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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022년 누가복음 12강 `자연과 영적 세계를 다스리시는 예수님`(누가복음 8:22-39)2022-05-30 0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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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누가복음 제 12

 

자연과 영적 세계를 다스리시는 예수님

 

말씀 / 누가복음 8:22-39

요절 / 누가복음 8:24


"제자들이 나아와 깨워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죽겠나이다 한대 예수께서 잠을 깨사 바람과 물결을 꾸짖으시니 이에 그쳐 잔잔하여지더라"

 

보통 우리 모임에서는 주일 말씀의 제목을 성경 본문에 있는 구절을 잡는데, 이번에는 본부 교재연구부에서 참신한 제목을 정했습니다. "자연과 영적 세계를 다스리시는 예수님". 처음에는 약간 어색했지만, 본문을 공부해보니 아주 적절한 제목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제목이 말해주는 바와 같이 본문에는 예수님이 자연과 영적 세계를 다스리시는 두 사건이 나옵니다. 우리가 오늘 이 사건들을 통해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새롭게 배우기를 원합니다.

 

22-24절입니다. 하루는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오르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번 행선의 목적지를 말씀하십니다. 그 목적지는 호수 저편 거라사 지방이었습니다. 제자들은 닻을 높이 올리고 배를 몰기 시작하였습니다. 가버나움은 갈릴리 호수 북쪽에 있었고, 거라사는 호수 북동쪽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번 행선은 호수의 정중앙을 가로지르는 것은 아니고 북쪽에서 북동쪽으로 지나는 비교적 짧은 코스였습니다. 거리상 약 5~6Km 인데 이는 배로 1시간 정도 되는 거리입니다. 갈릴리 호수는 바다라도 불릴 정도로 큰 호수이기는 하지만 물이 갇혀 있기 때문에 평상시에는 파도가 거의 없습니다. 잔잔합니다. 제자들이 모는 배는 유리같이 잔잔한 호수 위를 미끄러지듯이 나아갔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배 안에서 잠이 드셨습니다. 평상시에 Hard working 하신 예수님은 이 짧은 시간을 이용하여 쪽잠을 주무신 것입니다. 잠드신 예수님을 보면서도 은혜가 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 분은 천상에서나 지상에서나 하나님이 아닌 적이 단 한 순간도 없던 분이셨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사람의 몸을 입으신 분으로 우리와 똑 같은 성정을 가진 분이십니다. 육신을 가지셨기 때문에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4:15) 배고픔과 추위를 겪으셨습니다. 때로 몹시 피곤하기도 하셨습니다. 죄의 유혹도 받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잘 이해하시고 동정하십니다. (4:15) 예수님은 지상에서 머리 둘 곳 없이 사시면서도 하나님의 복음역사를 온 마음으로 섬기셨습니다. 죽어가는 생명을 구원하고자 하는 구령의 열정으로 쉼 없이 일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배에서 잠드신 중에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광풍이 불었습니다. 이 광풍은 멀리 북쪽에 있는 높이 3천 미터에 가까운 헬몬산에서 내려오는 찬 공기가 갈릴리 골짜기로 갑자기 통과하면서 생기는 돌풍으로 예측 불가한 것이었습니다. 23절에 보면 "광풍이 호수로 내리치매"라고 되어 있습니다. 옆에서 부는 것이 아니라 위에서 내리꽂듯이 광풍이 호수와 배를 내리 친 것입니다. 이런 광풍을 만나면 아무리 노련한 어부도 속수무책입니다. 배는 회오리바람에 말려들며 풍전등화와 같이 되었습니다. 점점 물이 차더니 배에 물이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배가 옆으로 기울어갔습니다. 침몰 일보직전이었습니다.

 

