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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022년 성탄 3강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누가복음 2:1-14)2022-12-26 0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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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성탄 3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말씀 / 누가복음 2:1-14

요절 / 누가복음 2:11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메리 크리스마스! 우리 구주의 성탄을 감사하고 찬송합니다! 이 시간 예수님의 탄생의 은혜와 기쁨이 여러분에게 충만하기를 기도합니다! 저자 누가는 본문에서 예수님의 탄생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탄생이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라고 합니다. 2,000년 전에 예수님이 나신 것이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일까요?

 

I. 구유에 누인 아기

 

당시는 가이사 아구스도가 천하를 다스릴 때였습니다. 그는 로마의 초대 황제로서 본명은 옥타비아누스입니다. 그의 양아버지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줄리어스 시이저입니다. 당시 로마는 엄청난 제국이었습니다. 앗수르, 바벨론, 페르시아, 그리스를 이어 세계의 패권을 잡은 제국이었습니다. 로마가 차지한 땅은 그 당시 문명권으로 알려진 모든 지역이었습니다. 그 중심 도시는 로마였습니다. 로마의 왕좌에서 온 세상을 통치하는 황제, 그가 가이사 아구스도였습니다. 그의 호적하라는 명령이 온 제국에 떨어졌습니다. 이는 인구조사를 하여 군대징집과 인두세 징수를 원활하게 하고자 함이었습니다.

 

4절입니다.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이므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요셉은 다윗의 후손이었으므로 호적을 하기 위해 베들레헴으로 올라갑니다. 다윗은 예수님 탄생 약 천 년 전에 베들레헴에서 태어났고, 그곳에서 양떼를 돌보며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베들레헴은 "떡집"이라는 뜻입니다. 옛 이름은 에브랏, 또는 에브라다로 '풍성하다'는 뜻이었습니다. 그곳은 비옥한 농경지와 풀로 뒤덮인 구릉들에 둘러 쌓여있는 작은 마을이었습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사마리아를 우회하면서 150킬로 정도를 갔을 것입니다. 만삭인 아내를 데리고 갔으니 더욱 많은 시간이 들었을 것입니다. 요셉은 당시 나사렛에서 목수 일을 하였습니다. 하루 일해 하루 먹고 살았습니다. 호적명령이 없었다면 가게 문을 닫고 베들레헴까지 족히 열흘이나 걸리는 여행을 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만삭이 된 마리아도 베들레헴에 올 이유가 전혀 없었습니다. 단지 그들은 힘없는 식민지 백성으로 황제의 명령 때문에 오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하나님의 놀라운 손길이 있었습니다. 아구스도의 호적명령이 있기 약 700년 전 미가 선지자가 예언하였습니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 (5:2) 베들레헴이 비록 작은 고을이지만 장차 그곳에서 이스라엘의 왕이 나신다는 것입니다. 그 분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이라고 합니다. 곧 영원 전 부터 계신 분이 한 아기가 되어 베들레헴에서 나신다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미가서 5:5절은 "이 사람은 평강(Peace)이 될 것이라"라고 합니다. 가이사 아구스도는 자신이 평강(Peace)이라고 말했습니다. 자기가 다스리는 로마는 평화롭다고 주장했습니다. (PAX ROMANA) 그러나 진정한 평강의 왕이 베들레헴에서 나십니다.

 

