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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020년 여름특강 제 2 강 `예수님의 크신 사랑`(요21:1-17)2020-08-24 0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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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여름특강 제 2

 

예수님의 크신 사랑

 

말씀 / 21:1-17

요절 / 21:15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다른 복음서와는 달리 요한복음은 그 끝부분에 디베랴 바다에서 있었던 부활하신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의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본문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영육간에 실패한 베드로를 찾아오셔서 그의 아픔을 어루만지시고 그를 인격적으로 만나주사 새롭게 세워주시는 사건입니다. 특별히 오늘 말씀은 베드로를 향한 예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를 잘 나타내주고 있습니다. 강한 사람이란 약한 사람에게 폭력을 쓰는 자가 아니라 약한 사람을 도와주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쓰러진 베드로를 일으켜 세워주시듯 변함없는 사랑으로 우리를 일으켜 세우시는 주님을 만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2절을 보십시오. 오늘 말씀은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사건으로 예수님은 다시금 디베랴 바다에서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습니다. 요한복음 20장에는 예수님께서 부활 후 나타나신 첫 번째와 두 번째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안식 후 첫날 저녁이었는데 도마가 부재중이었을 때였습니다. 그 후 팔 일 뒤에는 도마가 함께 있을 때 그를 위해 나타나셨습니다. 요한복음에는 종종 도마가 부활 사건과 관련해서 나타나는데 11장에서 나사로를 살리신 사건에도 등장합니다. 그리고 오늘 말씀에서도 베드로 바로 다음에 특이하게 도마가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도마가 매우 의심이 많은 사람이었음에도 부활의 사건에 등장한 것은 우리에게 예수님의 부활을 더욱 확실하게 증거해주며 우리로 하여금 그것을 믿게 해줍니다. 예수님은 진실로 살아나셔서 제자들을 약속대로 갈릴리에서 만나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제자들을 인격적으로 만나주사 그들의 아픈 마음을 위로해주시고 부활신앙을 확실하게 하시며 사명을 위해 준비되게 하고자 하셨습니다.

 

3절을 보십시오. 같이 읽겠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니 그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그 날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그 때 전직 어부였던 시몬 베드로는 물고기를 잡으러 가기로 합니다. 다른 제자들도 동행하고자 했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한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지만 아직 무엇을 해야 하는지 확신이 서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부인한 베드로는 수제자로서의 자신감을 잃었고 본래 어부였던 그는 그냥 평범한 어부로 돌아가고자 했습니다. 주름에 패인 그의 눈에서 옷깃으로 한 방울의 눈물이 떨어졌습니다. 밤은 그림자가 비추이지 않음으로 물고기를 잡기에 적합한 시간입니다. 7명의 장정들이 밤새도록 오랜 시간 배에서 고기를 잡기 위해 땀흘리며 고군분투했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어땠습니까? 아무 것도 잡지 못했습니다. 아마추어도 아니고 한 마리 정도는 우연히 잡을 수도 있었을텐데 완벽하게 아무것도 잡지 못한 것은 로또에 당첨될만큼 정말 기가 막힌 상황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영적인 일에 실패했는데 육적인 일도 잘 되지 않았습니다. 우리도 이따금 크고 작은 실패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큰 일에 실패에도 작은 일이 잘되면 마음의 작은 위로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큰 일에 절망해서 마음이 아픈데 사소한 일도 잘 따라와 주지 않으면 완전히 버림받은 것 같고 원망스럽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의 삶에 예수님을 통해 어떤 획기적인 변화가 이루어지게 되었습니까? 4절에서 6절을 보십시오. 밝아오는 새벽에 바닷가에 서 있는 누군가가 어슴푸레하게 보였습니다. 그 누군가가 제자들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여보게들, 어디 고기 좀 잡았어?” 그들은 한 마리의 고기도 없었고 이미 날은 새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어 보였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상황에서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져 고기를 잡으라는 명령에 그들은 순종해 그물을 던졌습니다. 그러자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파닥 파닥 뛰는 물고기들이 너무 많아 들 수 없을 정도로 고기가 잡혔습니다. 11절을 보면 153마리를 잡았는데 한 마리당 1kg라고 해도 무려 153kg였고 고기들이 안간힘을 쓰고 있었기 때문에 제자들이 들어올리기는 역부족이었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지금까지 해변에서 말씀하시는 예수님이 누구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 분의 명령에 순종했을 때 그 분이 예수님이시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들은 언제 부활하신 주님을 느끼게 됩니까? 우리는 삶에서 종종 낙심하게 됩니다. 이 때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낙심한 우리의 현실을 아시고 현실의 작은 삶에서 함께 하시는 것을 다양한 방법으로 나타내십니다. 이것이 반드시 큰 승리와 기적이 아니라 하더라도 나의 삶에 찾아오셔서 어루만져주시는 것을 느낄 때 낙심한 마음이 사라지고 고난 속에서도 위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절망에 처한 우리들을 불쌍히 여기사 고난으로 인해 죽지 않게 하시고 바닥에서 건져올려 살려주십니다.

