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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022년 민수기 11강 `거룩함을 나타내지 않은 모세와 아론⁠`(민수기 20:1-29)2022-01-24 02:26
작성자

민수기 11

 

 

거룩함을 나타내지 않은 모세와 아론

 

 

말씀 민수기 20:1-29

요절 민수기 20:12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고로 이 회중을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오늘 말씀은 모세와 아론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는 징계를 받는 사건입니다. 일반적으로 이 사건은 많은 사람들에게 의구심과 안타까움을 자아냅니다. 그러나 모세와 아론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된 것은 안타까움만 자아내는 사건은 아닙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신앙적 교훈을 주는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우리가 오늘 말씀을 통해 거룩함을 나타내지 못한 모세와 아론, 반면에 거룩함을 나타내신 하나님을 통해 인생들과 다르신 위대하신 하나님에 대해서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출애급 40년 첫째 달이었습니다( 33:38). 이스라엘 자손이 신 광야에 이르렀습니다. 이 신 광야는 시내산 전의 신 광야와 다른 곳입니다. 이스라엘 남부 초원지대인 네게브 밑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백성들이 가데스에 이르렀습니다. 가데스는 38년 전 백성들이 하나님을 불신하고 거역함으로 38년 훈련을 받기 시작한 바로 그 장소입니다.

 

가데스에서 미리암이 죽습니다. 그리고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회중이 물이 없음으로 모세와 아론에게 몰려 들었습니다. 원어에 보면 대적하기 위해 달려드는 것을 뜻합니다. 그들은 모세와 다투며, 반역한 형제들이 여호와 앞에서 죽을 때 같이 죽었더라면 좋을 뻔했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들이 거칠게 말했을 것이 분명함으로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그때 콱 디져 버렸으면 좋았을 것인데, 살아서 이 고생을 하는 구먼그들의 말은 표현도, 내용도 선을 넘는 말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징계로 죽은 사람들의 편에 서는 말을 하다니, 이것은 하나님과 지도자를 도발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모세와 아론을 원망했습니다. 모세와 아론이 여호와의 회중을 이런 곳으로 인도하여 고생시키고 다 죽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현재 그들이 있는 곳이나쁜 곳’(5)이라고 말했습니다. 개역한글에는악한 곳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말하는 나쁜 곳은 어떤 곳입니까? 현상적인 고통과 불편이 있는 곳입니다. 그들의 선악 판단의 기준은 오직 현상적 고통이었습니다.

그러나 고통이 있다고 다 나쁜 곳입니까? 아닙니다. 고통이 있지만 그곳은 선한 곳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과 연단이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곧 그들의 고통은 끝납니다. 하나님이 주신 고통은 영원하지 않고 하나님께 대한 신뢰를 쌓도록 하는 잠시잠간의 고통입니다. 우리가 고통이라는 현상만 보고 우리가 서 있는 인생지점을 함부로 나쁜 곳이라고 매도하지 않고 이 자리에 두신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백성들은 자신들이 서 있는 지점을 5무의 땅이라 불평했습니다(5). 그러나 같은 5무의 상황에서 하박국은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그 이유는 없는 5가지만 바라보지 않고 1가지 있는 것을 바라보았기 때문인데 그 한 가지가 무엇입니까? 여호와입니다. 그래서 하박국 선지자는 이렇게 찬양했습니다.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찬양하는 사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성도입니다. 특히 뭐가 없는 상황에서 찬양하는 분이 진정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입니다!!

 

모세와 아론은 문제 많은 회중 앞을 일단 떠났습니다. 그들은 회막문 앞으로 가서 여호와 앞에 엎드렸습니다. 그러자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났습니다.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해법을 제시하셨습니다. 그 해법은 회중을 모으고 그 목전에서 반석에게 명하여 물을 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그 반석이 물을 내어 회중과 짐승들이 다 마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상황은 물이 없고 보이는 것은 반석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반석에서 물이 나오게 하여 어려운 상황을 종료시키고 백성들을 충분히 마시게 하십니다. 이처럼 하나님께 나가면 반드시 해법이 있습니다.

