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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022년 누가복음 27강 `잃은 아들을 찾은 아버지의 기쁨 `(누가복음 15:1-32)2022-09-19 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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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누가복음 제 27

 

잃은 아들을 찾은 아버지의 기쁨

 

말씀 / 누가복음 15:1-32

요절 / 누가복음 15:24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오늘 말씀 바로 앞의 본문 14장에서 예수님은 제자도에 대해 가르치시고는 마지막 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누가 들을 귀가 있는 자일까요? 누가 이 말씀에 응답하여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나아옵니까? 15 1절을 보니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가까이 나아옵니다. 그들이 들을 귀가 있는 자들, 곧 주님의 말씀을 겸손히 듣고자 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을 기뻐하사 가르치시며 같이 음식도 드십니다. 예수님은 잃어버렸던 그들을 찾은 기쁨이 넘치십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이러한 예수님을 원망하고 비판합니다. 한 마디로 그들은 예수님의 기쁨을 전혀 이해하지 못합니다. 이 정황이 오늘의 비유가 주어진 배경입니다. 곧 종교지도자들에게 이 비유가 주어진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종교지도자들과 같은 마음이 있습니다. 우리가 오늘 말씀을 통해 잃은 자를 찾을 때 크게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배우길 기도합니다.

 

첫째, 잃은 양 비유 (4-7)

100 마리의 양을 치는 한 목자가 있었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양은 스스로 길을 찾지 못하고 자기 방어도 하지 못하는 연약한 짐승입니다. 그래서 목자의 도움이 꼭 필요합니다. 목자도 이를 잘 알고 양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애를 많이 씁니다. 그런데 어느 날 목자가 양들을 세어보니 한 마리가 없었습니다. 본문 4절에서 "잃으면"(아플뤼미)은 양이 연약하고 미련하여 목자를 잘 따라가지 못하고 길을 잃은 것임을 나타냅니다. 목자는 그 양이 어떤 양인지 잘 알았을 것입니다. 목자는 즉시 다른 양들을 흩어지지 않도록 들에 잘 모아놓고 그 잃어버린 양 하나를 찾아 나섰습니다. 들과 바위 사이를 샅샅이 찾았습니다. 그러나 아무데서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이제 다른 양들도 염려가 되고 돌아가야 될 것 같았습니다. 목자는 "에이, 그 미련한 녀석, 네가 잘못해서 그렇게 되었으니 고생이나 잔뜩 해봐라. 그 까짓 것 한 마리 없어도 99마리가 있으니 상관없어!" 하지 않았습니다. 그 양이 밤새 당할 두려움과 고통을 생각할 때 도저히 그냥 돌아갈 수 없었습니다. 그는 필사적으로 찾았습니다. 그때 절벽 근처에서 "매앰~" 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절벽에서 미끄러져 나무 가지에 겨우 매달려 있는 것이었습니다. 목자는 조심스럽게 내려가서 그 발을 잡아 끌어올렸습니다. 목자는 너무나 기뻤습니다. 피곤하여 잘 걷지 못하는 양을 어깨에 메었습니다. 조금도 무겁게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덩실 덩실 춤을 추며 돌아왔습니다. 집에 와서는 무엇을 하였습니까? 그는 벗과 이웃을 불러 모어 파티를 하였습니다.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아내었노라!" 그가 파티에 쓴 비용은 양 한 마리 값보다 더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기뻐했습니다. 이는 그 양을 찾은 것이 경제적인 목적이 아니라 그 양과의 애정의 관계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의 아이들은 애완동물을 갖고 싶어 했지만 저의 집이 좁아서 키울 형편이 못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애완동물에 대한 애정이나 그것을 잃어버렸을 때의 마음을 잘 알지는 못합니다. 그런데 비슷한 감정을 경험한 적이 있었습니다. 제가 선교사로 활동하다가 한국에 귀국했을 때 소나타2 중고차를 하나 구입했습니다. 그 차는 제가 가는 곳에 언제든지 같이 갔고 때로는 그 차 안에서 말씀연구도 하고 낮잠을 자기도 했습니다. 저의 몸의 일부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러다가 10년쯤 지나 폐차를 하게 되었습니다. 폐차하기 위해 차를 가져온 사람이 그 차를 타고 가는 순간 저는 마음에 상실감과 슬픔을 느꼈습니다. 기계 덩어리인 차에도 그런 마음을 갖는 것이 신기했습니다. 애완견을 키워온 분들의 그 동물에 대한 애정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말씀 공부를 할 때 여러 목자님들이 애완동물을 잃었을 때의 슬픔을 말씀하시는 것을 통해 본문의 목자의 그 양에 대한 애정과 사랑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 목자는 잃은 양을 찾은 기쁨으로 크게 즐거워하며 파티를 열었던 것입니다.

