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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022년 누가복음 25강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누가복음 13:22-35)2022-09-05 0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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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누가복음 제 25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말씀 / 누가복음 13:22-35

요절 / 누가복음 13:24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프랑스의 작가 앙드레 지드가 쓴 소설 "좁은 문"이 있습니다. 학생들의 필독서로 꼽히는 책입니다. 앙드레 지드 자신의 인생을 그린 것인데 여주인공인 알리사가 좁은 문으로 들어가 천국에서 진정한 사랑을 나누고자 하는 내용입니다. 예수님의 좁은 문에 대한 가르침이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과 도전을 주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좁은 문은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는 구원의 문을 의미합니다. 구원은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신앙 문제가 아니겠습니까? 1517년에 있었던 종교개혁의 핵심 이슈도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얻는가 하는 문제였습니다. 현재의 세상이 어떻게 되고 앞으로 예수님이 다시 오실 세상이 어떻게 된들 내가 구원받지 못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구원! 이는 가장 기본적이지만 또한 우리 각자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입니다. 우리가 오늘 본문을 통해 구원의 길을 새롭게 알고 이 길을 힘차게 가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지금 예루살렘을 향해 가시면서 여러 곳에서 천국복음을 전하십니다. 이때 한 사람이 예수님께 나아와 질문합니다. 23a절입니다. "어떤 사람이 여짜오되 주여 구원을 받는 자가 적으니이까?" 이 질문은 구원에 대한 질문이라기보다는 구원받는 사람이 많은가 아니면 적은가에 대한 질문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의 말씀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아브라함 언약은 적어도 구약 성경 네 군데에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창세기 12장에서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12:2) 15장에서 횃불언약을 맺으실 때도 말씀하셨습니다.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15:5) 17장에서 할례를 행하게 하실 때 말씀하셨고 (17:8), 22장에서 독자 이삭을 바치라는 명령에 순종한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22:17) 유대인들은 이러한 언약들을 하나님의 변치 않은 약속이요 이에 따라 아브라함의 혈통적 후손은 당연히 구원을 받는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지금까지 가르치신 말씀을 보면 유대인이라고 다 구원받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 지도자들을 여러 번 심히 책망하셨습니다. 주인이 올 것을 준비하지 않는 종들은 엄히 때리고 벌에 처한다고 경고하셨습니다. (12:46) 열매 맺지 않는 나무는 찍어버린다고 하셨습니다. (13:7) 무리들에게도 회개하지 않으면 망하리라 하셨습니다. (13:3)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구원은 민족 전체적으로 받는 것이 아니라 개인적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질문은 한 사람은 그렇다면 구원받는 자가 적은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전하시는 그 하나님 나라에 소속되는 멤버가 얼마나 되는지 궁금했습니다. "주여 구원을 받는 자가 적으니이까?"

 

예수님은 그의 질문에 어떻게 대답하십니까? 24절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그 사람은 "구원을 받는 자가 적으니이까"라고 물었지만 예수님은 구원받을 사람이 적다 많다로 대답하지 않으십니다. 궁극적인 문제, 곧 어떻게 하면 구원을 얻을 것인가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구원받을 사람이 적다 많다가 이 질문자에게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구원받을 사람이 많더라도 이 사람이 구원을 받지 못한다며 그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구원받을 사람이 많으냐 적으냐를 따질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구원을 얻을 것인가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여기서 물론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은 구원을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구원받는 수가 적은지 많은지 궁금해 하지 말고 구원받기 위해 힘쓰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예수님의 대답에서 '구원 받는 자가 적다'는 힌트를 얻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좁은 문"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에서도 말씀하셨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7:13-14)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여기서 힘쓰다(아고니제스데)는 운동선수가 젖 먹던 힘까지 다하여 힘쓰는 것을 말합니다. 또한 적군을 무찌르기 위해 사력을 다해 싸우는 군인의 모습을 나타내는 단어입니다. 이를 볼 때 좁은 문으로 들어가려면 대단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결코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가 쉽지 않을까요? 예수님은 세 가지 이유를 말씀하십니다. 첫째, 구원의 문이 좁기 때문입니다. 둘째, 구원의 문이 언제나 열려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셋째, 주인에게 아신 바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첫째, 구원의 문은 좁습니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문이 있습니다. 하나는 넓은 문이요 다른 하나는 좁은 문입니다. 넓은 문은 크고 광대합니다. 그 문을 통하여 보이는 길은 넓고 시원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같이 들어갈 수 있어서 그 길에 들어서는 것은 외롭지 않고 불안하지도 않습니다. 짐을 많이 들고 들어갈 수도 있습니다. 반면에 좁은 문은 들어가기가 어려워 보입니다. 들어가기만 어려운 것이 아니라 그 문을 들어간 후에도 가는 길이 계속하여 좁습니다. 들어가 봤자 초라해질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 길을 따라 걸어가는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예수님은 본문에서는 이 문이 무엇인지 말씀하고 계시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 이 문은 예수님 자신을 말합니다. 요한복음 10:9절입니다.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예수님이 구원의 문이요 생명의 양식을 얻는 문입니다. 요한복음14:6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예수님이 구원되신 하나님께 나아가는 유일한 길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9도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심은 우리를 노하심에 이르게 하심이 아니요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심이라."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습니다. 예수님이 문이요 길이십니다. 오직 그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습니다.