이상에서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예언의 말씀을 이루시기 위해 가이사의 호적명령을 쓰셨다는 것입니다. '호적하라'는 가이사의 명령 뒤에는 예언의 말씀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예언대로 베들레헴에 나게 하심으로 모든 사람이 그 분을 믿도록 하기 위함이셨습니다. 하나님은 온 세상 역사의 주관자이십니다. 우리가 이를 믿을 때 세상의 모든 사건들을 하나님의 섭리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간의 전쟁, 미국과 중국의 패권 경쟁, 북한의 핵 개발과 위협 이런 모든 것들도 다 하나님의 주권 하에 있습니다. 이런 강대국들이 막강하게 보이지만 하나님 보시기에는 통의 한 방울 물 같고 저울의 작은 티끌 같습니다. 떠오르는 먼지 같습니다. (40:15) 하나님은 이런 세상을 보고 말씀하십니다.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허사를 경영하는고!" (2:1) 하나님은 세속사를 섬세히 주관하사 세울 자를 세우시고 폐할 자를 폐하십니다. 모든 지도자는 하나님이 세우시고 사용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공중의 새 한 마리도 떨어지지 않습니다. 생사화복과 세상의 역사를 주관하시는 전능하시고 선하신 하나님을 믿을 때 우리는 세상의 상황에 요동하지 않게 됩니다. 우리가 범사에 하나님께 감사하며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에 온전히 충성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6,7절입니다. "거기 있을 그 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요셉의 아내 마리아의 배가 불렀고 언제 해산할지 몰라 불안해하던 요셉은 얼마나 빈 방이 있기를 원했겠습니까? 하지만 빈 방이 없었습니다. 그래도 찬 이슬을 맞지 않기 위해서 찾아간 곳이 마구간이었습니다. 아기를 낳아야 되는 긴박한 순간이 되었습니다. 어떻게 하겠습니까? 짐승의 먹이를 담아주던 구유를 털어 가지고 적당히 깨끗이 한 다음, 거기에다가 몸에 걸치고 온 헌 천을 깔고 그 구유에다가 아기를 낳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요셉은 부랴부랴 옆에 있는 집으로 달려가 물을 데워 양동이에 담아 와서 아내를 섬기고 그 아이를 씻겼을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세상에 오셨을 때 태어나는 장면이었고, 장소였습니다. 성자 하나님이 마구간에서 나시다니! 마구간이 어떤 곳입니까? 말과 양들이 오락가락 하면서 배설한 그 오물들의 악취가 가득한 곳입니다. 천장에는 거미줄이 여기저기 매달려 있으며 쥐들이 들락거리는 어두침침한 곳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마구간을 그 아들의 출생 장소로 선택하신 것입니다.

 

시골에서 자란 분들의 말에 의하면 외양간은 정말 열악한 곳이라고 합니다. 냄새가 지독하여 거기에 엎드려서 무엇을 한다는 것은 상상을 할 수 없고, 거기에 눕는다는 것은 차라리 죽는 편이 나을 정도의 일입니다. 오만 가지 벌레들이 기어 다니는 곳입니다. 그곳에 성자 하나님이 태어나셨습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셨기에 그렇게 해서라도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아니하면 안 되셨을까요? 예수님은 "큰 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불렸고, "다윗의 영원한 왕위를 이어받을 왕"이며, "무궁한 나라를 다스릴 왕"이었습니다. 엘리사벳이 그를 하나님이라 부르고, 태중에서 세례 요한은 온몸으로 뛰며 즐거워했던 메시아입니다. 사가랴의 노래 속에서 아브라함과 다윗과 맺으신 하나님의 언약을 성취하러 오신 메시아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이 태어나셨을 때 그 얼굴이 광채가 난다거나 거룩하게 보인다거나 그런 말이 없습니다. 주변 사람들과 부모들의 반응이 어떠했는지에 대한 설명도 전혀 없습니다. 그저 누가가 기록하고 있는 상황은 '강보' '구유' 뿐입니다. 예수님은 어느 아기라도 초라하게나마 있을 수 있는 장소도 얻지 못하셨습니다. 실상 예수님은 태어나실 때부터 머리 둘 곳 없는 삶을 사신 것입니다. 찰스 스펄젼은 말했습니다. "예수님이 머리를 누이시고 편히 쉬신 때는 무덤에 계셨던 3일 뿐이었다."

 

예수님이 마구간에서 나신 사실을 볼 때 우리는 큰 위로를 받습니다. 그의 낮아지심에 겸손해집니다. 여러분 중에 혹시 가난하고 운명적인 가정환경 가운데 자라신 분들이 있습니까? 말구유에 나신 예수님을 생각해보십시오. 혹시 현재 자존심의 상처를 입은 분, 무시를 받고 지내시는 분이 있으신가요? 말구유에 나신 예수님을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이 예수님 앞에 설 때 아무런 할 말이 없습니다.

