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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021년 요한복음 10강 `목마른 자에게 주시는 생수의 강 ⁠`(요한복음 7:1-52)2021-05-17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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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요한복음 10

    

목마른 자에게 주시는 생수의 강

    

말씀 / 요한복음 7:1-52

요절 / 요한복음 7:37,38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오늘 말씀은 우리 인간의 근원적 목마름과, 그 목마름이 채워지는 비결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시간 생수의 강물이 흘러나오는 삶의 비결을 잘 배우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예수님이 38년 된 병자를 살리자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어긴 것으로 예수님을 죽이려 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들을 피해 갈릴리에서 사역하셨습니다.

 

그런데 다시 유대인의 큰 명절인 초막절이 가까웠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의 형제들이 예수님께 말했습니다. “당신이 행하시는 일을 제자들도 보게 여기를 떠나 유대로 가소서 스스로 나타나기를 구하면서 묻혀서 일하는 사람이 없나니 이 일을 행하려 하거든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소서”(3) 형제들은 인간적으로 집안의 장남인 예수님이 인기 있는 사람이 된 것을 기뻐하며 자부심을 느낀 것 같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전 이스라엘에서 인정받는 분이 되기 위해 시골구석에 있지 말고 예루살렘에 가서 전국구 인기를 얻기를 바랬습니다. 특히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유대 3대 명절은 자기를 드러내기에 아주 좋은 기회인데 이 기회를 놓치지 않도록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동생들 입장에서 큰 형님이 잘 되면 자신들도 덕을 볼 수 있기 때문에 예수님을 충동하는 발언을 한 것입니다.

 

저자 요한은 동생들의 말에 이렇게 코멘트 합니다. 이는 그 형제들까지도 예수를 믿지 아니함 이러라”(5) 우리가 볼 때 형제들이 예수님을 믿기에 그런 조언을 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사도요한은 그들이 예수님을 정확히 모르는 것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예수님이 왜, 세상에 오셨는 지를 모르면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제대로 알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그 형제들에게 자신의 삶의 원칙을 천명하십니다.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거니와 너희 때는 늘 준비되어 있느니라”(6) 예수님은 내 때 곧 ‘My time’ 이라고 하는 그리스도의 시간에 따라 움직이십니다. 예수님의 때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때를 말합니다. 예수님은 철저히 하나님의 타임 스케줄에 따라 움직입니다. 이런 면에서 예수님은 자유가 없고 얽매인 삶을 사셨습니다. 반면에 그 형제들은 자기 맘대로 움직입니다. 가고 싶으면 가고 머물고 싶으면 머뭅니다. 크리스천들도 두 종류가 있습니다. 먼저, 자기 맘대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는 자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크리스천들은 자기 맘대로 살지를 못합니다. 어디를 갈 때도 자유롭게 가지 못합니다. 예컨대 명절에 어디갈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냐 그렇지 않는 가를 항상 따집니다. 가더라도 출발시간을 따집니다. 어떻게 보면 참 답답한 삶을 사는 것같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인본주의적 크리스천들과 신본주의적 크리스천들의 삶의 차이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의 형제들 같은 사람들을 미워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세상에 맞춰주는 삶을 살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과 비슷한 패턴으로 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이나 예수님 같은 라이프 스타일로 사는 사람들을 미워합니다. 자신들과 같은 패턴으로 살지 않기 때문이요, 더 나아가 자신들의 삶이 잘못되었다고 지적을 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세속적 크리스천으로 살지 않을 때 이곳 저곳에서 미움을 받는 일들이 발생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은 형제들과 같이 움직이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형제들이 다 올라간 다음에 은밀히 명절 중간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습니다. 물리적 시간차이로는 3-4일 밖에 되지 않지만 중요한 것은 무슨 동기로 왜 움직이는 가가 하나님의 때에 따라 사느냐의 기준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오기 전부터 예수님을 찾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평판은 나뉘었습니다. 예수님이 명절 중간에 오셔서 사람들을 가르치는 일을 하실 때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놀랐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정식으로 교육을 받지 않았는데 권위 있고 논리적으로 잘 가르치셨기 때문입니다. 당시 교육제도는 4단계였는데, 초등과정은 모세오경을 읽고 암송하는 것, 중등과정은 율법해석서를 읽고, 고등과정은 율법을 스스로 깊이 해석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랍비학교가 있는데 율법을 가르치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과정을 거치지 않으셨는 데 어떻게 그렇게 유창하고 권위 있게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는 지, 예수님은 자신의 가르침이 인간적인 교육의 산물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신적인 것이기 때문이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사람이 진지하게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가르침이 정말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참된 진리의 교사를 어떻게 분별할 수 있을까요? 18절을 보십시오. 스스로 말하는 자는 자기 영광만 구하되 보내신 이의 영광을 구하는 자는 참되니 그 속에 불의가 없느니라 말하는 내용이 자기로부터가 아니라 철저히 하나님으로부터 와야 합니다. 자기로부터 출발된 가르침은 불순하고 부정확합니다. 스스로 말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보다 자기영광을 구합니다. 이렇게 자기 영광을 구하는 사람의 가르침은 불순하고 불의할 가능성이 많습니다.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이의 가르침이 참되고 옳으며 그런 사람들이 참된 진리의 교사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 하는데 그 이유가 예수님이 율법을 어겼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안식일에 병자를 고쳐 일하지 말라는 안식일 법을 어겼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안식일에 자신들도 일을 했습니다. 특히 할례를 시행했습니다. 할례는 피를 보기에 작은 일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일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할례가 갖는 중요한 의미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할례를 하지 않으면 인간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할례가 바로 언약백성의 표식이기때문이었습니다. 할례를 해야 사람이 온전하게 됩니다. 그래서 난지 8일 째가 안식일인 경우 안식일에도 할례를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보실 때 38년 된 병자가 나음받아 온전케 되는 것도 할례못지 않게 중요했습니다. 38년된 병자가 치료의 전신할례를 받지 않으면 그는 사람이 아닌 삶을 사는 것이요 인생을 출발도 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니 그가 치료를 받는 것은 할례처럼 꼭 필요한 것입니다. 그 이상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치 할례를 하듯 그를 안식일이라도 고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자신들이 율법적용을 의미중심으로 한 것처럼 예수님에게도 같은 원리로 적용해야 함을 가르치셨습니다.