 

유트브에 보면 유럽의 합스부르크 왕가가 장례식을 어떻게 치르는가가 나옵니다. 사람들이 죽은 자의 관을 메고 장례식을 할 사원 정문에 이르러 문을 세 번 두드립니다. 안에서 소리가 납니다. "누가 들어오려고 하는가?" 그러면 죽은 자에 대해 말합니다. "오토 폰 외스터라이히,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태자이시며, 웅가른, 뵈멘..  크라카우의 대공이시며, 로트링겐, 잘츠부르크... 공작이시며, 지벤뷔르겐의 대후작이시며, 메렌의 변경백이시며, ...트리에스트, 카타로, 빈트 변경주의 영주이시며, 보이보디나, 제르비엔 등등 보호령의 보호자이시다." 그러면 안에서 "우리는 그러한 사람을 모른다!"합니다. 다시 문을 3번 두드립니다. "누가 들어오려고 하는가?" "오토 폰 합스부르크 박사, 국제 범유럽연맹의 회장이자 유럽의회 의원이자 최고의장이며, 수많은 대학교들의 명예박사이며 유서 깊은 학술원과 협회들의 회원이며, 국민의 자유·질서·정의를 수호함으로 수많은 훈장을 받은 자이다." 그러면 또 다시 "우리는 그러한 사람을 모른다!"고 소리가 납니다. 다시 한 번 문을 두드립니다. "누가 들어오려고 하는가?"합니다. "오토, 한낱 죄 많은 인간입니다." "그렇다면 들어오라!" 오직 예수님께 대한 믿음으로 죄인으로 자기를 낮춘 자만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이 시대는 어느 때보다 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유혹이 많습니다. 문 되신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인기가 없습니다. 세상 문화 자체가 사람들을 넓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몰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처럼 힘쓰지 않으면 저절로 떠내려갑니다. 구원으로 안내하는 이 구원의 문은 자연스럽게 들어갈 수 있는 문이 아닙니다. 힘을 써야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저 들어가기를 구한다고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원한다고 들어가는 것도 아닙니다. 실제적으로 힘을 써야 합니다. 예수님을 붙들기 위해 힘을 써야 하며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며 빛과 소금으로 살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둘째, 구원받기 어려운 다른 이유는 문이 열려있는 시간이 한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25절입니다. "집 주인이 일어나 문을 한 번 닫은 후에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주여 열어 주소서 하면 그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리니." 때가 되면 문이 닫힙니다. 그러면 아무리 밖에서 두드려도 문은 다시는 열리지 않습니다. 구원을 받으려면 타임 센스가 있어야 합니다. 시간을 놓치면 기회가 없습니다. 노아는 수십 년간에 걸쳐 방주를 지었습니다. 완성된 방주에 각종 짐승들이 다 들어간 후에도 비가 내리기 시작하기까지는 일주일의 유예 기간이 있었습니다. (7:4) 사람들은 그 기간에 언제든지 노아의 방주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때가 되자 방주의 문이 닫혔습니다. 그 이후 홍수가 났고 아무도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구원의 문은 지금 열려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문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습니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열려 있는 것은 아닙니다.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번개 같이 하늘에서 임하십니다. 번개 빛을 보고 행동하면 이미 늦습니다. 때를 놓치면 더 이상 기회는 없습니다. 지금이 은혜 받을 만한 때요 지금이 구원의 날입니다. (고후6:2) 누가복음 17:26-30 입니다.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더니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망시켰으며 또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에 하늘로부터 불과 유황이 비오듯 하여 그들을 멸망시켰느니라 인자가 나타나는 날에도 이러하리라.” 역사를 배우는 이유는 과거의 실패를 보고 다시는 그러한 일을 당하지 않고자 함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역사에서 아무 것도 배우지 못한다는 것을 역사는 늘 말하고 있습니다. 나중에 가서 땅을 치며 후회해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슬기로운 자는 재앙을 보면 숨어 피하지만 어리석은 자는 나가다가 해를 받습니다. (22:3) 우리가 진지하게 이 경고를 마음으로 받아 임박한 재앙을 피하여 구원의 문으로 들어가기를 기도합니다.