 

얼만 전에 우리나라를 방문한 적이 있는 사우디의 빈살만 왕세자는 수십 대의 스포츠카를 갖고 있습니다. 그의 차 중에는 황금으로 만든 벤츠도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그의 표적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표적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강보에 쌓여 구유에 누인 것이 표적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의 표적, 제자의 표적, 기독교의 표적이 무엇입니까? 황금입니까? 성공과 명예입니까? 아닙니다! 낮아짐과 희생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자기 영광을 구하며, 잘못된 기복주의, 번영주의 신학에 빠져 살아갑니다. 그러나 개인의 세상적인 축복과 영적인 성공은 기독교와 상관이 없습니다. 기독교는 말구유에 낮아지진 예수님을 배우고 그의 삶을 따르는 것입니다. 우리 오지에 계신 선교사님들은 예수님의 이러한 성육신에 큰 은혜를 받습니다. 현지에서 살아가는 것 자체가 고난이지만 예수님의 나심을 통해 큰 힘과 위로를 얻고 현지 역사를 섬기십니다.

 

우리 모임의 중요한 정신 중의 하나가 말구유 정신입니다. 말구유 정신은 무조건 가난한 삶을 살라는 것은 아닙니다.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오직 하나님께 순종하여 끊임없이 낮아지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높은 곳으로 높은 곳으로 가고자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말구유에 나신 예수님을 본받아 일생동안 낮은 곳으로, 더 낮은 곳으로 가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낮아진 자들을 들어 쓰십니다. 이를 통해 오직 인간의 모든 자랑이 가려지고 하나님의 영광만이 드러나게 하십니다. 이 성탄에 겸손히 말구유에 오신 우리 예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그러면 이 성탄의 소식이 누구에게 가장 먼저 전해졌습니까? 8,9절입니다. "그 지역에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추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구주 탄생 소식이 제일 먼저 왕궁에 있던 헤롯에게 전해져야 될 것 같습니다. 이스라엘 공회나 제사장들에게 알려야 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주의 사자는 제일 먼저 목자들을 찾아갔습니다. 목자들은 당시 가장 천히 여김 받는 직업을 가진 가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밖에서 자기 양떼들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10절입니다.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온 세상 사람들에게 미치는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전하겠다는 것입니다. 그 소식이 무엇입니까? 11절입니다.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이 소식은 첫째는 온 백성에게 미치는, 둘째는 큰, 셋째는 기쁨의 좋은 소식입니다. 한 사람도 빼 놓지 않고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는 소식, 그리고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소식, 역사상 가장 기쁘고 좋은 소식! 그 소식을 알려주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구주가 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구주가 나신 것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큰 기쁨의 좋은 소식입니까? 어째서 그것이 2,000년이 지난 지금의 나에게까지 좋은 소식이 된단 말입니까?

 

이는 구주께서 모든 인간에게 있는 가장 심각한 문제를 해결해주시기 때문입니다. 모든 인간에게 있는 가장 심각한 문제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그것이 죄문제요 그로 인한 사망 문제라고 합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21은 말합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죄에서 구원한다고요? 우리가 왜 죄에서 구원을 받아야 되죠? 죄란 무엇입니까? 양심의 가책을 말하나요? 사망이 문제라니요? 누구나 다 때가 되면 죽는 거 아닌가요? 그것이 모든 살아있는 생명체의 당연한 운명 아닌가요?

 

성경은 왜 죄가 모든 사람의 근본 문제인지를 가르쳐 줍니다. 하나님이 맨 처음에 창조하신 세상에는 죄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 하나님의 계명의 말씀을 거역하였습니다. 이 반역으로 죄라는 것이 세상에 들어왔습니다. 마치 컴퓨터 바이러스가 내 PC 에 들어온 것과 같습니다. 이로 인해 세상에는 온갖 종류의 죄의 결과물들이 파생되었고 인간은 마치 바이러스 감염된 프로그램같이 되어 제대로 작동이 안 되게 되었습니다. 죄로 인해 사람들은 상실된 마음이 되었고 죄의 지배를 받게 되었습니다. 죄의 권세 아래 살다가 죄의 결과인 죽음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단지 육신의 죽음만이 아니라 영혼의 죽음도 말합니다. 곧 우리 영혼이 영원히 하나님과 분리되는 형벌을 의미합니다. 이 세상에서 죄의 지배를 받고 있는 사람은 아무리 선한 일을 하고자 해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탄식하였습니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 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이것이 인간의 실존입니다.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에게 구원자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천사의 메시지를 다시 들어보십시오.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오늘 나신 분은 구주이십니다. 우리를 구하는 주님이십니다. 그 분이 그리스도 메시아이십니다. 어떻게 그 분이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나요? 그 분은 여러분과 저를 위해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십니다. 그 피로 우리들의 죄의 값을 치러주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우리가 이 예수님을 믿을 때 나의 죄와 사망의 문제가 해결되고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요한복음 3:16절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누구든지 독생자 예수님을 믿으면 죄사함을 받고 영생을 얻습니다. 사형수가 사면을 받는 것보다 더 감격에 찬 일은 없습니다. 죄로 인해 영원한 형벌을 받을 우리가 예수님으로 인해 죄사함과 영생을 받게 된 것은 우리 인생에 임한 최고의 기적입니다. 성탄절은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모든 죄의 세력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성자 하나님이 이 땅에 오신 날입니다. 우리에게 죄사함과 영생의 은혜를 주시기 위해 하늘의 영광 버리시고 비천한 구유에까지 낮아져 오신 우리 예수님께 감사와 찬송을 드립니다.

