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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021년 요한복음 8강 `그들의 원대로 주시니라 ⁠`(요한복음 6:1-21)2021-05-03 1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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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요한복음 제 8강

그들의 원대로 주시니라

말씀 요한복음 6:1-21
요절 요한복음 6:11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아 있는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 물고기도 그렇게 그들의 원대로 주시니라”

먹방과 극한체험 등이 인기입니다. 오늘 말씀은 요한복음에 나온 예수님의 7대 표적중 네 번째 다섯 번째 표적으로 성경에 나오는 최고의 먹방과 극한체험입니다. 표적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 가를 나타내는 게 목적이라고 하였습니다. 본문의 나온 두 표적은 예수님에 대해서 무엇을 말하고 있을 까요? 그 사실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 까요?


지난 강의에서 예수님이 예루살렘 양문곁 베데스다 연못가에서 38년 된 오래된 병자를 일으키셨고 그때문에 유대인들과 안식일 논쟁이 있었습니다. 

그 후에 예수님은 갈릴리 지방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디베랴의 갈릴리 바다를 건너 가셨습니다. 디베랴는 헤롯안티파스가 티베리우스 황제를 위해 건설한 계획도시입니다. 그 도시가 갈릴리 바다 근처에서 유명했기에 갈릴리 바다는 디베랴 바다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의 행선지는 다른 복음서를 참조해 보면 벳새다 지역이었고 전도여행을 다녀온 제자들에게 잠간의 휴가를 주기위해 가신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배를 타고 가자 그것을 본 무리들이 해변 길로 주님을 따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예수님이 병자들에게 행하는 표적을 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왕의 신하의 아들이 병이 나은 두 번째 표적과 38년 병자가 일어난 세 번째 표적이 있었습니다. 이런 표적들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관심을 가지고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는 기초적인 믿음과 동기부여를 해줍니다. 저도 개인적으로 폐결핵에 걸렸는 데 믿음으로 약을 끊었음에도 나았고, 새벽 기도할 때 천식을 하는 문제가 있었는데, 천식치료를 해주시면 새벽기도를 매일 드리겠다고 약속한 후, 그 심하던 천식이 사라지는 표적을 경험했습니다.

예수님이 뱃새다 (눅 9:10)의 한 산에 올라 제자들과 함께 거기 앉으셨습니다. 때는 유대인의 3대 명절인 유월절이 가까오고 있었는 데, 사람들이 유월절에 대한 기대보다 예수님께 대한 기대와 소망을 가지고 예수님께로 모여 들었습니다. 종교의식보다 예수님이 그들에게 더 소망이 되었습니다.   

5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큰 무리가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고 눈을 돌려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고 그들을 영육 간에 먹이고자 하셨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제자 중 빌립에게 물으셨습니다.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5b) 저자는 예수님의 이 질문이 어떻게 할지 몰라 빌립에게 자문을 구한 것이 아니라 계획은 있으셨고, 단지 빌립을 시험하고자 하신 질문이었다고 설명합니다.

시험이란 무엇입니까? 부족한 것을 드러내어 보충하도록 실시합니다. 예수님은 빌립의 영적인 약점을 잘 아셨습니다. 빌립은 현실적인 계산이 빠르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신뢰하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요 14:8). 이런 그가 주님의 종이 되어 쓰임 받으려면 그는 영적인 셈법을 배우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법을 익혀야 했습니다. 