 

이번 명절에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들이 예루살렘에서 설왕설래했습니다. 어떤 이들은 예수님은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그 근거로 말라기 3:1절을 들었습니다. 이 말씀에 의하면 그리스도가 신적 강림을 하는 것으로 되어 있는 데, 예수님은 그냥 마리아의 배를 통해서 태어났기에 그리스도가 아니라는 주장이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가 사실은 신비하게 성령으로 잉태된 것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정확히 모르면서 불신했습니다. 이런 불신의 말들에 대해서 예수님은 자신이 그리스도임을 외쳐 말씀하셨습니다. 외쳐 말씀하신 것은 확실하기 때문입니다. 외쳐서 말씀하신 내용은 자신이 스스로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내셔서 오셨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셔서 오셨다는 말은 한마디로 자신이 그리스도가 맞다는 말씀이었습니다.

 

한편, 예수님에 대해 우호적인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오실지라도 그 행하실 표적이 이 사람이 행한 것보다 많으랴”(31) 라고 말하며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이 말은 예수님을 볼 때 그리스도라는 증거가 차고 넘친다는 뜻이었습니다.

 

예수님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체포하여 오도록 아랫사람들을 보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에게 자신이 다시 보내신 이에게로 돌아가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죽음을 각오하셨기에 자신에 대한 설왕설래, 불신과 체포움직임에 대해 게의치 않으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여 예수님이 선교사로 나가겠다고 하신 것으로 오해했습니다.

 

유대 3대 명절인 초막절에 예루살렘은 많은 사람들로 가득했습니다. 이제 명절 끝날이 되었습니다. 이 때 예수님이 무슨 말씀을 하십니까? 37,38절을 보십시오.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나오리라 하시니. 명절 끝날이면 명절 피크로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모인 때였습니다. 또 이제 오늘 밤이면 행사는 끝나고 사람들은 흩어져 각기 삶의 처소로 돌아갈 것입니다. 행사가 끝나면 대개 허무하죠? 이러할 때 예수님은 일어서셔서 많은 사람들을 향해 외치셨습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이는 목마른 인생들에 대한 그리스도의 초청입니다. 초막절 행사 중 하나는 매일 제사장들이 실로암 못에 가서 금 주전자에 물을 길어 성전제단 옆 대야에 붓는 의식이었습니다. 특별히 마지막 날에는 제단 주위를 일곱 번 돈 후 물을 부었다고 합니다. 이것을 헌수식이라 하는 데 그 조상들이 광야를 지날 때 하나님께서 반석에서 샘물을 내어 백성들을 먹여주신 것을 기념하는 의식이었습니다.

