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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021년 봄 학기 준비 특강 요나서 제1강 `니느웨로 가서 외치라`(요나 1,2장)2021-02-15 02:47
작성자
2021 요나 1강 

니느웨로 가서 외치라 

말씀/ 요나 1,2장 
요절/ 요나 1:2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향하여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되었음이니라 하시니라” 

봄학기를 앞두고 요나서 말씀을 공부하게 되어 감사합니다. 요나서 본문 말씀 강론을 시작하기 앞서 간단하게 요나서의 주제와 구조 등 서론에 해당하는 내용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먼저 요나서의 주제는 ‘온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요나서를 다 읽고 나면 자연스럽게 요한복음 3:16절 말씀이 떠오르게 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나서의 1차 독자는 자기 중심적이고 편협한 사고에 갇힌 유대인들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자기들만 특별히 사랑하신다고 생각했습니다. 요나서는 이런 유대인들의 편협함과 자기 중심적인 생각을 깨는 책입니다. 

요나서는 1,2장과 3,4장이 대조되어 있는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1,2장의 인물과 사건들을 3,4장과 유심히 비교해서 읽어야 합니다. 

요나서 말씀을 통해서 우리 안에 있는 자기 중심적인 사고와 편협함이 깨지고 부숴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마음을 찢어 넓혀 바다보다 넓은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사랑을 배우는 귀하고 복된 은혜의 시간 되기를 기도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여호와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였습니다. 요나는 북이스라엘 왕 여로보암 2세 때 활동했던 선지자입니다(왕하 14:25). 여로보암 2세는 여호와 보기에 악한 왕이었습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악행을 인해 매를 드시고 징계하셨습니다. 날마다 잘못하여 야단맞고 혼나는 아들을 보며 안스러워하는 아버지처럼 하나님은 징계를 받는 이스라엘이 비록 그 행위를 고치지 않았지만 여로보암 2세 때 나라가 크게 번영하고 잃어버렸던 영토도 다시 회복하도록 도와 주셨습니다. 이 하나님의 마음을 왕에게 전달한 선지자가 바로 요나입니다. 

2절을 보십시오.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향하여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되었음이니라 하시니라” 니느웨는 노아의 홍수 이후 니므롯이 오늘날 이라크 북부 메소포타미아에 건설했던 도시입니다. BC 12세기 경부터 앗수르의 주요 도시가 되었고 BC 8세기 경 앗수르 왕 산헤립이 이곳을 수도로 삼았습니다. 이후 애굽까지 정복하여 니느웨는 큰 성으로 발전하였습니다. 

북이스라엘 역사 편에서 보면 본문의 요나 선지자가 활동하기 약 100여년 전인 앗수르의 살만에셀 2세의 통치 때(BC 860-825) 침략을 당했습니다. 이후 이스라엘은 앗수르에 조공을 바치게 되었습니다.  

이사야 10:13절을 보면 니느웨는 교만하여 내 힘과 내 지혜로 열국의 경계선을 걷어치워버렸다고 자랑하였습니다. 나훔 3장을 보면 어린 아이들을 거리 모퉁이에 메어치고 존귀한 귀족들을 제비뽑아 종으로 삼고 권세자들을 사슬에 결박하여 끌고 갔습니다. 스바냐 2:15절을 보면 오직 나만 있고 나 외에는 다른 이가 없다는 극도의 이기주의 가운데 쩔어 있었습니다. 

니느웨의 이런 악독함은 하나님 앞에 상달되었습니다. 당시 세계의 신관에 의하면 세상의 각 신들은 자기를 섬기는 민족만 돌보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온 세상을 두루 살피시고 큰 성 니느웨가 행하는 악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그 악을 심판하고자 결심하셨습니다. 그러나 심판하기에 앞서 그들에게 임박한 심판에 대한 경고의 메시지를 전하기 원하셨습니다. 