시험문제를 풀 때 무엇이 중요합니까? 출제자의 의도가 중요합니다. 출제자의 의도를 파악하면 정답을 찾기가 쉬워집니다. 출제자이신 예수님의 의도는 큰 무리를 먹이고자 하는 방향가운데 긍정적인 해답을 요구하는 것이었습니다. 다음으로, 시험에는 보통 힌트와 함정이 있는 데 이것을 알면 문제를 잘 풀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질문에는 어떤 힌트가 있었습니까? “우리가”라는 말에 힌트가 있었습니다. 빌립 혼자서 혹은 제자들만의 능력으로 먹이라는 것이 절대 아니었습니다. 계산에 예수님을 포함시키라는 것이 중요한 힌트였습니다. 예수님을 계산에 넣으면 긍정적인 답, 믿음의 답이 나올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함정은 ‘사서’입니다. 이 단어만 생각하면 많은 물질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고 부정적인 답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 돈 없이, 값없이 살 수도 있기 때문에(사 55:1), 반드시 물질적인 차원에서 문제를 풀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시험에 빌립은 무엇이라 답을 했나요?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7) 빌립은 예수님의 의도나 힌트는 읽지 못하고 재빠르게 눈에 보이는 데로 냉철하고, 현실적으로 판단했습니다. “주님, 각 사람에게 4,000원짜리 도시락을 준다고 하더라도 5,000명 쯤이니까 2,000만원은 있어야 되는 데, 우리 주머니는 털어서 먼지만 나니, 먹인다는 것은 턱도 없겠습니다.” 그의 대답은 부정적이었습니다.

이상에서 빌립은 머리가 좋아 두뇌회전과 계산이 빠르고 현실감각이 뛰어난 냉철한 지성인입니다. 그러나 이런 그는 영적으로는 꽝입니다. 주님과 함께 믿음의 역사를 섬기기에는 너무나 영적이지 않습니다. 이렇게 유독 빌립과 같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빌립만의 이야기는 아닙니다. 우리 모두에게도 빌립과 같은 인간적, 현실적, 계산적인 면이 있습니다. 그러니 빌립의 대답은 우리들의 대답이기도 합니다.  

“주님, 무엇무엇이 없어서 안 되겠습니다. 턱도 없습니다.” “먹고 살기도 힘듭니다. 사명을 감당하라구요? 가정과 아이들 감당하기도 힘듭니다. 성서한국도 힘들어요. 세계선교는 꿈도 못 꾸죠”
 
예수님이 빌립의 말에 실망하고 계실 때, 안드레가 등장했습니다. 그는 늘 시몬 베드로의 형제로 불리는 사람으로 독자적인 identity로 인정받지는 못했습니다. 그런데, 안드레는 사람 데려오는 데 은사가 있습니다. 자신의 형 시몬도 데려왔는데 그가 교회사에서 큰 인물이 되었습니다. 이번에 그는 한 어린아이를 데리고 왔습니다. 그 어린아이의 손에는 작고 보잘 것 없는 가난한 사람들의 1인분 도시락이 들려 있었습니다. 

아이를 데리고 온 안드레의 말이 무엇입니까?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사옵나이까”(9) 이 말을 볼 때, 안드레는 머리가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안드레가 초오천명을 먹이기 위해 오병이어를 든 어린아이를 찾아서 데려온 것은 아닌 것같고, 어린아이가 예수님 말씀을 듣고 자기 가진 것을 예수님께 드리겠다고 막무가내로 나와서, 안드레가 말리지 못하고 데리고 온 것으로 추정됩니다. 하여간 둘이서 같이, 오병이어를 든 채 예수님 앞에 나왔다는 것은 결과적으론, 둘 다 거의 같은 수준이라고 보면 되겠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어린아이 같은 마인드에 대해서 생각해 봅니다. 예수님이 어린아이를 부정적으로 말씀하실 때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어린아이를 좋게 말씀하셨습니다. ‘어린아이같이 하나님 나라를 받들지 않으면 결코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마 18:3). ‘어린아이 같은 자들에게 하나님이 영적 세계를 계시해주신다’(마 11:25)는 말씀 등이었습니다. 