 

둘째, 잃은 드라크마의 비유 (8-10)

8절입니다. "어느 여자가 열 드라크마가 있는데 하나를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아내기까지 부지런히 찾지 아니하겠느냐." 한 드라크마(Drachma)는 한 데나리온(Denarius)과 동일한 가치로서 노동자 하루 품삯에 해당되는 금액입니다. 오늘날 금액으로 한 10~20만 원쯤 되겠죠? 그 자체로도 큰 금액이지만 당시 유대 여인에게 있어서 은화 열 닢을 줄에 꿴 그것은 결혼예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중에 하나라도 빠지면 장신구 역할을 다할 수 없기 때문에 여인은 부지런히 그것을 찾았던 것입니다. 당시 서민들의 집은 방바닥이 진흙으로 되어 있어서 그 위에 짚을 깔아 놓았습니다. 집도 창문이 없는 경우가 많았기에 한 드라크마를 잃은 여인은 등불을 켜고 쓸며 찾아내야 되었습니다. 여인은 구석구석까지 빗자루로 쓸었습니다. 그러다가 드디어 그 잃은 것이 빗자루에 쓸려 나왔습니다. 여인이 한 드라크마를 다시 찾았을 때 그 기쁨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었습니다. 그녀는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파티를 합니다. "나와 함께 즐기자 잃은 드라크마를 찾아내었노라" 역시 그 파티 비용은 한 드라크마보다 더 큰 금액일 것입니다.

 

양은 생명이 있어 어떻게 하다보면 목자에게로 돌아올 가능성도 있지만 잃어버린 동전은 생명이 없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잃어버린바 된 인간은 동전처럼 스스로 전혀 구원할 수 없는 것을 말해줍니다. 구원에 관한한 인간은 철저히 무력하며 찾아냄을 받아야만 합니다. 우리는 과거에 잃어진 존재였습니다. 어두움에 있었습니다. 인생의 힘든 문제 앞에 혼자였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찾아주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끝까지 혼자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우리를 찾을 때 까지 찾으셨습니다. 짚으로 덮인 바닥을 빗자루로 쓸고 허리를 굽히고 손을 넣어 더듬어 보시며 찾으셨습니다. 주님의 이마와 얼굴은 온통 먼지와 땀으로 뒤범벅되셨습니다. 그렇게 찾으시다가 우리를 결국 찾으신 것입니다. 잃어버린 어린 아이를 마침내 찾아내어 아이를 부둥켜안고 웃는 것인지 우는 것인지 모르는 엄마의 얼굴을 상상해 보십시오. 눈물범벅이면서도 기쁨에 웃는 그 엄마의 얼굴을! 그것이 주님의 얼굴이요 주님의 마음입니다. 또한 이 비유를 통해 우리가 거친 빗자루의 의해 쓸림을 받을 때가 바로 주님이 우리를 찾으시는 순간임을 알게 됩니다. 빗자루에 쓸릴 때 아프고 쓰라립니다. 괴롭습니다. 그런데 그 빗자루의 거친 쓸림이 바로 주님이 나를 찾으시는 손길입니다. 나에게 쓸림이 있을 때 그것이 주님의 쓰시는 손임을 알고 주님께 나아가야겠습니다.