 

저도 개인적으로 한계에 부딪힐 때마다 약1:5절 말씀을 기억하며 하나님께 나갑니다. “너희 중에 지혜가 부족하거든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이 말씀처럼 하나님께 나아가면 하나님께서 지혜의 샘물이 솟아나 흐르게 하시고 저와 공동체에 필요한 생수를 주시는 것을 체험했습니다. 우리의 문제보다 하나님의 역량이 크시고 우리의 지혜는 한계적이나 하나님의 지혜는 한계가 없습니다. 한계는 우리에게나 해당하는 단어입니다. 우리가 자신도 감당하기 어렵지만 하나님께 나아갈 때 수많은 사람을 섬길 지혜를 얻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한계에 처할 때마다 하나님께 엎드려 반석에서 생수의 강이 솟게 하시는 하나님을 체험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반석 앞에 섰습니다. 그런데 그가 하나님이 하라는 대로 하지 않고 어떻게 합니까? 모세와 아론이 회중을 모으고 모세가 말합니다. “반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그리고 분노한 모세는 손을 들어 하나님이 주신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이나 쳤습니다. 하나님은 그냥 반석에게 명하도록만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한 것이었습니다.

 

모세가 왜 회중에게 화를 내었을까요? 지금까지 잘 참아왔고 지면에 그 온유함이 지상 최강이라 평가를 받지 않았습니까? 모세는 40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이 대적만 하는 회중이 지긋지긋했을 수 있습니다. 성인이 되었는데 어린아이 짓만 하고 있으면 화가 안나겠습니까? 정말 소망이 없다는 판단이 들었을 수 있습니다. 또 좀 문제제기를 해도 공손하게 예의를 갖추어 하면 얼마나 좋습니까? 해도해도 너무한다고 생각했을 수 있습니다.

 

이에 하나님은 그들으 허물과 관계없이 물을 내시지만 모세와 아론에게 그들의 문제를 지적하시며 그들을 징계하는 말씀을 하십니다. 12절입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고로 너희는 이 회중을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은 모세와 아론이 첫째로, 하나님을 믿지 아니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않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첫째로, 그들은 어떻게 하나님을 믿지 아니했습니까? 그들은 그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소망과 계획을 믿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생각과 다르게 그 백성에게 무한한 인내심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이번에도 쿨하게 물을 주시고자 계획했습니다. 그런데 모세와 아론은 자신들이 심판자가 되어 백성들을 심판해 버렸습니다. “이런 놈들은 소망이 없어. 해도 해도 너무해” “망할 놈의 회중들이처럼 우리도 하나님과 양들, 하나님과 동역자들, 하나님과 배우자나 자녀들 사이에 끼어 우리가 사람을 심판해 버린 적은 없습니까? 그래서더 이상은 못 참겠다하며 분노와 저주의 말을 해버렸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내가 나대는 것입니다. 중간에서 내가 월권행위를 하여 최종심판자 행세를 해버리는 것입니다.

 

둘째로, 그들은 하나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못했습니다. 거룩함이란 무엇입니까? 구별됨, 다름이란 뜻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함이란 하나님이 인생들과 다르심을 의미합니다. 인생들의 인내와 사랑과 자비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참을 수 있을 때까지만 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르십니다. 하나님의 인내와 소망과 자비는 무한하십니다. 이 패역한 백성을 계속 참으실 것입니다. 1,000, 2,000년을 참으실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거룩함입니다. 하나님은 그 백성을 참고 무한히 인내하시며 마침내 그들에게 두신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대리자요 메신저인 모세가 그 하나님의 거룩함을 훼손하여 하나님도 별 수 없고 하나님의 인내와 소망과 자비도 한계가 있다는 메시지를 주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대리자, 메신저가 주의해야 할 점입니다. 메신저가 하나님에 대해 한계적인 생각을 갖게 할 수 있습니다. 모세는 이처럼 하나님께 대해 왜곡된 메시지를 전달하고 월권행위를 했습니다. 이런 그와 아론은 하나님의 징계로 그 백성을 가나안 땅까지 인도하는 인도자의 영광을 잃게 되었습니다.

