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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023년 누가복음 37강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누가복음 22:1-38)2023-01-23 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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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누가복음 제 37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말씀 / 누가복음 22:1-38

요절 / 누가복음 22:20

"저녁 먹은 후에 잔도 이와 같이 하여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오늘 말씀의 제목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입니다. "새 언약"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예수님의 피로 세우는 새 언약에 대해 배우며 큰 은혜 누리길 기도합니다.

 

1절을 보면 유월절이라 하는 무교절이 다가왔습니다. 유월절은 어떤 날입니까? 과거 애굽의 노예 상태에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탈출한 날입니다. 그 때는 B.C. 1,400 년경이었습니다. 우리나라로 치면 고조선 초기의 청동기 시대입니다. 그 때 하나님은 모세를 부르시고 그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애굽에 10가지 재앙을 내리십니다. 그 중에 마지막 장자 재앙은 애굽에 있는 모든 초태생, 곧 사람이나 짐승의 처음 난 것들을 다 멸하는 재앙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재앙을 피할 수 있는 특별한 방법을 알려 주십니다. 그것은 장자 재앙이 있는 날 밤, 어린 양을 잡아 그 피를 문기둥과 인방에 바르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이스라엘 백성은 그 날 밤에 아무도 밖에 나가지 않고 집 안에서 머물렀습니다. 양을 잡아 문기둥과 인방에 피를 바르고, 그 양을 구워 무교병과 쓴 나물과 함께 먹었습니다. 그날 밤에 하나님이 보내신 죽음의 사자는 애굽의 모든 집의 처음 난 것을 다 멸하였습니다. 초상이 일어나지 않는 집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죽음의 사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집은 넘어갔습니다. 죽음의 사자가 넘어갔다(Passover)해서 그 날을 유월절이라 부르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니산월 14일 밤에 양고기와 무교병을 먹으며 대대로 그 날을 기념하였습니다. 유월절은 이스라엘의 가장 큰 명절이었습니다. 오늘과 같은 설 명절과 같은 날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때에는 해외에 흩어진 많은 유대인들도 예루살렘에 가서 유월절을 지켰습니다. 당시 팔레스틴 총독의 보고에 의하면 어떤 해의 예루살렘에서 유월절에 잡은 양이 256,500마리였다고 합니다. 보통 양 한 마리를 열 명이 먹었다고 하니 대략 250만 명이 예루살렘에 왔었음을 말해 줍니다.

 

본문을 보면 예루살렘은 유월절 명절로 온통 축제 분위기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명절에 종교지도자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습니까? 그들은 예수님을 죽일 방도를 궁리하고 있었습니다(2). 그런데 그들은 유월절이 다가오기 때문에 걱정이 되었습니다. 수많은 군중들이 몰릴 텐데 그들의 지지를 받는 예수님이 체포되면 큰 폭동을 일으킬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순례자들이 예루살렘에 모여들기 전에 예수님을 조용히 잡아 죽일 궁리를 하였습니다.

 

그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3절입니다. "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인이라 부르는 유다에게 사탄이 들어가니" "유다에게 사탄이 들어갔다"는 뜻이 무엇일까요? 이는 사탄이 가룟 유다 안에 들어가 그를 장악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이제부터는 사탄이 그의 마음의 사령탑에 앉아 그를 조종하게 된 것입니다. 유다가 왜 이런 상태가 되었을까요? 그는 예수님의 열두 사도 중에 한 명으로 지난 3년 동안 예수님의 많은 사랑과 섬김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재능을 인정하시며 그를 믿고 재정부장의 중책을 맡기셨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예수님을 순수히 배우지 못했습니다. 그는 예수님보다 예수님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이러한 그는 예수님이 아무리 가르치셔도 깨닫지 못했습니다.

 

특히 유다는 예수님의 발에 값비싼 향유를 부은 여자를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이런 여인을 칭찬하신 예수님을 더욱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사실 그 사건 이후 유다의 마음은 굳게 닫혀 버렸습니다. 예수님이 자기가 원하는 것을 주실 분이 아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지금까지 예수님을 따르며 희생한 것에 손해의식이 들었습니다. 최소한의 것이라도 챙겨야 되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는 이러한 악한 생각을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사탄의 표적이 된 것입니다. 그의 악한 생각을 통해 사탄이 간교한 유혹을 했고 결국 사탄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그는 대제사장들과 성전 경비대장들에게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그들에게 민중들이 없는 틈을 타서 예수님을 그들에게 넘겨주겠다고 제안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종교지도자들이 볼 때 하늘에서 떨어진 행운이었습니다. 그들은 기뻐하여 돈을 주기로 하고 같이 체포 방안을 의논합니다. 6절과 같이 무리들이 없을 때 넘겨줄 것, 48절과 같이 입맞춤을 신호로 체포하는 것 등에 대한 의논을 한 것입니다.

