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메세지

제목2020년 마태복음 11강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마태복음 7:13-29)2020-05-10 23:47
작성자

2020 마태복음 11강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말씀/ 마태복음 7:13-29

요절/ 마태복음 7:13,14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오늘 말씀은 산상수훈의 결론에 해당합니다. 또한 동시에 우리가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대 앞에 섰을 때 어떤 기준으로 평가받을지 그 기준을 보여줍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장차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어떤 기준으로 평가하실지 배우고 하나님께 인정받는 삶을 살고자 힘쓰는 저희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3-14절을 보십시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예수님은 산상 수훈의 결론으로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말씀하십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먼저 생각해 볼 것은 예수님의 그림 비유에서 이 문이 어디에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먼저 입구에 문이 있고 그 문 뒤에 길이 쫙 나 있는 것인지, 아니면 그 문에 이르까지 먼저 길이 있는 것인지 하는 문제입니다. 존 번연의 천로역정을 보면 전자의 의미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또 후자의 의미로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좁은 길을 쭉 따라가다보면 마침내 좁은 문이 나오고 그 좁은 문을 들어가면 생명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반면 전자의 의미로 본다면 먼저 좁은 문을 들어가고 그 좁은 문을 따라 천성에까지 이르는 좁은 길을 가게 된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실 어떻게 이해하든 의미는 동일합니다. 요지는 비록 많은 사람들에게 인기가 없을지라도, 또 그 과정이 어렵고 힘들지라도 좁은 문, 좁은 길을 가라는 것입니다. 다만 좁은 문을 들어가는 것은 삶의 결정적인 순간순간의 선택을 강조하는 그림언어이고, 좁은 길을 가는 것은 인생 전체를 통해 한 길을 가야 한다는 연속성을 강조하는 그림언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좁은 문, 좁은 길은 어떤 것이고, 넓은 문, 넓은 길은 어떤 것입니까?


먼저 넓은 문, 넓은 길은 자기 생각과 자기 본성을 따라 사는 삶입니다. 이것은 가장 타고난 본성에 부합하고 자연스럽고 편안한 삶입니다.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추구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기가 많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길을 택하고 이 문을 택합니다.


이에 비해 좁은 문, 좁은 길은 “믿음으로 사는 삶(to live by faith)”입니다.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웅장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눈에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님을 믿습니다. 그는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는 믿음으로 날마다 날마다의 삶을 아벨처럼 하나님께 바치는 제사와 같이 살아갑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살아계신 것과 하나님이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인 것을 믿습니다. 그는 노아처럼 장차 임할 심판에 대한 경고를 받고 믿음의 방주를 짓는 삶을 삽니다. 그는 아브라함처럼 자기를 부르신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갑니다. 그는 믿음으로 약속의 땅에 거류하며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받은 믿음의 동역자들과 함께 장막에 거합니다. 그는 사라와 같이 믿음으로 약속의 자녀를 잉태하여 낳을 힘을 얻고 믿음을 체험합니다. 그는 이 땅을 외국인이요 나그네처럼 살아가지만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의 삶은 좁은 문을 들어가는 것처럼 결정적인 순간 선택과 믿음의 결단이 요구됩니다. 예를 들어 모세가 장성하여 이집트의 왕자로서 세상의 부와 명예와 권세를 누리면서 살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으며 살 것인가 선택을 해야 했습니다. 그 결단의 때 모세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면서 받는 고난을 애굽의 모든 부화보다 더 귀한 것으로 여기는 선택을 하였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결단을 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특히 청년들의 경우 매주일을 지키고 신실하게 예배드리는 삶은 결단이 필요합니다. 이른바 불타는 금요일부터 시작되는 이 황금의 주말을 즐기면서 여행도 다니면서 살 것인가, 아니면 어떤 상황 가운데서든 절대적으로 예배드리는 삶을 살 것인가 - 결단이 필요합니다. 이 결단은 결코 작은 결단이 아닙니다. 예전 일제 치하 때에는 신사참배를 하지 않겠다는 결단을 하기 위해 목숨을 걸어야 했습니다. 그만큼 어려운 결단이었습니다. 그러나 요즘 시대에 매주 신실하게 예배드리겠다는 결단 역시 쉬운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이 시대에는 주중에 열심히 일해서 돈벌고 주말에는 번돈으로 마음껏 쾌락을 즐기는 삶의 흐름이 거대한 파도와 같이 흐르고 있습니다. 이러한 흐름을 거슬러 매주 주일을 지키는 것은 반드시 믿음의 결단이 필요합니다.