 

예수님은 이상의 두 비유를 주신 이유를 7,10절에서 반복하여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7) 여기서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은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는 종교지도자들을 의미합니다. 주님은 의인 아홉아홉도 기뻐하십니다. 그들도 주님의 양들이므로 사랑하십니다. 다만 죄인이 회개할 때 그 회개한 죄인을 더욱 사랑하십니다. 이는 그가 죄 가운데 너무 고생하다 돌아왔기 때문입니다. 고생한 그에 대한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강렬하여 더욱 사랑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도 양을 찾기 위해 열심을 내었습니다. 그들은 개종자 하나를 얻기 위해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녔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열심은 잃은 자를 찾아 구원하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자기들의 종파를 신봉할 지지자를 얻기 위함이었습니다. 사람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자기들의 교세 확장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결국 그러한 동기로 돕다보니 그들이 얻은 교인을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였습니다. (23:25) 똑같은 열심을 내어도 그 동기와 목적이 무엇이냐가 중요합니다. 자기 이름을 위한 전도, 자기 그룹만을 위한 역사를 하나님은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양들의 생명을 구하고자 하는 순수한 동기를 기뻐하십니다. 잃은 양을 찾을 때 목자도 기쁘지만 하나님이 더욱 기뻐하십니다. 스바냐는 성도들을 향한 하나님의 지극하신 사랑을 이렇게 노래합니다.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3:17)

 

셋째, 탕자들의 비유 (11-32)

11절부터는 유명한 탕자의 비유입니다. 누가복음에만 기록된 이 비유는 '탕자의 비유'로 잘 알려져 있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보면 여기 등장하는 두 아들 모두가 탕자들입니다. 호색과 방탕으로 소유를 탕진하고서 돌아온 둘째 아들이 탕자임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큰 아들 또한 아버지를 모르고 있다는 점에서 잃어버린 자요 탕자입니다. 그래서 이 비유는 '탕자의 비유'라기 보다 '탕자들의 비유'라는 제목이 적절합니다.

 

비유에서 아버지는 아름다운 포도원과 충성된 품꾼들을 가진 부자였습니다. 그는 두 아들을 깊이 사랑하였습니다. 자기의 가업을 이을 자들로 키웠고 신앙교육도 열심히 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영육간의 훈련에 큰아들은 잘 순종하였지만 둘째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둘째는 아버지의 훈육이 자기의 자유를 빼앗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는 세상에 나가 많은 것을 경험해 보고 싶었습니다. 새로운 세계에서 인생을 즐기고 싶었습니다. 마침내 작은 아들은 아버지 집을 떠나기로 결심하고 아버지를 찾아가 말했습니다.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12) 물론 둘째 아들의 이런 요구는 무례한 것이었습니다. 아버지가 아직 멀쩡히 살아 있는데 유산을 달라고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들이 이미 집을 나가기로 결심을 굳힌 것을 알았습니다. 그 아들을 인격적인 사랑으로 대했습니다. 아버지에게는 아들이 중요했지 재산이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 재산을 다 탕진하더라도 아들이 조금이라도 아버지의 사랑을 의심하지 않기 원했습니다. 요구하는 대로 재산을 나누어주었습니다.

 

13a절입니다. "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그는 유산으로 받은 재산을 다 현금화하였습니다. 그 돈을 가지고 먼 나라로 갔습니다. (14b) 그는 자유를 얻어서 떠나는 기분이었을 것입니다. 탈옥한 몽테크리스토 백작이나 빠삐용같은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자유다!" 그는 세상이 온통 자기 것인 양 느꼈습니다. 그는 이제 꿈꾸어왔던 일들을 시도하였습니다. 모든 것이 희망차고 자신감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가 자유라고 생각했던 것은 곧 방종으로 변해갔습니다. 술에 취하고 창기와 놀아났습니다. 결국 얼마 못가 재산을 다 허비하였습니다. "먼 나라에 가 거기에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허비하더니." (13b)

 

