체험을 하게 됩니다. 성경을 통해 말씀하신 예수님이 지금도 살아계신 주님이신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 때 온 몸에 고압 전기가 흐르는 것 같은 전율을 느끼게 됩니다. 말씀에 순종한 하인들이 느꼈던 그 전율, 그 감동을 여러분도 한 번 느껴보고 싶지 않으십니까? 

11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 첫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물을 포도주로 바꾼 사건은 예수님이 행하신 첫 표적이었습니다. 본문은 이 사건을 기적이라고 말하지 않고 표적이라고 말합니다. 기적은 miracle이고 표적은 sign입니다. 기적은 말 그대로 일상 생활에서 일어날 수 없는 놀라운 일을 가리킵니다. 이에 비해 표적은 그 기적이 어떤 의미, 어떤 뜻을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물을 포도주로 바꾸신 사건은 단순한 기적이 아닌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의미가 무엇일까요?

첫째, 예수님은 우리에게 기쁨을 주기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포도주는 기쁨의 상징입니다. 성경은 예수님을 결혼식 잔치의 신랑으로 자주 비유합니다. 장차 하나님 나라에서 성도들은 신부, 예수님은 그의 신랑이 되십니다. 결혼식 전에도 신부에게는 결혼식에 대한 기대감에서 나오는 기쁨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에게는 이런 기쁨이 충만합니다. 

요즘 한국 기독교가 언론을 통해 비난을 많이 받고 있습니다. 특히 젊은이들이 많이 접하는 SNS에서 평이 매우 좋지 못합니다. 이로 인해 많은 성도들이 기쁨을 잃었습니다. 얼굴에 수심이 가득합니다. 이것은 심각한 문제입니다. 만약 결혼식을 앞둔 신부의 얼굴에 수심과 근심이 가득하다면 그 얼굴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뭐라고 생각할까요? 신랑이 마음에 안드나보다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기독교의 표지는 기쁨입니다. 그래서 한 선교단체는 단체의 이름을 JOY라고 지었습니다. Jesus First, Others Second, You Third의 삶을 살 때 충만한 기쁨이 온다는 뜻입니다. 그러데 그 JOY 멤버들이 얼굴에 기쁨이 하나도 없고 근심과 수색이 가득한 모습으로 왔다갔다 한다면 사람들이 무어라고 생각하겠습니까?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믿는 우리에게는 근본적인 기쁨이 있습니다. 내 죄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주님으로 인한 죄사함의 기쁨이 있습니다. 이 주님 안에서 참된 생명,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 기쁨이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이 기쁨을 주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셨습니다. 넘치는 기쁨, 영원한 기쁨을 선물로 받은 우리에게는 이 기쁨을 적극적으로 표현할 책임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아니 기쁘면 기뻐하고 슬프면 슬퍼하는 것이지 기쁨을 적극적으로 표현해야 하는가 생각합니다. 그러나 데살로니가 전서 5:16-18절은 말씀합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그렇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기쁨을 주셨으나 그 기쁨을 항상 표현하는 것은 우리의 몫입니다. 결혼을 앞둔 신부가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어도 신랑만 생각하면 다시 얼굴이 웃음꽃이 환하게 피는 것처럼 우리도 주님을 생각하고 항상 기뻐하며 그 기쁨을 표현해야 합니다. 그래야 사람들이 이런 우리를 보고 아 정말 기독교의 표지는 기쁨이구나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우리에게 기쁨을 주시는 예수님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지 않겠습니까? 

둘째, 예수님은 변화의 능력자라는 사실입니다. 물이 포도주가 된 것은 근본적인 변화를 의미합니다. 우리가 과학 시간에 배운 것처럼 물의 분자식은 H2O입니다. 이에 비해 발효된 포도주의 분자식은 에틸 알콜이니까 C2H5OH입니다. 분자식을 비교해보면 없던 탄소 원소가 생겨난 것입니다. 탄소는 공유결합을 하기에 매우 용이하여 탄소는 복잡한 생명체가 탄생하기까지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과학자들은 이 탄소 원소가 생겨나기까지 태양보다 더 크고 뜨거운 별에서 무시무시한 온도와 압력이 발생했을 때 그 온도와 압력으로 탄소보다 더 단순한 원소들이 핵융합 반응을 일으켜 마침내 탄소 원소가 생겨났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별이 자기 수명을 다하고 폭발하여 우주로 흩어질 때 폭발과 함께 흩어졌던 탄소 원소가 오랜 시간 우주를 떠돌다가 마침내 지구에 도달해 오늘날 생명체를 이루게 되었다고 봅니다. 중요한 포인트는 없던 탄소 원소 하나가 생겨나기까지 얼마나 혹독한 조건이 필요하며 얼마나 오랜 시간이 필요한가 하는 것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별 개념이 없지만 과학자들은 없던 탄소 원소 하나가 생겨난 것을 정말 기적과 같은 일로 여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없던 그 탄소를 만들어 내셨고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게 하셨습니다. 이 예수님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여 물을 포도주로 바꾸는 변화의 능력자이십니다. 

오늘날 청년들은 변화에 대한 욕구가 있습니다. 불만족스러운 자신의 삶을 바꾸기 원합니다. 그래서 헤어 스타일을 바꾸기도 하고 옷차림을 바꾸기도 합니다. 내성적인 성격을 가진 청년들은 대학생활을 계기로 아주 활동적이고 외향적인 성격으로 바꾸는 성격 개조를 시도하기도 합니다. 이런 변화는 좋습니다. 그러나 진짜 변화의 능력자는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에게는 우리의 삶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습니다. 맹물같은 인생이 포도주같은 인생이 되게 하십니다.

과거 저는 내성적인 성격으로 인해 사람들 앞에 나서지 못하고 어디를 가든 말을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조용히 있었습니다. 대학에 와서는 이런 성격을 고쳐보려고 이런 저런 노력을 해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본래 자기 성격이 아닌데 억지로 하니까 더 어색했습니다. 이런 제가 예수님을 만나고 변화되어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메시지를 전하게 되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늘 자기 일만 생각하고 자기 문제만 신경쓰던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맛있게 요리하여 전달함으로 여러 사람들의 마음에 기쁨을 주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도 이 예수님을 만나 포도주처럼 변화된 인생을 살고 싶지 않으신가요. 

13-22절에서 예수님은 성전 안에서 장사하는 이들을 다 내 쫓으셨습니다. 표적을 요구하는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지금까지 이 성전을 짓는데 46년 걸렸는데 어떻게 삼일 동안 일으킬 수 있단 말인가 되물었습니다. 예수님은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이 말씀이 자신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통해 눈에 보이지 않는 성전을 일으키시겠다는 의미임을 깨닫고 성경과 예수님의 말씀을 믿었습니다. 

결론입니다. 세상 모든 일에는 하나님이 정하신 때가 있습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은 여러분에게 기쁨을 주기 원하십니다. 여러분의 삶을 변화시키기 원하십니다. 이 예수님을 체험하려면 그 분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여러분의 삶에 변화의 능력이 나타나며 기쁨이 충만하게 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