 

요한이 주님이시라말하자 베드로는 이 말을 듣자마자 겉옷을 두르고 바다로 뛰어 내려 예수님께 헤엄쳐 갔습니다. 배를 타고 가는 것이 더 빠른데 굳이 헤엄쳐서 가는 것을 택했고 겉옷을 벗고 헤엄치는 것이 더 자유로운데 주님께 대한 예의와 경외심으로 옷을 입고 헤엄쳐 갔습니다. 비록 머리는 요한이 더 좋았지만 행동은 그가 항상 먼저였습니다. 그는 신앙고백을 할 때도 제자들 중에 가장 먼저 나서서 대답했습니다. 바다 위로 걸어오시는 예수님께 자신도 물 위로 오라 하소서 말했습니다. 베드로는 항상 제자들 중에 1등이었고 그것이 주님을 향한 그의 마음이었습니다. 비록 세월이 흘렀고 현재 실패감과 실의에 빠져 있지만 지금도 예수님을 향한 마음만은 전혀 녹슬지 않아 있었습니다. 실패한 갈릴리 시골 어부였던 그를 맨처음 만나주신 주님을 위해 고기와 배를 버리고 주님을 따랐을 때의 주님을 향한 마음은 그 처음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는 주님께서 붙잡히실 때 세 번이나 주님을 부인한 자신을 찾아오신 부활하신 예수님께 그의 충성과 열정을 보여드리고자 몸부림쳤습니다.

 

육지에 올라오니 춥고 배고픈 그들을 위해 무엇이 마련되어 있었습니까? 지글지글 타는 숯불에 생선과 떡이 누렇게 구워지고 있었습니다. 해변에 바비큐파티가 열렸습니다. 예수님은 와서 조반을 먹으라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머뭇거리는 제자들에게 친히 떡과 생선을 가져다주셨습니다. 밤새 그물질로 지친 그들의 허기진 배가 따뜻한 식사로 채워졌습니다. 예수님의 모습은 이전에 그들과 함께 생활하시던 예수님 바로 그 분이었고 이는 예수님이 분명히 다시 살아나셨음을 알게 해주었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그들을 부드럽고 따뜻한 어머니의 사랑으로 사랑하시는 것을 느끼게 해주었습니다. 열왕기상 19장을 보면, 엘리야가 사역을 하다 지쳐 탈진상태에 있었고 죽기를 구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천사는 자신에 대해서 자책하고 자괴감가운데 있던 엘리야를 어루만지며 숯불에 구운 떡과 물한병으로 섬겨주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힘이 없어 들어 눕자 또 다시 어루만지며 일어나 먹도록 도와주었습니다. 이것은 양을 돌보는 목자의 사랑과 같습니다. 우리 목자님들도 현재도 예수님의 양이긴 하지만 UBF양일 때 이러한 목자님의 따뜻한 이해와 섬김을 받은 경험을 누구나 가지고 있습니다. 목자되신 예수님은 제자들을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연약한 우리들도 힘과 용기를 얻을 때까지 끊임없는 사랑과 긍휼로 다시금 찾아오시고 우리의 빈그물을 채우시며 우리의 영육간의 필요를 섬세하게 도우시는 분입니다.