그는 모든 재산을 허비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기근까지 겹쳤습니다. 돈이 떨어지자 친구들도 다 떨어져 나갔습니다. 할 수 없이 어떤 사람에게 붙여 살며 돼지를 치게 되었습니다. 돼지는 유대인들이 가장 부정하게 여기는 짐승입니다. (11:7; 14:8) 그는 급료도 제대로 못 받는 착취를 당했습니다. 노예 같이 일을 해야 되었습니다. 너무 배가 고파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였지만 그것도 주는 자가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극히 냉정하여 그 누구에게도 동정을 베풀지 않았습니다. 그런 세상에 사는 것 자체가 지옥과도 같은 것입니다. 그는 그런 곳에서 돼지보다 못한 비참한 상태가 되었습니다. 굶어 죽게 되었습니다.

 

둘째 아들의 이런 모습은 하나님을 떠난 인생의 모습을 잘 보여줍니다. 인간은 본래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고귀한 존재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그 고귀함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사람은 자유를 누린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는 냉혹한 세상에 살면서 하루하루의 생존에 매달립니다. 인생의 방향을 잃고 의미 없는 삶 가운데 욕망대로 살다가 몸과 마음이 더러워집니다. 그러한 사람들이 모인 세상은 온갖 불의, 추악, 탐욕이 만연한 황폐한 사회가 되어버립니다. 이 모든 근본 원인은 인간이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과거를 돌아보면 거의 다 비슷하지 않습니까? 삶의 의미와 목적을 모른 채, 알 수 없는 두려움과 염려에 시달린 삶. 육체의 욕망에 종노릇하던 삶. 입에서는 욕되고 악한 말을 내 뱉던 삶, 참 기쁨을 모르던 삶을 살지 않았습니까? 과거를 기억합시다. 그리고 오늘날의 나의 삶을 사는 것은 온전히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고 감사합시다.

 

17-19절을 보면 둘 때 아들은 고통 가운데 제 정신이 들었습니다.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17) 이 얼마나 기막힌 탄식입니까! 그는 주려 죽게 되자 무엇이 가장 먼저 생각났습니까? 아버지집입니다. 그 중에서도 누구를 생각했습니까? 아버지 집의 품꾼들입니다. 자기가 품꾼이기에 품꾼들이 제일 먼저 생각이 난 것입니다. 자기는 인권은 커녕 돼지 취급도 못 받는 노예살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아버지집의 품꾼은 인격적인 대우를 받았습니다. 풍족하게 지냈습니다. 품꾼들조차 인격적으로 대우하시는 아버지가 아들인 자기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비로소 깨닫게 되었습니다. 아버지의 사랑은 그로 하여금 집으로 돌아오도록 하는 소원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그는 이같이 하고자 합니다.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18,19) 그는 마음의 결심을 행동으로 옮깁니다. 20a절입니다.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그는 처절한 실패 앞에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돼지우리에서 일어났습니다. 그가 일어난 것은 자기 힘으로서가 아니었습니다. 아버지에게서 오는 사랑의 힘이었습니다. 냄새나는 옷을 갈아입거나 더러운 몸을 씻지도 않았습니다. 그게 자기였습니다. 아버지의 사랑 앞에 꾸밀 이유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대로 아버지의 집으로 나아갔습니다.

 

아버지는 그를 어떻게 맞이합니까? 20b절입니다.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먼저 그를 알아보았습니다. 그런데 이 순간에 그 아들이 회개하고 돌아오는 것임을 알 수는 없었습니다. 객관적으로 생각해보면 재산 다 탕진하고 그냥 돌아오는 것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종들에게 ", 없다고 해라!" 하고 숨지 않았습니다.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아들을 먼저 알아보았습니다. 이는 아버지가 매일같이 아들이 돌아올 것을 기대하며 먼 곳을 살펴보았다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향해 달려갑니다. 동양 문화에서는 아버지는 달리지 않습니다. 엄마나 아이들은 달리지만 어른은 결코 달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아버지는 자신의 품위가 떨어지는 것을 개의치 않았습니다. 신발도 신지 않고 그 아들을 향해 달려갔습니다. 왜 그렇게 한 것일까요? 그 아들을 측은히 여겼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측은히 여기다'의 뜻은 우리가 잘 아는 '스플랑크니조마이'입니다. 창자가 끊어지는 것 같이 불쌍히 여긴 것입니다. 아들을 측은히 여긴 아버지는 그에게 달려가 그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여기서 '입 맞추니'(카테필레센)은 많은 입맞춤을 뜻하는 말로 거듭 입맞춤하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기쁨을 그대로 드러내는 표시입니다. 돌아온 아들에 대한 끝없는 사랑의 표시입니다.