1945년 7월경 일본의 히로시마 상공에 수백만장의 항공 삐라(전단지)가 투하되었습니다. 내용인즉 8월 6일 이전에 적어도 30킬로미터 이상 이 도시를 멀리 빠져나가라는 것이었습니다. 삐라를 받아본 히로시마 주민들은 크게 동요하였습니다. 그 전단지의 경고를 받고 짐을 싸서 도시를 빠져나가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대로 남아있는 이들이 더 많았습니다. 마침내 경고했던 8월 6일이 되었습니다. 오전 8시 15분 3대의 B29 미군 전투기가 히로시마 상공에 나타났습니다. 일본은 처음에는 공습경보를 발효했다가 곧 취소하였습니다. 단 3대의 전투기가 위협적이지 않은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폭격을 방해하기 위한 전투기도 보내지 않았습니다. 잠시 후 고도 9,750미터에서 인류 최초의 핵무기인 ‘리틀 보이’가 투하되었습니다. 정확히 57초 후 히로시마 상공 580미터에서 원자폭탄은 폭발하였습니다. 폭발 지점을 중심으로 반경 1.6km 이내의 모든 것이 완전히 파괴되었으며 총면적 11km2의 90퍼센트가 파괴되었습니다. 7만명이 초기 폭발로 사망하였고 이후 후유증으로 거의 비슷한 숫자의 사망자가 발생했습니다. 이 비극적인 사건의 이전에 경고의 삐라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무섭습니다. 하나님은 히로시마 상공에 투하된 원폭과 같은 심판의 폭탄을 니느웨 상공에 투하하기로 결심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심판의 원폭을 투하하기에 앞서 선지자 요나를 경고의 삐라로 사용하기로 결심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만약 그들이 이 경고의 음성을 듣고 회개하면 원폭 투하를 전격 취소할 마음을 가지셨습니다. 

이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베드로 후서 3:9절은 말씀합니다.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또한 디모데 전서 2:4절은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하나님은 니느웨가 비록 악한 도성이지만 악한 그들이라도 멸망하지 않고 회개하여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선지자 요나를 불러 이런 하나님의 마음을 전하도록 하셨습니다. 


이 하나님의 마음은 BC 760년 경 요나의 때나 2,781년이 지난 오늘 이 시간이나 변함이 없습니다. 오늘날 이 세상은 어떠합니까? 니느웨 사람들처럼 악한 죄 가운데 있습니다. 특히 우리나라를 둘러싼 중국, 일본, 러시아 나라들이 어떠합니까? 이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여러가지 죄 가운데 살아가고 있습니다. 특히 하나님이 없으므로 선과 악의 기준이 없습니다. 음란과 사기와 흉포한 죄 가운데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들이 하나님을 알고 회개하여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십니다. 이들을 향한 크신 사랑의 마음을 갖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요나에게 “일어나 외치라” 하셨습니다. 자기 나라에서 안주하며 앉아있던 요나에게 일어나라고 하셨습니다. 입을 다물고 있던 요나에게 “그것을 향하여 외치라” 하셨습니다. 이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해 여러 죄 가운데 살아가는 그들에게 “일어나 외치라” 말씀하십니다. 

지난 미국 국제 수양회 때 유대인 교육 세미나에서 나누었던 내용입니다. 그것은 오늘날 젊은이들이 마치 외국인과 같다는 것입니다. 외국인은 정의상 다른 언어, 다른 문화권에 살고 있으면 외국인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요즘 젊은이들이 어떠합니까? 기성 세대와 언어가 다르고 문화가 다르고 사고 방식이 현저히 다릅니다. ‘키보드 워리어’ 하면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어그로를 끈다’ 그러면 무슨 의미인지 아십니까? 이처럼 사용하는 언어가 다릅니다. 또 요즘 청년들에게 유교 사상의 흔적인 남존여비, 장유유서를 들먹이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바로 대화금지 리스트에 오르게 됩니다. 카톡 친구 명단에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퇴출됩니다. 

