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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020년 부활절 특강 2강 `청년아, 일어나라`(누가복음 7:11-17)2020-04-19 1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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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특강 2강


청년아, 일어나라

말씀 누가복음 7:11-17

요절 누가복음 7:14

Happy Ester! 사망 권세를 이기시고 우리에게 부활의 소망을 주신 예수님께 감사합니다. 오늘 말씀은 “청년아 일어나라” 입니다. 청년! 이 얼마나 가슴 벅찬 소리입니까! 청년! 이 얼마나 소망의 단어입니까! “청년이 살아야 나라가 산다.”는 말이 있습니다. 청년은 우리의 꿈이고 소망입니다. 이런 청년이 청년다운 것은 피가 끓어 힘차게 약동할 때입니다. 비전과 가능성으로 충만할 때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 나오는 한 청년은 죽어 관속에 누워있었습니다.그는 관속에 누워 더이상 움직이지도 말을 하지도 느끼지도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그를 예수님이 일어나게 하셨습니다. 다시 살게 하셨습니다. 저희가 말씀을 통해 사망 권세를 이기신 예수님의 부활 능력을 체험하기를 기도합니다.부활의 믿음으로 살기를 기도합니다.

11절을 보십시오. 예수와 제자들 그리고 많은 무리가 나인성으로 가고 있을 때였습니다. 나인 성은 즐거움의 성이란 뜻으로 기쁨과 즐거움이 가득한 성이란 뜻입니다.그런데 이 즐거움의 성 나인성으로 가시는데 어떤 행렬을 만나셨습니까? 12절을 보십시오. 바로 장사행렬이었습니다. 성문에 가까이 이르는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고 있었습니다. 앞에는 만장을 들고 뒤에는 관이 오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 뒤를 따르며 슬피 울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가슴 아픈 것은 죽은 이가 청년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한 어미의 독자요 그의 어머니는 과부였습니다. 사람들은 이 죽은 청년을 위해 슬피 울며 따르고 있었고 청년을 잃은 어머니는 갈 수 없다며 울며불며 애통해하고 있었습니다. 이는 기쁨의 성 나인성에서 나오는 거대한 슬픔의 행렬이었습니다.

사실 과부는 어떤 사람입니까? 한차례 남편을 잃은 아픔이 지나간 사람입니다. 이 행복의 성 나인성에서 백 년 만년 검은 머리 파뿌리 될 때까지 꼭 같이 살자던 남편이 속절없이 먼저 가 버렸습니다.전처럼 자신의 얘기를 들어주는 그 자상한 얼굴을 이제 다시 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독자가 있었습니다. 과부에게 독자는 그녀의 마지막 소망이었습니다.그녀는 독자를 금지옥엽 같이 키웠슴니다.아이가 pc방에서 게임을 하는 날이면 행여나 끼니를 굶을까봐 핸드폰 쿠폰으로 떡볶이와 라면을 아낌없이 쏴 주었습니다. 또한 공부하느라 피곤한 아이를 위해 에너지 드링크 몬스터를 종류별로 구비해 놓았습니다. 어느덧 아이는 무럭무럭 자라 성실한 청년이 되었습니다. 물론 가끔 독자가 pc방 가고 핸드폰 게임 한다고 안하무인(眼下無人)이 되어 엄마도 몰라보고 반항적이 될 때가 있었지만 그래도 아이를 귀엽게 봐주고 소망과 꿈 가운데 키웠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무슨 이유인지 이런 독자가 죽고 말았습니다. 잠시 전까지만 해도 pc방에서 베그(베틀그라운드)하던 아이가 싸늘한 시체가 되어 관속에 누워 돌아온 것입니다. 아이는 아무리 불러보아도 대답이 없었습니다.죽은 청년은 아무리 흔들어 보아도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청년은 어떤 존재입니까? 청년은 가능성의 존재요 비젼의 존재요 살아 움직이는 존재입니다. 꿈과 소망으로 하늘을 날 것처럼 푸르른 나이입니다. 그런데 죽은 청년은 아무 움직임이 없었습니다.죽음이 청년에게서 이 모든 것을 앗아가 버렸습니다. 죽음이 이 청년의 생명력과 함께 모든 것을 빼앗아 갔습니다. 죽음이 그를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이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이처럼 죽음은 보이지 않지만 가장 무서운 실체입니다. 사람들은 평소에 죽음을 잘 생각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죽음은 이처럼 잔인하고 비정합니다.청년이라고 죽음이 봐주지 않았습니다. 죽음이 독자라고 봐주지 않았습니다. 죽음이 모범적으로 살았다고 해서 봐주지 않습니다.죽음은 전혀 자비가 없고 무섭고 잔인한 것입니다.그러나 우리가 슬픈 건, 지금은 청년이 이렇게 가지만 나도 언젠가는 저 뒤를 따라가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나도 이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에 잠 14:13절도 말했습니다. “웃을 때도 마음에 슬픔이 있고 즐거움의 끝에도 근심이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아무리 기쁨의 성 나인성에 살고 있지만, 이 죽음 앞에 사실 세상은 근본적으로 슬프고 어두울 뿐입니다. 울 수밖에 없습니다. 죽은 청년, 울고 있는 과부, 슬피 울며 따라가는 사람들, 이 모두는 죽음 앞에 연약한 우리 인생들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 행렬을 막고 서계신 분이 있었습니다. 13절을 상반절을 보십시오. 먼저 예수님은 이런 인생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예수님이 이런 죽음의 행렬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불쌍히 여기셨다는 것은 무한한 미안함과 안타까움으로 민망해 하셨다는 것입니다. 헬라어로는 (splanchnizomai) ,스플랑크니조마이로써, 죽음에 굴복당하며 울고 있는 이런 우리 인생들을 보시며 창자가 뒤틀리고 끊어지는 아픔을 느끼셨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망 권세 아래 떨며 울고 있는 우리 인생들을 보실 때 가슴 깊은 고통을 느끼시며 민망해 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처럼 우리가 사망 권세 아래 떨고 있는 것을 보실 때 가슴 아파하십니다. 이처럼 사망의 고통 가운데 울고 있는 우리 인생들을 안타까워 하십니다.