 

유월절 양을 잡을 무교절날이 이르렀습니다(7). 예수님은 베드로와 요한을 성 안으로 보내 유월절 식사를 준비하게 하십니다(8). 유월절 식사 준비를 함에 있어서 세 가지 방향을 주십니다(10-12). 첫째, 예루살렘 성내의 집에서 준비하도록, 둘째, 유월절을 먹을 적당한 객실을 찾도록, 셋째, 그 객실에 유월절 식사를 준비하도록 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왜 이와 같이 다소 비밀스럽게 준비하게 하셨을까요? 이는 유다가 이미 배신을 한 상황에서 적대자들의 방해를 피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만찬 장소가 미리 알려지면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이 아니라 유월절 만찬 다락방에서 체포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사도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셨습니다(14). 여기서 한 가지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제자들과 이 유월절 식사를 하신 날은 유대인들이 통상적으로 유월절 식사를 하던 때, 즉 니산월 14일 저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보다 하루 전날 즉, 13일 저녁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예수님은 유월절 식사 후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십니다. 거기서 체포되십니다. 예수님은 대제사장에게 심문을 받으신 후, 그 다음 날 곧 14일 새벽에 빌라도 총독에게 심문을 받습니다. 요한복음 18장을 보면 예수님은 빌라도의 심문을 받으십니다. 종교지도자들은 그날 저녁에 시작되는 유월절 잔치를 "더럽힘을 받지 않고 먹고자" 빌라도의 관정에 들어가지 않습니다(18:28). 실제 유월절 당일에는 예수님 자신이 유월절 양이 되셔서 사람들이 양을 잡는 그 시간에 십자가에서 죽으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하루 전에 제자들과 식사를 하신 것입니다.

 

15절입니다. "이르시되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 여기서 "원하고 원하셨다"는 말은 아주 간절히 원하신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죽기 위해 세상에 오셨습니다. 이제 그 일이 곧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왜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셔야 하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제자들이 그 의미를 깨닫지 못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예수님이 이루실 복음을 전파할 사도의 역할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이 마지막 식사를 하시며 그 의미를 가르쳐주길 간절히 원하셨던 것입니다.

 

16-18절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유월절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루기까지 다시 먹지 아니하리라 하시고 이에 잔을 받으사 감사기도 하시고 이르시되 이것을 갖다가 너희끼리 나누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이제부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까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고" 예수님이 여기서 강조하시는 바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참된 유월절 잔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때 다시 그들과 함께 먹고 마시겠다고 하십니다.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탈출한 이후 자주적이고 민족적인 국가공동체를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직 진정한 유월절을 성취하지 못하였습니다. 로마로부터의 정치적 지배뿐만 아니라 죄와 사망의 지배를 여전히 받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모든 억압과, 죄와 사망의 예속이 사라지는 유월절이 장차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루어지게 됩니다. 예수님은 그 날까지 유월절 식사를 다시 않겠다 하심으로써 제자들로 하여금 참된 유월절, 곧 참된 자유와 해방의 날을 소망하도록 하셨습니다.

 

19절입니다. "또 떡을 가져 감사기도 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예수님은 하나님께 감사기도 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셨습니다. 여기서 ""은 물론 유월절 무교병을 가리킵니다. ’(소마)이라는 단어는 인간의 전체적인 육체를 뜻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몸 전체를 온 인류의 희생물로 드린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떡 한 개를 여러 사람에게 떼어 나눠 주신 의미가 무엇일까요? 이는 첫째, 예수님의 생명이 떡을 먹는 여러 사람에게 전해지는 것입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산 떡이신 예수님을 먹음으로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6:57,58). 둘째, 떡을 먹으면 그것이 우리 몸에 들어가 소화가 되고 우리의 에너지가 되고 몸의 일부가 됩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 자신이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이 유월절 만찬을 성만찬으로 지켜 행하여 기념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그의 몸을 찢어 주신 그 사실을 기억하고 은혜를 누리며 그 뜻을 세상에 널리 알리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또 무엇을 하십니까? 20절입니다. "저녁 먹은 후에 잔도 이와 같이 하여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여기서 잔은 그 안에 담겨진 포도주로 예수님의 피를 상징합니다. 예수님은 그의 피로 새 언약을 세우십니다. 새 언약이라 함은 옛 언약이 있다는 말이죠?

