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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022년 누가복음 2강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누가복음 3:21-4:13)2022-04-01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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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누가복음 2 (2022. 3. 13)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말씀 / 누가복음 3:21-4:13

요절 / 누가복음 3:22

 

"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새 봄 학기에 생명의 말씀 누가복음을 배우도록 은혜주신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주어진 책입니다. 우리 목자님들은 대부분 성경을 여러 번 읽으셨을 것입니다. 저도 지금까지 여러 번 읽었습니다. 새로운 본문을 볼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이미 읽었던 말씀이고 아는 내용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성경을 정말로 아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의 크기는 태평양보다 더 넓고 더 깊습니다. 무궁 무궁한 하나님의 세계가 성경 안에 있습니다. 특히 성령님은 성경의 저자시요 우리를 성경 안으로 안내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성경을 공부할 때마다 겸손한 마음으로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아 성경의 깊은 세계로 나아가기를 기도합니다. 성경이 가리키는 바, 말씀하는 바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5:39) 특히 복음서는 더욱 예수님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올해 누가복음 말씀을 통해 이 복음서가 증거하는 예수님을 더욱 깊이 배우고, 알고, 얻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십니다. 하나님은 세례 받으시는 예수님에 대해 하늘로부터 친히 증거하십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오늘 본문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아들 예수님을 우리의 그리스도로 심령에 모시기를 기도합니다. 

 

21절을 보십시오. "백성이 다 세례를 받을새 예수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리며." 제사장 사가랴의 아들 요한이 요단강 부근에서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이 세례는 죄 사함을 얻게 하는 물세례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나아와 죄를 자복하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교회 역사를 살펴볼 때, 세례에는 세 종류가 있습니다. 첫째는, 당시 이방인들이 유대교로 개종할 때 받은 세례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유대인들은 태어나 8일 만에 할례를 행하고 희생제물을 바쳤습니다. 그런데 이방인들이 유대교로 개종할 때는 할례 및 희생제물과는 별도로 한 가지 더 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이방인으로서의 죄를 씻는 의미로 물세례를 받은 것이었습니다. 당시에 물세례는 이방인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었지 유대인에게는 아니었습니다. 둘째는 요한이 베푼 세례입니다. 이는 자기 죄를 자복하고 받은 세례입니다. 이 세례는 예수님이 베푸시는 성령 세례를 받기 위해 마음을 준비하는 세례였습니다. 요한의 세례는 당시의 유대인들에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이는 유대인을 이방인과 동일하게 취급하는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었습니다. 셋째는,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받는 세례입니다. 이는 이미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신자들이 자기의 신앙을 고백하고 교회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것을 공포하는 의식입니다.

 

21절을 보면 예수님은 요한에게 나아가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누가복음 기록에 따르면 예수님은 12세에 예루살렘 성전에서 랍비들과 대화하셨습니다. 그 후 18년간 가업을 이어 목수로 일하시며 가정을 부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조용히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시며 생업에 종사하셨습니다. 마침내 때가 되자 요한에게 나아와 세례를 받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이신데 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을까요?

 

첫째로, 세례 요한의 역사를 계승받자 하심이었습니다. 마태복음 3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려 하시자 요한이 말려 말합니다. "내가 당신에게서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하십니다. (3:13-15) “모든 의를 이룬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보다 크신 분이시지만, 그에게 세례를 받으심으로 요한의 역사를 하나님의 사역으로 인정하고 이를 계승받고자 하신 것이었습니다. 이를 통해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굳게 세우고자 하셨습니다.

 

둘째로, 죄인과 같이 되기 위함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아무 죄가 없으시지만 그들 가운데서 세례를 받으심으로 죄인의 모습을 취하신 것입니다. 이는 장차 예수님이 죄인들 가운데서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것을 예표합니다. 세례는 죽음을 의미합니다. 로마서 6:3,4a는 말씀합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세례 의식은 물에 잠김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옛 사람이 죽고, 물속에서 다시 일어남으로 새 생명으로 사는 것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세례를 받으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누가복음 12:50은 말씀합니다.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것이 이루어지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 예수님의 공생애는 물세례에서 시작하여 십자가 죽으심의 세례를 향하여 나아가는 삶입니다.