그리고 울고 있는 저들에게 무엇이라 하셨습니까? 13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울지 말라 하셨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위로 할때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아무 말도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라고 말합니다. 또는 같이 가서 조용히 같이 울어줍니다. 그리고 “우세요” 하며 힘들 때 울라고 말해줍니다.그러나 예수님은 “울지말라” 하셨습니다. 이는 인제 그만 울어라 그 정도 하면 되었다는 이런 뜻이 아닙니다. 놀랍게도 이 말씀은 이제 다시는 너로 울지 않게 해주시겠다는 말입니다. 더이상 우리 인생들이 이 죽음 문제로 울지 않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예수님은 여인을 다시 울지 않게 하실 수 있습니까? 14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이 말씀을 하시고 가까이 가사 그 관에 손을 대시며 멈추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무엇이라 하셨습니까? 다같이 14절을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청년아 일어나라 명하셨습니다.죽은자에게 청년아 하시며 일어나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15절을 보십시오. “죽었던 자가 일어나 앉고 말도 하거늘” 그 말씀에 죽었던 자가 일어났습니다. 이 예수님의 말씀에 죽은자가 다시 일어나 앉았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니 생명이 돌아왔습니다. 그가 말씀하실때 멈추었던 청년의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눈이 떠졌습니다.죽었다 일어나 다시 본 하늘은 너무나도 파랬습니다. 눈 부신 태양과 맑은 공기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환호했고 청년의 눈에서는 기쁨의 눈물이 흘렀습니다. 예수님이 죽었던 이 청년을 말씀으로 다시 살게 하신 것입니다. 그 말씀이 그를 사망의 어두움 죽음의 어두움에서 일어나게 한것입니다. 청년은 죽음에서 일어나 말했습니다. ‘아따 죽다 살았고만, 예수님 아니었으면 하마터면 진짜 죽을 뻔 했네’

이 사건이 무엇을 말합니까?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를 다시 살게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부활의 권세가 있음을 보이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를 사망권세에서도 일어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예수님의 말씀이 죽은자를 일어나게 하신다는 것을 보이신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 부활이 있다는 것을 보이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처럼 죽은자에게 명령하사 살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이처럼 죽은자 와 산 자에게 명령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그 말씀은 죽은자와 산자에게도 역사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사실 오늘날도 사람들은 나인성이라는 기쁨의 성에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왜 기쁨의 성 나인성에 살지만 슬픈 인생을 살아갑니까? 이는 그들의 내면에 부활이 없기 때문입니다. 진정 이들이 슬픈 것은 죽음 때문이 아니라 그 내면에 부활이 없기 때문입니다. 부활에 대한 믿음이 없기 때문이다. 부활이 없는 인생은 슬프고 어두울 뿐입니다.부활이 없는 인생은 울 수밖에 없습니다.