이것은 비단 기성 세대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젊은 청년들도 5년, 10년만 지나면 기성 세대 취급을 받습니다. 요즘 10대 청년들이 하는 이야기를 잘 알아들을 수 없습니다. 그들의 사고방식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때로는 사고방식과 행동이 엽기적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이처럼 문명이 고도로 발전할수록, 상호간의 커뮤니케이션의 방법이 발전에 발전을 거듭할수록 세대교체의 주기가 짧아집니다. 최전성기에 일하던 사람이 5년 10년만 지나면 더 발전된 방법에 익숙해진 새로운 세대에 주연 자리를 물려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굳이 선교지로 가지 않더라도 국내에서 선교하는 것 자체로 이미 선교사가 되어야 하고 또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제는 자기 자녀에게 복음을 전하려 해도, 몇 살 차이 나지 않는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려 해도 내 기존의 고정관념을 깨고 그들을 이해하려는 많은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요나에게 민족감정과 고정관념을 깨고 니느웨로 가서 회개의 메시지를 전하도록 하셨습니다. 이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우리와 다른 세대의 청년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3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여 그들과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배삯을 주고 배에 올랐더라”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요나의 반응이 어떠합니까? 놀랍게도 요나는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여 니느웨의 정반대편인 오늘날 스페인 남부 지브롤터 근처의 다시스로 도망가기로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주신 사명의 땅 니느웨와 지리상 최대한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가고자 하였습니다. 

그가 왜 이런 행동을 하였을까요? 이는 아마도 그의 민족주의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앗수르가 이스라엘에 끼친 그 악행을 결코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앗수르까지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는 앗수르가 악행 가운데 멸망하기를 원했습니다. 앗수르가 망하는 것이 정의론적 관점에서도 옳고 또 이스라엘의 안전과 번영을 위해서도 유익하다고 여겼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요나의 행동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요나가 만약 평범한 유대인이었다면 그의 행동은 혹 용서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요나의 직분이 무엇입니까? 그는 하나님의 선지자였습니다. 하나님의 심판 기준은 그의 직분이 무엇이었는지에 따라 달라집니다. 영적 지도자의 위치에 있는 자에게 하나님은 더 높은 수준을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선지자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순종’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선지자가 전하는 대부분의 메시지는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선지자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리고 이런 선지자를 하나님이 아무런 벌을 내리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백성들은 아니 선지자도 저렇게 자기 마음대로 하고 불순종하는데 나야 뭐 적당히 하나님 말씀 무시하고 내 마음대로 해도 되겠지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열왕기상 20:35-37절을 보면 한 선지자가 여호와의 말씀을 받고 친구 선지자에게 말했습니다. “너는 나를 치라” 그런데 그 사람이 어떻게 내 친구를 칠 수 있는가 하는 자기 생각으로 여호와의 말씀에 불순종했습니다. 이때 그 선지자는 친구에게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네가 나를 떠나갈 때에 사자가 너를 죽이리라” 하였습니다. 과연 선지자의 말대로 그가 떠났을 때 길에서 사자가 그를 죽였습니다. 그가 또 다른 선지자에게 동일한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사자에게 물려 죽은 선지자의 이야기를 들은 그는 있는 힘을 다해 그 사람을 쳤습니다. 친구 선지자에게 얼굴을 맞아 상한 모습이 된 그는 수건으로 얼굴을 가리고 왕에게 가서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우리는 열왕기상의 이 이야기를 보면서 좀 하나님이 심하신 것 아닌가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그가 선지자이기 때문입니다. 선지자에게는 주님의 말씀에 절대 순종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본문에서 요나의 행동은 그야말로 불순종의 극치입니다. 대놓고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을 거스르고 있습니다. 