 

예수님은 세례를 받으시고는 기도하셨습니다. 그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하늘이 열리며 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의 위에 강림하셨습니다. (21b,22a) 하나님은 때로 불, , 바람이나 새와 같은 비주얼 이미지를 통하여 언어로 전달하기 어려운 내용을 계시해주십니다. 비둘기는 온유와 평화의 상징입니다. 예수님에게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하신 것은 예수님의 성품이 온유하시고, 그의 하실 일이 평화의 사역임을 보여줍니다. 성령은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성령을 보내심으로 예수님이 능력 있게 메시아 사역을 감당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뜻에 겸손히 순종하고자 하신 예수님께 하늘로부터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나님이 천사들이나 선지자들을 통하지 않고 직접 말씀하신다는 것은 그 만큼 그 말씀하시는 내용이 분명하고 권위가 있다는 것입니다. 신약성경에는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시는 것이 세 번 나타납니다. 본문과 변화산 사건(17:5, 9:35) 그리고 요한복음 12:28 에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예수님이 자신의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친히 선포하셨습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사랑하는 아들이라면 당연히 하나님이 그를 기뻐하실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한 번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나님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님의 사랑의 관계는 너무나 깊고 강합니다.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으로 일컬어지는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우리가 온전히 이해하기는 불가능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가면 이 모든 신비를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하튼 이 시점에 다시 한 번 생각할 점은 우리가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영접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아들이십니다. 하나님이 친히 그의 음성으로 선포하신 메시아이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심으로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시는 우리의 구주이십니다.

 

23절을 보면, 예수님이 가르치심을 시작하실 때 삼십 세쯤 되셨다고 말씀합니다. 성경에서 삼십 세는 성년이 된 때를 말합니다. 구약에서 요셉이 총리가 된 때나 다윗이 왕으로 즉위한 때도 삼십 세였습니다. 당시 공회원 자격도 30세였습니다. 무엇보다 당시 30세는 제사장들이 그들의 임무를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나이입니다. (4:3) 예수님은 삼십 세에 인류와 하나님 사이를 중재하는 영적 제사장으로서의 공식적인 사역을 시작하신 것입니다.

 

23절부터 38절까지는 예수님의 족보입니다. 마태복음 1장에 나오는 족보와 비교하여 볼 때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먼저, 마태복음에 의하면 요셉의 아버지가 야곱이라고 되어 있는데 (1:16) 본문에는 요셉의 아버지가 헬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에 대한 설명으로 대부분의 성경학자들은 마태복음에 나오는 족보는 요셉의 족보인 반면, 본문은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로 부터 올라가는 족보라고 설명합니다. 이런 점에서 31절에 '나단'이라는 이름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역대상 3장을 보면 다윗이 예루살렘에서 낳은 아들들의 이름이 기록되어있는데, 첫째가 시므아, 둘째가 소밥, 셋째가 나단, 그리고 넷째가 솔로몬입니다. 솔로몬의 바로 위의 형이 나단입니다(대상 3:5). 마리아는 나단의 후손이고 요셉은 솔로몬의 후손입니다. 요셉이나 마리아나 모두 다윗의 후손입니다. 이와 같이 마리아의 족보를 따라 나신 예수님은 창세기에 예언된 대로여자의 후손으로 오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의 후손으로 나시고 육신의 아버지 요셉의 보호 아래 자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똑 같은 성장과정을 거치신 사람의 아들이십니다.

 

또한 유대인들을 위해 기록된 마태복음에는 예수님의 족보가 아브라함에서 시작되는 반면, 이방인들을 위해 기록된 누가복음에는 하나님까지 올라갑니다. 이는 예수님이 이스라엘만을 위한 그리스도가 아니라 모든 인류를 위해 오신 그리스도임을 나타냅니다. 하나님은 그 외아들을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사랑의 증거는 희생입니다. 희생이 많을수록 큰 사랑입니다. 자기의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을 희생하사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사랑은 참 사랑입니다. 이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참 사랑, 절대적인 사랑을 인하여 감사와 찬송을 돌려드립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메시아 사역으로 처음으로 하시는 일이 무엇입니까? 4 1,2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강에서 돌아오사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성령에게 이끌리시며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더라. 이 모든 날에 아무 것도 잡수시지 아니하시니 날 수가 다하매 주리신지라." 성령은 예수님으로 하여금 광야로 나아가 마귀의 시험을 받으시도록 인도하셨습니다. 어떤 분들은마귀또는귀신이라고 하면 21세기 AI 시대에 무슨 마귀냐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지만 마귀가 분명히 존재한다고 말씀합니다. 2절에 나오는 '마귀'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디아볼로스'(대상21:1)인데 히브리어의 '사탄'(삼상29:4)과 같은 말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는큰 용또는옛 뱀이라고도 불립니다. (12:9) 마귀는 온 천하를 미혹하는 자요 (12:9)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입니다. 마귀는 하나님을 대적하여 높아지려고 하다가 이 땅에 쫓겨났습니다. (14:12) 마귀는 최초의 인간 아담과 하와를 유혹하여 타락시켰습니다. 성령께서는 예수님을 광야로 인도하시어 이런 마귀에게 시험을 받도록 하셨습니다.