본문의 어린아이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어떻게 무리들을 먹일 수 있을까 궁리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손에 든 오병이어 도시락을 주님께 드리고자 했고, 주님이라면 그것을 받으셔서 어떻게든 하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본문에서 우리는 주님의 명령에 어린아이같이 반응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고 주님의 역사에 쓰임 받는다는 것을 배웁니다. 우리는 영악한 사람들이 가득찬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목자들도 영악해집니다. 계산하고 따집니다. 냉철하고 부정적입니다. 어떤 면에서 사람들이 똑똑해지고 현실감이 있어진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역사는 이런 사람들을 통해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통해서는 그저 인간적인 역사만 이루어질 뿐입니다. 관악5부에 가신 사모님 중에 박경환 사모님이라고 있었습니다. 이분은 어떻게든지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사람을 주님께 인도하고자 하신 분이었습니다. 소감을 지성적으로 쓰진 못하셨지만 주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하는 단순한 마음이 있어 많은 분들을 주님께 인도했고, 서울대에 가서도 그런 단순한 믿음을 주님께 드리고, 주님이 그런 그녀의 믿음을 축복해 주셨습니다. 우리 가운데도 박경환 사모님처럼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들고 예수님께 나오는 어린아이 같은 분들이 있기를 기도합니다. 또 우리가 내가 어린아이들처럼 그렇게 못하면 안드레처럼 그런 사람들을 판단하지 않고, 귀히 여기고 그런 사람들의 손을 잡고 함께 주님께 나가기를 기도합니다. 

소년의 손에 들린,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본 안드레는 그가 믿음의 사람이지만 그것으로 예수님이라 하더라도 10명이나 아니면 열왕기하에 나오는 엘리사처럼 100명쯤 먹이실 까 생각했을 것입니다(왕하 4:43). 그래서 그는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들에게 얼마나 되겠삽나이까” 반문했습니다. 안드레에게도 빌립적인 요소가 있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소년의 오병이어를 통해 얼마만큼의 큰일을 하셨습니까? 예수님은 먼저 제자들에게 무리들로 하여금 앉게 하라 말씀하셨습니다. 마침 그곳에 잔디가 있었고 그 위에 사람들이 앉게 했습니다. 이를 통해 제자들과 무리들은 믿음훈련을 받았습니다. 오병이어로 그 큰 무리를 먹이실 것을 믿고 식사대형을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숫자를 세어보니 무려 5천명쯤 되었습니다. 다른 복음서를 보면 남자만 카운팅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요절 말씀인 11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시고 후에 앉아 있는 자들에게 나눠주시고 물고기도 그렇게 그들의 원대로 주시다. 예수님은 한 소년이 가지고 나온 오병이어를 부정적으로 보지 않으셨습니다. “얘야, 장난 하니? 이런 작은 것을 누구 코에나 붙이겠니?” 하고 무시하고 멸시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진심과 믿음이 담긴 오병이어를 받아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감사하셨습니다. 축사란 감사하는 것을 말합니다. 주님은 믿음이 없는 사람들 가운데도 믿음을 가진 그 소년이 있음을 감사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무것도 없는 빈들의 상황에서 당신의 영광을 나타낼 수 있게 되어 감사하셨을 것입니다. 언제나 열악한 상황은 주님의 영광을 더 드러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감사기도하신 후에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떡과 물고기를 나누어 주셨습니다. 그런데, 떡과 물고기가 예수님의 손에서 계속 창조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손은 창조주의 손이었습니다. 최소 4,999개의 도시락이 창조되었습니다. 그 결과 5,000의 무리들은 부족함 없이 떡과 물고기를 먹을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으로 인해 아무것도 없는 들판에서 부족함이 없음을 체험하였습니다. 아마도 이때 무리들은 푸른 초장위에 누워 시편 23:1절 말씀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이상의 사건을 벳새다 급식사건이라고 부릅니다. 이 사건을 통해 우리가 배울 점이 무엇입니까? 

첫째로, 아무리 답이 안 나오는 상황에서도 우리 주님이 일하시면 모든 부족함이 채워지고 풍성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도 그렇고 우리의 사역도 그랬습니다. 주님이 계시는 벳새다 광야는 허허벌판이 풍성한 야외도시락 파티장으로 바뀌었습니다. 예수님은 창조주로서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그분, 텅빈 밤하늘을 별들로 수놓으시고 텅 빈 지구를 갖가지 생명체로 충만하게 하셨던 그분이었습니다. 이 예수님을 믿고 의지할 때 우리도 열악한 상황과 조건에서도 풍성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프랑스의 AMEN 센터를 섬기시는 김요한 선교사님은 아주 명문대를 나온 것도 아니고 공부를 잘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고 정말 단순한 믿음으로 사셨습니다. 그랬을 때 때마다 영육 간에 풍족히 채우시는 주님을 체험하고 “Praise the Lord!”를 연발하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이번에 YTN 사이언스란 프로에 그분이 프랑스의 핵융합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일하는 자랑스런 모습이 방송되었습니다. 저는 그분을 볼 때마다 정말 주님이 함께 하시니 인간조건을 넘어 얼마나 풍성한 삶을 사는 지 다시 한 번 놀라고 저 역시 믿음으로 살고자 하는 소원을 덧입게 됩니다. 우리가 자기 만족이 아니라 주님이 기뻐하시는 사역을 섬길 때 이상에서 배운 예수님을 믿고 맡기신 사역을 섬기기를 기도합니다. 