 

그런데 잠깐, 이 순간까지 둘째 아들은 아버지에게 아직 한 마디도 하지 않은 상태입니다. 아버지에게 미안하다든가 회개한다든가 하는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 순간에 "아버지, 사업 자금을 다시 한 번 대 주세요. 다음에는 꼭 성공하겠습니다"라고 말할 수도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춘 것은 아들의 사과나 회개와 관련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야말로 아버지의 아들에 대한 사랑은 조건이 없는 사랑입니다. 아들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입니다. 아들이 어떤 말을 하든 무슨 요구를 하든 무조건적으로 사랑하는 사랑입니다. 사람들은 보통 "네가 회개하지 않으면 용서하지 않겠다." "네가 먼저 사과하지 않으면 내가 결코 먼저 사과하지 않겠다"합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사랑은 그냥 아들을 사랑하는 사랑입니다. 뜨거운 사랑입니다. 그 사랑에 자신이 삼켜져 버리는 사랑입니다.

 

21절입니다. "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하나." 아들은 원래 이 말에서 더 나아가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라고 말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의 말을 끊으셨습니다. "아들아 이제 되었다, 그런 말 할 필요없다"하신 것입니다. 실제로 아버지에게는 아들이 아무런 말을 할 필요도 없었던 것입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기쁨을 통해 자기를 영접하시는 것을 감지했습니다. 그러나 감히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를 면목이 없어 그저 눈물만 흘리고 있었을 것입니다.

 

22,23절입니다.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아버지는 돌아온 아들에게 제일 좋은 옷을 입힙니다. 제일 좋은 옷이란 그 집에 있는 첫 번째의 옷입니다. 당시에는 훈장이 없던 시기였으므로 왕이 공로가 많은 신하를 포상할 때 귀중한 옷을 하사했습니다. 따라서 가장 좋은 옷을 입혔다고 하는 것은 그를 마치 장원급제하고 돌아온 아들로 여겼다는 것입니다. 가락지는 인장 반지입니다. 아버지의 인감도장을 준 것으로서 모든 권한을 아들에게 위임한 것입니다. 신을 신긴 것은 그를 자유인으로 회복시킨 것을 의미합니다. 이 세 가지(, 가락지, )는 모두 아들을 존귀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살진 송아지를 잡으라 합니다. 여기서 송아지라는 단어 앞에 관사가 붙어있는데 그 송아지는 바로 아버지가 이때를 위해 준비해 둔 송아지임을 말해줍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돌아올 것을 믿고 기도했고 축제를 미리 준비했던 것입니다. 아버지가 말합니다.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24) 아들 편에서 볼 때 그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습니다. 아버지 편에서 볼 때 그는 잃었다가 다시 얻은 것입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다시 얻었습니다. 자기 목숨보다도 더 귀중히 여긴 그 아들을 다시 얻었습니다. 아버지는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였습니다.

 

그러나 큰아들은 어떠하였습니까? 25절입니다.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이 왔을 때에 풍악과 춤추는 소리를 듣고 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물은 대." "풍류와 춤추는 소리"라는 말을 볼 때 둘째 아들의 귀환을 축하하는 잔치의 규모가 대단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야말로 풍악을 울리고 대대적인 춤판이 벌어진 것이었습니다. 큰 아들은 한 종으로부터 자초지종을 듣고 분노하였습니다. (28a) 아버지가 나와서 권하지만 그는 아버지께 말합니다.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29,30) 그는 아버지를 여러 해 동안 섬겼다고 합니다. 여기서 섬겼다는 표현 '둘류오'는 종으로서 일했다는 것입니다. NIV 성경에는 slaving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종살이를 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아버지를 섬기면서도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 없었습니다. 아버지가 자기를 노예처럼 부린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아버지를 섬기면서 기쁨이 없었습니다.