 

광야는 어떤 곳입니까? 광야는 사진으로 보면 때로 멋있고 낭만적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낮과 밤의 온도차가 극심하고 물 한 방울도 없어 풀 한포기 자라지 못하는 거친 곳입니다. 전갈과 독사가 들끓는 곳입니다. 뜨거운 태양으로 인해 단 하루도 지내기도 어렵습니다. 그런데 성령께서는 왜 이러한 곳에서 예수님으로 하여금 마귀의 시험을 받도록 하셨을까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에 마귀에게 시험을 받아 메시아로서 승리하셔야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첫 사람 아담을 낙원에서 영원토록 살 수 있는 행복한 존재로 지으셨습니다. 그런데 마귀가 그를 세상 욕심으로 유혹하여 넘어뜨렸습니다. 유혹에 넘어가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도록 했습니다. 이로 인해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지금의 모든 불행한 일이 생긴 것입니다. 아담은 가장 좋은 환경에서 마귀의 시험에 져서 낙원을 잃어버렸습니다. 예수님은 메시아로서 가장 열악한 환경에서 마귀의 시험을 이기셔야 되었습니다. 이를 통해 예수님이 우리 인생들을 구원하실 수 있는 메시아가 되심을 증거하시게 됩니다.

 

성령께서 예수님으로 하여금 마귀의 시험을 받도록 하신 두 번째 이유는 예수님으로 하여금 시험 당하는 자들을 깊이 이해하도록 하심이었습니다. 히브리서 4:15절은 말씀합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비참함을 경험한 사람만이 그 비참함에 처한 사람을 이해합니다. 예수님은 마귀에게 시험받으심으로 광야 같은 세상에서 시험받는 우리 인간의 연약함을 깊이 이해하시고 동정하실 수 있는 메시야가 되십니다.

 

요즘 코로나 인해 많은 분들이 어려움을 당하고 있습니다. 질병에 걸려 고생하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경제적, 정신적인 어려움에 처한 분들도 많습니다. 또한 우크라이나에서 전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병사들이 전장에서 죽어가고 있고 무고한 시민들도 사랑하는 가족을 잃고 정든 고향을 떠나 이방 땅으로 피난을 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고난당한 사람들을 누가 이해하고 동정할 수가 있겠습니까? 사람이 돕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감사한 것은 우리보다 훨씬 더 심한 고난을 당하신 예수님이 계시다는 것입니다. 시험받으신 예수님은 우리가 받는 시험을 이해하십니다. 우리가 당한 아픔과 슬픔을 잘 아십니다. 깊이 이해하시고 위로하시며 실제적으로 도우실 수 있습니다. 우리가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 예수님께 나아가기를 기도합니다. 이 예수님께 나아가 우리의 모든 문제를 아뢸 때 주께서 친히 위로하시며 도와주실 것을 믿습니다. 우리를 진정으로 이해하시는 분, 위로하실 수 있는 예수님을 인하여 감사를 드립니다!

 

에덴동산에서 마귀는 선악과를 따먹도록 하와를 유혹하였습니다. 그에게 욕심을 심어 그 나무의 열매가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게 보이도록 하였습니다. (3:6) 요한일서 2:16에서 말씀하는 바와 같이 세상적인 욕망 곧,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그리고 이생의 자랑으로 유혹하였습니다. 마귀는 예수님에게도 이와 같은 세상 욕망으로 유혹합니다.

 

첫째, 육신의 정욕. 3절입니다. "마귀가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돌들에게 명하여 떡이 되게 하라." 마귀는 예수님의 육체적인 연약함을 틈타 공격합니다. 예수님은 광야에서 계시며 사십 일 동안 아무 것도 잡수시지 아니하셨습니다. 우리와 똑 같은 성정을 가지신 분이니 얼마나 배가 고프셨을까요? 저는 예전에 5일간 금식 기도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5일째가 되니 몸에 기도할 힘도 없고, 아무런 의욕도 없어졌습니다. 먹지 않으므로 시간은 넘쳐 나는데 왜 그렇게 시간은 안 가는지요! 그저 먹기만 하면 소원이 없었습니다. 제가 좋아했던 김치찌개와 쌀밥을 먹기만 하면 정말 소원이 없을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무려 사십 일을 아무 것도 드시지 못하셨습니다. 의학적으로도 사람이 먹지 않고 살 수 있는 날이 최대 일수가 40일이라고 합니다. 육신을 가지신 예수님은 이 순간 죽느냐 사느냐하는 절체절명의 순간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눈에는 길에 있는 돌멩이도 빵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그때 마귀가 시험합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돌들에게 명하여 떡이 되게 하라". "네가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일진대 못할 것이 무엇이냐? 이 돌들을 빵으로 만들어 먹는 문제를 해결하라"는 것입니다.