 

그들이 예수님께서 베풀어주신 아침 식사를 맛있게 먹은 후였습니다. 이윽고 예수님은 시몬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15절 말씀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예수님은 베드로가 주님을 다른 제자들보다 더 많이 사랑하는 것을 아주 잘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마음 중심을 아셨습니다. 거칠고 서툰 행동보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진심만을 귀하게 받아주셨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볼 때 그는 말보다 행동이 앞서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왜 그렇게 튀냐는 소리를 듣고 사고도 많이 쳤습니다. 그는 다른 제자들보다 예수님께 인정을 받고 싶었습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에는 최고가 되고 싶었습니다. 다른 건 몰라도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은 내가 최고야라는 자부심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에게 베드로야, 너는 다른 제자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는구나!” 하는 칭찬을 듣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대제사장의 뜰에서 예수님을 부인하며 보기 좋게 망가졌습니다. 이런 그는 수제자로의 자존심에 깊은 상처를 받았습니다. 영적 자신감을 완전히 상실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런 그에게 네가 여기 있는 제자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이 질문을 통해 다른 제자들 앞에서 그를 높이 세워 주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인정해주신 것입니다. “베드로야, 너는 변함없이 하나 뿐인 나의 수제자란다라고 말씀하신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질문에 대한 베드로의 대답이 어떠합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사랑의 단어는 아가페로 완전한 사랑을 의미하지만 베드로는 필레오 곧 불완전한 사랑을 뜻하는 말로 답합니다. 과거의 베드로라면 자신있게 사랑한다고 대답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완전하지 못하고 연약한 자신을 깨닫고 깊이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겸손하게 답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과거 그는 자신이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사실은 그가 아니라 예수님이 그를 먼저 사랑하신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십자가에서 드러났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위해 십자가에서 목숨을 주님으로 그를 사랑하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더러운 죄를 자신의 보배로운 피로 씻어주셔서 한없는 사랑과 용서를 나타내셨습니다. 비천한 그에게 세상 누구도 줄 수 없는 사랑을 베풀어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따뜻한 섬김에 감격하여 사랑고백하는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내 어린양을 먹이라는 말씀으로 사명을 맡겨주셨습니다. 어린 양은 더욱이 절대적으로 목자가 필요하고 목자의 도움 없이는 생존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양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피로 사신 대상입니다. 결코 아무에게나 맡길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대상을 베드로에게 맡기십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이는 실수와 허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를 결코 버리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배신자로 낙인찍힐 수 있는 그를 전폭적으로 신뢰하며 믿어준다는 것입니다.

 

16절에서 예수님은 다시금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질문하십니다. 두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는 이 질문은 예수님이 수단인지 목적인지를 묻는 질문입니다. 그는 앞으로 목자의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유혹과 박해 속에서 초대교회를 형성하는 사명을 감당하게 됩니다. 이때 그는 끊임없이 세상과 주님 사이에서 갈등에 처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그는 세상이나 혹 다른 것이 아닌 주님을 선택해야 합니다. 그러나 과거 그는 계집종 앞에서 주님을 부인했었습니다. 그는 죽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표면적으로는 죽음이 두려웠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더 깊이 들어가보면 그가 주님보다 세상 영광을 사랑했음을 보여줍니다. 어떤 대상을 목적으로 두는지 수단으로 두는지는 목적과 수단이 충돌할 때 여실히 드러나게 됩니다. 그는 세상 영광을 사랑했기에 눈치를 보고 소심해졌습니다. 예수님을 목적에 두지 않고 자신의 영광을 위한 수단에 두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얻는 그 무언가를 사랑하게 되면 결국 예수님을 버리고 부인할 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을 끝까지 따라가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목적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때 단순하고 담대해질 수 있습니다. 이것 저것 계산하지 않고 끝까지 예수님을 따라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양을 위해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다른 것보다 그를 순수하게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베드로를 향한 사랑처럼 그가 주님을 목적으로써 사랑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세 번째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17절 말씀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이번 질문에서 예수님은 불완전한 사랑으로 질문하셨고 베드로도 여전히 불완전한 사랑으로 답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사랑의 한계를 아셨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사랑의 분량에 대등한 사랑을 하고 싶지만 언제나 주님 앞에 서기에 부끄러운 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예수님께서 그에게 질문하신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부모님이 자녀에게 사랑 고백을 받는 것과 같습니다. 부모는 자녀의 사랑이 불완전한 것을 압니다. 그러나 사랑한다고 고백할 때 기뻐합니다. 예수님은 오병이어와 같은 그의 사랑도 받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바라신 것은 거창한 능력이나 완벽함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마음이 담긴 작은 사랑고백이었습니다.