또한 믿음의 결단이 요구되는 결정적인 순간들이 있습니다. 룻기에서 룻은 몰록신을 섬기는 모압 집안에서 태어나 자라다가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나오미의 집안으로 시집오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이곳에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그녀의 하나님으로 믿고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시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남편의 형제도 죽도 남편마저도 죽고 말았습니다. 이런 큰 시련 앞에서 그녀는 결단을 해야 했습니다. 이런 시련 가운데서도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이스라엘 집안에 남을 것인가, 아니면 동서처럼 다시 몰록 신에게로 돌아갈 것인가. 이때 그녀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택하는 믿음의 결단을 하였습니다. 이와같이 결정적인 순간 믿음의 결단을 하는 것이 곧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또한 좁은 길을 간다는 것은 연속성이 요구됩니다. 곧 한 평생을 한결같이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창세기에서 요셉은 그의 인생 전체를 하나님이 주신 꿈을 붙들고 살았습니다. 그는 역경과 환란과 시련 가운데서도 이 꿈을 붙들었고 이 꿈을 놓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좁은 길을 간다는 것은 이 요셉과 같이 어떤 역경과 환란과 시련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는 믿음을 놓지 않고 끝까지 믿음으로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요셉은 그가 젊은 시절 붙든 꿈으로 인해 많은 시련을 받았습니다. 먼저 형들의 시기와 미움을 받았습니다. 그 시기와 미움은 선을 넘어 요셉을 죽이려 하는데까지 이르렀습니다. 마침내 요셉은 노예로 팔려갔습니다. 노예 생활을 하면서도 요셉은 하나님이 주신 꿈을 놓지 않고 붙들었습니다. 그 결과 성범죄자로 오인받고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감옥에서도 하나님이 주신 꿈을 붙들었습니다. 마침내 하나님은 요셉에게 주신 꿈을 이루셨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살고자 할 때 젊은 요셉처럼 많은 시련과 환난을 당합니다. 이러한 시련과 환난은 죄성을 가진 사람들을 통해 다가옵니다. 사람들은 그들 중 누군가가 순결한 믿음으로 살아가기 시작할 때 그 꼴을 두고 보지 못합니다. 온갖 악랄한 방법을 동원하여 그가 가진 순결한 믿음을 포기하고 쓰레기통에 던지도록 시험하고 유혹합니다. 또한 이러한 시련과 환난은 악한 사탄을 통해서 옵니다. 사탄은 죄악의 홍수가 만연한 가운데 어떤 한 사람이 순결한 믿음으로 살아가기 시작할 때 사람들을 이용하고 여러가지 사건을 이용하여 그가 가진 믿음을 포기하도록 유혹하고 시험합니다. 또 정 안되면 그의 귀에 직접 대고 속삭임으로 그가 가진 믿음을 포기하도록 유혹합니다.


오늘 특히 우리에게 필요한 믿음은 어떤 믿음입니까? 오늘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믿음은 하나님이 나를 가장 사랑하시고 나의 삶을 베스트의 길로 인도하고 계신다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은 십자가의 예수님을 통해 나를 가장 사랑하신다는 증거를 보여주셨습니다. 내가 하나님과 원수되었을 때 그의 아들을 십자가에 나를 위해 내어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하나님과 화목된 나를 얼마나 더 사랑하시고 나를 위해 가장 좋은 것을 아끼지 않고 내어주시겠습니까! 오늘 우리에게는 이 믿음이 필요합니다. 비록 외적으로 어려운 시련과 환난이 찾아온다 해도 하나님한 그것을 통해서도 선을 이루시고 나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신다는 믿음을 붙들어야 합니다.