둘째로, 작은 것을 무시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병이어는 참으로 작고 그에 비해 오천 명은 참으로 큰 숫자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작은 오병이어를 받으시고 큰일을 이루셨습니다. 야고보서에 보면 작은 것이 큰 것을 자랑한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믿음으로 드리는 오병이어는 정말 작은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진심과 믿음이 담긴 그것을 받으시고 큰일을 하십니다. 5.30일에 UBF 60주년 세계선교보고대회가 있습니다. UBF는 지금은 큰 모임이 되어 세계적으로 목자들이 5,000 명이 넘을 것입니다. 이 큰 모임은 작은 키의 이사무엘 선교사님 한분이 단순한 믿음과 진심의 오병이어를 주님께 드리고 주님이 그것을 축복해 주신 결과입니다. 또한 UBF 역사는 작은 1:1의 역사였습니다. 시대를 움직이는 큰일은 할 수 없었지만 믿음으로, 진심드려 작은 1:1 한 팀을 섬길 때 주님께서 축복하시고 결과적으로 큰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우리가 하는 일의 크기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믿음으로 하는 가? 그렇지 않는 가, 진심을 드리는 가? 그렇지 않는가가 중요합니다. 우리가 믿음과 진심의 나의 작은 오병이어를 주님께 드릴 때 주님은 그것을 멸시치 않으시고큰 일을 행하실 줄 믿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배부른 후에 제자들에게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도록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환경운동이나 절약운동보다는 믿음의 역사를 묵상하며 마음에 새기도록 함이었습니다. 공교롭게도 오병이어로 그들이 먹고 남은 조각이 12 바구니에 차서 12 제자들은 모두 한 바구니씩 들고 감개무량하여 요새 같았으면 사진을 찍어 인스타그램에 올렸을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믿음의 증거들이 있습니다. 어떤 분은 믿음의 증거가 12 바구니가 되고도 남습니다. 우리가 믿음의 증거를 마음에 담아두고 묵상하여 또 다른 믿음의 도전의 근거로 삼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의 오병이어 표적을 본 사람들은 예수님께 열광했습니다. 정말 예수님만 있으면 평생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자신들의 임금으로 삼으려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피해 산으로 가서 기도하셨고 나중엔 몰래 물위로 가버리십니다. 왜 예수님이 이렇게 그들을 피하셨는지 이 부분은 다음 강에서 자세히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다른 복음서에 의하면 예수님은 제자들이 무리들을 피해서 먼저 바다건너 가버나움 선교센터에 가도록 조치하셨습니다. 그들이 배를 타고 가는 데 바다는 어두웠습니다. 그런데 큰 바람이 불고 파도가 일어났습니다. 벳새다 – 가버나움 코스는 바다의 중심을 지나지 않는 코스로, 비교적 가벼운 코스인데 이런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우리 인생에도 이런 예상치 못한 데서 큰 어려움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에 제자들은 처음에 열심히 노를 저어 자기 열심으로 상황을 극복하려 했습니다. 10 여리 정도 노를 저으며 사투를 벌였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자기들의 열심으로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때는 다른 복음서에 보면 밤 4경 곧 새벽 3-6시 사이가 되었습니다. 정말 그들은 사경을 헤매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때 그들에게로 오셨습니다. 왜 그 때 오셨을 까요? 그들이 자기노력의 한계에 깊이 절망할 때 구원의 주님을 진실로 의지하고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 예수님은 그들에게 어떻게 오셨습니까? 바다 위를 걸어서 배에 접근해 오셨습니다. 이것을 본 제자들은 매우 놀라 두려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밤바다를 걸어올 수 있는 존재는 유령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유, 유령이다” 라고 외쳤을 것입니다. 이때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내니, 두려워 말라”(20) 그들이 자세히 보니 유령이 아니라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들은 기뻐서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어서, 오세요 예수님” 그들이 예수님을 영접하자 바람과 파도는 그치고 배는 그들이 가려던 곳에 잘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이 바다 위를 걸어오신 표적을 통해 예수님은 자신이 사람의 몸을 입고 있지만 하나님이심을 드러내셨습니다. 중력의 법칙을 이기고 물위를 걸으실 수 있는 분은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창조주만이 피조세계의 법칙에 제한받지 않으십니다. 이 예수님은 예상할 수 없는 방법으로 고난 받은 제자들에게 임하사 그들을 도우시는 분입니다. 