 

빵 문제는 육신을 가진 인간에게 가장 심각한 문제입니다. 사흘을 굶으면 담을 넘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이 순수학문을 추구하고 예술과 문화를 창조할 수 있는 것도 배가 불러야 할 수 있습니다. 큰 뜻을 품고 사명인으로 살고자 하다가도 먹는 문제에 걸리면 염려와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마귀는 육신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 곧 먹는 문제로 많은 두려움을 심어 사람들의 발목을 잡아 자기 종으로 삼아버립니다. 예수님은 마귀가 말을 하지 않아도 돌들을 보실 때마다 떡으로 만들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으셨을 것입니다. 마귀가 충동을 하니 더욱 투쟁이 되셨을 것입니다.

 

여기서 마귀가 예수님을 넘어뜨리려고 하는 점은 메시야의 능력을 개인적인 유익을 위해 사용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류를 구원하는 공적인 사명을 위해 오셨습니다. 사적인 유익을 위해 그 능력을 사용하시러 오신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예수님의 생애를 보면 그 놀라운 능력을 한 번도 자신의 유익이나 안일을 위해 사용하지 않으십니다. 머리 둘 곳 없는 삶을 사시면서 언제든지 공적인 삶에 헌신하십니다. 예수님은 메시아의 능력을 개인적인 문제 해결에 사용하라는 마귀의 달콤한 시험에 넘어가지 않으셨습니다.

 

4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기록된 바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였느니라." 우리는 고난을 당할 때 "두려워말고 믿기만 하라!" 또는 로마서 8:28 말씀 곧 하나님이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는 말씀을 반복하여 읽고 외칩니다. 그 말씀을 붙들고 투쟁합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지금 신명기8:3 말씀 "기록된 바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를 붙들고 마귀와 싸우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귀의 시험에 넘어가기 아주 쉬운 그 때에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마귀를 대적하사 첫 번째 시험을 물리치셨습니다.

 

마귀는 이제 두 번째 시험, 곧 안목의 정욕으로 시험합니다. 5-7절입니다. "마귀가 또 예수를 이끌고 올라가서 순식간에 천하만국을 보이며 이르되 이 모든 권위와 그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이것은 내게 넘겨 준 것이므로 내가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 그러므로 네가 만일 내게 절하면 다 네 것이 되리라." 마귀는 예수님을 이끌고 높은 곳으로 올라갔습니다. 그곳에서 순식간에 파노라마같이 천하만국을 보여주었습니다. 로마제국이 온 천하를 다스리던 당시 세계를 다스리는 권세와 영광은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마귀는 예수님이 자기에게 절하면 그 보이는 모든 권세와 영광을 주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마귀가 실제로 그런 권세와 영광을 줄 수 있는 것일까요? 물론 마귀는 세상에서 어느 정도의 권세를 갖고 있습니다. 그는 공중의 권세 잡은 자입니다. (2:2) 이는 인간이 죄로 인해 타락하여 죄의 지배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권세는 모든 권세의 주인이신 하나님으로 받은 것이 아닙니다. 속임수를 써서 일시적으로 빼앗은 것입니다. 마치 강도가 일시적, 불법적으로 뺏어서 소유하고 있는 장물과 같습니다. 이러한 불법적 권세는 마귀가 누구에게 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그리스도가 다시 오실 때 찬탈한 모든 권세를 박탈당하고 영원한 형벌을 받습니다.

 

여하튼 예수님의 눈에 보인 온 천하를 다스리는 권세와 영광은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눈 딱 감고 자기에게 절만 한번 하면 이 모든 영광을 주겠다고 마귀는 속삭였습니다. 여기서 마귀가 예수님을 넘어뜨리려고 하는 점은 예수님이 마귀에게 일시적으로나마 굴복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만왕의 왕이시요 창조주이십니다. 예수님이 일시라도 피조물인 마귀에게 절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신명기 613a절에 기록된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말씀을 붙드시고 마귀의 두 번째 유혹을 물리치셨습니다.