 

13절을 보십시오.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와 다투었으므로 이를 므리바 물이라 하니라 여호와께서 그들중에서 그 거룩함을 나타내셨더라. 므리바는다툼의 장소란 뜻입니다. 백성들은 여호와와 다투었습니다. 모세는 이런 백성들과 다투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백성과 다투지 않고 모세의 허물에도 생수의 강을 허락하셨습니다. 인생들과 달리 거룩하신 하나님은 사람들과 다투지 않고 섬기신 하나님이십니다. 다투지 않을 때 사람들을 도울 수 있습니다. 살릴 수 있습니다. 키울 수 있습니다. 우리가 다투지 않으신 하나님을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4-21절은 에돔과 다투지 않고 길을 우회한 이스라엘입니다. 모세는 가데스에서 사신을 보내 겸손히 에돔을 통과해 갈 수 있도록 에돔 왕에게 요청했습니다. 형제로서 애굽에서 당한 형편을 말했고 하나님의 인도하심도 얘기했습니다. 그리고 어떤 피해도 끼치지 않고 지나가기만 하겠으니 허락해 달라고 겸손히 간청했습니다. 그런데 에돔 왕은 거절했습니다. 이스라엘은 다시 큰 길로만 지나가고 만약에 짐승이 물이라도 마시면 그 물 값도 내겠다고 말했습니다. 이쯤하면 좀 들어 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럼에도 에돔 왕은 매몰차게 거절하고 많은 백성을 거느리고 나와 그 영토에 발을 들여놓지도 못하게 했습니다. 이에 이스라엘은 에돔과 싸우지 않고 먼 길을 우회하기로 방향을 잡았습니다.

 

이렇게 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신명기 2:4,5절을 보면 하나님이 에돔과 싸우지 말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에돔에 대해 원래 같은 형제족속인데 참 사람들이 쩨쩨하고 야박하게 굴고 다른 이들의 상황과 형편을 배려하지 못하는 가 라고 판단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도 에돔처럼 구는 사람들을 보면 분노를 터트리고 싸우고 싶어할 수있습니다. 하지만 에돔 족속의 피해의식도 이해해야 합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조상 야곱에게 단단히 속았던 에서의 후예입니다. 그들은 야곱에게 속아 소중한 장자권을 빼앗긴 경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스라엘에 대한 피해의식과 불신을 가질만 합니다. 피해를 주지 않겠다고 자신들의 영토에 들어온 다음에 무슨 짓을 저지를지 믿을 수가 없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상대방이 나를 쉽게 믿어 주지 않고 협조하지 않을 때 그들에 대해 서운해 하고 미워할 수 있지만 다 이유가 있서서 그러니 이럴 때는 칼을 뽑아 싸울 때가 아니며 그 싸움은 정당하지도 않습니다. 이럴 때는 충돌을 피해가야 합니다. 우회해서 가야 합니다. 기다려야 합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가데스를 떠나 호르 산에 이르렀습니다. 하나님은 호르 산에서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내용은 아론은 이제 죽겠고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고자 하는 땅에는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가 모세와 함께 므리바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했기 때문입니다.

 

아론은 모세와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했습니다. 하나님은 반석에게 명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모세와 아론은 과거의 경험에 기초해서 반석을 쳤습니다. 그들은 새롭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주의깊게 듣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나름대로 순종하는 것은 거역임을 알게 됩니다. 또한 우리는 항상 새롭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말씀을 귀기울여 들어야 합니다. 심지어 과거의 비슷한 믿음의 사건의 틀에 갇혀 있어도 안됩니다. 40년전에 승리했던 방식만 고집해서도 안됩니다. 이런 분은 영적으로 라떼를 좋아하는 분입니다. 우리가 지금 하나님이  새롭게 말씀하시는 것을 디테일하게 듣고 새로 주어진 성령의 방향에 순종해야 하겠습니다. 그런 사람이 지금 쓰임받으며 새로운 시대 새롭게 쓰임받는 하나님의 종이 될 수 있습니다.