 

II. 기뻐하는 사람들

 

이 예수님의 나심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입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세상 사람들이 기뻐했습니까?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을 놓고 기뻐 춤을 추며 그를 영접했습니까? 아닙니다. 기뻐하고 영접한 사람은 도대체 몇 명이나 되었습니까? 너무나 소수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기록된 성탄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사람의 숫자는 불과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소수입니다.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기뻐하고 영접한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세례 요한의 아버지 어머니인 사가랴와 엘리사벳은 어떤 사람입니까? 제사장이기는 했지만 평범한 제사장이었습니다. 그들은 평생 자식이 없어서 외롭게 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당시 자식이 없는 것은 하나님의 벌을 받은 것으로 보았습니다. 자랑할 것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요셉이나 마리아도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깡촌 나사렛에서 태어나 평생 목공소를 경영하면서 살 촌부들이었습니다. 목자들은 어떠합니까? 가장 낮은 천민 중에 하나였습니다. 나중에 예수님의 탄생을 기뻐한 시므온과 안나는 어떠합니까? 다 초라한 사람들이요, 평생 외롭게 산 사람들입니다. 이런 몇몇 사람들이 예수님이 세상에 오실 때 환영하고 기뻐했다 그 말입니다. 모두가 어떤 사람들입니까? 세상적으로 말하면 천대 받는 사람이요, 무시당하는 사람들, 세상에서 자랑할 만한 것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하고 기뻐했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우리가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도 좋은 일입니다. 잘 사는 것, 부유하게 사는 것, 하나님의 축복의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에게 유명해 지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한 가지를 알아야 합니다. 세상적인 것들로 가득한 사람이 되어서는 세상에 오신 예수님을 내 마음에 모시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현재 잘 산다 해도 마음을 비워야합니다. 세상일에 몰두하며 편안하고 안일하게만 살고자 하는 마음을 돌이켜야 합니다. 성공하고 유명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하나님 앞에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말구유에 누우신 예수님을 보게 될 것이고, 그분이 나를 구원하기 위해 세상에 오셨다는 사실 앞에 감격하게 될 것입니다. 기뻐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경배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크리스마스를 100번을 맞아도 우리는 기뻐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오심을 기뻐할 수 있는 사람은 교회 안 보다 교회 밖에 더 많이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인생의 그늘진 곳에서 오늘도 눈물을 흘리며 밤을 지새는 사람들이 세상에 많기 때문입니다. 종로1부의 한 사모님이 동사무소 사회복지 쪽에서 일을 시작하면서 쪽방촌 노인들을 살펴보니 사람이 어떻게 이런데서 사는가 할 정도였습니다. 그곳에 있기가 무서움을 느낀다고 했습니다. 세상에는 짓밟힌 사람, 피지도 못하고 꺾인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오늘도 게임방에 박혀 게임에 몰두하고 있는 젊은이들, 장래 염려로 마음에 두려움이 가득한 대학생들, 취직을 하지 못해 오늘도 라면으로 때우는 청년들, 우리는 그들에게 이 기쁜 소식을 전해야 합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예수님을 전해야 합니다. 그럴 때 그들은 예수님을 기뻐하는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당장 태어나셨다고 해도 세상적으로 말하면 변한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여전히 가난했습니다. 여전히 목자였습니다. 여전히 사람들로부터 멸시 받는 나사렛 동네에서 살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하나님의 복음을 전할 30년 후까지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 동안은 아무 일도 그들에게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기가 막히는 상황입니다. 구원자는 오셨는데, 아무 일도 안 일어나는 것입니다. 30년을 기다릴 동안 요셉도 죽었습니다. 사가랴도 죽었습니다. 엘리사벳도 죽었습니다. 목자들 가운데 여러 명이, 나이 든 사람은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무 것도 손에 얻지 못하고 가버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기뻐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기뻐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구원자가 오셨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들은 기뻐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 구원자가 베풀 그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내다보고 기뻐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 아름다운 구원이 임하는 날을 소망하며 살다가 그들은 갔습니다. 가난 속에서도 그 구원자를 찬송하고 기다리다가 갔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볼 때는 웃긴다고 할지 모르지만, 사람들 보기에는 달라진 것이 없어도 그들은 구원자를 발견했습니다. 그 구원자가 준비하신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고 기쁨으로 살았습니다. 그 나라가 임할 것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기뻐할 수가 있었습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에 한 포로수용소에 감금된 병사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눈은 움푹 패이고 몸도 삐쩍 말라가고 몸은 불결하였습니다. 그러나 철조망 밖에는 그들을 사로잡은 자들이 마치 아무 걱정이 없다는 듯이 여유롭게 지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연유로 철조망 안에 라디오 한 대가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포로들은 외부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철책 밖에 있는 자들이 매우 이상한 광경을 보게 되었습니다. 철조망 안에 있는 포로들의 미소를 짓는 것이었습니다. 일부 사람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그들의 양은 그릇을 공중에 던지고는 하였습니다. 그들의 이러한 행동은 참으로 이상하게 보였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포로로 잡혀있습니다. 음식과 물이 부족합니다. 많은 포로들이 여전히 병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뭔가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에게 뉴스가 전해졌다는 것이었습니다. 상륙작전이 성공했고 적들의 방어선이 뚫리고 있다, 해방군은 수용소에서 불과 몇 킬로 떨어지지 않은 곳까지 왔다, 자유가 임박했다는 뉴스입니다. 이것이 뉴스가 만들어 내는 차이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 임한 뉴스는 무엇입니까? 구주가 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셨으며 마귀와 죄와 사망을 물리치시려고 결정적인 전투가 일어났으며, 그 싸움은 그리스도께서 이기셨다는 것입니다.

