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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021년 요한복음 19강 `내가 곧 길이요 ⁠`(요한복음 14:1-31)2021-07-26 0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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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요한복음 제 19 강

내가 곧 길이요

말씀 / 요한복음 14:1-31

요절 / 요한복음 14:6



오늘 말씀은 “내가 곧 길이요.”입니다. 저희가 말씀을 통해 예수님을 길과 진리요 생명으로 만나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을 통해 아버지를 만나고 하나님을 보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아버지께 이르는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지난 시간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신 후에 제자들 중에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는 충격적인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13장 36절에서 “나의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다” 말씀하셨습니다. 38절에서는 베드로에게 닭이 울기 전에 세 번 예수님을 부인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에 제자들은 근심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떠나가실 수 있고 팔려 가실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힘들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잡아 죽이려고 하고 만찬도 마가의 다락방에서 몰래 하고 있는데 “예수님은 간다고 그러시고 누군가 판다고 그러시니 이렇게 되면 예수님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그리고 또 우리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버려지는 것인가? 아님 끈 떨어진 연처럼 되는 것인가?” 근심이 되었습니다.


그럼 예수님은 두려워하며 근심하는 제자들에게 무엇이라고 하셨습니까? 1절을 다시 보십시오. 예수님을 믿으라 하셨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하나님을 믿으니 나를 믿으라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가지라 하셨습니다.


사실 근심이란 무엇입니까? 근심이란 해결되지 않는 일 때문에 속을 태우거나 우울함을 말합니다. 특히 마음의 근심이란 그 근심이 너무나 커서 영적인 죽음에 이를 수 있는 영혼의 질병을 뜻합니다. 사람들은 너무나 근심한 나머지 영적인 죽음에 이르기도 합니다.내 현실문제가 두렵고 내 직장문제가 두렵고 내가 이러다 도태될까봐 두렵고 근심합니다. 그 근심이 너무나 커서 숨이 막혀 옵니다. 이렇게 살다 망하는 것 아닐까 마음에 깊은 근심으로 잠을 이루지 못합니다. 온통 근심에 사로잡혀 그 생각이 마비되고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는 그런 사람이 됩니다.

그럼 왜 사람들이 근심하는 것입니까? 예수님보다 자신을 믿기 때문입니다. 본문 말씀대로라면 근심의 문제는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 문제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못하고 자신을 의지하는데서 다른 것을 의지하는데서 오는 문제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대한 믿음이 없을 때 그 마음은 끊임없이 일어나는 바다의 풍랑과 같이 출렁이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으면 어떠합니까? 더 이상 근심하지 않습니다.도리어 전능하신 예수님께 믿고 맡기니 기대가 되고 고대가 됩니다.

사실 예수님도 어디로 가시는 것입니까? 2절을 보십시오. 거처를 예비하러 가십니다. 아버지 집을 건축하러 가십니다. 아버지 집은 아버지가 계신 곳으로 아버지를 만날 수 있는 곳입니다. 보통 아버지 집은 성전을 말합니다. 성전은 하늘과 땅이 만나는 곳이요 죄악된 인간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유일한 장소를 의미합니다.그런데 요한복음 2장 19-21절에서 예수님 자신이 성전을 대체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이제 손으로 짖지 아니한 새로운 성전이 되고자 하셨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세워진 새로운 성전 처소입니다. 그 새 성전은 예수님 자신이기도 합니다. 이에 아버지 집으로 가시는 것이었습니다.


2절 하반절과 3절도 보십시오.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또한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그 가심의 이유도 다시 오심의 이유도 우리를 다시 영접하여 들이시기 위함입니다. 이 땅에서 외롭게 투쟁하고 있는 우리를 다시 데리러 오십니다. 이 예수님의 가심은 전혀 슬퍼하거나 어려워 할 일이 아니었습니다. 기뻐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4,5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도마는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 못하는데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 하며 그 말씀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어디로 가시며 어떻게 그 길을 갈수 있는지 다시 말씀하여 주십니다.