 

셋째, 구원을 받기 어려운 세 번째 이유는 그 문은 주인이 아는 사람만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26,27절입니다. "그 때에 너희가 말하되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는 또한 우리를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 하나 저가 너희에게 말하여 이르되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 가라 하리라." 사람들은 자기들이 예수님을 안다고 주장했습니다. "주님, 우리를 모르십니까? 우리가 전에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는 또한 우리를 길거리에서 가르치지 않으셨습니까?" 그들은 아마 예수님이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실 때 같이 먹은 무리 중에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회당장 야이로의 집으로 이동하실 때에 그를 둘러싼 많은 무리 중에 있던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8:45) 그들은 그런 것을 자기들이 예수님을 아는 근거로 주장한 것입니다.

 

마태복음에서 그들은 이렇게까지 말합니다.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7:22) 그들은 주님의 이름으로 말씀을 전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권능을 행하기도 했습니다. 이 정도면 주님을 아는 것 아니냐고 주장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25-27절에서 두 번이나 반복하여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 (25,27) 놀랍지 않습니까? 어떤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선지자처럼 말씀을 능력 있게 전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귀신아 나가라!” 하자 귀신이 떨며 나갑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안수하며병이 나으라!” 하니 즉시로 병이 낫습니다. 우리는 당연히 그런 놀라운 일을 행한 사람은 하나님의 능력 있는 종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 사람이 구원받지 못한 가짜 크리스천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요?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요? , 있습니다. 지금 본문에서 예수님이 말씀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는 예수님과 인격적인 사랑의 관계성 없이 열심히 기독교 종교 생활하는 사람입니다. 청교도 신학자 존 오웬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에게 능력을 행하는 은혜를 주셨지만 구원의 은혜는 주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이나 심지어 말 못하는 짐승까지도 사용하실 수 있으십니다. (대하35:21, 22:28)

 

주님은 주의 이름으로 능력 있는 일을 해도 그들을 모른다고 하십니다. 그들이 주님을 안다고 생각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그들을 아셔야 합니다. 갈라디아 4:8,9는 말합니다. "그러나 너희가 그 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노릇 하였더니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 아니라 하나님이 아신 바 되었거늘." 신자는 하나님이 아신 바 된 자입니다. 주님이 오실 때 내가 "제가 주님을 아는데요" 는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주님이 "나는 너를 안다" 하시는 것이 관건입니다. 예수님이 ", 착하고 충성된 김사랑 목자, 내가 너를 알지, 내 나라에 들어오라!" 하시면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구원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주인이 나를 알아야 합니다. 만일 주인이 나를 모른다면 절대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유대인은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가 있는 민족이었습니다. 그러나 포인트는 민족을 아시는 것이 아니라 나를 아시는가 입니다. 혈통이 구원을 보장해주지 않습니다. 산상수훈에서 예수님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하시고 나서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다만 하늘에 계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7:21)고 하셨습니다. 외적으로 얼마나 예수님 주변에서 얼쩡거렸는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무슨 일을 행하였는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래봤자 그는 "행악하는 자"로 주인은 그에게 "나를 떠나 가라"고 쫓아냅니다. 구원은 하나님과 '관련된' 종교 활동에 달려있지 않습니다. 구원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17:3)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 위해 힘쓴다는 것은, 첫째로 예수님을 부끄러워하는 시대 가운데 그러한 시류에 떠내려가지 않도록 예수님을 붙들고자 힘쓰는 것입니다. 다른 구원의 길이 없음을 알고 예수님을 굳게 붙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들은 복음에 더욱 유념함으로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2:1)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 한다고 하여 이것이 소극적인 싸움은 아닙니다. 바울은 이를 믿음의 선한 싸움이라고 하였습니다. (딤전6:12) 그 싸움에 져서 믿음이 파선된 사람도 있습니다. (딤전1:19) 히브리서는 피 흘리기까지 대항하라고 하였습니다. (12:4)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님을 알고 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삶을 살게 된 것은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이를 등한히 여기면 다른 구원의 길이 없습니다. (2:3) 그래서 이 길에서 떠내려가지 않도록 우리는 날마다 부르심의 은혜를 새롭게 해야 합니다. 소극적으로 믿음 중심이나 지키고자 하면 떠내려갈 수밖에 없습니다. 전진이 없으면 밀리는 것입니다. 전진하기 위한 애씀이 필요합니다. 우리 힘은 약합니다. 그러나 애쓰며 기도하면 주님이 도우십니다. 우리가 좁은 문 되시는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이 가시는 길을 끝까지 힘써 따라가는 제자들이 다 되기를 기도합니다.