사실 죽음의 어두움이란 참으로 무섭습니다. 이런 내면에 찾아오는 것이 죽음의 생각들입니다. 늘 슬픈 생각 운명적인 생각에 스스로 인생을 포기하게 합니다. 여러분 전 세계 10~30대 자살률 1위가 우리나라인 것 알고 있으십니까! 또한 청소년 사망원인 1위가 뭔지 아십니까? 바로 자실입니다. 작년 기준 하루 37.5명꼴로 죽었다고 합니다. 그 이유를 보면 가정 스트레스라든지, 학업 스트레스라든지, 대인관계라든지, 학교폭력 취업 문제 등 이런 부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속을 들여다보면 이 대부분이 사실 심리적인 요인이라고 합니다. 이런것들이 생각하기에 마음먹기에 달렸고 별것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이 생각에 사로잡혀 불안에 사로잡혀 결국 죽음에 이르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렇게 크지 않은데 그 내면을 지배하고 있는 무서운 두려움 때문에 자살한다는 것입니다. 베르테르 효과라고 그냥 유명 연예인이 죽으면 그걸 따라서 죽기도 합니다. 이것이 죽음 세력의 무서움입니다. 한번 마음에 어두운 생각이 들어오면 그 생각에 사로잡혀 아무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무엇이든지 어둡고 부정적으로 생각하게 합니다. 무엇이든지 할 수 없는 일로 만듭니다. 그 내면에 흘러내린 어두움은 그 인생마저 그 삶마저 슬프고 어둡게 만들어 버립니다. 그 사망의 졸개들이 두려움과 근심입니다.


이에 얼마나 많은 이들이 이 사망권세에 누워 죽은자와 같이 되었습니까! 세상 잔재미와 죄악에 죽어있습니다.허무와 절망에 죽어있습니다.정욕과 음란은 사람을 눕게 합니다. 또 어떤 분들은 자신의 내면 문제로 어떤 분들은 외모에 대한 열등감으로 자의식과 어두움 속에 울고 있습니다. 특히 청년들은 실업으로 울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청년 실업이 심각한데 코로나로 인해서 그 상황이 더 심해졌습니다. 이에 회사에서는 자꾸 나가라고 합니다. 이에 마음에 돌덩이가 있는 것 같아 힘이 듭니다. 현실문제 앞에 그 내면이 두려움과 염려로 떨고 있습니다. 대학생들도 취직 걱정에 도서관 밖을 나오려 하지 않고 있습니다. 청년이지만 3포세대 5포 세대 7포세대. 이미 포기하는 게 더 익숙해져 있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또한 요즘은 애 어른 할것 없이 대부분의 사람들이 게임에 빠져 죽어가고 있습니다. 잠자는 시간을 빼고 하루종일 컴퓨터와 핸드폰 앞에만 앉아 게임에 몰두합니다. 그속에서 자기 원하는 대로 하며 그 속에서 왕이 된듯한 착각에 빠져 삽니다. 힘든 현실을 부정하고 자신만의 세상에서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반항적으로 되고 힘들면 쉽게 포기하는 것이 버릇되었습니다.사실 게임에 별 의미를 느끼지 못할 때도 있지만 그러나 그 중독성으로 인해 나올수가 없습니다.웃고 있는 것 같지만 자신도 스스로 나오지 못해 힘들어합니다.그래서 누워 눈물만 흘릴 뿐입니다.마음이 고통스럽지만 누구하나 자신을 이해해 주거나 이런 자신의 말을 들어주는 이가 없어 힘들어 합니다.게임으로 인해 자제력을 상실하고 우울증, 수면장애, 불안, 현실 부적응으로 힘들어하고 있습니다. pc화면이 내 관입니다. 핸드폰 화면이 내 관입니다. 이미 핸드폰과 컴퓨터가 내 관이 되었습니다. 과연 무엇이 이들을 도울수 있습니까? 무엇이 이들을 다시 살게 할수 있습니까? 말씀뿐입니다. 생명의 주 예수님의 말씀뿐입니다. 예수님의 부활 능력이 이런 이들을 일으켜 세우십니다. 부활의 주님 말씀이 이들로 살게 합니다.

말씀을 보십시오. 오늘 예수님은 말씀을 통해 이렇게 고통하는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이런 나를 불쌍히 여기고 찾아오셨습니다. 찾아오사 내 어두움에 눌려 있는 고통을 보시고 내 내면의 아픔을 아십니다. 두려워 울 수밖에 없는 나. 겁이 나는 나. 누울 수밖에 없는 나의 어려움을 이해하십니다. 완전 포기가 되는 문제 내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문제 완전히 끝나버린 문제 죽음의 문제도 아십니다. 그리고 이 사망의 그늘에 앉아 울고 있는 우리를 보시며 가슴 아파하시고 고통해 하십니다.