6절을 보십시오. 그럼 먼저 예수님은 어디로 가십니까? 아버지께로 가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하늘 아버지께로 인도하고자 하십니다. 특별히 여기서 예수님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말씀하신 것은 이제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하나님과의 관계성의 변화를 말합니다. 이제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이 멀리 있는 분이 아니라 나의 아버지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아버지란 내가 의지하고 붙들고 대화하는 존재를 말합니다. 나의 근본이고 나의 의지할 대상이라는 것입니다. 인터넷에 아버지를 검색해보니 “인순이의 아버지, 도망간 아버지, 아버지와 함께 간 풀장, 아버지의 숨겨진 제산” 등 많은 기사가 올라왔습니다. 그중에서도 “아버지 영전에 바치려던 메달 .. 유도 김원진, 서럽게 울었다”라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비록 아버지가 돌아가셨지만 아버지를 위해 모든 걸 쏟아 부은 김원진 선수의 기사에서 저는 아버지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을 볼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신 것은 이제 제자들이 이 아버지를 의지하여 살도록 그분께 나아가 대화하고 의존하며 교제하며 살도록 하신 것입니다. 힘들고 어려워도 이 아버지에게 나아가도록 괴로울 때 이 아버지를 붙들도록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나의 의지할 대상이고 내가 붙들고 말 할 수 있는 유일한 대상이십니다. 나의 보호자이십니다. 이에 “아버지께로 간다.” 이는 이 땅에서도 아버지를 회복하는 것 아버지와의 교제와 만남이 중요함을 말합니다. 이 하나님을 만나고 교제하며 하늘아버지를 향해 나아가야 함을 말씀하십니다.우리 인생의 의미와 목적도 내 사역의 목적도 하나님을 만나고 교제하고 그분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그럼 우리가 어떻게 이 아버지에게 이를 수 있습니까? 6절입니다. 바로 예수님을 통해서입니다.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누구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아버지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말씀을 다시 보십시오.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라고 하셨습니다. “I am the way” 즉 예수님이 아버지께 이르는 길입니다. 사실 누구도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지 못합니다. 어떤 방법으로도 하나님나라에 이를 수 없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서 10:19,20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우리를 하나님 아버지께로 담대히 나오게 하셨습니다. 누구든 이 예수님을 힘입어 담대히 그 앞에 나오게 하셨습니다. 누구든 나를 위한 그 사랑을 믿을 때 그분을 통해 아버지께 나아갑니다.

또 그렇게 나아갈 때 진리를 깨닫게 하십니다. 말씀을 다시 보십시오. 예수님은 자신을 진리라고 하셨습니다. 왜 많은 사람들이 방황합니까? 진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많은 이들이 인생의 길을 묻습니다. 인생의 길을 찾고 진리를 찾습니다. 그러나 어디에도 영원히 변치 않는 진리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진리가 되십니다. 요 1:14절은 말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진리 그 자체로 그는 우리를 구원하시는 구원의 진리이십니다. 또한 그 말씀은 진리의 말씀으로 그 안에 은혜와 진리가 충만합니다. 이에 누구든 그분을 따를 때 그분을 통해 인생의 참된 진리를 발견하고 인생의 진리를 이르게 됩니다. 벧전 2:25절은 말합니다.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그리고 이 진리의 말씀은 우리를 생명으로 인도합니다. 6절 중반절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생명이라고 하셨습니다. 요1장4절에서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고 했고 요한복음 17장 3절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라고 했습니다. 누구든 예수님을 알 때 그 안에 생명이 임합니다. 누구든 그를 알고 교제할 때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을 소유하게 됩니다. 그 생명은 영원한 생명(조에)으로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됩니다.