제자들이 처한 이런 모습은 우리가 인생을 살아갈 때 예기치 않게 닥치는 큰 문제들을 생각나게 합니다. 영국의 대런 힐드로 목자님은 항상 명랑하고 남을 아주 재미있게 해주는 은사가 있습니다. 이 분이 모임의 사회를 보거나 메시지를 전하면 온통 웃음바다가 되는데, 그러면서도 말씀의 은혜가 충만합니다. 이런 분이 암에 걸려 큰 시련을 겪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완치가 되었지만 지금도 침샘이 회복되지 않아 음식 섭취에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대런 목자님과 같이 늘 조이풀한 분에게 이런 고난이 닥칠 것을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그 외에도 우리 주변에 큰 병에 걸려 고난을 받는 분들이 있습니다. 또한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우크라이나 전쟁이 일어나 무고한 인명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참으로 우리 인생에 무슨 일이 닥칠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말하기를 인생은 지뢰밭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제자들은 전혀 예기치 못한 돌풍 앞에 패닉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비로소 예수님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아니, 이런 광풍에서 주무시다니! 빨리 일어나셔서 물이라도 같이 퍼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들은 예수님을 깨우며 말합니다. "주여 주여 우리가 죽겠나이다!" "예수님, 이제 배가 빠져 다 죽게 되었어요. 모든 것 다 버리고 메시아 왕국을 이루실 예수님을 좇았는데 이제 다 끝났네요!" 그들은 높은 파도가 치는 현실에 매몰되어 크게 절망하며 두려워하였습니다. 이 순간에 제자들은 예수님이 호수 건너편으로 가자고 말씀하셨던 것을 왜 기억하지 못했을까요? 또한 예수님이 그들과 함께 배에 계신데 예수님이 호수에 빠져 죽기라도 하신다는 말인가요? 그들은 예수님을 믿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광풍 속에서도 우리는 곤히 잠을 잘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믿지 못하면 산들 바람에도 화들짝 놀라는 인생을 살게 됩니다.

 

제자들은 심히 다급해져서 "주여! 주여!" 하며 예수님을 깨웠습니다. 예수님은 잠을 깨신 후 상황을 파악하셨습니다. 그리고 바람과 물결을 꾸짖으셨습니다. "내가 잠을 좀 자는데 너무 소란스럽구나! 내 제자들을 이렇게까지 놀라게 하다니 잠잠하라!" 그러자 어떻게 되었나요? "이에 그쳐 잔잔하여지더라". ! 예수님의 꾸지람에 바람과 물결이 즉시 잔잔해졌습니다. 여기서 두 가지 점을 주목하게 됩니다. 첫째, 물결도 잔잔해진 것입니다. 바람은 기압차로 인해 갑자기 방향이 바뀔 수도 있습니다. 태풍의 눈 속으로 진입하면 일시적으로 무풍지대가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물결이 금방 잔잔해지는 것은 물리학적으로 불가능합니다. 높이 이는 파도의 파동 에너지가 감소하는 데는 시간이 걸립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꾸짖으시는 한 마디에 호수 표면의 모든 파동 운동도 즉시 중단되어 버렸습니다. 사납게 날뛰던 파도가 유리바다처럼 되었습니다. 둘째, 바람과 물결을 잔잔하게 하는 권세가 예수님 자신에게서 나왔습니다. 예수님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께 기도하심으로 이를 행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냥 잠에서 깨어 꾸짖으셨습니다. 잔잔하라고 명령하신 분이 예수님 자신이십니다. 예수님에게서 권세가 나와 순종시켰습니다.

 

이 예수님은 누구십니까? 말씀 한 마디로 인격체도 아닌 바람과 물결을 순종시키신 분, 이 분은 누구십니까? 예수님은 천지 만물을 다스리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에 대해 골로새 1:15-17절은 말씀합니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오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예수님은 우리 눈에 보이도록 나타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 분은 보이는 세계나 보이지 않는 영계, 곧 천사나 하나님 나라나 모든 것을 만드신 분이십니다. 지금도 만물이 존재하게끔 붙들고 계신 분이십니다. 이 예수님이 우리의 주님이시요 우리의 목자요 아버지이십니다. 우리 각자를 지극히 사랑하시되 그의 생명까지 내어주신 분이십니다.

 

25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하시니 그들이 두려워하고 놀랍게 여겨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물을 명하매 순종하는가 하더라."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Where is your faith?" 너희가 갖고 있던 그 믿음을 어디에 두었느냐? 하는 말씀입니다. 제자들에게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른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믿음은 피상적이었습니다. 실제 문제에 부딪치니 믿음으로 반응하지 못했습니다. 믿음을 결부시키지 못했습니다. (4:2) 예수님은 이런 그들에게 믿음을 찾아오라 하십니다. 그 믿음을 붙들라 하십니다.

 

우리도 머리로는 예수님을 잘 압니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부족합니다. 믿음이 내재화되어야 합니다. 머리로만이 아니라 마음으로 믿고, 우리의 무의식까지 이 믿음이 심겨져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갑자기 내리치는 광풍을 만나더라도 요동하지 않게 됩니다. 세상에 풍파가 많고 지뢰가 많은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전능하신 예수님을 믿는 실제적인 믿음이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 예수님께 대한 믿음이 있는 사람에게는 문제들은 예수님을 더 깊이 배우고 체험할 수 있는 좋은 기회입니다. 그런 것들을 자장가처럼 들으며 잠을 즐길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이러한 실제적인 믿음을 소유한 자들로 축복해 주시길 기도합니다.