 

그는 불쌍한 처지에 놓인 아우에 대해 이해관계로만 반응하였습니다. 그의 마음은 차가웠습니다. 자기가 아버지의 전 재산의 2/3 에 해당하는 몫을 이미 받았음에도 염소나 송아지(30) 한 마리로 불평하였습니다. 그는 동생을 '이 아들' "this thy son" (KJV) "당신의 아들"로 불렀습니다. 돌아온 아들을 '동생'이라고 부르는 것을 거절한 것입니다. 그러나 32절에서 아버지는 이러한 맏아들의 표현을 시정하여 '네 동생'이라고 합니다. 큰 아들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아버지와의 관계가 잘못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아버지의 마음을 몰랐습니다. 그는 동생을 떠나보내고 슬퍼하는 아버지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동생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는 무정한 사람이었습니다. 몸으로는 아버지를 섬겼지만 마음은 아버지를 떠난 집안에 있는 탕자였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바로 이 큰아들과 같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기 위해 피나는 투쟁을 하였으므로 겉으로는 하나님을 잘 섬기는 의로운 사람들 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노예 생활을 한다고 하나님께 대한 불평불만으로 가득하였고,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을 정죄하였습니다.

 

31,32절입니다.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아버지는 돌아온 둘째로 인해 함께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합니다. 이는 '잔치를 베풀 수밖에 없었다'고 하는 아버지의 변명의 말이 아닙니다. 큰 아들도 반드시 환호하고 기뻐해야 하는 것이 아니냐하는 책망의 말씀입니다. 아버지는 맏아들로 하여금 돌아온 동생을 뜨거운 가슴으로 맞아들이도록 요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서두에서 말씀드렸듯이 이 비유는 근본적으로 종교지도자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그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엄청난 축복과 영적인 특권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저 눈앞의 현세적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배타적인 독선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감격을 잃어버린 자들입니다. 이런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아버지의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

 

앞에서 이 비유는 탕자의 비유가 아니라 탕자들의 비유가 적절한 제목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탕자가 몇 명이죠? 두 명? 실제로는 세 명입니다. 또 하나가 누구냐고요? 아버지로 표현된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탕자라고요? 예 그렇습니다. 누가복음 15장에 "탕자"라는 단어는 없습니다. 사람들이 소제목을 그렇게 정한 것이죠. 탕자를 영어표현으로는 "The Prodigal Son"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Prodigal"이란 "낭비하는" "아낌없이 쓰는"이라는 뜻입니다. 쉽게 말하면 "못 쓰게 될 정도로 빠져버린", "눈이 먼"이라는 뜻입니다. 둘째 아들은 쾌락에 빠져 못쓰게 되었습니다. 큰 아들은 자기의에 빠져 못쓰게 된 자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에 빠져 눈이 머셨습니다. 그래서 미국의 Tim Keller 는 이 본문으로 "The Prodigal God" 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에 눈이 머셨습니다. 사랑은 죽음보다 강합니다. 죽음보다 강한 사랑에 눈멀지 않고는 자기 아들을 원수들을 위해 내어 줄 수는 없는 법입니다. 청춘 남녀는 사랑으로 일시적으로 눈이 멀지만 우리의 아버지 하나님은 우리에 대한 사랑으로 영원히 눈이 먼 분이십니다. 사랑에 눈 먼 하나님은 죄 가운데서 돌아온 우리를 인하여 눈물범벅이면서도 기쁨에 웃으십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가 알고 그 사랑을 소유한 사람이 되길 기도합니다. 아름답고 고귀하고 영광스런 우리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을 찬양합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은 종교지도자들과 같이 딱딱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우리가 회개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품기 원하십니다. 우리가 날마다 하나님의 사랑의 마음을 더 알아가고 이 사랑으로 잃어버린 양들을 섬기는 목자들이 되게 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