천로역정의 저자 존 번연은 가난한 땜장이의 아들로 태어나 10살까지만 교육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로 치면 초등학교 3학년까지만 공부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성경말씀을 들었을 때 살아계신 하나님에 대한 불타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그는 땜장이 일을 하면서 시간이 날 때마다 사람들에게 성경을 가르쳤습니다. 그러다가 영국 국교에서 인정하는 설교자 외에는 성경을 가르칠 수 없다는 법 때문에 무려 12년간이나 감옥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 감옥 수감 시절 인류역사상 성경 다음으로 인쇄된 책 베스트 셀러 2위에 오른 천로역정을 쓰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그가 감옥 바깥에서 성경을 가르쳐서 이룬 일보다 감옥에 갇혀있는 기간 더 큰 일을 하도록 인도하셨습니다. 특히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오늘 말씀은 그가 쓴 천로역정의 중요한 모티브가 된 말씀입니다.


이 외에도 마이크도 없던 시절 구름떼같이 많은 이들을 말씀을 들으러 오도록 한 챨스 스펄전, 근대 선교의 아버지 윌리암 캐리, 감리교의 창시자 요한 웨슬리 등이 다 영국 출신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영국은 무신론 사상의 근거지처럼 되었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으며 매주 예배드린다고 말하면 눈을 크게 뜨고 겉으로는 Good for you 말하지만 속으로는 샤머니즘적 무속신앙에 빠져있는 미개인으로 취급하고 멸시합니다. 오늘날 우리 한국도 이러한 서구 사회를 따라가고 있습니다. 앞으로 청년들은 믿음으로 사는 삶이 갈수록 점점 더 외롭고 고독하고 힘겹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미개하고 생각이 없는 미신적인 사람으로 오해받고 멸시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사는 이 길에는 우리 주님이 나와 함께 하고 계십니다. 주님은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당신을 신뢰하고 믿음으로 사는 삶이 이 세상에서 가장 고상하고 아름답다고, 하나님의 마음에 더할 수 없는 기쁨과 감동을 준다고 말씀하십니다. 또 우리에게 비록 소수이지만 다윗과 요나단과 같은 믿음의 동역자들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다 몰라주어도 이 믿음의 동역자들만큼은 내가 가는 이 믿음의 길이 참으로 귀하고 아름답고 축복된 길이라고 인정해 주고 격려해 줍니다.


무엇보다 이 길 끝에는 하나님이 주시는 참된 생명이 있으며 하나님이 내 머리에 씌워주시는 의의 면류관이 있습니다. 루터는 세상 모든 이들이 다 하나님을 떠난다 하여도 나는 이 하나님을 의지하여 끝까지 이 길을 가겠다고 선언하였습니다. 세상 그 어느 누구도 나를 인정해 주지 않을지라도 나는 하나님 한 분만 바라보고 이 길을 가겠다고 하였습니다. 오늘 우리 청년들도 루터와 같은 그러한 믿음의 결단을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이 세상 모든 청년들이 다 하나님을 떠나 넓은 길로 간다 할지라도, 세상 모든 청년들이 나를 어리석고 미개한 신앙인의 길을 간다고 조롱할지라도, 나는 오직 믿음으로 사는 이 좁은 문, 이 좁은 길을 가겠다는 믿음의 결단을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5-20절을 보십시오.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구약 시대 때 선지자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전달하는 이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이들 가운데 거짓 선지자들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신약 시대에도 이와같이 많은 거짓 선지자들이 나타날 것을 아셨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하나님이 특별히 자기를 통해 성경에 감추어진 신비한 비밀을 드러내셨다고 주장합니다. 또 어떤 거짓 선지자들은 하나님이 자신에게 직접 말씀하심으로 자신의 뜻을 나타내셨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이들을 판별할 수 있는 방법으로 그들이 맺는 삶의 열매를 자세히 주목하여 보라고 하셨습니다. 가시나무가 포도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또 엉겅퀴가 무화과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습니다. 나쁜 나무는 사람들이 도끼로 찍어 불에 던집니다. 이 비유를 통해 예수님은 거짓 선지자들이 실제 삶에서 어떤 열매를 맺는지 보라고 하십니다.