 

갈릴리 호수의 광풍은 제자들을 잠시 공포에 시달리게 하였지만 그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알고 믿게 하는 귀중한 기회였습니다. 이러한 기회가 그들에게 계속 주어집니다. 26절을 보면 제자들은 거라사인의 땅에 이르렀습니다. 제자들은 빨리 배에서 내려 젖은 옷이라고 말리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배에서 내리자마자 어떤 한 사람이 큰 소리를 지르며 달려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는 귀신들린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전혀 옷을 입지 않았고 온 몸은 상처 투성이였습니다. 그는 예수님 앞에서 심한 두려움에 몸을 떨었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이미 그 사람 안에 있는 귀신들에게 나가라고 명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21세기에 무슨 귀신이냐 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귀신은 지금도 엄연히 존재합니다. 베드로후서 2:4과 유다서 6절은 귀신이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타락한 천사들이라고 말합니다. 타락한 천사장인 마귀, 다른 이름으로 용, 옛 뱀, 사탄으로 불리는 자를 좇으면서 (12:9)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유혹하여 범죄하게 합니다. 귀신은 육체, 곧 몸은 없지만 인격을 가진 존재입니다. 그런데 귀신은 건전한 인격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비뚤어지고 비정상적입니다. 과도한 미움과 시기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헛된 교만과 명예욕을 가지고 있습니다. 거짓말을 하고 살인을 해도 양심의 가책이 없습니다. 탐욕스럽습니다. 이런 더러운 귀신은 끊임없이 사람의 몸을 숙주로 하여 활동합니다. 인격을 파괴시키고 다른 사람들과의 정상적인 관계를 맺지 못하게 합니다. 

 

이 거라사인도 가정이나 사회에서 사람들과 관계성을 맺지 못하고 무덤 사이에서 홀로 지내고 있었습니다. 귀신에 붙잡혀 자기 컨트롤을 잃어버렸습니다. 귀신이 그를 컨트롤했습니다. 귀신이 시키는 대로 아무데서나 옷을 벗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피해를 막고자 그를 쇠사슬로 묶고 고랑을 채워 놓았습니다. 그러나 귀신이 주는 괴력으로 쇠사슬과 고랑을 끊고 광야로 몰려 나갔습니다. 아무도 이런 그를 도울 수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그저 그가 무덤 사이에 거하며 동네에 내려오지 않는 것을 다행으로 여겼습니다. 그가 거기서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이와 같이 완전히 귀신에게 포로가 되어 자아를 상실한 그를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사실 예수님은 그 한사람을 돕고자 호수를 가로 질러 여기까지 오신 것이었습니다. 귀신들린 자는 예수님을 보고 부르짖습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당신께 구하노니 나를 괴롭게 마옵소서!" 호수를 건너올 때 제자들은 바람과 물결을 잔잔하게 하신 예수님을 경험했습니다. 그때 그들은 큰 충격을 받고 "도대체 이 분은 누구신가?"하는 강한 의문을 가졌습니다. 제자들은 아직까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는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지식 면에서는 귀신이 앞섰습니다. 귀신들은 예수님이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이는 그들이 신앙을 고백하는 것은 아닙니다. 귀신은 절대로 예수님을 신앙하지 않습니다. 믿지 않습니다. 그저 머리로만 알고 있는 것을 말했을 뿐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으로부터 적절한 타협을 얻어내고자 하였습니다.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나를 괴롭게 마소서". 귀신은 자기에게 간섭하지 말아 달라고 했습니다.

 

오늘날에도 귀신들의 역사가 활발합니다. 영적인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세상 사람들은 귀신의 활동을 모두 심리적인 것으로 설명하고자합니다. 심리학, 정신적인 방법, 약물과 격리를 통해서 치료하고자 합니다. 물론 정신적인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 중에 심리적인 상처나 충격의 후유증으로 고생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은 악한 영들, 곧 귀신들의 역사로 인한 것입니다. 귀신들은 음악, 영화, 게임 그리고 음란한 문화를 통해 교묘하게 사람들을 사로잡고 있습니다. 음란하고 폭력적인 영화를 통해서 정욕에 사로잡히게 하고 폭력적이 되게 합니다. 조그마한 상처에도 분노하게 하고, 의심하게 하며 관계성을 파괴시킵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합니다. 우울증, 공황장애 등 다양한 병적 증상을 겪게 합니다.