 

목자의 삶을 살아갈 때 우리는 나 자신이 예수님을 따르기에 부족한 자가 아닌지에 대한 의구심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런 우리에게 여전히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물으시며 그렇다고 하면 내 양을 치라말씀하십니다. 주님의 일을 섬기는 것은 다양한 요구가 주어지며 많은 일들을 해야 하지만 예수님을 향한 개인적인 사랑 하나만 있으면 할 수 있습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예수님의 부르심과 사명을 따르기에 전혀 부족하지 않은 자로 써주십니다. 목자의 삶에는 때로 고난과 어려움이 닥칩니다. 실패하고 절망하고 모욕과 상처를 받기도 합니다. 그로 인해 지치고 쓰러질 수 있습니다. 자신의 삶에 아무 것도 남지 않은 것 같이 느껴질 수 있습니다. 단지 사명인의 삶 뿐 아니라 우리의 개인적인 삶에도 이해할 수 없는 어려운 일들이 닥치고 직장일이나 인간관계로 상처 받고 눈물 흘릴 일이 많습니다. 급기야 하나님께 불평하고 원망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를 향한 사랑으로 나에게 물으십니다. 너는 나를 사랑하니?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우리가 과거의 죄 때문에 고통스럽다면 예수님께 진심으로 우리의 신앙을 고백하면 예수님은 기꺼이 용서하시고 일어나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인생이 한 번 부르심을 받고 끝까지 한번도 실수하지 않고 제자의 삶을 완주하는 이상적인 모습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부르심은 허물많은 인간에게 단회적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끝까지 사랑과 용서의 손길로 우리를 어루만져 주시고 다시금 사랑을 고백하게 하십니다. 이를 통해 수없이 버림받아 마땅한 우리를 용서해주시고 사명을 새롭게 하여 주십니다.

 

우리가 어떻게 주님을 사랑할 수 있습니까? 주님을 사랑하는 것은 주님의 양을 치는 것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다면 양을 쳐야 합니다. 예수님은 곧 승천하실 것입니다. 다시는 이 땅에서 직접 예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대신 양은 그분께서 피로 사신 가장 소중하게 여기시는 존재입니다. 예수님은 양을 우리에게 부탁하고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진실로 사랑한다면 그 사람은 양을 먹일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과 같습니다. 주님을 사랑하기 위해 물질을 드릴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사랑합니다! 고백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을 진정 사랑한다면 양을 걱정하시는 주님의 마음을 헤아려야 합니다. 주님의 양들은 현재 어디로 갈지 몰라 방황하고 있습니다. 잃어 버린 바 되었고 이리 떼에게 잡아먹혀 죽을 수 있습니다. 마땅히 주를 사랑한다면 안타까워하실 예수님을 생각하며 이 주님의 부탁을 외면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저는 초등학교 때부터 교회를 다니며 하나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남다른 열정으로 예배에 참여하며 달란트를 모으고 또 매일 학교가기 전 성경을 읽었습니다. 십계명을 외우며 다른 친구들처럼 불량한 행동을 하지 않고 모범적인 삶을 살고자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만화책을 보거나 게임을 하는 등 쾌락을 추구하는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교회를 다니며 적어도 하나님의 뜻을 위해 살고자 노력하기 때문에 죄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사춘기 시절 빠지게 된 정욕의 죄로 인해서 나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죄의 쾌락을 즐길 때 저는 애써 하나님을 부인했습니다. 구제불능이라는 생각에 고통스러워 했습니다. 또 심판에 처할 것에 대한 두려움으로 작은 소리에도 가슴이 철렁 내려 앉았습니다.

 