이에 나는 할 수 없되 주님이 일으켜 세우십니다. 그리고 “청년아 일어나라” 일어나라 하십니다. ”young man get up“ 이 사망의 세력에서 이 어두움의 세력에서 나를 일으켜 세우십니다. 나는 죽은자와 같이 누워있는데 아무런 소망 없이 죽은자와 같이 살고 있는데 청년이라 하십니다.나는 이미 아무 소망 없이 죽은 자와 같은데 청년이라 하십니다. 나는 두려움과 염려로 살고 있는데 주님께는 청년이라는 것입니다. 나는 세상 잔재미에 무기력과 안일에 죽어있지만 그러나 이 주님안에서는 너는 청년과 같이 다시 푸르른 인생이 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너는 주님 안에서 소망의 존재라는 것입니다. 너는 이렇게 관속에 누워있어야 할 존재나 이렇게 슬픔에 죽어 누워있을 존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살아서 역동하며 싸워야 할 청년이라 하십니다. 그리고 일어서게 하십니다. 부활의 권능으로 함께 하사 내 문제에서 일어나도록 하십니다. 그 부활의 말씀의 권능으로 나를 일으켜 세우십니다. 

시 23:4절이 말했습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설령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짜리도 함께 하십니다. 이 죽음 권세를 이기는 부활의 능력으로 함께 하사 나를 세워 주십니다.

우리도 어떻게 일어납니까? 바로 이 예수님의 말씀 때문입니다. 예수님 안에 있는 이 부활의 권세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나를 찾아오사 부활의 능력으로 함께 해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2천 년 전에 부활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말씀은 지금도 살아서 이를 믿는 자들에게 그 능력으로 역사합니다. 예수님은 하늘에 계시지만 그러나 그 말씀의 권능은 지금도 우리 가운데 남아서 이를 믿고 따르는 자들에게 순종하는 자들에게 역사하는 능력입니다. 그 말씀은 지금도 죽은자와 산자에게도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16절을 보십시오. 이 부활의 예수님으로 인해 사람들 가운데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운명과 절망 가운데서 울던 과부는 죽음 가운데서 아이를 돌려 받았습니다. 아마 아이를 돌려받은 과부는 너무나 기뻐 춤을 추었을 것입니다. 또한 슬픔과 죽음의 어두움속에 통곡하며 관을 나르던 많은 이들도 이제 하나님을 찬양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방금 전만 해도 울고불고 고통해 하던 이들입니다. 그러나 이 부활의 주님으로 인해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습니다. 도리어 하나님이 자신을 돌아보셨다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그 말씀 때문에 죽음에서 살아난 이 청년, 울며 따르던 과부 그리고 상여를 매던 따르는 자들 이들이 도리어 부활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사람이 부활을 영접하면 죽은 자가 살아나고 과부가 기쁨으로 춤을 추며 사람들과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본문의 이 청년은 다시 죽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날에 다시 부활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도 말씀하셨습니다.

요 11:2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약속하셨습니다. 죽음에서의 부활을 약속하셨습니다. 

고전 15:51절이 말했습니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하였습니다. 우리에게는 다시 살 소망 부활의 소망이 있습니다. 또한 이 부활을 믿을 때 우리가 살아서도 현재적으로도 이 부활의 능력을 체험하며 삽니다. 요한복음 11장 25-26절에서도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이땅에서도 이 부활을 체험하며 두려움이 없는 인생을 살아갑니다.