 

요즈음 우리나라의 1/3이 혼자 사는 가구라고 합니다. 홀로 집에 거하며 아무런 영적인 도움도 받지 못하고 지내는 분들이 많습니다. 오늘날 2030 세대의 사망 원인 제 1위가 자살이라고 합니다. 이런 시대에 사람들은 어떻게 그들을 도울 수 있을지를 모릅니다. 잘 들어주고 더 심해지지 않도록 약물을 처방해 주는 정도입니다. 그러한 처방은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닙니다. 이 시대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분은 영적 세계를 다스리시는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또한 목자의 사랑과 기도로 인한 성령의 역사로 나을 수 있습니다.

 

30절을 보면 예수님은 그 사람에게 물으십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여기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는, 예수님이 자아를 상실한 그 사람에게 물으신 것입니다. 이름이란 자기의 인격을 대표합니다. 그도 한 때는 부모님의 사랑스러운 아들이었습니다. 그에게 이름이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이 그의 이름을 불러줌으로 그는 인격적인 대우를 받았습니다. 그 이름으로 다른 사람들과 교제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의 이름을 불러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냥 귀신 들린 자라고 불렀습니다. 이런 그에게 예수님은 그의 이름을 물으신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이 질문 앞에, ", 내 이름.. 내 이름이 무엇이지?.. 철수? 그렇지 나는 철수지! 내 고향은 아름다운 마을이었지, , 나의 가족들.. 그런데 내가 왜 여기 있지? 내 모습이 왜 이렇지?" 할 수 있었습니다. 그가 만일 자기의 본래 이름을 기억하게 된다면 그는 잃어버린 자아를 찾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둘째는, 그 사람을 사로잡고 있는 귀신에게 정체를 드러내라고 물으신 것입니다. 귀신들도 자기들의 특징을 나타내는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귀신이 이름을 말한다면 그 사람은 자기 속에 다른 영적인 존재가 살고 있음을 인식하게 될 것입니다. 자아를 찾고자 방향을 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은 그 사람이 귀신에게 사로잡힌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그 이름을 물으신 것입니다.

 

귀신들이 대답합니다. 짧은 한 마디 대답입니다. "군대라" (Legion). 당시 로마의 군단(Legion) 6,000명의 군인으로 구성되었습니다. 그와 같이 많은 귀신이 그에게 들어가 있다는 것입니다. 한 사람에게 한 귀신이 들어갈 수도 있고, 많은 귀신이 들어갈 수도 있습니다. 누가복음 13:11을 보면 한 여자가 귀신이 들려 열여덟 해 동안이나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였습니다. 마태복음 12:22를 보면, 귀신 들려 눈멀고 말을 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한 귀신에 들린 자들입니다. 한편, 막달라 마리아는 과거에 일곱 귀신에 들렸었습니다. 그녀의 상태가 매우 심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1장에도 보면, 한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는데 다시 그가 나온 집에 가서 보니 그 집이 깨끗이 되어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 심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를 볼 때 일곱 귀신만 들어도 그 상태가 매우 심해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에게는 무려 6천 마리의 귀신이 들어가 앉아 있었으니 그 상태가 어떠했겠습니까? 그는 자신에 대한 컨트롤을 완전히 잃어버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가 아직까지도 살아있다는 것 자체도 기적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많은 떼귀신들도 예수님 앞에서는 아무런 힘을 쓰지 못합니다. 그저 최후의 형벌 장소인 무저갱으로 들어가라 하지 마시기를 간구하였습니다. (31) 귀신들은 근처에서 먹고 있는 돼지 떼에게 들어가게 해달라고 간구하였습니다. 귀신들은 고귀한 인간을 해치지 못하게 된 마당에 저등한 존재라도 파괴하고자 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요청을 거절할 수도 있으셨습니다. 그러나 허락하셨습니다. 그러자 귀신들이 그 사람에게서 나와 돼지에게로 들어갔습니다. 돼지 떼가 살맛을 잃어버렸습니다. 비탈로 내리달아 호수에 들어가 몰사하였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왜 귀신들의 요청을 허락하셨을까요? 세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은 귀신의 파괴적인 속성을 드러내고자 하셨습니다. 이를 통해 귀신 들렸던 사람이나 예수님의 제자들로 하여금 귀신의 악랄한 속성을 보도록 하셨습니다. 둘째, 그 사람으로 하여금 귀신들이 자기에게서 나간 것을 확실히 알도록 하심이었습니다. 그럼으로써 그가 안심하도록 하셨습니다. 셋째는, 그 한 사람의 생명이 천하보다 귀함을 알게 하심이었습니다. 마가복음에 보면 호수에 익사한 돼지가 2,000마리나 되었습니다. (5:13) 한 마리당 100만원씩만 잡아도 20억이나 되는 거액입니다. 예수님은 귀신들에게 그냥 광야로 나가버리라고 명하실 수도 있으셨습니다. 그러나 돼지에게로 들어가게 하셨습니다. 이는 그 한 사람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돼지 2천 마리도 아무 것도 아님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곧 그 한 사람이 천하보다 귀한 생명임을 알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한 사람을 보시는 관점입니다. 우리 각 사람은 천하보다 귀한 생명입니다. 세상의 억만 보화로도 한 생명을 살 수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가 영혼을 구원하는 복음 역사를 섬기는 것은 정말 얼마나 소중한 일을 하는 것입니까!