 

출애굽기 19장을 보면 하나님은 모세를 시내산 위로 부르십니다. 그곳에서 십계명과 율법을 주십니다. 이후 모세는 산 아래로 내려와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여호와의 모든 계명을 전합니다(24:3). 이에 백성들이 한 소리로 응답합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 이에 모세는 계약서에 도장을 찍듯이 서명식을 합니다. 짐승의 피를 가져다가 반을 여호와의 제단에 뿌립니다. 그리고 나머지 반은 여러 양푼에 담습니다. 그 양푼에 담은 피를 제단 앞에 서 있는 백성들에게 흩뿌립니다. 서 있는 백성들의 얼굴과 옷에 짐승의 피가 뿌려지는 것을 상상해보십시오. 얼마나 놀랍고 진지한 일입니까! 피는 죽음을 상징합니다. 언약을 어기면 죽는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피뿌림 예식을 행 한 후에 말합니다.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24:8) 바로 이것이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 간에 맺어진 옛 언약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라고 하십니다. 곧 짐승의 피로 맺은 옛 언약과 달리, 이제 예수님의 피로 새 언약을 맺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왜 새 언약을 맺어야 되셨나요? 이는 옛 언약이 깨어졌기 때문입니다. 왜 깨어졌습니까? 사람이 어겼습니다. 왜 어겼을까요? 하나님의 계명에 문제가 있었던 것일까요? 아닙니다. 계명은 거룩하고 의로운 것이었습니다. 조금도 문제가 없었습니다. 문제는 사람에게 있었습니다. 계명이 옳은 것임을 알고는 있지만 지킬 힘이 없었습니다. 능력이 없었습니다.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거룩한 계명을 지키고자 하는 마음도 있지만 동시에 계명을 거스르고자 하는 악한 본성이 있었습니다. 그 악한 본성이 선한 의지보다 강하여 언제나 하나님의 계명을 어겼습니다. 타락한 심성으로 인해 사람은 하나님을 원하지만 동시에 하나님을 밀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도망가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싶으나 증오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거룩함을 원하지만 더러움을 쫓아가는 이해할 수 없는 피조물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이 맹세는 하였지만 지킬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법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은 단 하나도 없었습니다. 이로 인해 모든 사람에게 죽음, 곧 영원한 멸망이 임하였습니다. 옛 언약은 인간의 연약함으로 무용지물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 아래 놓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인간들을 모두 멸망시키실 수도 있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생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어찌하든지 구원하기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님을 보내 주시고 새 언약을 맺으십니다. 이 새 언약을 통해 인생들을 구원하고자 작정하신 것입니다. 인생들에게 새로운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이 놀라운 기회가 우리에게는 거저 주어지지만 하나님은 큰 대가를 지불하십니다.

 

예수님이 맺으시는 새 언약은, 옛 언약과 여러 가지 다른 점이 있겠지만 특히 어떤 점에서 달라야겠습니까? 다시는 인간의 연약함으로 인해 깨어지는 언약이 아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곧 인간의 연약함과 전혀 관계없이 성취되는 언약이어야 합니다. 새 언약은 그런 언약입니다. 옛 언약은 쌍방이 지켜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옛 언약을 쌍방언약, 쌍무언약, 또는 행위언약이라고 부릅니다. 양쪽에게 의무가 있습니다. 한 쪽이라도 지키지 않으면 깨집니다. 이 옛 언약은 인간의 연약함으로 깨어졌습니다. 반면 새 언약은 일방언약, 편무언약, 또는 은혜언약이라고 부릅니다. 이 언약은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약속하시고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성취하십니다. 사람이 할 일은 무엇입니까? 아무 것도 없습니다. 새 언약에서 하나님은 일방적인 은혜의 공여자요 사람은 일방적인 수혜자가 됩니다.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그저 받기만 하는 자가 됩니다.