 

광야 40년 간 하나님은 그 백성을 먹이시고 마시게 하셔서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셨습니다. 이것을 기념하는 것이 초막절 행사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스라엘은 광야 때처럼 목마르지 않습니다. 그들은 사막에 있지도 않고 그들곁에는 풍부한 실로암 연못이 있어 언제든지 목마르면 마음껏 마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왜 이렇게 목소리를 높혀 목마른 이들을 자신에게로 초청하였을까요? 이스라엘의 모든 환경이 출애급 때 비하면, 풍부하였기에 이는 육적 목마름에 관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육적 목마름이 아니면 무엇입니까? 영적 목마름입니다. 인간은 영적인 존재로 하나님만이 채울 수 있는 영혼이란 공간이 있습니다. 때문에 아무리 육적으로 잘 먹고 많은 것을 마셔도 영적으로는 목마를 수 있습니다. 영적인 목마름의 증상은 허무, 무의미, 무기력, 답답함, 불만족, 방향 없음 등입니다. 육신의 목마름으로 사람이 죽듯이 영적 목마름도 그럴 수 있습니다. 영적 목마름은 육적 목마름 못지 않게 심각하고 중요합니다. 때문에 예수님이 외쳐 말씀하신 것입니다. 반드시 알아야할 것을 알릴 때나 심각한 위험에 직면할 때 우리가 외치지 않습니까?

 

그러면 영혼의 목마름이 어떻게 해결됩니까? 예수님에게 와서 마시면 됩니다. 간단합니다. 예수님에게서 무엇을 마십니까? 영생수를 마시는 것이지요. 이미 요한복음 4장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4:14) 그러면 예수님에게 와서 마시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나를 믿는 자는..”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믿는 것이 자신에게 와서 마시는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예수님이 주시는 물을 마시는 것입니다. 사람이 예수님을 믿으면 신기하게 모든 영적 목마름이 사라집니다.

 

그 만족의 정도가 어떠합니까?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온다는 말씀이 잘 설명합니다. 여기서 배는 욕망과 만족의 처소입니다. 입에 비해 배는 존재의 깊은 곳을 뜻합니다.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온 다는 것은 기쁨과 만족과 생명력이 피상적이지 않다는 뜻입니다. 영혼 깊은 곳을 터치하고 채운다는 것입니다. 생수의 강이라고 한 것은 그 풍부함을 말하는 데, 이 생수의 강의 실체는 바로 성령과 성령의 역사입니다(39).

 

이 생수의 강에 대한 이야기는 사실 예수님이 갑자기 하신 것이 아니라 구약 성경에 이미 말씀되어 있습니다. 구약성경 에스겔 47장과 스가랴 14:8절에 나옵니다. 에스겔 47장을 보면 완전한 성전인 에스겔 성전이 나오는데요. 그 성전에서 물이 흘러나옵니다. 이 완전한 성전은 바로 예수님을 뜻합니다. 예수님에게서 생수가 흘러나옵니다. 그래가지고 1,000척 단위로 그 물의 깊이가 깊어집니다. 처음에는 발목수준의 물이 흐르다가 나중에는 무릎, 그리고 허리 깊이로 흐릅니다. 나중에는 헤엄쳐야 건널 수 있는 강이 됩니다(47:5). 이 강 좌우편에 나무가 심히 많습니다. 이 나무에는 각종 열매가 끊이지 않고 매달 열립니다. 그 물이 얼마나 좋은 지 나뭇 잎은 모두 약재료가 될 정도입니다. 그리고 그 물은 생명력이 충만하여 수많은 물고기가 뛰어 놀고 이 물고기 덕에 물고기 잡는 것을 업으로 하는 이들 곧 어부들까지 출현합니다. 또한 이 물은 아라바 바다로 가서 그 죽은 바다를 살리기 까지 합니다.

 

이 생수의 강에 대해 스가랴 14:8절에는 예루살렘에서 솟아난 생수가 동서로 흘러나갈 것을 예언했습니다.

 

이상의 생수의 강에 대한 예언의 말씀은 예수님이 오셔서 우리 인생들에게 성령의 생수를 부어주실 것을 예언한 것입니다. 그 생수는 단지 한 두 사람이 먹고 만족하는 정도가 아닙니다. 세계만민을 먹입니다. 출애굽 당시 광야에서 생수가 나온 사건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물이 없다고 불평하고 원망하는 백성들을 위해 모세에게 반석을 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세가 물이 나올 것 같지 않는 반석을 쳤을 때, 거기서 200만 명이 먹고도 남는 생수의 강이 흘러 나왔습니다. 이 반석과 생수의 강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을 예표하는 것입니다.

 

37,38절의 말씀 형태는 초청과 약속으로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에게 와서 마시는 사람들을 절대 실망하지 않게 엄청난 풍성함으로 채워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모든 풍성한 삶의 조건은 단 하나,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을 때 그 사람 속에 성령이 내주하시며, 생명과 만족과 기쁨과 영향력이 충만한 삶을 살게 됩니다.

 

본문을 볼 때 사람은 크게 두 종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자신의 내부에서 생수가 흘러나오는 사람, 내부에 아무것도 없어 외부의 눈치를 보고 외부의 상황에 좌우되는 사람입니다. 어떤 분이 낙타형 인간과 사슴형 인간이라고 분류했습니다. 낙타형 인간은 내부에 물 저장소를 가지고 있어 사막을 횡단해도 끄덕 없습니다. 그러나 사슴형 인간은 내부에 물 저장소가 따로 없습니다. 그래서 항상 목마른 사슴처럼 뭔가를 찾으러 외부로 열심히 싸돌아 다닙니다. 이런 분들은 삶의 행복이 외부의 영향을 많이 받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크리스천들은 낙타와 같이 내부에 생수 저장소가 있기에 외부상황이 어떻든 항상 만족와 생명과 여유를 가지고 삽니다.