저는 간절히 저를 구원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드렸습니다. 대학에 입학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목자님을 통해 저를 찾아오셨습니다. 목자님은 대학생활이 낯설기만 한 저를 친절과 겸손 그리고 사랑으로 대해주었습니다. 선배 목자님들의 영적인 모습을 볼 때 존경스럽고 하나님께서 참으로 살아계시고 역사하시는 것을 선배님들을 통해서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성경공부를 하며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고자 했고 여름수양회에서 나의 구원자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저는 죄인인데 왜 하나님이 나를 살려두시고 죄를 심판하시지 않으시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제서야 하나님께서 제가 죄를 짓고 사는 그 오랜시간 동안 저를 기다리고 계셨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여러 목자님들의 진실된 소감을 들으며 저도 십자가 말씀을 듣고 소감을 쓰면서 저의 죄인됨을 고백했고 제가 얼마나 큰 죄인인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제서야 예수님이 다른 흉악한 죄인이 아니라 바로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나를 위해 돌아가셨다는 말을 할 때마다 감사와 감동의 눈물이 났습니다. 다음날 수양관에서 아무도 일어나지 않은 이른 시간에 일어나 본문 말씀을 읽는데 이 말씀에서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는 예수님이 마치 저에게 말씀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이 말씀은 저에게 들려주시는 예수님의 사랑의 음성이었고 저는 그것을 도저히 거부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큰 사랑은 저로 하여금 주님을 사랑하게 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저로 하여금 지금까지 제가 사랑하던 게임과 정욕과 쾌락적인 삶을 버릴 수 있게 했습니다. 그리고 과거 삶의 방향이 나를 위하던 데에서 하나님을 위한 삶으로 전환되게 하셨습니다. 나를 구원하신 주님의 은혜에 보답하고 주님을 위해 사는 삶을 살고자 다짐하게 되었습니다. 과거에는 주중에는 죽은 사람처럼 지내며 주말만 기다리며 살았는데 이제는 매일 매일이 활기차고 즐거운 나날들이 되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그 사랑을 가지고 캠퍼스를 누비며 열심히 양을 먹이는 삶을 살며 주님의 구원의 역사에 쓰임받는 은혜도 입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목자의 삶을 살아가며 여러 사람들의 인정과 칭찬을 듣게 되자 점차 목자의 삶을 사는 동기가 모임 안에서 사람들의 인정을 받기 위한 것이 되어 갔습니다. 다른 사람과 경쟁하고 시기하는 불순한 마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빈그물 뿐이었던 제자들처럼 열심히 그물질을 함에도 원하는데로 잘 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삶에서 하나님에 대한 원망과 불평이 쌓여갔습니다. 여기에 더해 2008년 군전역후 풀타임 목자로 한성대를 섬기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책임감이 강한 저에게 있어 책임을 져야 하는 위치가 큰 부담과 짐이 되었습니다. 역사 내에 이런 저런 문제가 생길 때마다 저는 내 잘못인 것 같아 괴로워하고 사람들의 평가에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2018년에는 아이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질병에 걸리면서 양이 아니라 아이를 돌보아야만 하는 상황에 처했습니다. 이것으로 인해 저는 목자로서 제 역할을 제대로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동역자들과 양들을 위해 기도지원을 해야 할 제가 오히려 다른 분들의 도움을 받고 기도지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영육간에 실패한 것 같고 영적 자존감도 낮아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목자의 삶을 살고자 하는 자신감과 의욕도 떨어졌습니다.

 

주님은 오늘 말씀을 통해 실의에 빠진 저의 마음을 아시고 인격적으로 저를 다시금 찾아와 주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하시는 예수님은 저의 실존을 속속들이 다 보고 계십니다. 자존감이 낮아져 있는 저이지만 예수님은 저의 삶의 모습이나 결과가 어떠한지를 보지 않으시고 저를 인정해주십니다. 저에 대한 부르심을 돌이키지 않으십니다. 저의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서 저를 무조건적으로 사랑해주십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끝이 없어서 제가 여러 번 실수하고 잘못한다 해도 다시금 찾아오십니다. 또한 주님의 사랑은 바다와 같이 한없이 넓어 스스로를 용납할 수 없을 정도의 못난 모습이라 하더라도 저를 품어주십니다. 이 사랑으로 태초부터 영원까지 저를 택하시고 든든하게 붙들어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제가 과거의 죄와 허물에 메여있지 않고 주님을 향한 사랑으로 부족하지만 오병이어 같은 저의 진심과 사랑을 드리기를 기도합니다.

 

결론입니다. 주님의 사랑은 완전한 사랑입니다. 반면 베드로의 사랑은 불완전합니다. 그럼에도 주님께서 우리에게 사랑의 고백을 원하시는 것은 주님의 완전한 사랑 안으로 우리가 들어오게 하심입니다. 이때 우리의 죄와 허물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사랑 안에서 우리는 세우심을 입어 주님을 향한 사랑으로 맡기신 양들을 사랑하게 됩니다. 우리들이 실패하고 허물진 우리를 여전히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크신 사랑을 믿음으로 양을 먹이는 목자의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