 

모세는 아론과 그 아들 엘르아살을 데리고 호르산에 올라가 아론의 옷을 벗겨 그 아들 엘르아살에게 입혀 줍니다. 이렇게 해서 아론은 죽고 회중들은 수고하며 대제사장의 삶을 산 아론을  30일간 애도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다투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배웠습니다. 모세는 온유한 사람이나 마지막 순간에 백성들과 다투었습니다. 우리는 사람과 다투지 않기 쉽지 않습니다. 사람이 다툴 때 사람을 키울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와 달리 다투지 않으신 하나님을 잘 배워야 하겠습니다.

 

인생들과 다투지 않으신 하나님은 인생들을 참고 참으신 하나님입니다. 악인들을 향해 하나님이 주신 세상에서 방빼라고 하지 않으시고 그들에게도 변함없이 햇빛과 비를 주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마침내 죄인들을 위해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셔서 십자가에서 죽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이렇게 죄인들을 위한 마지막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23:34) 예수님의 용서의 기도가 인생들을 살렸습니다. 이렇게 인생들과 다투지 않고 인생들을 심판하지 않고 무한히 용서하시는 하나님은 거룩하신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특별히 예수님을 통해 자신의 지극히 거룩함을 나타내셨습니다.

 

우리는 다투지 않고 살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처가에서 양치는 목자생활 40, 그리고 광야에서 사람목자 생활 40, 80년 참고 온유하게 섬기는 훈련을 했던 모세도 결국은 분노를 터트렸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분노를 조절할 수 없는 한계적인 자임을 깨닫고 우리 인생들을 참으사 그리스도를 보내신 거룩하신 하나님께 늘 나아가 그 거룩하심을 덧입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그 온유함과 그 용서와 그 인내와 그 소망을 배우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제가 목자생활이란 다투지 않고 축복하는 삶임을 깊이 영접합니다. 이번에 일대일 목자님이 포천센터에 오셔서 제사장 축복문 말씀을 주시며 목자생활은 어떤 패역한 자들도 축복하는 삶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에서 자신을 못박는 사람들을 향해 용서와 축복의 기도를 하시는 예수님의 기도를 배워 사람들을 축복해야 합니다. 제가 앞으로 북한과 경기북부권의 대학생들을 품고 쿨하게 축복하는 자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본문에서 모세의 실패는 안타까움을 주지만 또한 큰 교훈과 깨달음을 줍니다. 그것은 율법의 수여자요 탁월한 인격자였던 모세가 그 행위와 인격으로 결국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말해주는 바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결국 우리의 행위, 우리의 의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삶과 인격이라는 것은 결국 하나님이 은혜 주셔서 견디고 부드러움을 유지할 뿐입니다. 정말 못된 사람, 정말 지긋지긋한 사람을 만나면 우리가 그 한계를 드러낼 수밖에 없습니다. 내 온유함이란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참을 수 있는 사람과 함께 하고 있기 때문에 참고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이 인생의 고난의 강도를 점점 올리시면 결국 우리의 인격은 망가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의로 구원받지 않았으며 우리의 의로 목자생활하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의 의로 하나님 나라에 가지 못합니다. 특히, 우리의 의로 다른 사람과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의로 동료와의 관계, 양들과의 관계, 자녀와의 관계, 부부관계를 유지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의 한계를 깊이 인정하고 하나님의 의가 되시는 예수님을 붙잡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결론입니다. 같은 상황에서 우리가 거룩함을 나타내지 못한 모세와 거룩함을 나타내신 하나님을 비교해서 배웠습니다. 우리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내면의 한계를 깊이 인정하고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은혜를 덧입고 다른 사람들을 섬기고 키우는 우리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