세리 마태는 예수님을 만나기전 세상에 돈이 전부 인줄 알았습니다. 그렇게 세상 가치관으로 사는 게 내 인생 그렇게 사는 게 최고인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때 얼마나 허 무했습니까! 그는 무의미하고 힘든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을 얻고 자신을 얻고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쫒았습니다. 예수님을 생명으로 진리로 길로 만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길을 찾았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 영적인 무지 속에 살았습니다. 그는 바리새인이요 가말리엘 문하생으로서 누구보다도 율법을 잘 알았고 율법대로 살고자 애썼던 사람입니다. 그는 세상의 학문이 세상의 명예가 최고인줄 알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다마섹 도상으로 예수님을 핍박하러 가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 어떻게 되었습니까? 예수님 안에서 비로소 진리를 발견하고 영적인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비로소 영적인 눈을 떠 죄인 된 자기를 발견하고 그때서야 하나님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는 자신이 핍박하던 이 예수님을 만나고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예수님을 증거하는 종이 되었습니다. 이는 예수님 안에서 참된 진리를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평생 이 예수님께 메인바 되어 그를 전하고 다녔지만 한번도 그 영혼이 메이고자 지치지 않았습니다. 그 안에 그리스도의 생명력이 함께 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방황하던 제 삶에도 길이 되셨습니다. 제가 어떻게 하나님께 이르게 되었습니다. 저는 길이 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인생의 길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고 절망하며 극도의 두려움과 염려로 살았습니다. 근심으로 장이 쪼그라드는 듯한 고통을 맛보며 살았습니다. 또 죽음 문제 앞에서 인생의 허무와 절망으로 비탄 가운데 살았습니다. 마음에 음란과 정욕으로 하나님을 피해 다니는 자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고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로 말미암아 영적인 생명을 얻었습니다. 예수님을 진리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무엇을 주고도 바꿀 수 없는 하늘 아버지를 나의 아버지로 얻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근심하지 않습니다. 염려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분께 나아가 생명력이 충만하게 하십니다. 이는 예수님으로 인한 역사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어떻게 하늘 아버지께로 이르게 됩니까? 어떻게 길을 찾습니까? 우리는 어디로 가는 인생입니까? 우리도 십자가의 예수님을 통해 나의 하늘 아버지께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분께 나아가 교제하면 인생의 참된 행복과 기쁨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살지 않고 자기로 말미암아 살고 돈으로 말미암아 살고 이성으로 말미암아 살고 있습니다. 또 그렇게 돈을 위해 살지만 그래서 남는 것은 극도의 이기심과 두려움입니다.도리어 돈에 노예가 되어 자유가 없습니다. 열심히 살지만 삶의 방향이 없습니다. 돈은 벌지만 삶의 의미는 모르는 그런 허무한 삶을 살아갑니다.

신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땅에서 살아가지만 자기 영광으로 말미암아 살고 자기로 말미암아 삽니다. 아버지와 교제하며 아버지께 이르는 삶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때 신자이지만 세상 영광에 시달리고 세상풍조에 휩쓸려 길을 잃고 방황합니다.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자신을 잃어버리고 길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through him 누구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살 때 그분을 통해서 길을 찾게 됩니다. 예수님 안에 길이 있습니다. “아버지께로 가는 것” 즉 우리 삶과 신앙생활의 최종목적지요 방향이 아버지께 있다는 것입니다. 내 길이 아버지를 향해 있습니다. 내 삶의 방향이 아버지를 향해 있습니다. 내 인생의 목적과 방향이 아버지를 향해 있습니다. 우리 인생의 의미와 목적도 내 사역의 목적도 하나님을 만나고 교제하고 그분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저희가 예수님을 통해 아버지께로 나아가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 안에서 그분을 나의 아버지로 만나고 아버지 안에 있는 기쁨을 누리는 자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분과 만나는 아버지를 회복하는 기쁨을 누리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이 길이 되십니다.

7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이제 제자들에게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라 이제부터는 너희가 나를 알았고 또 보았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을 알게 되면 하나님 아버지를 알게 됩니다. 또 그를 알게 되면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본다는 것은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8절을 보십시오. 빌립은 여전히 근심과 두려움 속에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그럼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하며 보여 이제 하나님을 보여 달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봅니까?