 

어떻게 그 은혜를 받을 수 있을까요? 그냥 받아들임으로입니다! 그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은혜를 주신다, 하나님이 약속하시는 바는 좋은 것이다, 하나님은 내가 단순히 이 은혜를 받아들이기 원하신다는 것을 믿는 입니다. 우리는 단지 그의 언약을 받아들임으로 언약의 당사자가 됩니다. 실제적인 삶에서 이 새 언약을 받아들이는 것, 곧 믿는 것은 어떤 결과를 나타낼까요?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을 통해 성령을 보내십니다. 우리 마음을 변화시키십니다. 우리에게 소원을 주시고, 믿음도 주시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게 하심으로 구원을 받게 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거룩한 사람들로 빚어 가십니다.

 

신명기는 모세가 모압 평야에서 가나안 땅에 들어갈 이스라엘 신세대들에게 율법을 다시 전한 내용입니다. 그 율법의 내용이 신명기 29장까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지키라고만 하면 그것은 옛 언약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신명기30장에 이미 새 언약을 계시해 주셨습니다. 신명기 30:6입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마음과 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 네게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게 하사 네게 생명을 얻게 하실 것이며" 할례를 베푼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는 완전히 잘라내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 옛 마음을 완전히 제거합니다.

 

예레미야 31:31-33에도 하나님이 새 언약을 맺으시리라는 분명한 약속의 말씀이 있습니다. 에스겔11:19도 말합니다. "내가 그들에게 한 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 영을 주며 그 몸에서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 사람이 계명을 지키지 못하는 것도, 하나님을 미워하는 것도, 세상 쾌락을 좋아하는 것도 다 마음이 그러하니까 그런 것 아닙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완전히 변하게 하십니다. 영적 심장이식수술을 하십니다. 새 마음,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 의를 행하기 기뻐하는 마음,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십니다. 우리로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십니다. 누가 한다고요? 하나님이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로 생명을 얻게 하십니다. 이것이 새 언약의 가장 큰 특징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지만 하나님이 그런 마음을 주셔서 우리로 그렇게 하십니다. 우리의 구원이 우리에게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달려있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다시는 하나님의 법도를 깨는 일이 없게 하신 것입니다.

 

본문을 다시 보면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라고 하십니다. 이 새 언약은 예수님의 피로 세우는 것입니다. 세운다는 것이 무슨 말일까요? 공동번역은 "내 피로 맺는 새로운 계약"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결국세운다는 이 말은 계약을 맺는다, 예수님의 피로 언약을 성립시킨다는 것입니다. 사람들 간에 계약할 때 인주를 발라 도장을 찍습니다. 옛 언약에서는 짐승의 피로 옛 언약에 도장을 찍었습니다. 그런데 새 언약은 예수님의 피로 도장을 찍는 것입니다. 이는 절대로 파기될 수 없는 언약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의 피 흘리심, 그의 죽음을 두고 맹세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피는 새 계약을 성립시켜 효력이 발생하게 하는 도장 역할도 하지만, 새 언약의 내용이 되기도 합니다. 이는 그의 피 흘리심으로 우리 인류의 모든 죄를 사하시는데, 그것을 받아들이는 자를 구원하시는 것이 언약의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의 핵심은 피로 인한 죄사함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빨래 짜듯 짜면 피가 흘러나온다는 말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다 하십니다. 그가 우리 대신 모든 고난을 받으시고, 우리 대신 죽으십니다. 그가 묻히십니다. 그가 다시 살아나십니다. 죄와 사망을 영원히 멸하십니다. 우리가 할 일은 무엇입니까? 그저 예수님이 하신 일을 믿는 것입니다. 믿고 누리는 것입니다. 그를 믿고 그를 나의 구주로 섬기는 것입니다. !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영원한 지옥 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일방적으로 속죄하시고 구원의 은혜를 주시는 우리 주님께 다만 감사와 찬송을 드립니다! 우리가 자다가 하루 일곱 번씩 깨어 이 주님의 은혜를 감사해도 부족합니다. 나에게 영원한 죄사함,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 내 대신 피 흘리신 우리 예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이제 그림자인 유월절은 갔습니다. 그래서 중국의 임어당이라는 분이 말했습니다. "태양이 떴다 촛불을 끄라". 그림자는 갔습니다. 실체가 왔습니다. 참된 유월절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온전히 실현되겠지만 우리는 이 땅에서 이미 믿음으로 누리며 기뻐하는 것입니다. 참 자유와 평화가 이미 우리 마음에 왔습니다. 이제 우리에게는 참된 유월절을 이루신 예수님께 대한 감사와 찬송이 있을 뿐입니다. 이 감사와 찬송의 식사가 성만찬입니다. 신자는 이 땅에서 천국을 누리며 사는 자들입니다. 우리가 늘 주님의 살을 먹고 마시며 이 기쁨을 누리길 기도합니다.