4-5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큰 바람을 바다 위에 내리시매 바다 가운데에 큰 폭풍이 일어나 배가 거의 깨지게 된지라 사공들이 두려워하여 각각 자기의 신을 부르고 또 배를 가볍게 하려고 그 가운데 물건들을 바다에 던지니라 그러나 요나는 배 밑층에 내려가서 누워 깊이 잠이 든지라” 

마침내 여호와께서 큰 바람을 바다 위에 내리셨습니다. 이로 인해 바다 가운데 큰 폭풍이 일어나 배가 거의 깨지게 되었습니다. 사공들은 두려워하여 각자 자기의 신을 불렀습니다. 또 배를 가볍게 하려고 짐을 바다에 던지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요나는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습니까? 그는 배 밑층에 내려가 코를 골며 자고 있었습니다. 그가 왜 자고 있었을까요? 현실이 너무 힘들어 도피성 잠을 자고 있었을 수 있습니다. 아니면 급하게 배편을 알아보고 달려오느라 피곤해서 잠이 들었을 수 있습니다. 

6절을 보십시오. “선장이 그에게 가서 이르되 자는 자여 어찌함이냐 일어나서 네 하나님께 구하라 혹시 하나님이 우리를 생각하사 망하지 아니하게 하시리라 하니라” 잠든 요나가 무슨 꿈을 꾸었을까요? 혹시 먼 나라의 에버랜드 놀이동산에 가서 바이킹을 즐기고 있는 꿈을 꾸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이런 그에게 천둥벼락같은 음성이 귓가에 울려 퍼졌습니다. “자는 자여 어찌함이냐 일어나서 네 하나님께 구하라” 그는 처음에 이것이 진노한 하나님의 음성인가 생각했습니다. “일어나서 구하라”라는 표현은 원문상 2절에서 하나님이 하신 말씀 “일어나 외치라”는 말씀과 동일한 표현이었습니다. 요나가 놀라 눈을 비비고 보니 그것은 하나님의 음성이 아니라 진노한 선장의 음성이었습니다. 선장은 “너가 지금 자고 있을 때냐 일어나 너의 하나님께 구하라” 요나를 책망하며 그에게 방향을 주었습니다. 

현재 상황만 놓고 보면 선장의 신앙이 요나의 신앙보다 더 좋아보입니다. 요나서는 전체적으로 유대인들이 ‘개’로 여겼던 이방인들의 신앙이 정통 유대인인 요나보다 더 좋아 보이는 모습을 드라마틱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뒤에 나오지만 3장에서는 니느웨의 이방인들이 얼마나 회개를 잘 하는지 유대인들보다 훨씬 더 회개를 잘 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믿은 지 오래 되는 사람보다 때로 아직 하나님을 잘 알지 못하거나 혹은 이제 막 알아가기 시작한 사람이 훨씬 더 신앙적으로 좋은 모습을 보여주는 경우가 있습니다. 믿은 지 오래 된 사람은 나태한 신앙생활을 하다가 삶의 어려움과 위기가 찾아와도 똥고집과 배짱을 부리며 기도하지 않습니다. 전라도 말로 징허게 기도안합니다. 좋게 말하면 부모님의 절대적인 사랑을 확신하는 막내아이가 뗑깡을 부리며 막 나가는 것처럼 행동합니다. 그런데 이제 막 하나님을 알아가기 시작한 이들, 하나님은 없는 분인 줄 알았다가 정말로 이 세상 만물과 천지를 창조하시고 나를 지으신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것을 이제 막 알게 된 이들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자세가 좋은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절대적인 경외심과 자세를 가지고 순종합니다. 주님의 말씀에 두렵고 떨림으로 대합니다. 

본문에서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 유대인, 그 중에서도 영적인 지도자급에 해당하는 선지자 요나가 이방인 불신자 선장에게 야단을 맞고 있습니다. “지금이 잘 때냐, 잠만 자지 말고 기도 좀 해라, 기도!!” 

우리가 현재 혹 본문의 요나와 같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너무 의심치 않고 확신하여 삶에 어려움이 찾아오고 힘든 일이 있어도 기도하지 않고 잠만 자고 있지는 않습니까? 