그럼 예수님은 이런 그에게 무엇이라고 대답하셨습니까?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가 내안에 거하는 것을 믿으라 하셨습니다. 10절을 보십시오.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그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무엇보다 11절을 보십시오.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 하셨습니다. 그럼 그 믿도록 행하신 일은 무엇이었습니까? 예수님은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 오직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으로서만 하실 수 있는 일을 하셨습니다.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셨습니다. 38년 된 병자를 일으키셨습니다.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셨습니다. 광풍을 잠잠하게 하셨습니다. 물위를 걸으셨습니다. 소경의 눈을 뜨게 하셨습니다. 죽은 나사로를 살리셨습니다. 이 일은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통해 하신일로 우리가 이를 통해 믿도록 역사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가 예수님 안에 계심으로 이루신 역사입니다.


12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그 믿는 자는 예수님이 하는 일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더 큰 일도 하리니”하셨습니다. 13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하셨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14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하나님을 구하는 이들에게 약속하셨습니다.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 하십니다. 구하기면 하면 너희가 알 수 있게 깨달을 수 있게 내가 행하신다는 것입니다. 그 살아계심을 알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15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하셨습니다. 21절을 보십시오. 이렇게 계명을 지키면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하나님 자신을 나타내신다고 하셨습니다.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그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자신을 보이시고 나타내신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16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까? 우리가 성령의 나타나심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이제 예수님이 가시고 성령이 오십니다.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신다 하십니다. 그리고 17절을 보십시오. 이 성령을 통해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하심을 알게 하시고 깨닫게 하십니다. 20절입니다. 이 성령을 통해 그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게 하십니다.


우리도 어떻게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까? 아버지와 예수님이 하나인 것을 믿고 기도할 때입니다.그 이름으로 구할 때입니다. 14절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 그 이름으로 구하기만 하면 내게 행하여 주십니다. 이것을 통해 살아계신 하나님을 뵙고 만나고 체험하게 하십니다. 이에 우리는 하나님을 체험하기 위해 믿음으로 적극적으로 구해야 합니다. 구할 때 만나주십니다. 이렇게 구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을 보이십니다.또한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까? 그 계명에 순종하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구할 때입니다. 21절에서 우리가 그 말씀에 순종하여 살 때 하나님 자신을 드러내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말씀에 순종할 때 성령께서 우리로 깨닫게 하시며 자기를 나타내어 주십니다.

위 말씀은 제게 큰 소망이 됩니다. 저에게 부족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기도입니다. 제에게는 앞으로 기도해야 할 일 많은 일들이 있습니다. 코로나로 어려운 상황에서 캠퍼스에 올라가 피싱을 하고 제자를 양성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현제 돕고 있는 형제들과 목자들이 믿음으로 서고 자신의 목숨보다 주님을 사랑하는 제자가 되도록 돕는 일, 또한 제가 말씀의 종이 되고 말씀을 심령으로 받아 증거하는 일등입니다. 이는 저의 힘으로 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도우심으로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은 제게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하셨습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아버지를 보이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제가 하나님의 나타나심을 깨달을 때까지 기도하는 종이 되고자 합니다. 빠르게 움직이고 계산하기 보다 예수님께 간절히 믿음을 가지고 기도하는 가운데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고 체험하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은 무엇이든지 구하면 행하여 주시는 분입니다. 기도하는 자에게 자신의 살아계심을 보이시는 분이십니다. 저희도 믿음으로 기도하고 구하는 가운데 하나님을 만나가고 체험하는 삶 살기를 기도합니다. 계명을 사랑하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구함으로 하나님을 만나가고 그분을 눈앞에 보고 사는 것처럼 확신하는 인생 체험하는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22절을 보십시오. 그런데 이때 가롯이 아닌 유다가 또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주여 어찌하여 자기를 우리에게는 나타내시고 세상에는 아니하려 하시나이까?” 물었습니다.이게 무슨 말입니까? 즉 그렇게 능력이 있으면서도 왜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제자양성이나 복음전파만 하시고 자기를 드러내지 않으시냐는 것입니다. 이는 가롯 아닌 유다가 세상에서 잘 나가려는 마음, 세상 영광을 얻고자 하는 마음을 나타낸 것입니다.사실 능력만 있으면 자기 능력을 드러내어 우리들도 영광을 받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능력이 있으시지만 제자들을 붙들고 씨름하시고 십자가를 지시는 삶을 사셨습니다. 능력을 통해 자기를 나타내기보다 말씀에 순종하시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지만 하나님 앞에 순종하는 삶을 사셨습니다. 그러나 이는 초라해 보이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무엇이라고 하십니까? 31절을 보십시오. “오직 내가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과 아버지께서 명하신 대로 행하는 것을 세상에 알려 하려 함이로라.”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기의 나타내시기보다 오직 하나님께 순종하는 모습, 그 모습을 드러내려 하셨습니다. 오직 내가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과 아버지께서 명하신 대로 행하는 것을 세상에 알게 하려 하셨습니다. 자기를 드러낸 것이 아니라 아버지를 나타내고자 하셨습니다.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고자 하셨습니다.