 

또한 내부에 물 저장소가 있는 낙타형 인간도 두 종류입니다. 한 부류는 겨우 광야 같은 세상에서 자신을 유지하는 정도로 사는 부류입니다. 다른 부류는 영향력이 풍부한 삶을 사는 부류입니다. 강물은 한 사람을 위해 있진 않지 않습니다. 한강물은 1,000만 명이 먹어도 부족함이 없습니다. 강물이 있는 곳에 도시가 형성됩니다. 4대 문명이 강 주위로 형성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정서가 메말랐을 때 강을 찾습니다. 이처럼 성령 충만한 사람들은 선한 영향력을 미치는 삶을 삽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로 인해서 힘을 얻는 삶을 삽니다.

 

2021UBF 60주년 세계선교보고대회가 얼마남지 않았습니다. 우리 모임은 그 배에서 생수가 흘러나오신 이 사무엘, 마더배리 선교사님들을 통해 한국의 대학생들이 만족을 얻고, 더 나아가 세계 92개국 336개 지부의 대학생들이 만족을 얻는 생수의 강의 역사였습니다. 우리가 이번 대회를 통해 진실로 예수님을 믿은 한 두 사람을 통해 일어난 성령의 역사가 어느정도인지 배우고 우리도 성령충만한 삶을 사모하는 자리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는 조건이 무엇이라고 하였지요? 첫째,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진실로, 어린아이처럼 곧이곧대로 믿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곧이곧대로 믿지 못하고 빌립처럼 현실만 계산하고 예수님을 투명인간 취급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예수님을 실체가 아닌 유령정도로 생각합니다. 그러면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지 않습니다. 나오던 생수마저 끊깁니다. 생수가 내 안에 있긴 있는데 동파방지 때처럼 몇 방울 떨어지는 수준이 됩니다. 우리에게 실질적인 믿음이 회복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래서 생수의 강이 다시 흐르는 사람들이 다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둘째로, 자기를 비워야 합니다. 배에서 흘러나오는 생수가 성령을 뜻한다고 볼 때 우리 안에는 성령이 내주하고 계십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서 왕노릇을 하셔야 그것이 성령충만한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 충만을 막는 가장 큰 장애물은 자기가 왕 노릇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왕노릇하는 사람은 자기영광 구하는 것이 인생목적입니다. 예수님의 형제들이 말한 것을 보면 그들은 예수님보고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라고 말했습니다. 자기가 왕노릇하는 사람은 자기를 나타내느냐 그렇지 못하느냐가 최대고민거리이고 그 때문에 생수가 막힙니다. 그 사람은 그것 때문에 행복이 없습니다. 성령충만하려면 자기를 내려 놓아야 합니다. 자기 영광을 구하지 말아야 합니다. 자기 영광을 구하면 구할수록 사람은 불행해 집니다. 내면에 여유가 없고 항상 긴장된 삶, 상처받는 삶을 삽니다. 그러나 자기를 내려놓으면 성령이 점점 강물처럼 충만하게 흐르는 것을 체험하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성령 충만을 강물과 보트에 비유했습니다. 갈수기에는 보트가 자꾸 부딪힙니다. 그러나 강물이 어느 정도 유지되면 보트는 신나게 강물을 타고 내려가며 래프팅을 즐길 수 있습니다. 자기를 비움으로 우리 모두가 성령 충만하여 영혼의 만족함이 있고 다른 사람들과도 선한 관계를 유지하며 생명의 역사, 제자양성과 세계선교 역사에 은혜롭게 쓰임 받는 사람들이 다 되기를 기도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이 갈릴리에서 태어나신 줄 알고 성경에 약속한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도 성경도 잘 모르면서 아는 체 하고 함부로 판단했습니다. 그러나 그들 중에는 예수님의 말씀에 은혜 받는 사람들, 예수님을 옹호하는 니고데모 같은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결론입니다. 사람에게 영혼의 목마름이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아도 물질적으로 안정되어도 웬지 허무하고 무의미합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자신을 진실로 믿으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온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진실로 믿음으로 내면에 참 만족이 있고 영적 영향력이 있는 삶을 살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세계선교보고대회를 통해 성령의 역사에 대해서 배우고 우리 모두가 새롭게 이 사무엘, 마더 배리 선교사님같이 생수의 강이 흘러넘치는 사람이 되고자 하는 소원을 덧입을 수 있기를 간절히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