 

좋은 소식이라고 당장 죽음이나 죄나 고통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가 오셨고 원수들은 패배했으며 왕이 우리에게 약속하신 바를 곧 시행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약속을 믿을 때 우리에게 소망과 기쁨이 가득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세상의 것을 주시려고 오신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것은 아침에 피었다가 지는 꽃과 같습니다. 아무리 아름답고 영화로운 것이라도, 아무리 사람들의 눈을 끄는 것이라도, 아침 안개가 사라지듯이 다 없어집니다. 그런 것을 주려고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것이 아닙니다. 영원한 것, 없어지지 아니할 것, 하나님과 더불어 영원토록 누릴 그 영광을 우리에게 주시려고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그 구원자가 오신 것을 믿는 사람은 세상적으로 달라지는 것이 없다고 할지라도 예수님 때문에 기뻐합니다.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는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바라보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지금 당장 아무 것도 얻지 못해도 우리는 기뻐할 수 있습니다.

 

13,14절입니다. 천사들의 합창이 어떠합니까? "홀연히 수많은 천군이 그 천사들과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구주 예수님의 탄생은 하나님께 영광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범죄 이후 보내시겠다고 약속하시고, 아브라함과 많은 선지자들을 통해 구체적으로 약속하신 구주를 마침내 보내셨습니다. 그 약속을 지키셨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반역하였지만 하나님은 그런 인간도 사랑하셨습니다. 사랑하시되 독생자 예수님을 내어 주시기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사랑과 자비,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 이 모든 것을 한마디로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밖에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이러한 일을 행하신 우리 하나님은 영광스런 분이십니다!

 

하나님이 없는 세상은 미움, 증오, 폭력, 살인이 넘칩니다. 평화가 없습니다. 참된 평화는 인간이 먼저 하나님과 평화할 때 실현됩니다. 우리 구주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과 평화할 때 우리 마음에 하늘의 평화가 넘칩니다. 이러한 평화가 나의 마음에 넘칠 때 우리는 다른 모든 사람을 용서하고 사랑하며 평화할 수 있습니다. 우리를 위해 구유에 오신 우리 구주 탄생을 감사 찬양드립니다! 메리 크리스마스!!