7-9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서로 이르되, 자 우리가 제비를 뽑아 이 재앙이 누구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임하였나 알아 보자 하고 곧 제비를 뽑으니 제비가 요나에게 뽑힌지라 무리가 그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이 재앙이 누구 때문에 우리에게 임하였는가 말하라 네 생업이 무엇이며 네가 어디서 왔으며 네 나라가 어디며 어느 민족에 속하였느냐 하니 그가 대답하되 나는 히브리 사람이요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로라 하고”

선장을 비롯한 사공들은 마침내 제비를 뽑아 이 재앙이 누구로 말미암은 것인지 알아보기로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때는 계절적으로 절대 폭풍이 일 때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제비를 뽑았을 때 아니나 다를까 요나가 딱 뽑혔습니다. 사공들은 요나를 심문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요나는 대답하였습니다. “나는 히브리 사람이요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라” 

요나의 대답이 아이러니합니다. 그는 자기를 소개할 때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라 하였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라는 것은 그가 하신 말씀을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현재 요나는 하나님이 가라고 하신 방향의 정 반대쪽을 향해 전속력으로 달아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사람이라고 자기를 소개합니다. 이 얼마나 아이러니합니까! 이 얼마나 웃픈(웃기면서도 슬픈) 상황입니까! 

요나의 대답을 들은 사공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바다의 파도는 점점 더 세졌습니다. 사공들은 요나에게 해결책을 물었습니다. 요나는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하였습니다. 그러면 잔잔해질 것이라 하였습니다. 그러나 사공들은 감히 요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는 요나가 하나님의 사람인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님이 정말로 바다와 땅을 지으신 하나님, 하늘의 하나님이신 것을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이 하나님을 모시는 종을 감히 바다에 던졌다가 장차 무슨 화를 당할지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사공들은 어찌하든 배를 다시 육지에 대려고 젖먹던 힘까지 짜내 노를 저었습니다. 그러나 점점 더 강해지는 바람과 파도 앞에 배가 거의 깨질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그들은 이 선지자를 죽인 피를 자기들에게 돌리지 말 것을 구하는 기도를 드리고 요나를 들어 바다에 던졌습니다. 

요나가 바다에 첨벙 하고 들어가자 곧 바람과 파도가 그쳤습니다. 사공들은 여호와를 크게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제물을 드리고 서원을 하였습니다. 

1장에 나타나는 사공들의 신앙은 요나서를 읽는 유대인 독자들에게 분명한 메시지를 던져주고 있습니다. 파도를 일으키시고 잔잔케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한 이방인들이 이렇게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여호와께 제물을 드리고 서원을 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에 비해 출애굽의 그 위대한 기적, 그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한 이스라엘은 어떠합니까. 40년간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주는 기적을 체험했던 이스라엘은 어떠합니까. 

저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본문을 통해 각자를 돌아보도록 돕습니다. 우리는 어떠합니까? 우리는 과거 그 무서운 죄, 마약 중독자가 마약에 중독된 것처럼 죄에 중독되어 있는 상태에서 우리를 죄로부터 건지시고 구원하신 하나님의 크신 능력을 체험했습니다. 내 기도를 섬세하게 들으시고 나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크신 능력을 체험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떠합니까? 본문의 이방인 사공들처럼 여호와께 감사의 제물을 드리며 하나님께 나의 신앙적 결단을 말씀드리고 지키는 서원을 하고 있습니까? 요나서 말씀을 통해 우리 각자의 영적 상황과 신앙을 깊이 돌아볼 수 있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17절은 바다에 빠진 요나에게 일어난 사건을 한 줄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바다에 빠진 요나를 위해 이미 큰 물고기를 예비하셨습니다. ‘예비’라는 단어는 요나서에 4번 나옵니다. 4장에서 하나님은 요나를 위해 박넝쿨을 예비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비록 불순종하며 막나가는 요나이지만 그를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예비하셨습니다. 

2장은 물고기 뱃속에서 요나가 드린 기도입니다. 