저는 어린 시절부터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왜 살아야 하는지 알 수 없어 힘들어 했습니다. 또 죽으면 그만인 인생 왜 이렇게 힘들게 살아야 하나 허무해 했습니다. 죽음이라는 것 앞에 모든 것이 허무하고 무의미했습니다. 거기에 늘 내 마음에는 해도 안 된다는 생각과 키 작은 열등감에 시달렸습니다. 또 멍게와 같이 여드름 많은 얼굴로 자악 했습니다. 저는 어려운 가정환경으로 가난하고 힘든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못 먹고 못 입는 것보다 더 힘든 것은 내가 왜 살아야 하는지 알 수 없는 그 이유와 목적이었습니다. 눈을 떴지만 어디에 눈을 둬야 할지 몰랐고 심장은 뛰는데 뭘 위해 살아야 할지 몰라 뛰는 심장을 붙잡고 고통해 했습니다.저는 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안고 중학교 시절 두 번이나 자살을 결심했습니다. 아무도 이런 저를 도울 수도 말릴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런 나를 불쌍히 여기셔서 찾아오셨습니다.어린시절 하나님께 이끌려 간 교회에서 펴본 성경책에서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대학교 시절 ubf로 인도하셔서 목자님과의 성경공부를 통해 주님의 부활을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다시 산다는 것, 하나님 나라가 있다는 것을 마음으로 영접하고 뛸 듯이 기뻤습니다. 이 하나님 나라와 부활을 영접하고 전 기뻐서 하늘을 날 것 같았습니다. 이에 기뻐서 늘 울고 다녔습니다. 자다가도 울고 길을 걷다가도 울었습니다. 이는 새 세상을 얻은 기쁨이었습니다. 이는 하늘 아버지가 이 땅에서 죽음과 사망 가운데 고통하던 제게 주시는 하늘 기쁨이었습니다. 그 후로 부활의 주님을 믿기에 무엇에든지 믿고 도전하고 또 순종할 수 있었습니다. 무엇이든지 주님의 부활을 믿으니 믿고 희생할 수 있고 헌신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던 대학교 4학년 시절 저에게 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저는 약 1년간 8부에 인턴 목자로 가 있었습니다. 낮에는 열심히 공부하고 전도를 하고 밤에는 장막에서 같이 모임을 이루었습니다. 그런데 그러던 어느날 장막의 형제 목자들이 말없이 사라지고 저만 홀로 남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혼자 장막 생활을 하던 중 과의 친한 누나가 신상을 비관하여 자살하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평소에 친하게 지내던 사이라 믿기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날 밤부터 장막에 가서 홀로 누워있으면 누군가 창문을 두들기며 저를 부르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큰 바깥 창문 너머로 그 누나의 얼굴이 보이는 듯 했습니다. 방이 지하라 창밖은 시멘트 뿐이었습니다. 저는 너무 무서워 얼른 불을 켰습니다. 그러나 다시 불을 끄면 뭔가 알 수 없는 큰 어두움이 다가오는 듯 했고 창문밖에 누군가 서 있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너무나 두려웠습니다. 이 두려움에 큰 소리를 쳐보고 창문을 열고 밖을 살피고 무서워서 욕도 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센터에서 외우라고 해서 외웠던 부활절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요 11:2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너희가 이것을 믿느냐” 아멘. 저는 이 말씀을 창문을 향해 외치고 얼른 성경책을 펴 이 말씀을 크게 다시 읽었습니다.그리고 얼른 무릎을 꿇고 이 주님을 간절히 붙들었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러고 난 후 다시는 그 환영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다시는 그 어두움이 나타나지 않았습니다.말씀에 힘이 있습니다. 말씀은 살아서 역사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말씀은 권능이 있습니다. 그 말씀이 지금도 힘이 있어서 사망과 두려움 가운데 떨고 있는 우리를 일어서게 합니다. 그 내면의 죽음의 어두움마저 물리쳐 주십니다.


무엇이 나로 죽게 합니까? 무엇이 나를 관속에 누워있게 합니까? 예수님은 우리 연약함을 너무 잘 아십니다. 우리 염려도 더 잘 아십니다. 이에 “청년아 일어나라” 하시며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죽음의 그늘에 누워 고통하는 우리를 부르시는 생명의 음성입니다. 나로 살게 하시고자 나를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우리를 일어서게 하십니다. 이 사망과 두려움에서 내 실패와 좌절에서 주님이 일어나게 하십니다. 이 주님이 나를 나의 부끄러운 일에서 일어나게 하십니다. 이 부활의 주님이 게임이나 죄악이 아니라 주님과 그 거룩한 사명을 위해 일어나게 하십니다. 이 주님의 말씀이 세계선교와 하나님이 주신 비전을 향해 일어나게 하십니다. 저희가 부활의 주님을 힘입어 주님이 맡기신 복음 역사와 생명구속 역사를 위해 일어나기를 기도합니다. 나의 소시민적인 꿈이 아니라 거룩한 꿈을 향해 하나님을 행해 일어나기를 기도합니다.


누구든 우리는 주님 안에서는 청년입니다. 저희가 주님의 부활을 굳게 붙잡고 청년과 같이 주님의 거룩한 사명을 위해 힘차고 고동치는 자로 다시 살기를 기도합니다. 이 부활의 주님을 힘입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인생이 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