 

그러면 그의 살을 먹고 마시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것은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매사에 매 순간에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믿음은 신비한 것입니다. 그를 믿을 때 내가 예수님이 하나가 됩니다. 연합이 이루어집니다. 그를 믿을 때 그의 생명이 나의 생명이 됩니다. 그의 생명이 내 속에서 약동합니다. 그의 영이 나를 변화시켜 나갑니다. 믿음을 결합할 때 성령의 역사로, 예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 역동적인 삶을 경험하게 됩니다. 우리가 늘 예수님을 믿음으로 나를 위해 피 흘리신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하며 기뻐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또 이 주님의 놀라운 은혜를 기념하며 힘써 전하기를 기도합니다.

 

21,22절입니다. "그러나 보라 나를 파는 자의 손이 나와 함께 상 위에 있도다 인자는 이미 작정된 대로 가거니와 그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하시니" 예수님 자신은 작정된 대로 가지만 예수님을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다고 경고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유월절 어린 양으로 죽임을 당하시는 것은 창세전부터 작정된 일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하여 예수님을 판 유다의 죄가 정당화되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은 유다의 배반을 안타까워하시면서 오히려 그에게 임할 화를 염려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심각한 말씀을 가르치시는데 24절을 보면 제자들 사이에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을 감당하시며 다시 온유하게 가르쳐주십니다. 그들 중에 크다고 생각하는 자는 가장 어린 사람과 같이 돼야 한다고 하십니다. 이 사실을 27절에서 강조하십니다. "앉아서 먹는 자가 크냐 섬기는 자가 크냐 앉아서 먹는 자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

 

최후의 만찬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그림처럼 일자 식탁에서 의자에 앉아서 먹은 것이 아닙니다. 영어성경 마26:20이나 막14:18에 보면 "reclining at the table" 이라고 되어 있는데 유대인의 식사 예법대로 비스듬히 옆으로 누워 식사를 하는 것입니다. 다들 비스듬히 누워 식사를 하는데 예수님만 그 중에 오가시며 음식을 섬기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 생각해봐라. 앉아서 먹는 자가 크냐, 섬기는 자가 크냐, 당연히 너희처럼 그렇게 자리에 비스듬히 앉아 건네주는 음식을 먹는 자가 큰 자가 아니냐? 이 땅에선 노예가 서서 봉사하고, 주인이 앉아서 먹지 않느냐? 그런데 봐라.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느냐? 나는 너희 중에 섬기는 자로 있지 않으냐? 섬기는 자가 큰 자다"라고 예수님은 직접 본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28절입니다. "너희는 나의 모든 시험 중에 항상 나와 함께 한 자들인즉" 제자들은 예수님의 모든 시험 중에 함께 하였습니다. 이런 제자들이 예수님께 큰 위로와 기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여러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깊은 애정과 신뢰를 가지고 계셨습니다. 이들에게 하나님의 나라의 건설과 그 나라 선포 활동을 넘겨주십니다(30). 31-34절에서 예수님은 베드로의 배반에 대해 예고하십니다. 35-38절 말씀은 기록된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 제자들을 준비시키시는 내용입니다. 이제부터는  상황이 어려워질 것이니 전대와 주머니를 가지라고 하십니다. 검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서라도 검을 사라고 하십니다. 이로써 예수님이 체포될 때 그가 불법자의 동류로 여김을 받았다 한 말이 이루어집니다(53:12).

 

결론적으로, 예수님은 유월절 어린 양으로 죽임당하십니다. 우리 죄를 위해 그의 살을 찢기시고 피를 흘리십니다. 그의 살을 먹고 그 피를 마시는 자, 곧 그를 믿는 자는 죄사함과 영생을 얻습니다. 우리가 주님 다시 오시는 날까지 십자가에서 그 생명을 내어주신 주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그의 구속의 사랑에 강권된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