 

이에 마귀는 최후의 유혹을 합니다. 9-11절입니다. "또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여기서 뛰어내리라 기록되었으되 하나님이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너를 지키게 하시리라 하였고 또한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네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시리라 하였느니라." 마귀는 예수님을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웠습니다. 여기서 성전 꼭대기는 예루살렘 성전의 뜰이 보이는 높은 탑 중의 하나입니다. 거기서 성전 뜰로 뛰어내리라는 말입니다. 마귀는시편 91:11,12절과 같이 하나님이 그 사자들을 명하사 지키게 하시리라 하셨고 또한 그 사자들이 손으로 받들어 네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시리라하지 않았느냐? 그러니 기록된 말씀을 믿고 뛰어 내려서 그 놀라운 이적을 보여주면 모든 사람들이 너를 메시야로 영접할 것이 아니겠느냐?”하는 말입니다. 이는 참으로 간교한 유혹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교묘히 비틀어서 인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시편91:11,12 말씀은 하나님의 은혜와 보호를 깊이 경험한 시인이 하나님을 찬양한 시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비록 험한 길을 가더라도 우리를 지켜주시는 분이라는 찬송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귀는 이 말씀을 하나님을 시험하여 무슨 일을 하더라도 지켜주신다고 약속하신 말씀으로 왜곡하여 인용한 것입니다.

 

이 시험은 이생의 자랑으로 시험하는 것입니다. 이 시험이 의도하는 바는 예수님으로 하여금 메시아의 고난의 길을 가지 말고 쉬운 길을 가라는 것입니다. 그 높은 곳에서 한번 떨어졌는데 다치거나 죽지 않는 기적을 보인다면 사람들은 그를 금방 메시야로 영접을 할 것이니 이 얼마나 쉬운 길인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빌어 쉽게 명예와 영광을 얻도록 하는 시험이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은 누구나 명예심이 있습니다. 높아지고자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첫 사람 아담도 그 점에서 넘어졌습니다. "너희가 그것을 먹으면 하나님과 같이 되리라!" (3:5) 이 유혹에 넘어갔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그러한 시험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오직 하나님만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 살고자 하였지만 신앙생활을 오래하면서 자기를 높이고자 하는 욕구가 발동합니다. 사람들의 사랑과 존경에 목말라합니다. 자존심에 조금이라도 상처가 나면 견디지를 못합니다. 예수님의 뒤를 따라 기꺼이 고난의 길을 가고자 했던 초심을 잃어버리고 하나님을 이용하여 자기 영광을 구하는 사람이 되기도 합니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12절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하나님은 인간으로부터 결코 시험 받을 대상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시오 온 세상을 주관하시는 분이십니다. 사람은 그 앞에 입김에 불과한 피조물입니다. (62:9) 하나님은 시험을 받지 않고 절대적인 신뢰를 받으심으로 영광을 받으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명예와 영광을 구하지 않으시고 다만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셨습니다.

 

이상에서 예수님은 간교하고도 집요한 마귀의 시험을 이기셨습니다. 이를 통하여 예수님은 첫 사람 아담의 실패를 만회하시고 인생들을 구원하실 수 있는 메시야이심을 드러내셨습니다. 또한 본문을 통하여 우리는 마귀의 시험을 이길 수 있는 비결을 배우게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의 검입니다. 예수님도 마귀가 시험할 때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대적하셨습니다. 마귀의 시험은 결코 나의 경험이나 지혜로 이길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굳게 의지할 때 승리할 수 있습니다.

 

13절을 보십시오. "마귀가 모든 시험을 다 한 후에 얼마 동안 떠나니라." 마귀는 모든 공격에서 실패하자 얼마동안 떠났습니다. 여기서 얼마동안이란 "좋은 기회가 올 때까지"(until an opportune time)로 마귀의 시험이 이번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기회가 주어지면 다시 시험해 올 것을 시사하는 것입니다. 실상 예수님의 공생애 전체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을 통해, 무리들을 통해, 심지어 그의 제자들을 통해서 십자가 길을 포기하도록 유혹하는 공격이 간단없이 있게 됩니다. 그러나 마귀의 시험을 이기신 예수님은 지속적으로 승리하시며 결국 그의 복음적 사명을 최종적으로 성취하시게 됩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그의 사랑하시는 아들이라고 친히 인 치심을 받으셨습니다.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기록된 말씀으로 마귀의 시험을 이기셨습니다. 이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시험을 받으시되 죄는 없으신 분이십니다. 메시야 사역을 시작하는 이 시점부터 십자가를 지시기까지 끊임없이 계속되는 시험에도 예수님은 전혀 죄를 짓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그의 죽음은 온 백성을 위한 대속의 죽음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 예수님을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시는 구주로 깊이 영접하기를 기도합니다. 시험이 많은 세상에서 오직 예수님만을 믿고 따르기를 기도합니다. 이 봄 학기에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으로 마귀의 유혹을 이기게 하여 주시길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