역사상 거짓 선지자들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들이 맺은 열매를 통해 그들이 거짓 선지자임을 드러냈습니다. 문제는 지금 당장 아직 열매가 나타나 보이지 않을 때에는 어떻게 분별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 때에는 하나님이 주신 기록된 성경을 통해 분별해야 합니다. 기록된 말씀을 통해 그들의 가르침이 장차 맺게 될 열매를 예측할 분별력을 가져야 합니다. 여기에는 기도가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분별력을 주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21-23절을 보십시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또 어떤 이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릅니다. 그것도 반복하여 ‘주여, 주여’라고 부릅니다. 이는 이들이 나름대로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특히 그들은 자기들 나름대로 열매를 많이 맺었습니다.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할 것이라” 하실 것입니다. 주님은 그들을 도무지 알지 못한다고 하실 것입니다.


주님은 이 말씀을 통해 외적으로 눈에 보이는 사역을 하는 것과 주님을 인격적으로 아는 것은 별개임을 가르쳐 주십니다. 사람들은, 특히 사역자들은 눈에 보이는 큰 일을 할 때 그것이 곧 주님과 친밀한 관계의 증거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외적인 사역을 하는 것과 주님을 인격적으로 아는 것은 별개의 문제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주님을 인격적으로 안다는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그것은 주님을 죄인과 구주로서 만난 것을 의미합니다. 베드로는 그 어떤 권능을 받기 이전에 주님 앞에 엎드려 고백했습니다. “주님. 저를 떠나주십시오. 저는 비참한 죄인입니다.” 구주 예수님 앞에 자기가 죄인인 것을 깊이 고백한 사람이 주님과 인격적인 만남을 가진 사람입니다. 죄인인 자기를 위해 십자가에 주님께서 대신 죽으신 것을 생각하며 그 사랑에 놀라고 그 사랑에 감격한 사람이 주님과 인격적인 만남을 가진 사람입니다.


더 나아가 삶의 작은 부분에서 주님의 뜻을 알고 행하는 사람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삶에, 우리 사역의 현장에 기대했던 것만큼 많은 능력과 권능을 주지 않으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비록 나의 삶의 현장이 보잘 것 없어 보여도, 사역이 미미해 보여도 그 안에 주님의 귀한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지극히 작은 일 안에 나에게 두신 하나님의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 지극히 작은 일은 세상에서 무시받는 소자 한 사람을 섬기는 일이 될 수 있습니다. 그 지극히 작은 일은 나의 마음에 상처를 주거나 해를 가한 사람을 마음으로 용서하는 일이 될 수 있습니다. 그 지극히 작은 일은 조용히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하는 시간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 지극히 작은 일을 행할 때 우리를 귀하게 보십니다. 사랑하십니다. 마지막 날 나를 두 팔로 안아주시고 영접하여 주십니다.


24-27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까닭이요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지금까지 예수님의 말씀, 특히 산상수훈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과 같습니다.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심하게 불어 그 집에 부딪히지만 반석 위에 지은 그 집은 무너지지 않습니다. 이에 비해 주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않는 사람은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습니다.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힐 때 순식간에 와르르 무너지게 됩니다.


28-29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그들의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예수님의 말씀은 참으로 권위가 있었습니다. 마태복음의 주제는 왕되신 예수님입니다.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정의의 심판자요 생명의 주로 다시 오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의 말씀을 통해 심판의 주로서의 권세를 보여주셨습니다. 산상수훈의 말씀은 예수께서 온 세상을 심판하실 때 그 심판의 기준이 되는 말씀이 될 것입니다.


마태복음의 저자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이 예수님의 말씀의 권위 앞에 겸손한 마음으로 순종하며 살아가라고 말씀합니다. 모든 미움과 분노와 용서하지 않는 마음을 다 내려놓고, 주님의 마음으로 용서하고 사랑하며 살아가라고 말씀합니다. 자기 생각과 자기 계획, 자기 뜻을 다 내려놓고 주님의 뜻에 순종하며 살아가라고 말씀합니다. 그리하여 어둠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빛과 소금이 되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그러한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