2:1,2절을 보십시오.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내가 받는 고난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더니 주께서 내 음성을 들으셨나이다” 

1장에서 요나가 뱃사공들에게 자기를 바다에 던지라고 한 것은 아마도 요나가 불순종한 선지자가 죽음으로 하나님의 징계를 받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겼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막상 바다에 던져지자 요나는 살고 싶었습니다. 비록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고 심지어 정면으로 대적하여 가라고 하신 정반대 쪽으로 간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었다 할지라도 하나님께 이번 한 번만 자기를 용서해 주시고 살려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스올은 죽은 자가 가는 어둠의 세계입니다. 당시 고대인들은 죽으면 삼일 길을 여행하여 죽은 자의 세계, 곧 사자의 세계에 이른다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요나는 이제 죽어 죽은 자의 세계로 가는 삼일의 여행을 시작하기 직전이었습니다. 

3-7절을 보십시오. “주께서 나를 깊음 속 바다 가운데에 던지셨으므로 큰 물이 나를 둘렀고 주의 파도와 큰 물결이 다 내 위에 넘쳤나이다 내가 말하기를 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지라도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 하였나이다 물이 나를 영혼까지 둘렀사오며 깊음이 나를 에워싸고 바다 풀이 내 머리를 감쌌나이다 내가 산의 뿌리까지 내려갔사오며 땅이 그 빗장으로 나를 오래도록 막았사오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내 생명을 구덩이에서 건지셨나이다 내 영혼이 내 속에서 피곤할 때에 내가 여호와를 생각하였더니 내 기도가 주께 이르렀사오며 주의 성전에 미쳤나이다” 

이 말씀은 요나가 죽음의 문턱에 이르러 얼마나 간절히 하나님께 부르짖었는지 잘 보여줍니다. 깊은 바다에 빠진 요나의 몸 안으로 물이 밀려들었습니다. 요나는 물이 내 영혼까지 둘렀다고 하였습니다. 바다의 풀이 그의 머리를 감쌌고 산의 뿌리, 곧 바다의 밑바닥까지 이르렀습니다. 이제 잠시 후면 요나의 숨은 끊어지고 그의 몸은 바다 깊은 곳에 수장되게 됩니다. 

이 절대절명의 순간 요나는 하늘의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의 불순종의 죄를 회개하고, 어려움 가운데서도 기도하지 않았던 죄를 회개하고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고 기도하였습니다. 

요나가 이 기도를 마치자 마자 하나님이 예비하신 큰 물고기가 요나를 삼켰습니다. 물고기의 뱃 속은 마치 아늑한 방과 같았습니다. 아마도 하나님은 스스로 빛을 내는 물고기 몇 마리를 그 뱃속으로 넣으셔서 방이 촛불을 켜놓은 상태였을 것이라고 상상해 봅니다. 요나는 이곳에서 쉼을 누렸습니다. 그리고 그동안 중단했던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온전히 회복했습니다. 삼일 간 영적 회복의 시간을 가진 뒤 물고기는 요나를 육지에 토해내었습니다. 

물고기 뱃속에 거하던 삼일 간 요나는 다시 태어난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새로워지니 하늘과 땅도 새로워보였습니다. 스올에서 돌아와 다시 맡게 된 풀내음, 신선한 공기는 그의 영혼까지도 상쾌하게 하였습니다. 

요나서의 1차 독자는 믿은 지 오래 된 유대인들입니다. 이 말씀은 믿은 지 오래 된 우리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생각과 편협함으로 마음이 굳어져 요나처럼 된 우리가 하나님과 관계를 새롭게 하기를 원하십니다. 요나서 말씀을 공부하는 2주간 우리 모두가 하나님과의 관계성이 새롭게 되고 멈추었던 기도의 숨결이 되살아나며 우리의 영혼이 회복되는 귀한 은혜가 있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각자의 자리에서 일어나 품고 이해하기 힘든 젊은 영혼들을 품고 이해하며 이들에게 크고 넓으신 하나님의 사랑을 외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