 

예수님이 돼지 2천 마리를 희생시키셨다고 하여 물질을 가치 없게 여기신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오병이어 사건 이후에도 부스러기를 거두어 버리지 않도록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물질을 건전한 것, 필요한 것으로 보셨습니다. , 영혼의 가치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보신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이러한 한 영혼을 귀히 여기고 물질을 건전하게 경멸하는 믿음을 주시길 기도합니다.

 

34,35절을 보면 돼지 치던 자들이 그 된 것을 보고 도망하여 성내와 촌에 들어가 말했습니다. 사람들이 달려 나왔습니다. 와 보니 귀신 들렸던 사람이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예수님의 발아래 앉아 있었습니다. 그 사건을 목격한 자들이 모든 것을 자세히 말해 주었습니다. 이를 들은 모든 백성이 크게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들은 무엇을 두려워하였을까요? 예수님이 누구신줄 모르는 그들에게는 그 지역에 큰 재앙이 닥친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예수님을 화를 불러오는 분으로 보았습니다. 이 분이 더 이상 이곳에 있다가는 큰일 날것으로 알고 두려워한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빨리 그 지방을 떠나 주시기를 요구했습니다.

 

37절을 보십시오. "거라사인의 땅 근방 모든 백성이 크게 두려워하여 예수께 떠나가시기를 구하더라 예수께서 배에 올라 돌아가실새." 예수님은 그들의 떠나 달라는 요청에 개의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을 원망하지도, 책망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잠잠히 배에 오르셨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에는 도리어 잔잔한 만족이 있으셨습니다. 그 만족은 귀신들려 폐인이 되었던 한 영혼을 구하신 만족이었습니다.

 

돼지 2천 마리를 희생하시면서 까지 거라사 광인을 구하신 이 사건은 장차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자기 목숨을 희생하시는 사건의 예표가 됩니다. 갈릴리 호수를 건너 거라사인에게 오신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하늘에서 땅으로 오셨습니다. 귀신의 세력 가운데 사는 우리 인생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자기 생명을 드리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는 고통 가운데도 영혼의 만족이 있으셨습니다. 그 만족이 무엇이었을까요? 이사야 53:11절은 말합니다.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하게 여길 것이라." 예수님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하게 여기셨습니다.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이 무엇일까요? 우리입니다! 여러분과 저입니다! 주님의 은혜로 생명을 얻게 된 우리가 주님의 수고한 열매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주님의 기쁨의 대상이요 만족의 대상입니다.

 

이 예수님 안에서 우리는 진정한 나의 가치를 발견합니다. 소중한 내 인생임을 알게 됩니다. 자신을 진정으로 존중하게 되고, 예수님이 위하여 죽으신 나의 이웃과 형제자매를 존중하며 사랑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없으셨다면 우리는 여전히 영적 거라사 땅에서 귀신들의 영향을 받고 살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우리를 구원해 주신 예수님께 감사와 찬송을 드립니다. 우리도 예수님과 같이 한 생명을 천하보다 귀히 여기는 마음으로 도움이 필요한 분들을 섬기기를 기도합니다.

 

결론적으로, 말씀 한 마디로 바람과 물결을 잔잔케 하시고 군대 귀신 들린 자를 고쳐주신 예수님 자연과 영적 세계를 다스리시는 분, 곧 전능한 하나님이십니다. 이 예수님은 한 귀신 들린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그 지방에 오셨고 많은 돼지 떼를 희생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자기 생명을 내어주셨습니다. 고귀한 생명을 바쳐 사신 바 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천하보다 귀합니다. 이를 알고 우리가 자신에 대한 진정한 자기 존중을 배우며 또한 다른 사람을 깊이 존중하며 사랑하기를 기도합니다. 인생의 광풍과 귀신으로 고통하는 이 시대의 지성인들을 예수님의 마음으로 섬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