우리도 신자로써 십자가를 지거나 누가 알아주지 않는 제자양성의 길보다 세상에서 잘나가고자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세상에 자기를 드러내고자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또 영적인 길을 가면서도 자기 영광을 구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세상에서 잘 나가려는 마음, 자기를 센터와 세상에 나타내고자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저도 10여 년간 섬겼지만 떠나간 목자에 대한 마음에 깊은 절망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열심히 복음을 전했지만 변변치 못한 제자양성의 열매와 인해 초라한 자신에 대한 마음에 절망이 있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이 좋지만 거절 받는 것에 대한 두려움 또 사람들에서 한없이 낮아져야 하는 것에 대한 초라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에 복음 전하기를 주저하는 마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떠셨습니까? 능력이 있으시지만 오히려 자기를 드러내려 하시기 보다 오직 하나님께 순종하는 모습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과 그 명하신 대로 행하는 삶, 아버지를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사셨습니다. 저도 아버지 자체를 드러내는 삶,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하는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열매에 상관없이 그 명하신 대로 제자양성과 십자가의 길 복음증거자의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우리 신앙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오직 아버지를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오직 “아버지께서 하신 일을 세상에 알게 하려 함이라.”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오직이라는 단어를 쓰셔서 오직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과 아버지께서 명하신 십자가와 제자양성의 길, 이를 드러내고 그 하나님께 순종하는 길을 가고자 하셨습니다. 오직 하나님을 드러내고 기쁘시고 하고자 하셨습니다. 저희가 세상이 알아주지 않아도 때로는 나 스스로 초라해 보여도 아버지가 명하신 일 제자양성과 십자가의 길을 힘써 갈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아버지를 사랑하는 삶을 살아가기를 기도합니다. 아버지를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이것이 초라해 보여도 이 길은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길이요 예수님이 알아주시는 삶입니다.

26절을 보십시오. 이제 예수님이 가시면 보혜사 성령이 오십니다. 그가 오시면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십니다. 그리고 27절을 보십시오. 성령님은 오셔서 평안을 주십니다.

결론입니다. 예수님은 떠나지만 왜 제자들이 슬퍼하거나 염려하거나 근심하지 않아도 됩니까? 이는 예수님이 아버지께로 가는 길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그가 성령을 보내시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성령을 의지하여 자립적인 종들이 되게 하십니다. 저희가 길이신 예수님을 통해 날마다 아버지에게 이르는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기도하고 계명에 순종하므로 날마다 아버지를 눈앞에 보는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자기를 나타내려 하기보다 아버지의 행하신 것을 나타내는 삶 그분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