이상에서 네 번째 표적과 다섯번 번째 표적의 공통점은 무엇입니까? 상황이 안 좋다는 것입니다. 육지나 바다냐의 차이뿐 둘 다 상황이 아주 안 좋습니다. 육지는 아무것도 없는 들판이었습니다. 바다는 바람과 파도가 배를 삼켜 잠수시킬 것같은 두렵고 절망적인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두 상황 모두 예수님이 계시므로 상황이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문제보다 크십니다. 결핍이 충만한 상황, 아무것도 손쓸 수 없는 상황도 예수님이 계시기에 부족함이 없는 상황으로 바뀌고 폭풍우가운데도 목적지에 틀림없이 안착하였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상황을 압도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볼 때 상황은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으며 상황은 평정되고, 오히려 어려운 상황이 예수님의 영광과 신성을 체험하는 좋은 계기가 됩니다.  

지금, 우리의 상황이 어떻습니까? 무엇이 부족합니까? 내 힘으로 헤쳐 나가기 힘든 어떤 어려움이 있습니까? 

20대 젊은이들은 장래걱정이 많습니다. 어떤 정치인이 20대 젊은이들에게 1억통장을 만들어준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그 1억 원이 우리 20대들의 미래를 보장해 줄까요? 그 뉴스가 뜨자, 그 통장 만들어주면 아마 비트코인하는 데 다 쓸 것이라고 비판했습니다. 가장이 된 분들은 앞으로 최대 다섯 식구를 어떻게 먹여 살릴 까 걱정합니다. 40대들도 모두 은퇴 후를 걱정하며 사느라 고민이 많습니다. 사후는 걱정하지 않으나 노후는 심히 걱정됩니다. 그들은 믿음의 용사 Warrior가 아니라 걱정 많은 사람 Worrier로 살고 있습니다. 이렇게 어려운 현실에서 먹고살기도 힘든 데, 엎친데 덮친 격으로 다가온 광풍같은 문제로 인생의 항해에서 어두운 밤바다에 침몰할 것같은 두려움을 느끼기도 합니다. 건강문제, 자녀문제와 같은 것이 우리를 인생의 항해에서 수장시킬 것 같습니다.

이럴 때 우리가 현실과 상황만 바라볼 것이 아니라 상황보다 크신 주님을 바라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우리 곁에 계신 주님을 다시 계산에 넣어야 하겠습니다. 우리 곁에 계신 주님을 유령이 아닌 실체로 영접해야 하겠습니다. 우리 주님이 우리의 공급자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 주님이 우리 항해의 선장이 되십니다. 우리가 주님을 잊었습니다. 그래서 부정적인 생각과 공포에 사로잡혔습니다. Remember God! 이 말에서 re member는 다시 삶의 멤버로 모셔 들이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고난을 안 주시는 분은 아닙니다. 빈손이 되게도 하시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허용하시기도 하십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 주님은 여전히 우리의 목자이십니다. 그런 어려운 상황에서 더 우리를 깊이 만나주시고 자신을 나타내십니다. 주님이 어려운 현실속에 여전히 목자로 계시니 우리는 부족함이 없습니다. 우리가 현실보다 주님을, 상황보다 주님을 바라볼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래서 위기를 극복할 뿐 아니라 새 역사를 창조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