 

잠시 다시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 생각해봅시다. 구원받을 사람이 적을까요? , 적습니다. 유대인이라고 당연히 구원받는 것도 아니고, 구원의 문이 언제까지나 열려 있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못하게 하는 무신론과 이방 종교들이 세상에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 이방 종교에는 구원이 없습니다. 구원받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실로 구원으로 들어가는 문은 좁습니다. 한 번 더 생각해봅시다. 구원받는 사람이 적을까요? 아니오, 그 수는 매우 많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그의 후손이 하늘의 뭇별과 같으리라 하셨습니다. (15:5) 바다의 모래같이 많으리라 하셨습니다. (22:17) 구원받는 사람은 매우 많습니다. 요한계시록 7:9,10입니다.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큰 소리로 외쳐 이르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 세상 끝 날에 구원받은 무리들이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하나님을 찬양하는데 그 수가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셀 수 없이 많은 사람이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어떤 이단에서 말하는 144,000명이 아닙니다. 144,400은 구약의 열두 지파와 온 세상을 상징하는 신약의 열두 사도를 곱한 12 x 12 에 무한한 수를 의미하는 1,000을 곱한 수로 한 마디로 매우 많다는 상징수입니다. 바로 이어지는 9절에서 말하는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를 의미합니다. 구원 받는 사람은 지구상에 산 사람 전체 중에는 상대적으로는 적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수는 매우 많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경고하십니다. "보라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도 있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될 자도 있느니라 하시더라." (30) 이 말씀은 누구보다 먼저 믿음 생활을 출발한 유대인들이 그 나라에 들어가기를 힘쓰지 않으면 땅 끝에 있던 이방인들이 먼저 들어가게 될 것이라는 경고의 말씀입니다. 경고대로 되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 생활을 일찍 출발한 사람도 있고, 늦게 한 사람도 있습니다. 또 구원받았다고 자족하며 영적으로 안일하게 사는 사람도 있고, 두렵고 떨림으로 예수님을 열심히 따르는 자들도 있습니다. 나중 된 자가 먼저 될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강도가 먼저 천국에 들어갔습니다. 최종적인 판단은 하나님이 하십니다. 다만 우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는 말씀에 지금 순종하여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실제적으로, 우리 각자가 혼자서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삶을 살기 어렵습니다. 세상의 탁류가 거세며 우리는 연약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힘을 합쳐야 합니다. 모이기를 힘쓰며 손을 잡고 서로 도와야 합니다. 서로 격려하고 권고하며 함께 푯대 되신 예수님을 향해 나아가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3:14) 한 사람이면 패하겠지만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습니다. 세 겹줄은 쉽게 끊어지지 않습니다. (4:12) 우리가 모이기를 힘쓰며 서로 믿음을 격려하는 가운데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생명의 길을 가기를 기도합니다.

 

결론적으로, 구원의 문은 좁습니다. 이 구원의 좁은 문은 예수님입니다. 이 문은 세상에서 어리석고 미련하게 보입니다. 그래서 배척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길만이 생명으로 가는 문이기 때문에 흔들리지 말고 이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써야 합니다. 이 구원의 문은 한 번 닫히면 다시는 열리지 않습니다. 이 문이 열려있는 동안 우리가 들어갈 뿐만 아니라 이 문을 찾지 못해 방황하는 캠퍼스 영혼들을 초청하여 함께 들어가기를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